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헤르만 폰 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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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헤르만 폰 카테는 프로이센의 귀족 출신으로, 프리드리히 2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프리드리히의 탈출 계획을 도운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군사 재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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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헤르만 폰 카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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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한스 헤르만 폰 카테 |
원어 이름 | Hans Hermann von Kat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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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04년 2월 28일 |
출생지 | 베를린, 프로이센 |
사망일 | 1730년 11월 6일 |
사망지 | 퀴스트린 |
사망 원인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한 처형 |
부모 | 한스 하인리히 그라프 폰 카테 도로테 소피아 폰 바르텐슬레벤 |
2. 생애
한스 헤르만 폰 카테는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집안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신임하는 흉갑 기병 야전사령관이었고, 어머니 역시 명망 높은 군인 가문 출신이었다. 카테는 쾨니히스베르크와 위트레흐트에서 프랑스어와 법학을 공부한 뒤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했다.
카테는 프리드리히 왕세자와 1729년경부터 개인적인 교습을 함께 받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시와 음악 등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둘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동성애적 관계였을 수 있다는 추측도 제기되었다.[1][2] 카테는 왕세자의 가장 신임받는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1730년, 카테는 가혹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벗어나려던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영국 도피 계획을 도왔다. 1730년 8월, 만하임 근처에서 시도된 탈출 계획은 발각되었고, 공모 사실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면서 두 사람은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어 퀴스트린 요새에 투옥되었다.[5]
군사 재판은 카테에게 탈영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으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카테가 세상에서 정의를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며 형벌을 참수형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왕은 카테가 근위대 장교라는 이유로 엄벌을 주장하며 왕세자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의 사면 요청을 모두 거부했다. 결국 카테는 1730년 11월 6일, 퀴스트린 요새에서 왕세자 프리드리히가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처형 직전 카테는 프랑스어로 Il n'y a rien à pardonner, je meurs avec joie pour vous!|일 니 아 리앵 아 파르도네, 주 뫼르 아베크 주아 푸르 부!프랑스어(용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 광경을 본 프리드리히는 정신을 잃었다.
카테의 시신은 처음에는 요새 해자에 묻혔다가 후에 가족의 요청으로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에 있는 가문 묘지로 이장되었다.[7] 프리드리히는 친구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카테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740년 왕위에 오른 뒤, 프리드리히 2세는 카테의 아버지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습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2. 1. 초기 생애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난 카테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의 알트마르크 지역 기사들이었다. 아버지 야전사령관 한스 하인리히 폰 카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높이 평가한 흉갑 기병 중 한 명이었으며, 어머니 도르테 소피 폰 바르텐슬레벤은 경험 많은 야전사령관 그라프 레오폴트 알렉산더 폰 바르텐슬레벤의 딸이었다. 한스 헤르만은 쾨니히스베르크와 위트레흐트에서 프랑스어와 법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했는데, 이는 그가 원했던 사법 분야 경력을 쌓기 위한 필수적인 임시 군 복무였다.프리드리히 2세와 카테가 처음 만난 정확한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729년 함께 사적으로 수학과 역학 수업을 들으면서 급속히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카테보다 8살 어린 프리드리히는 그의 국제적인 감각을 높이 샀으며, 두 사람은 시와 플루트 연주라는 공통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으며, 프리드리히의 성적 지향에 대한 당시의 인식[1]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들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관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참조: 프리드리히 대왕의 성적 취향). 