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국가 연합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와 대공황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 속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연합국은 1941년 1월 1일 '연합국 공동 선언'을 통해 결속을 다졌으며,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연합국의 승리는 국제 연합(UN) 창설로 이어졌지만, 냉전의 시작과 한반도 분단 등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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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연합국 |
|---|---|
| 원어 명칭 | zh: 同盟國/同盟国 fr: Alliés ru: Антигитлеровская коалиция |
| 영문 명칭 | Allies / United Nations |
| 지위 | 군사 동맹 |
| 존속 기간 | 1939년 ~ 1945년 |
| 주요 연합국 | (1939년 9월 참전) (1941년 6월 참전) (1941년 12월 참전) |
| 기타 동맹국 | |
| 항복한 구 추축국 동맹국 | (1943년 9월 참전) (1944년 8월 참전) (1944년 9월 참전) (1944년 9월 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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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프 최고 전쟁 위원회 | 1939년 9월 ~ 1940년 6월 |
|---|---|
| 세인트 제임스 궁전 선언 | 1941년 6월 |
| 대서양 헌장 | 1941년 8월 |
| 연합국 공동 선언 | 1942년 1월 |
| 테헤란 회담 | 1943년 11월 ~ 1943년 12월 |
| 브레턴우즈 회의 | 1944년 7월 1일 ~ 1944년 7월 15일 |
| 얄타 회담 | 1945년 2월 4일 ~ 1945년 2월 11일 |
| 유엔 창설 | 1945년 4월 ~ 6월 |
| 포츠담 회담 | 1945년 7월 ~ 8월 |
| 연합국 | 국제 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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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군사사 -
추축국
추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에 대항하여 싸운 국가들의 연합체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주축이 되어 삼국 동맹을 체결하며 공식 형성되었고 팽창주의적 야심과 침략 행위로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나 연합국의 승리로 붕괴하며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종말을 가져왔다. -
제2차 세계 대전 -
연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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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친일단체로,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이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 체제를 뒷받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
20세기 군사 동맹 -
5개국 방위 협정
5개국 방위 협정은 1971년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영국이 체결한 안보 협정으로, 회원국들은 상호 협의를 통해 공동 대응을 약속하며 군사 협력 및 상호 운용성을 강화하고 사이버 보안 및 우주 안보 등 새로운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능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
20세기 군사 동맹 -
북대서양 조약 기구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안보를 위해 결성된 군사 동맹으로, 회원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며, 냉전 시기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고 동유럽으로 확장하여 영향력을 넓혀왔다.
2.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진행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패전국인 동맹국에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독일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손실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항에 반발했다. 종전 후 조약을 체결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가 크게 약화되고 굴욕받은 국민을 통치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은 유럽 전역, 특히 독일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독일에서는 보복주의적인 민족주의자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베르샤유 조약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평화 조약 이후 결성된 아돌프 히틀러의 극우 나치당은 대중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용하여 독일의 지배적인 정치조직으로 부상했다. 1933년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독일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하며 독일인이 다수 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다수 거주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중 하나였던 일본 제국은 이후 점점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들어 민족주의적 정서가 고조되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비판했으나 1933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의 행동을 규탄하고 제재를 시작했으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협상을 시도했던 미국이 특히 일본의 침공에 분노하여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 가능성은 높았지만 주요 강대국 중 누구도 또 다른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많은 정부가 유화정책과 같은 비군사적 전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의 비율이 높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지대를 독일에게 양도하여 히틀러를 달래는 협상인 뮌헨 협정이 체결된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다. 뮌헵 협정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협정을 평화를 향한 중대한 승리라고 축하했지만, 협상 조항을 대대적으로 과시한 것은 유화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 유화정책을 주로 지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 점령하자 히틀러는 외교적 합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31일 영국은 독일의 임박한 침공을 막기 위해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또한 1921년부터 오랫동안 폴란드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서방 국가와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실패했고, 1939년 8월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스탈린과 있을 잠재적인 전쟁을 사전에 막았다. 불가침 조약에서는 지난 세계대전에서 자국 군대에 타격을 입었던 양 측의 전쟁을 막음과 동시에 중부유럽 및 동유럽의 국가를 독일과 소련 양국이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소련은 독일에게 석유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진행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패전국인 동맹국에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독일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손실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항에 반발했다. 