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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수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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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수라 전투는 1759년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벵골 지역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집중하던 영국은 네덜란드의 세력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여 전투를 벌였으며, 해전과 육전 모두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영국은 벵골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미르 자파르를 축출하고 사위인 미르 카심 알리 칸을 옹립하며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 통치를 공고히 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중립성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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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수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친수라 전투
부분전7년 전쟁
1787년 [[휴글리-추추라|친수라]] 그림, [[윌리엄 호지스]] 작
1787년 친수라 그림, 윌리엄 호지스 작
날짜1759년 11월 24일 - 25일
장소친수라, 벵골 수바
결과영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707).svg|23px]] 영국 동인도 회사
[[파일:Flag of the Principality of Bengal (15th-18th century).svg|23px]] 벵골 수바
교전국 2[[파일:Flag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svg|23px]]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지휘관
지휘관 1[[파일: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707).svg|23px]] 프랜시스 포드
[[파일: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707).svg|23px]] 찰스 윌슨
[[파일:Flag of the Principality of Bengal (15th-18th century).svg|23px]] 미르 자파르
지휘관 2[[파일:Flag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svg|23px]] 장 밥티스테 루셀 (항복)
병력 규모
병력 1300명 유럽 보병
800명 세포이
50명 유럽 기병
200명 인도 기병
3척 군함
100명 벵골 기병
병력 2150명 유럽인 (수비대)
300명 세포이 (수비대)
700명 유럽인 (증원군)
800명 말레이인 (증원군)
7척 군함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320명 사망
300명 부상
550명 포로
6척 군함 나포
1척 군함 좌초

2. 배경

1757년 샹데르나고르의 프랑스 전초 기지가 영국에 함락 및 파괴된 후, 벵골 나바브인 미르 자파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대표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벵골 지역의 네덜란드 소유지에 병력을 투입하려 했다. 당시 영국네덜란드 공화국7년 전쟁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관계였다.

동인도 회사 행정관 로버트 클라이브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네덜란드가 친수라 주변에서 징병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 상황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클라이브는 민병대를 소집하고 자원병을 모집했으며, 강변 포대의 요새를 강화했다. 또한 프랜시스 포드 대령에게 500명의 병력을 주어 바라나가르의 네덜란드 전초 기지를 점령하도록 했다.

2. 1. 7년 전쟁과 국제 정세

미르 자파르는 1757년 찬다나가르(샹데르나고르)에 있는 프랑스 전초 기지가 영국에 함락되고 파괴된 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대표와 비밀리에 협상하여 영국군을 축출하고자 네덜란드 군을 데려오도록 했다. 영국네덜란드 공화국7년 전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후글리-친수라의 네덜란드 전초 기지 이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보고, 친수라에 추가 병력을 보내는 데 동의했다. 1,500명 이상의 유럽인과 말레이인 병력을 태운 7척의 함대가 바타비아에서 출발하여 1759년 10월 후글리 강 어귀에 도착했다.

2. 2. 영국-네덜란드 갈등 심화

미르 자파르는 1757년 찬다나가르에 있던 프랑스 전초 기지가 영국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대표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네덜란드 군을 벵골 지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당시 영국네덜란드 공화국7년 전쟁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벵골 나바브인 미르 자파르는 샹데르나고르의 프랑스 전초 기지가 1757년 영국에 점령 및 파괴된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대표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네덜란드 소유지에 병력을 투입하려 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평화 상태였으나, 7년 전쟁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동인도 회사 행정관 로버트 클라이브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샹데르나고르에서 멀지 않은 후글리-친수라의 네덜란드 전초 기지 이사들은 이 기회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친수라에 추가 병력을 보내는 데 동의했다. 1,500명 이상의 유럽인과 말레이인 병력을 태운 7척의 함대가 바타비아에서 출발, 1759년 10월 후글리 강 어귀에 도착했고, 미르 자파르는 캘커타에서 클라이브와 회담을 가졌다.

한편, 미르 자파르는 북부 국경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클라이브에게 후글리-친수라로 돌아가 네덜란드 이사들을 소환하여 배를 떠나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 만난 후, 클라이브에게 네덜란드에게 약간의 특권을 부여했으며,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이 소식과 네덜란드가 친수라 주변에서 징병을 하고 있다는 보고는 클라이브가 이 상황을 실제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클라이브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었던 4척의 배 중 한 척을 제1대 준남작 새뮤얼 코니쉬 경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네덜란드는 후글리 강에서 몇 척의 작은 영국 선박을 나포하면서 이 배를 점령했다. 클라이브는 민병대를 소집하고 자원병을 모집했으며, 강변 포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프랜시스 포드 대령에게 500명의 병력을 주어 바라나가르의 네덜란드 전초 기지를 점령하고 네덜란드가 샹데르나고르를 점령하려 할 경우 그들을 가로막도록 샹데르나고르로 보냈다. 네덜란드는 11월 21일 후글리 강 북쪽 기슭에 병력을 상륙시켰는데, 이는 영국 강변 포대의 사정거리 밖이었으며, 친수라로 진격했다.

3. 전투 과정

1759년 11월 23일, 영국 함대는 네덜란드 함대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네덜란드군은 병력 상륙 후 강 하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국 함대 사령관 찰스 윌슨 제독은 네덜란드 함선을 지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네덜란드군은 사격으로 위협했다. 다음 날, 클라이브의 최후통첩이 거절당한 후 양측은 교전을 벌여 영국 함대가 승리했다.