실제로 당시 궁정 신하였던 카를 루드비히 폰 푈니츠는 두 사람이 마치 "연인과 애인처럼" 서로를 대했다고 기록했다.[2] 카테는 왕세자의 절친한 측근으로서, 이전에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경계하여 베젤의 제31 보병 연대 소위로 전출시킨 시종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 폰 카이츠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빌헬미네 공주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카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지적이고 박식하며 세상 물정에 밝았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베를린에서는 보기 드문 세련된 매너를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부족한 편이었다. 두 개의 검은 눈썹이 거의 눈을 덮었고, 그의 모습에는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불길함이 서려 있었다. 그을리고 움푹 들어간 피부는 그의 외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행동했고, 삶을 다소 방탕하게 살았다. 엄청난 야망과 오만함이 이러한 단점들과 함께했다. 이러한 총애는 내 오빠가 그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주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3]
1730년 6월 어느 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예상보다 일찍 귀가했을 때, 카테와 방문 중이던 작곡가 요한 요아힘 콴츠는 벽난로 뒤 작은 방에 한 시간가량 숨어 있어야 했다. 국왕은 아들 프리드리히가 비밀리에 모아둔 책과 옷들을 발견하고 불태워버렸으며, 남은 책들은 팔거나 경매에 부쳐야 했다.[4]
2. 2. 프리드리히 왕세자와의 관계
프리드리히 2세와 카테가 정확히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729년,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수학과 역학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카테보다 8살 어렸던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카테의 국제적인 안목과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둘은 시를 좋아하고 플루트를 연주하는 등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깊은 우정을 쌓았다. 프리드리히가 동성애자였다는 오랜 인식(심지어 생전에도[1])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관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참조: 프리드리히 대왕의 성적 취향). 당시 궁정 신하였던 카를 루드비히 폰 푈니츠는 두 사람이 마치 "연인과 애인처럼" 서로를 대했다고 기록했다.[2] 카테는 왕세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측근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왕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눈 밖에 나 베젤의 제31 보병 연대 소위로 좌천된 시종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 폰 카이츠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프리드리히의 누나인 빌헬미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카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지적이고 박식하며 세상 물정에 밝았다. 그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당시 베를린에서는 매우 드물었던 세련된 매너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얼굴은 매력적이기보다는 덜 매력적이었다. 두 개의 검은 눈썹이 거의 그의 눈을 덮었고, 그의 모습에는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그을리고 움푹 파인 피부는 그의 추함을 더했다. 그는 자유로운 정신의 역할을 했고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살았다. 엄청난 야망과 오만함이 이 악덕과 함께했다. 그런 총애는 내 오빠가 그의 일탈을 단념시키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3]
1730년 6월 어느 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예상보다 일찍 귀가했을 때, 카테와 방문 중이던 작곡가 요한 요아힘 콴츠는 벽난로 뒤 작은 방에 한 시간 동안 숨어 있어야 했다. 국왕은 아들의 비밀 서적과 의복 컬렉션을 발견하고 불태워 버렸으며, 남은 책들은 팔거나 경매에 부쳐야 했다.[4] 이 사건 직후, 프리드리히는 카테에게 폭군적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털어놓았다. 카테는 처음에는 왕세자를 만류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탈출 계획을 돕기로 결심했다. 1730년 6월, 국왕과 함께 머물던 차이타인 야영지에서 말을 구하지 못해 첫 번째 탈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730년 8월 5일, 국왕의 수행원이 팔츠 선제후국의 만하임 근처에 머물 때, 프리드리히는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카테는 포츠담에 있었지만[5], 그의 동생이 왕세자의 시종으로 동행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역마차가 준비되었으나, 왕세자의 하인이 잠에서 깨 경비병을 부르면서 계획이 발각되었다. 두 사람의 공모 사실을 담은 편지가 발견되었고, 프리드리히와 카테는 체포되어 퀴스트린 요새에 투옥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 장교 신분으로 탈출을 시도한 이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했다.