종전 후 조약을 체결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가 크게 약화되고 굴욕받은 국민을 통치하면서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은 유럽 전역, 특히 독일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독일에서는 보복주의적인 민족주의자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베르샤유 조약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평화 조약 이후 결성된 아돌프 히틀러의 극우 나치당은 대중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용하여독일의 지배적인 정치조직으로 부상했다. 1933년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독일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하며 독일인이 다수 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다수 거주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중 하나였던 일본 제국은 이후 점점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들어 민족주의적 정서가 고조되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비판했으나 1933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의 행동을 규탄하고 제재를 시작했으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협상을 시도했던 미국이 특히 일본의 침공에 분노하여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 가능성은 높았지만 주요 강대국 중 누구도 또 다른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많은 정부가 유화정책과 같은 비군사적 전략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의 비율이 높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지대를 독일에게 양도하여 히틀러를 달래는 협상인 뮌헨 협정이 체결된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점령했다. 뮌헵 협정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협정을 평화를 향한 중대한 승리라고 축하했지만, 협상 조항을 대대적으로 과시한 것은 유화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 유화정책을 주로 지지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 점령하자 히틀러는 외교적 합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9년 3월 31일 영국은 독일의 임박한 침공을 막기 위해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 또한 1921년부터 오랫동안 폴란드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경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은 서방 국가와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실패했고, 1939년 8월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스탈린과 있을 잠재적인 전쟁을 사전에 막았다. 불가침 조약에서는 지난 세계대전에서 자국 군대에 타격을 입었던 양 측의 전쟁을 막음과 동시에 중부유럽 및 동유럽의 국가를 독일과 소련 양국이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고 소련은 독일에게 석유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 미국, 이탈리아 왕국을 대표하는 승전국들은 새로운 안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가 간 협력을 강화해 나갔다. 대규모 국가 연합 시도인 국제연맹이 설립된 것도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또한 독일을 경계한 프랑스는 독일 주변국과의 연합을 강화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소협상에 접근하였고, 1921년에는 폴란드와의 동맹(en)을 체결했다. 1925년에는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의 연합이 강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몬로주의가 대두하고 고립주의 풍조가 높아져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재군비를 시작하며 국제연맹 탈퇴 등 로카르노 체제를 파괴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35년, 프랑스는 독일을 경계하여 소련과 불소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은 이를 구실로 라인란트에 진주했고, 로카르노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러나 다른 주변국들은 이에 유화 정책으로 대응했다. 영국은 영독 해군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재군비를 용인했고, 폴란드도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대체코슬로바키아 정책 등에서 공동 보조를 맞췄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과 그 후 1933년의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이후,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가 급속히 가까워져 1936년에는 일독 간에 방공 협정을 체결했고, 1937년에는 일독이 방공 협정으로 발전하면서 이들 3개국은 사실상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같은 해에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에 중일 전쟁이 발발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중화민국을 전면적으로 지지했고, 이후 일본과 영국, 미국 등과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2.2.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발흥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뒤이은 대공황은 유럽 전역, 특히 독일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 독일에서는 보복주의적인 민족주의자가 경제 위기의 원인을 베르사유 조약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평화 조약 이후 결성된 아돌프 히틀러의 극우 나치당은 대중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용하여 독일의 지배적인 정치조직으로 부상했다. 1933년 나치당은 권력을 장악하고 나치 독일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하며 독일인 다수 거주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중 하나였던 일본 제국은 점점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국제 연맹은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로 비판했으나 1933년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의 행동을 규탄하고 제재를 시작했으며, 미국이 특히 일본의 침공에 분노하여 중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2.3. 연합국의 형성 과정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영국은 폴란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 또한 폴란드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얼마후, 영국의 자치령(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들도 참전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지 약 2주 후에는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게 선전포고했고, 영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을 공격하자, 미국이 연합국에 합류하였다. 중일전쟁을 통해 1937년부터 일본과 전쟁 중이던 중화민국은 1941년 12월 9일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합류하여 추축국 전체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1942년 1월 1일, 연합국 공동 선언을 통해 연합국의 결속을 강화하고 전후 국제 질서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4명의 경찰관을 주창했다.
