첸투리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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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첸투리페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3년 8월 시칠리아 전역의 일환으로 영국군이 시칠리아 섬의 첸투리페를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첸투리페는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며, 독일군은 헤르만 괴링 사단과 폰 카르나프 전투단을 투입하여 방어했다. 영국 제78 보병 사단은 험준한 지형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첸투리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카타니아로 향하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붕괴시켰고, 독일군이 에트나 선으로 철수하게 만들었다. 첸투리페 점령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공격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칭찬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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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투리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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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 | |
장소 | 시칠리아 첸투리페 |
좌표 | 북위 37° 37' 동경 14° 44' |
날짜 | 1943년 8월 2일 ~ 8월 4일 |
결과 | 영국군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넬슨 러셀 존 풀러턴 에베츠 |
지휘관 2 | 루트비히 하일만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제78보병사단 제38(아일랜드) 보병여단 |
병력 2 | 제1강하기갑사단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313명 전사 174명 부상 및 실종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2. 배경
시칠리아를 가로지르는 독일 방어선의 핵심 위치는 첸투리페였다. 첸투리페는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고 험준한 측면으로 인해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주변의 작은 언덕들도 독일군에 의해 잘 방어되고 있었으며, 첸투리페를 공격하기 전에 이 언덕들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4]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부대는 헤르만 괴링 사단으로, 대부분 제3 공수 연대로 구성되었고, 루드비히 하일만 지휘하의 ''폰 카르나프 전투단''(Kampfgruppe von Carnap)의 일부였다. 이 연대 외에도 전투단은 포병 연대와 전차와 지원 보병 부대를 포함한 다수의 정찰 부대로 구성되었다. 하일만은 7월 말 영국 포병의 공격으로 폰 카르나프 대령이 사망한 후 그의 지휘를 이어받았다.[6][7]
제78 ''배틀액스'' 보병 사단은 비비안 이블리 소장의 지휘 하에 카테나누오바로 진격하여 작전 ''하드게이트''(Hardgate)의 일환으로 첸투리페를 점령하기 위해 집결했다.[8] 두 마을 사이의 지역은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는 거칠고 험준한 지형이었고, 이는 튀니지 전역에서 제78 사단이 전투를 벌였던 지형과 유사하며, 이 지형은 그들 사이의 유일한 산길을 덮고 있었다.[9] 이블리는 넬슨 러셀 준장에게 첸투리페를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계획은 필요에 따라 중포 포격을 가하며 야간 진격을 하는 것이었다.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스 제6대대와 로열 아이리쉬 퓨질리어스 제1대대가 주요 임무를 맡았고, 런던 아이리쉬 라이플스 제2대대는 위험한 측면 기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10]
8월 1일 저녁, 런던 아이리쉬는 첸투리페의 구릉 아래 와디 지역으로 이동했다. 운송 수단이 앞으로 갈 수 없었고, 이는 모든 탄약, 식량 및 기타 보급품을 사람이 직접 운반해야 함을 의미하여 지연이 발생했다.[9]
2. 1. 시칠리아 전역과 첸투리페
시칠리아를 가로지르는 독일 방어선의 핵심 위치는 첸투리페였다. 첸투리페는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고 험준한 측면으로 인해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주변의 작은 언덕들도 독일군에 의해 잘 방어되고 있었으며, 첸투리페를 공격하기 전에 이 언덕들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4]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부대는 헤르만 괴링 사단으로, 대부분 제3 공수 연대로 구성되었고, 루드비히 하일만 지휘하의 ''폰 카르나프 전투단''(Kampfgruppe von Carnap)의 일부였다.[6][7]