군사 재판은 카테에게 탈영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는 국왕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형기가 지속될 예정이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카테가 세상에서 정의를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선언하며 형벌을 참수형으로 바꾸었다. 그는 카테가 국왕 근위대 장교였으므로 가벼운 처벌을 내리면 근위대의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왕세자 본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대사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제켄도르프 백작 등 여러 인물들이 카테의 사면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 국왕은 심지어 카테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존경하던 장군에게 "당신 아들은 악당이고, 내 아들도 악당인데, 아비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카테는 퀴스트린 요새에서 참수되었으며, 국왕은 프리드리히 왕세자에게 이 처형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게 했다. 카테가 처형대로 끌려 나오자, 프리드리히는 프랑스어로 Veuillez pardonner mon cher Katte, au nom de Dieu, pardonne-moi!|뵈이에 파르도네 몽 셰르 카트, 오 농 드 디외, 파르돈-무아!프랑스어(사랑하는 카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주오!)라고 외쳤다. 카테는 같은 언어로 "용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쓰러졌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카테의 시신은 프리드리히의 감방 창문이 보이는 처형대에 하룻밤 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카테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처형 직전 그가 아버지에게 쓴 작별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물로, 아버지, 저는 이 편지가 충실한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녹아내리고 싶습니다. 나의 미래 복지와 노년의 안락함에 대한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져야 한다는 것, 나의 양육을 위한 모든 노력과 부지런함이 소중한 행복의 성숙으로 헛되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제가 이 세상에서 저의 노력과 제가 이룬 과학의 열매를 당신에게 보여주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세상을 오르지 못하고 당신의 희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까? 제가 어떻게 행복과 안녕을 놓치지 않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떻게 명성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얼마나 덧없는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제 삶의 풍경은 얼마나 슬프게 끝나가고, 제 현재 상태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다른가요. 저는 명예와 명성의 길을 걷는 대신 굴욕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다시 강해지십시오, 아버지, 그리고 저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이 게임에서 저와 함께하십니다. 그분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 그동안, 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게 보여주신 모든 아버지의 충성에 대해, 저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이 위안으로 마무리하는 것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에게서 높고 특별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셨을지라도, 오! 부디 천국에서 훨씬 더 높은 것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의 충실한 아들. 한스 헤르만"[6]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프리드리히는 3일 동안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후 그는 다시는 카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무덤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카테의 시신은 처음에는 국왕의 지시에 따라 요새 해자에 묻혔으나, 가족의 요청으로 발굴되어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에 있는 가문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처형 집행인의 비용을 지불하고 처형에 사용된 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7]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740년 왕위에 오른 지 불과 4주 만에 프리드리히는 카테의 아버지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습 백작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칭호는 그의 막내아들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8년 만에 소멸되었다.

2. 3. 탈영 시도와 체포
1730년 6월 어느 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예상보다 일찍 귀가하여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방에서 카테와 작곡가 요한 요아힘 콴츠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벽난로 뒤 작은 방에 한 시간 동안 숨어 있어야 했다. 왕은 아들의 책과 옷 등 비밀 소장품을 발견하고 불태웠으며, 남은 책들은 팔거나 경매에 부쳐야 했다.[4] 이 사건 직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가혹함과 폭정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카테에게 털어놓았다. 카테는 처음에는 만류했지만 결국 프리드리히의 탈출 계획을 돕기로 했다.1730년 6월, 왕을 따라갔던 차이타인 야영지에서 첫 탈출을 시도했으나 말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1730년 8월 5일, 왕의 수행단이 팔츠 선제후국의 만하임 근처에 머물 때 프리드리히는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카테는 포츠담에 있었지만[5], 그의 동생이 시종으로 함께 있었다. 역마차가 준비되었으나 왕세자의 하인이 잠에서 깨 경비를 부르면서 계획은 발각되었다. 두 사람의 공모 사실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었고, 프리드리히와 카테는 체포되어 퀴스트린 요새에 투옥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 장교 신분으로 탈영을 시도한 두 사람에게 반역죄를 적용했다.
군사 재판은 카테에게 탈영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종신형을 내렸다. 이는 국왕이 사망할 때까지 감옥에 갇히는 형벌이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카테가 세상에서 정의를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형을 참수로 바꾸었다. 국왕은 카테가 자신의 근위대 장교였기 때문에 가벼운 처벌을 내리면 근위대의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본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대사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제켄도르프 백작 등 많은 이들이 카테의 사면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국왕은 카테의 아버지이자 존경받는 장군인 한스 하인리히 폰 카테에게 "네 아들은 악당이고, 내 아들도 악당인데,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카테는 퀴스트린 요새에서 참수되었으며, 국왕은 프리드리히에게 처형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게 했다. 처형대에 오른 카테를 본 프리드리히는 프랑스어로 Veuillez pardonner mon cher Katte, au nom de Dieu, pardonne-moi!|뵈이예 파르도네 몽 셰르 카트, 오 농 드 디외, 파르돈-무아!fra(사랑하는 카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주시오!)라고 외쳤다. 카테 역시 같은 언어로 Il n'y a rien à pardonner, je meurs avec joie pour vous!|일 니 아 리앵 아 파르도네, 주 뫼르 아베크 주아 푸르 부!fra(용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카테의 시신은 하룻밤 동안 프리드리히의 감방 창문이 보이는 처형대에 방치되었다.
카테는 처형 직전 아버지에게 작별 편지를 남겼다.