최초 서명 국가는 26개국이다.
3. 주요 연합국
1939년 9월 3일,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프랑스보다 수 시간 앞서 독일을 향한 선전포고를 하는 《최후통첩 연설》을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아직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는 이 두 자치령에도 자동으로 적용되었다. 다른 자치령과 영연방 소속국은 1939년 9월 3일부터 일주일 안에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대표적인 국가로 캐나다, 영국령 인도, 남아프리카 연방이 있다.
전쟁 기간 처칠은 주요 결정과 합의가 이루어진 17개 연합국 회담에 참석했다.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반기 연합국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꼽혔다.
영국령 서아프리카와 동,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는 주로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지중해 및 중동 전구에 주로 참전했다. 2개 서아프리카 사단과 1개 동아프리카 사단이 버마 전역에 파견되었다.
남로디지아는 1923년 책임정부가 수립된 자치령이다. 하지만 주권을 가진 자치령은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는 국내정치를 스스로 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군대도 가지고 있었지만 외교 부문의 자치권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참전하자 자동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남로디지아 정부는 상징적인 의미의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영제국 내 다른 어떤 자치령이나 식민지보다 빠르게 나온 선전포고이다.
영국령 인도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포괄했던 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로, 전쟁 발발 당시 영국령 인도 육군의 병력은 약 20만명 정도였다. 2차대전 말기로 가면 영국령 인도군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자원군이 되어 약 250만명에 달하는 수로 증가했다. 전쟁 기간 총 30명의 인도군 병사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 기간 인도군의 사상자는 87,000명으로 영국의 왕령식민지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3.1. 영국
1939년 9월 3일,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프랑스보다 수 시간 앞서 독일을 향한 선전포고를 하는 《최후통첩 연설》을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아직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의회에서 비준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는 이 두 자치령에도 자동으로 적용되었다. 다른 자치령과 영연방 소속국은 1939년 9월 3일부터 일주일 안에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대표적인 국가로 캐나다, 영국령 인도, 남아프리카 연방이 있다.
전쟁 기간 처칠은 주요 결정과 합의가 이루어진 17개 연합국 회담에 참석했다.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전반기 연합국 지도자 중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꼽혔다.
영국령 서아프리카와 동, 남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는 주로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지중해 및 중동 전구에 주로 참전했다. 2개 서아프리카 사단과 1개 동아프리카 사단이 버마 전역에 파견되었다.
남로디지아는 1923년 책임정부가 수립된 자치령이다. 하지만 주권을 가진 자치령은 아니었다. 내부적으로는 국내정치를 스스로 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군대도 가지고 있었지만 외교 부문의 자치권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참전하자 자동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럼에도 1939년 9월 3일 남로디지아 정부는 상징적인 의미의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영제국 내 다른 어떤 자치령이나 식민지보다 빠르게 나온 선전포고이다.
영국령 인도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포괄했던 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로, 전쟁 발발 당시 영국령 인도 육군의 병력은 약 20만명 정도였다. 2차대전 말기로 가면 영국령 인도군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자원군이 되어 약 250만명에 달하는 수로 증가했다. 전쟁 기간 총 30명의 인도군 병사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전쟁 기간 인도군의 사상자는 87,000명으로 영국의 왕령식민지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3.2. 프랑스
1939년 9월 3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1940년 1월,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독일의 행동을 비난하는 대중 연설을 진행했다.