제78 ''배틀액스'' 보병 사단은 비비안 이블리 소장의 지휘 하에 카테나누오바로 진격하여 작전 ''하드게이트''(Hardgate)의 일환으로 첸투리페를 점령하기 위해 집결했다.[8] 두 마을 사이의 지역은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는 거칠고 험준한 지형이었고, 이는 튀니지 전역에서 제78 사단이 전투를 벌였던 지형과 유사하며, 이 지형은 그들 사이의 유일한 산길을 덮고 있었다.[9] 이블리는 넬슨 러셀 준장에게 첸투리페를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계획은 필요에 따라 중포 포격을 가하며 야간 진격을 하는 것이었다.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스 제6대대와 로열 아이리쉬 퓨질리어스 제1대대가 주요 임무를 맡았고, 런던 아이리쉬 라이플스 제2대대는 위험한 측면 기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10]
8월 1일 저녁, 런던 아이리쉬는 첸투리페의 구릉 아래 와디 지역으로 이동했다. 운송 수단이 앞으로 갈 수 없었고, 이는 모든 탄약, 식량 및 기타 보급품을 사람이 직접 운반해야 함을 의미하여 지연이 발생했다.[9]
2. 2. 독일군 방어 부대
첸투리페는 시칠리아를 가로지르는 독일 방어선의 핵심 위치로,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 험준한 측면으로 인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4] 주변의 작은 언덕들도 독일군에 의해 잘 방어되고 있었다.[4]이 지역은 헤르만 괴링 사단의 루드비히 하일만이 지휘하는 ''폰 카르나프 전투단''(Kampfgruppe von Carnap)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제3 공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6][7] 전투단은 포병 연대와 전차, 지원 보병 부대를 포함한 다수의 정찰 부대로 구성되었다.[6] 하일만은 7월 말 영국 포병의 공격으로 폰 카르나프 대령이 사망한 후 지휘를 이어받았다.[6][7]
2. 3. 영국군 공격 부대
첸투리페는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고 험준한 측면으로 인해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주변의 작은 언덕들도 독일군에 의해 잘 방어되고 있어 첸투리페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점령해야 했다.[4]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부대는 헤르만 괴링 사단으로, 대부분 루드비히 하일만 지휘 하의 ''폰 카르나프 전투단''(Kampfgruppe von Carnap) 소속 제3 공수 연대였다.[6][7] 이 전투단은 포병 연대와 전차, 지원 보병 부대를 포함한 다수의 정찰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일만은 7월 말 영국 포병의 공격으로 폰 카르나프 대령이 사망한 후 지휘를 이어받았다.[6][7]제78 ''배틀액스'' 보병 사단은 비비안 이블리 소장의 지휘 하에 카테나누오바로 진격하여 작전 ''하드게이트''(Hardgate)의 일환으로 첸투리페 점령을 위해 집결했다.[8] 두 마을 사이의 지역은 튀니지 전역에서 제78 사단이 전투를 벌였던 지형과 유사한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는 거칠고 험준한 지형이었다.[9] 이블리는 넬슨 러셀 준장에게 첸투리페 점령을 명령했고, 필요에 따라 중포 포격을 가하며 야간 진격을 하는 계획을 세웠다. 로열 이니스킬링 퓨질리어스 제6대대와 로열 아이리쉬 퓨질리어스 제1대대가 주요 임무를 맡았고, 런던 아이리쉬 라이플스 제2대대는 위험한 측면 기동을 하도록 명령받았다.[10]
8월 1일 저녁, 런던 아이리쉬는 첸투리페 구릉 아래 와디 지역으로 이동했다. 운송 수단이 앞으로 갈 수 없어 모든 탄약, 식량 및 기타 보급품을 사람이 직접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지연이 발생했다.[9]
3. 전투 경과
다음 날 정오, 런던 아일랜드 연대(London Irish)는 36 보병 여단의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6대대 후방으로 진격했는데, 그들은 첸투리페 뒤 언덕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8월의 더위 속에서 마을이 큰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2]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임무는 첸투리페 뒤에 있는 3개의 지휘 언덕인 704지점, 611지점, 703지점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독일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군의 관심이 주 전투에 집중되어 후방보다는 여기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되었다.[9]
