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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탱 드 라 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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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는 18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파스텔 초상화가이다. 생캉탱에서 태어나 음악가의 아들로 자랐으며,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퐁파두르 부인,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등 당대의 유명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작품은 인물의 특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밝은 색채와 미소를 특징으로 한다. 말년에는 고향 생캉탱으로 돌아가 자선 활동을 펼치다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초상화는 프랑스 지폐에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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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탱 드 라 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이스 가슴 장식을 단 자화상 (ca 1751)
레이스 가슴 장식을 단 자화상 (ca 1751)
본명모리스-캉탱 들라투르
출생일1704년 9월 5일
출생지피카르디, 생캉탱, 프랑스 왕국
사망일1788년 2월 17일
사망지피카르디, 생캉탱, 프랑스 왕국
국적프랑스
분야파스텔

2. 생애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는 생캉탱에서 음악가 프랑수아 드 라 투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37년 파리 살롱에 프랑수아 부셰의 아내 초상화와 "웃는 자화상"(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전시하며 150여 점에 달하는 초상화 연작을 시작했다.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회원으로 인정받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궁정의 주목을 받았으며, 1745년에는 루브르 궁전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1760년대 후반에는 왕족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드 라 투르는 초상화에 인물의 매력과 지성을 담아냈으며, 파스텔을 섬세하게 다루는 솜씨로 부드러움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활기차고 유쾌하지만, 괴팍한 성격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자화상에서는 관객을 향해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으며, 로라 커밍은 그가 다른 예술가들보다 더 많은 웃는 얼굴의 자화상을 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작품을 망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평가도 있다.[4]

드 라 투르는 수입이 증가하면서 고향 생캉탱에 드로잉 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여성, 장애인, 노령의 장인과 예술가들에게 기부하는 등 자선 활동을 펼쳤다. 또한 파리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아미앵의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의 고문이자 후원자였다. 말년에는 정신 질환으로 생캉탱으로 은퇴했으며,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그의 재산은 "생 루이 왕립 군사 훈장 기사"였던 그의 형제 장-프랑수아에게 상속되었다.

2. 1. 초반기 (1704년 ~ 1737년)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는 생캉탱에서 음악가 프랑수아 드 라 투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수아는 출신이었으며, 1674년에 사망한 랭과 생캉탱의 석공장이었던 장 드 라 투르의 아들이었다. 프랑수아 드 라 투르는 맹 공작의 소총 연대 트럼펫 연주자이자 생캉탱 대학 교회의 음악가였다고 한다. 그는 아들이 예술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1] 2002년 프랑수아 마란데에 따르면, 어린 모리스를 위해 1719년 10월 12일부터 뒤푸치라는 화가와 견습 계약이 체결되었지만, 이 계약이 언제 종료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 19세가 되기 전까지 드 라 투르의 배경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는 사촌 안 부지에 관한 경솔한 행동으로 파리를 무기한으로 떠났다. 이 무렵 그는 화가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주장했다. 1725년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을 여행한 후, 1727년 파리로 돌아와 파스텔로 초상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도록 장려받았다. 그의 가장 초기 초상화는 1731년 랑글루아가 제작한 판화로만 증명되었으며, 볼테르의 초상화였다.[2]

1737년 파리 살롱에서 드 라 투르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아내인 "부셰 부인"의 초상화와 "웃는 자화상"(루브르 박물관)을 전시했는데, 이 작품은 향후 36년 동안 파리 살롱의 영광 중 하나가 된 150점의 초상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조제프 뒤크뢰는 자신이 그의 유일한 제자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이는 가능성이 낮다).

2. 2. 성공기 (1737년 ~ 1773년)

1737년 파리 살롱에서 드 라 투르는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아내인 "부셰 부인"의 초상화와 "웃는 자화상"(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전시했는데, 이는 이후 36년 동안 파리 살롱의 영광 중 하나가 된 150점 초상화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다.[2] 화가 조제프 뒤크뢰는 자신이 그의 유일한 제자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가능성이 낮다. 1737년 5월 25일, 드 라 투르는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agréé)받았으며, 곧 루이 15세의 프랑스 궁정의 주목을 받았다.[2] 제파레스에 따르면, 그는 1745년에 루브르 궁전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1760년대 후반에는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중단했다. 드 라 투르는 초상화 속 인물들에게 독특한 매력과 지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파스텔을 다루는 섬세하면서도 확실한 솜씨는 그들의 특징에 부드러움을 더했다.