1940년 5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붕괴하고 프랑스 북부와 서부는 독일의 군정체제에 들어갔다. 독일군이 점령하지 않은 프랑스 남부에는 잔존국인 비시 프랑스가 세워졌으나, 샤를 드 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는 6월 18일 연설 이후 영국으로부터 망명정부로 인정받아 연합군 편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3.3. 소련
1939년,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하여 점령 및 분할하는데 협력했다. 당시 소련은 연합국과 추축국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으며, 양측의 갈등을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히틀러가 소련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3년 초, 소련 지도부는 독일의 침공 위협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1933년 12월에는 발트 3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폴란드-소련 공동 선언 발표를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폴란드는 독일과 핀란드의 반대로 협상에서 철회되었다.
1939년 8월 20일, 할힌골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이 일본 제국에 승리하여 동쪽의 위협을 제거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히틀러로부터 외교 회담 제안을 받았고,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동유럽을 양국의 '영향권'으로 분할하고 폴란드를 분할하는 비밀 조항을 포함시켰다. 9월 15일, 스탈린은 일본과 평화 협정을 맺었고, 9월 17일 소련군은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다. 10월 5일까지 전투가 지속되었지만, 양국은 9월 25일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고 9월 28일 독일-소련 국경 및 친교 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하여 국제 연맹에서 추방당했다. 1940년에는 발트 3국과 루마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독일-소련 조약은 종결되었다. 이후 스탈린은 서방 연합국을 지지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나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합할 것을 촉구했다. 소련은 영국과 동맹 협정을 체결했고, 알바니아 민족 해방 전선, 중국 공산당, 그리스 민족 해방 전선 등 여러 공산주의, 친소련 세력들이 추축국에 맞서 싸웠다.
1945년 소련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선전포고하여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의 국민정부와 협력했다. 또한 일본군을 몰아낸 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과도 협력했다.
3.4. 미국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도 하에,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41년 이전, 미국은 중립적인 상태에서 무기대여법(렌드리스)을 통해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을 지원했다. 1941년 8월에는 윈스턴 처칠 총리와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여 "나치의 최종 파괴"를 위한 협력을 약속했다. 미국은 중일 전쟁에서 중국 국민정부를 지원하며 군사 장비, 물자, 자원군을 제공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은 유럽 전선에도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은 연합합동본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연합국 간의 연락 및 군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은 필리핀, 괌, 웨이크섬 등 여러 섬을 일본에 빼앗기는 등 초기에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둘리틀 공습과 산호해 해전에서의 승리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미 해군은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과달카날 전역 등에서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3.5. 중국
1920년대에 소련은 중국국민당의 국민정부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당, 국가, 군대의 통합이라는 레닌주의 노선에 따라 당을 재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국민당은 중국공산당 당원들이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28년 북벌 종식 후 중국의 명목상 통일 이후 장제스는 좌익을 당에서 제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 공산당, 전직 군벌들 및 기타 군국주의 세력과 싸웠다.
분열된 중국은 일본이 총력전 없이도 조금씩 영토를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괴뢰국 만주국이 수립되었다. 1930년대 초중반 내내 장제스는 반공, 반군국주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일본과 끊임없는 소규모 충돌을 벌였고, 군사적 패배 후 불리한 타협과 양보를 했다.
1936년 장제스는 장쉐량에 의한 납치 및 석방 이후 반공 군사 작전을 중단해야 했고, 공산당과 명목상의 동맹을 맺었으며, 공산당은 일본에 맞서 국민당의 명목상 지휘 아래 싸우기로 합의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중국과 일본은 중일전쟁에 돌입했다. 소련은 중국이 일본에 맞서 싸우도록 유지하기를 원하여 1941년 일본과 소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중국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후, 중화민국은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태평양 전쟁의 일환으로 중국은 연합국 중 유일하게 3대 강국 중 하나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한 국가가 되었으며, 동부 전선의 소련군 수를 넘어섰다.
적진 후방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이 두 전 동맹국 간의 주요 군사적 갈등인 신사군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는 일본에 대한 협력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으며, 중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중국으로 나뉘어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어졌다.