눈물로, 아버지, 저는 이 편지가 충실한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녹아내리고 싶습니다. 나의 미래 복지와 노년의 안락함에 대한 모든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져야 한다는 것, 나의 양육을 위한 모든 노력과 부지런함이 소중한 행복의 성숙으로 헛되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제가 이 세상에서 저의 노력과 제가 이룬 과학의 열매를 당신에게 보여주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굴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세상을 오르지 못하고 당신의 희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까? 제가 어떻게 행복과 안녕을 놓치지 않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떻게 명성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얼마나 덧없는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제 삶의 풍경은 얼마나 슬프게 끝나가고, 제 현재 상태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다른가요. 저는 명예와 명성의 길을 걷는 대신 굴욕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 다시 강해지십시오, 아버지, 그리고 저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이 게임에서 저와 함께하십니다. 그분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 그동안, 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게 보여주신 모든 아버지의 충성에 대해, 저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이 위안으로 마무리하는 것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에게서 높고 특별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셨을지라도, 오! 부디 천국에서 훨씬 더 높은 것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의 충실한 아들. 한스 헤르만[6]
카테의 죽음을 목격한 프리드리히는 3일간 깊은 절망에 빠졌으며, 이후 다시는 카테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카테의 시신은 처음에는 국왕의 지시로 요새 해자에 묻혔으나, 가족의 요청으로 발굴되어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에 있는 가문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처형 집행 비용을 지불하고 처형인의 칼을 받았다.[7] 그러나 1740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 4주 만에 카테의 아버지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습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이 작위는 그의 아들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8년 만에 소멸되었다.
2. 4. 재판과 처형
1730년 8월 5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수행원이 팔츠 선제후국의 만하임 근처에 머물 때, 왕세자 프리드리히는 영국으로 도망치려 다시 시도했다. 이때 카테는 포츠담에 있었지만, 두 사람의 공모를 드러내는 편지가 발각되면서 프리드리히와 카테는 체포되어 퀴스트린 요새에 투옥되었다.[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 장교 신분인 두 사람이 국외로 탈출하려 한 것을 반역죄로 규정했다.
군사 재판은 카테에게 탈영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카테가 세상에서 정의를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선언하며 형벌을 참수로 바꾸었다. 국왕은 카테가 국왕 근위대 장교였기 때문에 가볍게 처벌하면 근위대를 다시는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 본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대사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제켄도르프 백작 등이 카테의 사면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 심지어 국왕은 카테의 아버지이자 자신이 존경하던 장군에게 "네 아들은 악당이고, 내 아들도 악당인데, 아버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카테는 왕세자가 감금된 퀴스트린 요새의 탑 근처에서 처형되었다. 국왕은 프리드리히에게 창문을 통해 처형 장면을 지켜보도록 강요했다. 처형대로 끌려가는 카테를 본 프리드리히는 프랑스어로 Veuillez pardonner mon cher Katte, au nom de Dieu, pardonne-moi!|뵈이예 파르도네 몽 셰르 카트, 오 농 드 디외, 파르돈-무아!fra("사랑하는 카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주시오!")라고 외쳤다. 카테는 같은 언어로 "전하, 용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전하를 위해 기꺼이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습을 본 프리드리히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카테의 시신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프리드리히의 창문 아래 처형대에 하룻밤 동안 방치되었다.
처형 직전 카테가 아버지에게 쓴 작별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 눈물로, 아버지, 저는 이 편지가 충실한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큰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녹아내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세상을 오르지 못하고 당신의 희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까?... 하지만 모두 헛된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얼마나 덧없는가: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저는 명예와 명성의 길을 걷는 대신 굴욕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다시 강해지십시오, 아버지, 그리고 저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 이 게임에서 저와 함께하십니다... 그동안, 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게 보여주신 모든 아버지의 충성에 대해, 저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것은 이 위안으로 마무리하는 것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에게서 높고 특별한 것을 경험하지 못하셨을지라도, 오! 부디 천국에서 훨씬 더 높은 것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당신의 충실한 아들. 한스 헤르만[6]
카테의 죽음을 목격한 프리드리히는 3일 동안 깊은 절망에 빠졌으며, 이후 다시는 카테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카테의 시신은 처음에는 국왕의 지시에 따라 요새 해자에 묻혔으나, 나중에 가족의 요청으로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에 있는 카테 가문의 묘지로 이장되었다.[7]
아이러니하게도, 1740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 4주 만에 카테의 아버지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습 백작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 칭호는 그의 다른 아들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8년 만에 소멸되었다.