런던 아일랜드 연대 G중대와 F중대는 25 파운더(Ordnance QF 25-pounder)의 15분간의 예열 사격 이후 출발선을 넘어섰고, 곧 704지점에 도착하여 G중대가 점령하자 H중대가 703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출발선에서는 언덕과 측면에서 날아오는 기관총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G중대가 측사포 사격을 멈추는 데 기여했고, 어둠이 내리자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확보한 지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7] 그러나 세 번째 언덕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그 언덕이 함락될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지체 없이 공격을 계속하여 독일군이 좌익 공격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탈지 결정해야 했다.[2] 후자가 선택되었다. 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Royal Irish Fusiliers)는 첸투리페 북쪽과 후방으로 공격을 가했고, 전선에서 독일군과 밀착해 있던 인니스킬링스(Inniskillings)는 100피트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포함한 맹렬한 포격 이후 마을 남쪽 가장자리에 발판을 마련했다.[9]
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Royal Irish Fusiliers)는 도시 북쪽 끝을 밀고 나갔고, 전투는 완강하고 치열했다. 독일 3호 전차(Panzer MKIII) 2대가 가장 큰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지원할 영국 전차는 없었으며, 결국 PIAT 무기에 의해 격파되었다.[9] 그 후 아일랜드 여단은 난공불락의 공수부대를 상대로 어려운 시가전을 벌여야 했고, 저녁 무렵에는 도시를 장악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독일군의 반격이 있었고, 대부분 격퇴되었지만 일부 부대는 몰래 다시 침투하여 아일랜드군이 거리와 집을 정리하는 동안 저격했다. 밤새 38 여단에서 더 많은 병력이 도시로 이동하여 이미 그곳에 있던 병력을 증원했다. 마침내 독일군은 또 다른 반격을 가했지만 이번에는 약했고 쉽게 격퇴되었고, 그 후 저항이 약해지기 시작했다.[2][9]
8월 3일 새벽 직전, 첸투리페를 포함한 주변 지역 전체가 아일랜드 여단에 함락되었다. 작전은 어려운 지형에서 치러졌고, 성공의 주요 공로는 전투의 주역이었던 인니스킬링스(Inniskillings)에게 돌아갔다.[4]
1943년 8월, 첸투리페를 점령한 후 숨 돌릴 틈도 없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Irish Fusiliers)는 마을 너머의 고지를 장악했고, 런던 아일랜드 연대(London Irish)는 첸투리페를 지나 살소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에 도달했다.[10] 수송대는 12시간이나 걸려 공병이 메운 큰 구덩이와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그 지역에 뿌린 박격포탄과 포탄 때문에 첸투리페에서 꼬불꼬불한 도로를 내려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3. 1. 8월 1일: 런던 아이리쉬 라이플스의 이동
런던 아일랜드 연대(London Irish)는 정오에 36 보병 여단의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6대대 후방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첸투리페 뒤 언덕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8월의 더위 속에서 마을이 큰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2]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임무는 첸투리페 뒤에 있는 3개의 지휘 언덕인 704지점, 611지점, 703지점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군의 관심이 주 전투에 집중되어 후방보다는 여기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되었다.[9]런던 아일랜드 연대 G중대와 F중대는 25 파운더(Ordnance QF 25-pounder)의 15분간의 예열 사격 이후 출발선을 넘어섰고, 곧 704지점에 도착하여 G중대가 점령하자 H중대가 703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출발선에서는 언덕과 측면에서 날아오는 기관총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G중대가 측사포 사격을 멈추는 데 기여했고, 어둠이 내리자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확보한 지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7] 그러나 세 번째 언덕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그 언덕이 함락될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지체 없이 공격을 계속하여 독일군이 좌익 공격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탈지 결정해야 했다.[2] 후자가 선택되었다.