4. 기타 연합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는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직후 참전하였다. 이들 국가는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왕, 캐나다 국왕, 뉴질랜드 군주제 하의 주권국이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41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내각 수립 이후 외교가 독립적으로 변모하여, 12월 8일 핀란드, 헝가리, 루마니아에게, 다음 날에는 일본에게 각각 선전포고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는 1940년 5월 독일의 침공을 받은 이후 연합국에 합류했다. 이들 국가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서 패배 후 본토가 점령되었고, 벨기에 망명 정부, 네덜란드 망명 정부, 룩셈부르크 망명 정부를 수립하여 항전을 계속했다. 노르웨이 또한 1940년 4월 독일의 침공(베저위붕 작전)으로 노르웨이 전역에서 패배하여 점령당했고, 망명지에서 전쟁에 계속 참전했다.
그리스는 1940년 10월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연합국에 합류했고, 독일의 침공으로 본토가 점령당한 후 망명하여 항전했다. 유고슬라비아는 1941년 4월 추축국의 침공으로 연합국 편에 섰으나 2주 만에 패배했고, 페타르 2세 국왕과 정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체트니크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등의 반추축국 저항운동이 계속되었다.
브라질은 초기에 중립을 유지했으나, 1942년 초 남아메리카 동쪽 나타우에 미군 공군기지 건설을 허가하고, 1월 독일, 일본, 이탈리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후 브라질 상선 36척이 독일과 이탈리아 해군에 침몰되자 1942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브라질은 브라질 원정군을 유럽에 파견하여 대서양에서 활동했다. 멕시코는 독일 잠수함이 자국 유조선 SS 오트레로델야노와 SS 파하데오로를 격침하자 1942년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멕시코는 멕시코 원정공군(FAEM)의 제201전투비행단을 미국 육군 항공대 제58전투비행군에 소속시켜 루손섬 탈환 작전에 참전했다.
1941년 헤르체고비나 동부 봉기를 시작으로 종전 무렵까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반추축국 저항전이 계속되었다.
1941년 말까지 반추축국 저항운동은 크게 왕당파인 체트니크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주의파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으로 나뉘어 전쟁 중 서로 맞서면서 점령군에 저항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전쟁 기간 여러 해방구를 만들며 추축국의 점령에 상당한 저항을 펼쳤다. 1943년 8월에는 유고슬라비아 내에 크로아티아 독립국 및 기타 추축국 부역조직을 제외하고더라도 약 30개의 추축국 사단이 주둔했다. 1944년에는 연합국 주요 세력이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이반 슈바시치 총리 하의 왕당파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설득해 티토-슈바시치 협정을 맺어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를 수립했다.
쿠바는 1941년 12월 추축국에게 선전포고해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최초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쿠바군은 카리브해 국가 중 가장 효율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진주만 공격 이후인 1941년 12월 11일 추축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과 한계
3·1 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활동하고자 했다. 1941년 12월,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협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영토, 국민, 주권이 없어 당시 영국, 중화민국, 소련, 프랑스를 포함하는 연합국으로부터 정식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전후 삼팔선 남부를 지배한 미군정 역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6. 연합국의 승리와 전후 처리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국은 전후 국제 질서 재편을 위해 국제 연합(UN)을 창설하고,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을 통해 전범들을 처벌했다. 독일과 일본은 연합국의 군정 통치를 받았으며, 이후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
몰타 회담과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얄타 체제라 불리는 전후 세계의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의 국경이 변경되고 독일과 일본의 영토가 변경되었으며,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다.
포츠담 회담에서는 독일의 점령 통치 등을 정한 포츠담 협정이 합의되었고, 일본에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소련의 대일 참전 이후,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냉전의 시작으로 인해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고,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 한국 전쟁은 이러한 동서 대립의 결과로 발생한 전쟁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었지만, 소련과의 평화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독일은 독일 최종 규정 조약을 통해서야 연합국과의 강화가 성립되었다.
7. 유산
=== 유엔 헌장 ===
1942년 1월 1일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4명의 경찰관과 기타 22개국이 유엔 헌장에 서명했고, 이는 나중에 유엔의 토대가 되었다. 1945년 7월에서 8월까지 포츠담 회담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중국,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의 외무장관에게 "유럽의 평화조약과 국경안 초안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제안하면서 '빅 5'의 외무장관 협의회가 창설되었으며, 이 다섯 국가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이어졌다.