카테의 처형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많은 소설, 서사시, 드라마 등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목을 벤 사형 집행인의 칼은 '카테의 검'(Katte-Richtschwert)이라 불리며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 현존하고 있다.
2. 5. 처형 이후
군사 재판은 카테에게 탈영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카테가 세상에서 정의를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형벌을 참수로 바꾸었다.[2] 국왕은 왕세자 프리드리히에게 퀴스트린 요새에서 카테의 처형을 직접 지켜보도록 강요했다.
처형대에 오른 카테를 향해 프리드리히는 창문에서 프랑스어로 Veuillez pardonner mon cher Katte, au nom de Dieu, pardonne-moi!|뢰이예 파르도네 몽 셰르 카트, 오 농 드 디외, 파르돈-무아!프랑스어 (사랑하는 카테,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주오!) 라고 외쳤다. 카테 역시 프랑스어로 Monseigneur, il n'y a pas de quoi pardonner. Je meurs pour vous avec mille joies!|몽세뇌르, 일 니 아 파 드 쿠아 파르도네. 주 뫼르 푸르 부 아베크 밀 주아!프랑스어 (전하, 용서받을 것이 없습니다. 저는 전하를 위해 천 번의 기쁨으로 죽습니다!) 라고 답하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이 모습을 본 프리드리히는 충격으로 기절하여 쓰러졌다.[3] 카테의 유서에는 "저는 국왕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하는 지금까지처럼 부왕과 모후를 존경하고, 하루빨리 화해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테의 시신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처형 장소에 하룻밤 동안 방치되었고, 이후 요새 해자에 묻혔다. 그러나 이후 가족들의 요청으로 시신은 발굴되어 작센안할트주 부스트에 있는 카테 가문의 묘지로 이장되었다.[7] 그의 할아버지는 사형 집행 비용을 지불하고 처형에 사용된 칼을 받았다. 이 칼은 '카테의 칼'(Katte-Richtschwert)이라 불리며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 현존하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카테의 죽음을 목격한 후 3일 동안 깊은 절망에 빠졌으며, 이후 다시는 카테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740년 왕위에 오른 지 4주 후, 프리드리히 2세는 카테의 아버지 한스 하인리히 폰 카테를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세습 백작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혹했던 처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다만 이 작위는 카테의 남동생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8년 만에 소멸되었다.
카테의 비극적인 죽음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야기는 여러 소설, 서사시, 드라마, 연극 등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3. 평가 및 영향
카테는 왕태자 프리드리히가 감금된 퀴스트린의 탑 근처에서 처형되었다. 이 장면은 후세에까지 회자되어 많은 소설, 서사시, 드라마, 연극 작품 등의 소재가 되었다.
처형 당시, 왕태자가 방 창문에서 "카테, 이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외치자, 카테는 "저는 전하를 위해 기꺼이 죽겠습니다"라고 의연하게 답하며 왕태자가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왕태자는 아버지인 국왕의 강요로 처형 장면을 지켜봐야 했지만, 이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실신했다.
카테의 유서에는 "저는 국왕 폐하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하는 지금까지처럼 부왕과 모후를 존경하고, 하루빨리 화해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카테의 목을 벤 사형 집행인의 칼은 '카테의 검'(Katte-Richtschwert)으로 불리며, 현재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 보존되어 있다.
참조
[1]
뉴스
For the MORNING POST
http://rictornorton.[...]
Rictor Norton
1776-06-18
[2]
서적
Preußen. Aufstieg und Niedergang 1600–1947
DVA
2006
[3]
서적
Mémoires de Frédérique Sophie Wilhelmine, Margrave de Bayreuthe, soeur de Frédéric le Grand, depuis L’année 1709 jusqu’a 1742, écrit de sa main
Mercure de France, Ellwanger
1967, 2007
[4]
서적
Anekdoten von König Friedrich II. von Preussen
https://books.google[...]
[5]
서적
[6]
서적
Wanderungen durch die Mark Brandenburg
[7]
문서
Margravine Wilhelmine describes the gruesome details of the execution and the events that followed in her memo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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