3. 2. 8월 2일: 첸투리페 후방 고지 점령전
다음 날 정오, 런던 아일랜드 연대(London Irish)는 36 보병 여단의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6대대 후방으로 진격했는데, 그들은 첸투리페 뒤 언덕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2]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임무는 첸투리페 뒤에 있는 3개의 지휘 언덕인 704지점, 611지점, 703지점을 점령하는 것이었다.[9]런던 아일랜드 연대 G중대와 F중대는 25 파운더(Ordnance QF 25-pounder)의 15분간의 예열 사격 이후 출발선을 넘어섰고, 곧 704지점에 도착하여 G중대가 점령하자 H중대가 703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출발선에서는 언덕과 측면에서 날아오는 기관총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G중대가 측사포 사격을 멈추는 데 기여했고, 어둠이 내리자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확보한 지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7]
3. 3. 8월 2일 ~ 3일: 첸투리페 시가전
다음 날 정오,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36 보병 여단의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6대대 후방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첸투리페 뒤 언덕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8월의 더위 속에서 마을이 큰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2]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임무는 첸투리페 뒤에 있는 704지점, 611지점, 703지점의 3개 지휘 언덕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군의 관심이 주 전투에 집중되어 후방보다는 여기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되었다.[9]런던 아일랜드 연대 G중대와 F중대는 25 파운더의 15분간의 예열 사격 이후 출발선을 넘어섰고, 곧 704지점에 도착하여 G중대가 점령하자 H중대가 703지점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출발선에서는 언덕과 측면에서 날아오는 기관총에 맞서야 했기 때문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G중대가 측사포 사격을 멈추는 데 기여했고, 어둠이 내리자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확보한 지역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7] 그러나 세 번째 언덕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고, 그 언덕이 함락될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지체 없이 공격을 계속하여 독일군이 좌익 공격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탈지 결정해야 했다.[2] 후자가 선택되었다.
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첸투리페 북쪽과 후방으로 공격을 가했고, 전선에서 독일군과 밀착해 있던 인니스킬링스는 100피트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포함한 맹렬한 포격 이후 마을 남쪽 가장자리에 발판을 마련했다.[9] 도시 북쪽 끝을 밀고 나간 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완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독일 3호 전차 2대가 가장 큰 문제를 일으켰고, 이를 지원할 영국 전차는 없었으며, 결국 PIAT 무기에 의해 격파되었다.[9]
그 후 아일랜드 여단은 난공불락의 공수부대를 상대로 어려운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저녁 무렵에는 도시를 장악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독일군의 반격이 있었고, 대부분 격퇴되었지만 일부 부대는 몰래 다시 침투하여 아일랜드군이 거리와 집을 정리하는 동안 저격했다. 밤새 38 여단에서 더 많은 병력이 도시로 이동하여 이미 그곳에 있던 병력을 증원했다. 마침내 독일군은 또 다른 반격을 가했지만 이번에는 약했고 쉽게 격퇴되었고, 그 후 저항이 약해지기 시작했다.[2][9]