동시대 기록은 드 라 투르의 성격을 활기차고 유쾌하지만 기이한 것으로 묘사한다. 많은 자화상에서 그는 프레임 밖에서 관객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라 커밍은 드 라 투르에 대해 "다른 예술가들이 자신을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그는 이 과제를 가볍게 여기고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더 많은 웃는 얼굴의 자화상을 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3] 그러나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성격(결국 치매로 이어진)과 까다로운 성격 탓에 그는 작품을 망칠 정도로 지나치게 공을 들였다고 묘사되기도 했다.[4]

드 라 투르의 수입이 의뢰로 인해 증가함에 따라 그의 자선 활동도 증가했다. 그는 고향 생캉탱에 드로잉 학교를 설립했고, 감금된 가난한 여성, 장애가 있는 장인 및 예술가, 그리고 나이든 장인 및 예술가들에게 기부했다. 그는 또한 파리의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와 아미앵의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의 고문이자 후원자였다.

2. 3. 생캉탱의 자선가 (1773년 ~ 1788년)

드 라 투르는 수입이 늘면서 자선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그는 고향 생캉탱에 드로잉 학교를 설립했고, 감금된 가난한 여성, 장애인, 노령의 장인과 예술가들에게 기부했다.[4] 그는 파리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아미앵의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의 고문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3. 작품과 사후 평가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발행된 50 프랑 프랑 지폐에는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의 초상화가 실렸다.

3. 1. 작품의 특징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의 화풍은 쉽게 구분 가능하다. 그의 작품은 보통 큰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주제는 밝은 부분 아래에 잘 배치되어 있다. 추한 인물들은 항상 희미하게 그려졌으며, 입술 끝쪽은 항상 미소짓는 듯이 올라가 있다. 인물의 시선은 항상 순수하며, 명암과 색조를 통해 혈색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캉탱 드 라 투르의 기술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했다.

캉탱 드 라 투르의 작업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제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명과 색 배합을 찾기 위해 파스텔 크로키를 빠르게, 보통 여러 장 그리는 초상화 준비 과정이었다. 퐁파두르 부인 초상화를 위해 그린 여러 습작들이 그 예시를 보여준다. 그의 습작은 보통 한 장씩만 보존되었다.

''마리 레슈친스카'', ''프랑스 왕비'' (1748년 살롱)


''장자크 루소'' (1753년 살롱에서 전시)


''마리 펠'' (1757)


에밀리 뒤 샤틀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3. 2. 대표작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는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주로 큰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밝은 조명 아래 인물을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추한 인물들은 희미하게 묘사하고, 입술 끝은 항상 미소 짓는 듯이 올라가도록 표현했다. 인물의 시선은 순수하게 표현되었으며, 명암과 색조를 통해 혈색을 완벽하게 묘사했다. 그의 기술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했다.

캉탱 드 라 투르는 초상화를 그리기 전, 대상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명과 색 배합을 찾기 위해 파스텔 크로키를 빠르게 여러 장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퐁파두르 부인 초상화를 위해 그린 여러 습작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습작은 보통 한 장씩만 보존되었다.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 (1748-55), 파리, 루브르 박물관.


3. 3. 사후 평가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의 화풍은 쉽게 구분 가능하다. 주로 큰 크기로, 대상을 밝은 부분 아래에 잘 배치했으며, 추한 이들은 항상 희미하게 그렸다. 입술 끝쪽은 항상 미소짓는 듯이 올라가 있으며, 인물의 시선은 항상 순수하다. 명암과 색조를 통해 혈색을 완벽히 표현했다. 캉탱 드 라 투르의 기술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했다.[1]

캉탱 드 라 투르의 작업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상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조명과 색 배합을 찾기 위해 파스텔 크로키를 빠르게, 보통 여러 장 그리는 초상화 준비 과정이었다. 퐁파두르 부인 초상화를 위해 그린 여러 습작들이 그 예시이다. 그의 습작은 보통 한 장씩만 보존되었다.[1]

참조

[1] 간행물 The Apprenticeship of Maurice Quentin de La Tour (1704-88) The Burlington Magazine 2002
[2] 뉴스 Causerie artistique: La Tour Journal des débats politiques et litteraires 1904-10-02
[3] 서적 A Face to the World: On Self-Portraits HarperPress 2010
[4] 서적 French Painters of the XVIIIth Century George Bell and Sons 1899
[5] 웹사이트 L'homme: son physique, son caractère, 'Humiliation par La Tour de son portrait par Perronneau' Musée Antoine Lecuuer https://web.archive.[...]
[6] 문서 1704년 생자크 교구의 생캉탱의 호적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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