유엔 헌장은 1945년 4월부터 7월 사이 국제 기구에 관한 유엔 회의를 통해 합의되었다. 6월 26일까지 50개국이 서명했으며(폴란드는 예약되었으며 나중에 51번째의 "최초의" 서명국이 됨), 전쟁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정식으로 비준되었다. 1944년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 소련, 영국, 미국, 중국 대표단과의 회의인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 유엔이 공식화되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구성과 상임이사국(중국,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빅5)도 결정되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46년 1월 17일 전쟁 직후 첫 회의를 가졌다.
유엔 헌장에 최초로 서명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상임이사국 5개국은 별표로 표시)
=== 냉전 ===
유엔이 성공적으로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미국, 영국 간의 동맹은 붕괴되어 반세기 간의 분쟁인 냉전으로 이어졌다. 연합국 지도자들 사이에는 많은 긴장이 존재했지만, 전시 중 동맹을 깨뜨릴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1942년 루스벨트는 중국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한 4대 경찰이 되는 것을 제안했고, '4대 강국'이라는 표현은 연합국 선언에도 반영되었지만, 처칠이나 스탈린으로부터 초기에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서방 연합군이 유럽에 제2 전선을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미국은 1920년대 소련과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33년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렌드리스 차관의 원래 조건은 소련에 맞춰 영국 조건과 일치하도록 수정되었다. 미국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전쟁이 끝나면 소련으로부터 이자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미국은 어떠한 "전후 소련 재건 노력"도 지원할 의향이 없었다. 이는 결국 몰로토프 계획으로 나타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를 "더욱 강력한 처칠에 비해 가벼운 인물"로 평가했다.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그의 후임인 해리 트루먼이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7.1. 유엔 헌장
1942년 1월 1일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명의 경찰관과 기타 22개국이 유엔 헌장에 서명했고 이는 나중에 유엔의 토대가 된다. 1945년 7월에서 8월까지 이뤄진 포츠담 회담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중국,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의 외무장관에게 "유럽의 평화조약과 국경안 초안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제안하면서 일명 '빅 5'의 외무장관 협의회가 창설되었으며 이 다섯 국가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이어졌다.
유엔 헌장은 1945년 4월에서부터 7월 사이 국제 기구에 관한 유엔 회의를 통해 합의되었다. 6월 26일까지 50개국이 서명(폴란드는 예약되었으며 나중에 51번째의 "최초의" 서명국이 됨)했으며 전쟁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정식으로 비준되었다. 1944년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 소련, 영국, 미국, 중국 대표단과의 회의인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 유엔이 공식화되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구성과 상임이사국(중국,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빅5)도 결정되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46년 1월 17일 전쟁 직후 첫 회의를 가졌다.
유엔 헌장에 최초로 서명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상임이사국 5개국은 별표로 표시)
7.2. 냉전
유엔이 성공적으로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미국, 영국 간의 동맹은 붕괴되어 반세기 간의 분쟁인 냉전으로 이어졌다. 연합국 지도자들 사이에는 많은 긴장이 존재했지만, 전시 중 동맹을 깨뜨릴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1942년 루스벨트는 중국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한 4대 경찰이 되는 것을 제안했고, '4대 강국'이라는 표현은 연합국 선언에도 반영되었지만, 처칠이나 스탈린으로부터 초기에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서방 연합군이 유럽에 제2 전선을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미국은 1920년대 소련과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33년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렌드리스 차관의 원래 조건은 소련에 맞춰 영국 조건과 일치하도록 수정되었다. 미국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후 전쟁이 끝나면 소련으로부터 이자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미국은 어떠한 "전후 소련 재건 노력"도 지원할 의향이 없었다. 이는 결국 몰로토프 플랜으로 나타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를 "더욱 강력한 처칠에 비해 가벼운 인물"로 평가했다.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그의 후임인 해리 트루먼이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8. 결론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다양한 국가와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자의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연합국의 승리는 민주주의와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지만, 냉전이라는 새로운 갈등을 낳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과 한계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분류:제2차 세계 대전 관련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