8월 3일 새벽 직전, 첸투리페를 포함한 주변 지역 전체가 아일랜드 여단에 함락되었다. 작전은 어려운 지형에서 치러졌고, 성공의 주요 공로는 전투의 주역이었던 인니스킬링스에게 돌아갔다.[4] 1943년 8월, 첸투리페를 점령한 후 숨 돌릴 틈도 없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마을 너머의 고지를 장악했고,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첸투리페를 지나 살소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에 도달했다.[10] 수송대는 12시간이나 걸려 공병이 메운 큰 구덩이와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그 지역에 뿌린 박격포탄과 포탄 때문에 첸투리페에서 꼬불꼬불한 도로를 내려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3. 4. 8월 3일: 첸투리페 함락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36 보병 여단의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6대대 후방으로 진격하여 첸투리페 뒤 3개의 지휘 언덕인 704지점, 611지점, 703지점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2] 런던 아일랜드 연대 G중대와 F중대는 25 파운더(Ordnance QF 25-pounder) 포격 지원을 받으며 진격하여 704지점을 점령하고, H중대가 703지점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G중대가 측사포 사격을 제압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7]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첸투리페 북쪽과 후방을 공격했고, 인니스킬링스는 마을 남쪽 가장자리에 발판을 마련했다.[9] 퓨질리어 연대는 도시 북쪽 끝을 밀고 나갔으나, 독일 3호 전차(Panzer MKIII) 2대의 저항에 직면했다. 영국 전차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PIAT 무기로 격파했다.[9] 이후 아일랜드 여단은 시가전을 벌였고, 독일군의 반격을 격퇴하며 밤새 증원군을 받아 저항을 약화시켰다.[2][9]
8월 3일 새벽, 첸투리페와 주변 지역 전체가 아일랜드 여단에 함락되었다.[4]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는 마을 너머 고지를 장악하고,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살소 강을 내려다보는 고지에 도달했다.[10]
4. 전투 이후
첸투리페의 성공적인 점령은 카타니아로 향하는 독일 전선 전체를 붕괴시켰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새로운 방어선인 에트나 선으로 철수해야 했다.[3] 그러나 이마저도 포기해야 했고, 곧 시칠리아 섬 전체를 포기하려는 계획이 세워졌다.[5][7]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빠르게 살소 강 건너편 고지에 도달했고, 밤에는 'E' 중대와 'F' 중대가 시메토 강에 도달했다. 해가 질 무렵, 'G' 중대의 두 개 소대가 다른 두 개 중대를 즉시 지원하기 위해 예비 탄약, 박격포, 기관총과 함께 강을 건넜다. 어둠이 내릴 무렵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독일군은 밤새 철수하여 다음 날 아침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전투 순찰대가 다음 목표인,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인 아드라노 꼭대기의 언덕 중간 지점에서 독일군을 발견했다.[10] 그러나 그것은 아일랜드 여단의 임무가 아니었다. 제78사단의 다른 두 개 여단(제11, 제36 여단)이 통과했기 때문이다. 8월 1일 오후부터 8월 5일 밤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첸투리페, 살소, 시메토에서 전투를 벌이며 25마일을 진격했다.[9]
대대는 시메토의 시원한 물에서 5일 동안 휴식을 취했고, 그동안 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아데르노와 브론테를 점령하고 후자 도시 건너편 언덕을 점령했다. 살소 강과 시메토 강의 도하와 아데르노의 함락으로 에트나 산 서쪽과 남쪽의 모든 독일군의 횡적 통신이 차단되었고, 파테르노、산타마리아, 비안카빌라의 함락을 초래했다.[4] 한편, 제1 왕립 아일랜드 푸질리어 연대는 카펠라와 몬테 말레토를 점령하고 마을을 정리했다. 말레토의 함락과 그에 따른 란다초로의 급속한 접근은 독일군이 마지막으로 서둘러 바다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4]
첸투리페 점령 소식은 큰 열광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제8군 사령관은 점령 후 도시의 절벽을 보여주자 "불가능해!"라고 외쳤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불과 며칠 후 하원에서 점령 소식을 언급하며 점령을 공격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았다.[2]
4. 1. 독일군의 후퇴와 시칠리아 전역
첸투리페 점령은 카타니아로 향하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켰고, 독일군은 에트나 선으로 철수했다.[3] 그러나 이마저도 포기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를 포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5][7]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살소 강 건너편 고지에 도달했고, 밤에는 'E' 중대와 'F' 중대가 시메토 강에 도달했다. 'G' 중대의 두 개 소대가 예비 탄약, 박격포, 기관총과 함께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밤새 철수했고, 다음 날 아침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폭격으로 파괴된 아드라노에서 독일군을 발견했다.[10] 제78사단의 다른 두 개 여단(제11, 제36 여단)이 통과하면서, 8월 1일 오후부터 8월 5일 밤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첸투리페, 살소, 시메토에서 전투를 벌이며 25마일을 진격했다.[9]