같은 날 밤, 포드는 바라나가르를 점령하고 찬데르나가르 근처에 야영했다. 네덜란드군은 포드를 가두려 했으나, 다음 날 아침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친수라로 후퇴했다. 캘커타에서 파견된 지원군과 나바브가 보낸 기병대가 포드에게 합류했다. 포드는 클라이브의 승인을 받고 비데라 평원에서 네덜란드군을 공격했다. 11월 25일, 네덜란드군은 영국군의 포격과 도랑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머스킷 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나바브의 병사들은 영국군이 승리할 것이 확실해진 후에야 전투에 합류했다.

3. 1. 해전

남아 있던 세 척의 영국 함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네덜란드 함선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네덜란드군이 병력 상륙을 마치자 네덜란드 함선은 강 하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1월 23일, 영국 함대의 사령관인 찰스 윌슨 제독은 네덜란드 함선을 지나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이에 네덜란드군은 영국 함선이 지나가려 할 경우 사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다음 날, 클라이브는 앞서 네덜란드군이 몰수한 선박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두 함대는 교전을 벌였다. 두 시간의 전투에서, ''듀크 오브 도르셋''은 네덜란드 기함 ''블리싱겐''을 항복하게 했고, ''하드위크''와 ''캘커타''는 두 척의 배를 쫓아내고 세 번째 배를 좌초시키자 나머지 배들도 항복했다. 강 어귀에 도착한 다른 영국 배들이 결국 도망치는 네덜란드 배 두 척을 나포했다.

3. 2. 육전 (비데라 전투)

11월 23일 밤, 포드는 바라나가르(현재 바라나가르)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후 그의 부대와 함께 찬데르나가르 근처에 야영했다. 네덜란드군은 도착하는 병력과 친수라 수비대 사이에 포드를 가두기를 바라며, 그날 밤 찬데르나가르의 폐허에 도착한 병력을 야영시켰다. 다음 날 아침, 두 군대는 교전을 벌였다. 포드의 부대는 네덜란드군을 격파하여 친수라로 후퇴하게 했고, 네덜란드 야전을 포획했다. 캘커타에서 파견된 추가 병력이 그곳에서 포드에 합류하여 그의 병력 규모를 약 1,200명으로 늘렸다. 나바브는 또한 영국군 진영에 100명의 기병대를 보냈는데, 표면적으로는 영국군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전투를 관찰하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포로들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 날 네덜란드 증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포드는 네덜란드군을 공격하는 것이 전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캘커타에 있는 클라이브에게 조언을 구하는 급한 메시지를 보냈다. 클라이브는 포드의 메시지 뒷면에 "포드에게—즉시 싸워라"라고 적어 되돌려 보냈다.

포드는 친수라와 찬데르나가르 사이의 비데라 평원을 전투 장소로 선택했다. 그의 부대는 오른쪽에 비데라 마을을 점령하고 왼쪽에 망고 숲을 점령했으며, 넓은 도랑이 중앙을 확보했다. 11월 25일 오전 10시경, 네덜란드군이 도착했다.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포드는 야전 포병에게 사격을 명령했다. 네덜란드군은 영국군의 사격에도 불구하고 전진을 계속하다가 도랑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도랑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군의 선두가 멈춰 서자, 후미가 계속해서 밀고 들어와 네덜란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의 위치가 영국군의 머스킷 사정거리에 들어가자, 그들은 퇴각하기 전에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이때 포드는 기병대를 내보내 나바브의 병사들에게 돌격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바브의 병사들은 물러섰고, 그들이 승리할 것이 확실해 보였던 두 번째 돌격 때까지 영국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4. 결과 및 영향

영국군의 승리는 압도적이어서, 네덜란드 군대가 보낸 유럽인 중 16명만이 친수라에 도착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미르 자파르를 몰아내고 사위인 미르 카심 알리 칸으로 교체했다. 플라시 전투와 함께 이 전투는 벵골에서 영국의 우세를 굳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전쟁은 네덜란드의 중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네덜란드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소수의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4. 1. 영국의 벵골 지배 강화

영국군의 승리는 압도적이어서, 네덜란드 군대가 보낸 유럽인 16명만이 친수라에 도착했다. 이 승리로 영국군은 미르 자파르를 몰아내고 그의 사위인 미르 카심 알리 칸으로 교체했다. 플라시 전투와 더불어 친수라 전투는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 통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네덜란드의 중립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네덜란드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소수의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4. 2. 인도 식민 지배의 발판 마련

영국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네덜란드 군대가 보낸 유럽인 병사 중 16명만이 친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영국군은 미르 자파르를 몰아내고 그의 사위인 미르 카심 알리 칸으로 권력을 교체했다. 플라시 전투와 더불어 친수라 전투는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 통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전투는 네덜란드의 중립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네덜란드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4. 3. 네덜란드의 중립 유지

영국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파견된 네덜란드 군대 중 단 16명의 유럽인만이 친수라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 이후, 영국군은 미르 자파르를 축출하고 그의 사위인 미르 카심 알리 칸으로 교체했다. 플라시 전투와 함께 이 전투는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 통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네덜란드의 중립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네덜란드는 전쟁에 연루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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