대대는 시메토에서 5일 동안 휴식을 취했고, 그동안 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아데르노와 브론테를 점령했다. 살소 강과 시메토 강의 도하와 아데르노의 함락으로 에트나 산 서쪽과 남쪽의 모든 독일군의 횡적 통신이 차단되었고, 파테르노、산타마리아, 비안카빌라의 함락을 초래했다.[4] 제1 왕립 아일랜드 푸질리어 연대는 카펠라와 몬테 말레토를 점령하고 말레토의 함락과 란다초로의 급속한 접근은 독일군이 바다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4]
첸투리페 점령 소식은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제8군 사령관과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
4. 2. 살소 강, 시메토 강 전투와 아드라노 점령
첸투리페 점령 성공으로 카타니아로 향하는 독일 전선 전체가 붕괴되었고, 독일군은 에트나 선으로 철수해야 했다.[3] 그러나 이마저도 포기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를 포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5][7]
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빠르게 살소 강 건너편 고지에 도달했고, 밤에는 'E' 중대와 'F' 중대가 시메토 강에 도달했다. 해가 질 무렵, 'G' 중대의 두 개 소대가 예비 탄약, 박격포, 기관총과 함께 강을 건너 다른 두 개 중대를 지원했다. 어둠이 내릴 무렵 교두보가 확보되었고, 독일군은 밤새 철수했다. 다음 날 아침 런던 아일랜드 연대의 전투 순찰대는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인 아드라노 꼭대기 언덕 중간 지점에서 독일군을 발견했다.[10] 제78사단의 다른 두 개 여단(제11, 제36 여단)이 통과하면서 아드라노 점령은 아일랜드 여단의 임무가 아니었다. 8월 1일 오후부터 8월 5일 밤까지 아일랜드 여단은 첸투리페, 살소, 시메토에서 전투를 벌이며 25마일을 진격했다.[9]
대대는 시메토 강에서 5일 동안 휴식을 취했고, 그동안 사단의 나머지 부대는 아데르노와 브론테를 점령하고 후자 도시 건너편 언덕을 점령했다. 살소 강과 시메토 강 도하 및 아데르노 함락으로 에트나 산 서쪽과 남쪽의 모든 독일군 횡적 통신이 차단되었고, 파테르노, 산타마리아, 비안카빌라 함락을 초래했다.[4] 제1 왕립 아일랜드 푸질리어 연대는 카펠라와 몬테 말레토를 점령하고 마을을 정리했다. 말레토 함락과 그에 따른 란다초로의 급속한 접근은 독일군이 바다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4]
첸투리페 점령 소식은 큰 열광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제8군 사령관은 점령 후 도시의 절벽을 보고 "불가능해!"라고 외쳤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하원에서 점령을 공격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았다.[2]
4. 3. 전투의 의의와 평가
첸투리페 점령은 카타니아로 향하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켜 독일군이 에트나 선으로 철수하게 만들었다.[3] 그러나 이마저도 포기하고 시칠리아 섬 전체를 포기하는 계획이 세워졌다.[5][7]런던 아일랜드 연대는 살소 강을 건너 시메토 강에 도달했고, 교두보 확보 후 아드라노에서 독일군을 발견했다.[10] 8월 1일부터 5일 밤까지 첸투리페, 살소, 시메토에서 전투를 벌이며 25마일을 진격했다.[9]
시메토 강에서 5일간 휴식 후, 사단의 다른 부대는 브론테를 점령했다. 살소 강과 시메토 강 도하 및 아데르노 함락으로 에트나 산 서쪽과 남쪽 독일군의 통신이 차단되었고, 파테르노, 비안카빌라 함락을 초래했다.[4] 제1 왕립 아일랜드 푸질리어 연대는 몬테 말레토를 점령했고, 란다초로의 접근은 독일군이 철수하게 만들었다.[4]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제8군 사령관은 "불가능해!"라고 외쳤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하원에서 이 점령을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언급했다.[2]
5. 주요 참전자
존 앤서니 홀트 손더스 경은 홍콩 상하이 은행 회장으로, 이스트 서리 연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11]
6. 전투 서열
6. 1. 연합군
영국 78보병사단은 제38아일랜드보병여단을 포함한다.6. 2. 추축군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 제1기갑척탄병연대 헤르만 괴링
- 기갑연대 헤르만 괴링
참조
[1]
서적
Blaxland
[2]
서적
Blackwell
[3]
서적
Alexander
[4]
서적
The Italian Campaign, 1943–45: A Political and Military Re-assessment
https://books.google[...]
Praeger
[5]
서적
Facaros & Pauls
[6]
서적
Mitchum
[7]
서적
Kurowski
[8]
서적
Chant
[9]
서적
Ford
[10]
서적
Doherty
[11]
서적
Squire &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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