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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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군인이자 우익 정치인이다. 그는 핀란드 독립 이전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예거 부대 출신으로, 핀란드 내전에서 백위대 소대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동카렐리아 합병을 위한 비에나 원정, 페차모 원정에 참여했으며, 1918년에는 외교관을 포함한 5명의 러시아인 처형을 주재했다. 1930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나 스톨베리 납치 사건 연루로 강제 퇴역했으며, 라푸아 운동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다 매르첼래 반란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겨울 전쟁에서는 라플란드 집단군 사령관을 맡아 소련군을 격퇴했으나, 비푸리 만 전투에서 부진한 지휘로 불명예 제대되었다. 이후 로바니에멘에서 은퇴하여 저술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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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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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 | 1877년 7월 25일 |
사망 | 1950년 5월 10일 (향년 72세) |
출생지 | 핀란드 |
사망지 | 헬싱키 |
복무 | 핀란드 |
소속 | 핀란드군 |
복무 기간 | 1898년 ~ 1918년, 1939년 ~ 1944년 |
계급 | 소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핀란드 내전 겨울 전쟁 계속 전쟁 |
훈장 | 자유 십자 훈장 1급 자유 십자 훈장 2급 자유 십자 훈장 3급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3급 성 안나 훈장 3급 |
가족 | |
배우자 | 텔마 폰 슐츠 |
2. 예거 운동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독립 이전에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예거 부대의 일원이었다. 1915년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27 예거 대대에 입대했으며, 미사 강 전투에 참여했다.[1][2]
2. 1. 독일에서의 훈련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독립 이전에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예거 부대의 일원이었다. 1915년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27 예거 대대에 입대했다. 미사 강 전투에 참여했다.[1][2]3. 핀란드 내전
핀란드로 돌아온 발레니우스는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반공주의 백위대 측에 참여했다. 테르볼라와 토르니오에서 소대를 지휘했고, 라피에서 알렉시 힌나바라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후 쿠올라얘르비와 쿠사모 주변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3월 실패한 비에나 원정에서 북부 그룹 지휘를 맡았고, 1920년 5월에는 두 번째 페차모 원정의 지도자였다.[3] 1918년 2월에는 외교관을 포함한 5명의 러시아인 처형을 주재했다.[3]
3. 1. 백위대 지휘관
발레니우스는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반공주의 백위대 측에 참여했다. 그는 테르볼라와 토르니오에서 소대를 지휘했다. 라피에서 발레니우스는 순록 사육사 알렉시 힌나바라를 만나 함께 라피를 여행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후 발레니우스는 쿠올라얘르비와 쿠사모 주변의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3] 1918년 3월에는 실패한 비에나 원정에서 북부 그룹 지휘를 맡아 동카렐리아의 일부를 핀란드에 합병하려 했다.[3] 그는 또한 1920년 5월의 두 번째 페차모 원정 지도자였다.[3]3. 2. 비에나 원정
발레니우스는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반공주의 백위대 측에 참여하여 테르볼라와 토르니오에서 소대를 지휘했다. 라피에서 순록 사육사 알렉시 힌나바라를 만나 함께 라피를 여행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후 쿠올라얘르비와 쿠사모 주변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 3월에는 동카렐리아의 일부를 핀란드에 합병하려는 비에나 원정에서 북부 그룹 지휘를 맡았으나 실패했다.[3] 1920년 5월에는 두 번째 페차모 원정의 지도자였다.3. 3. 러시아인 처형 관여
발레니우스는 1918년 핀란드 내전 당시 반공주의 성향의 백위대에 가담하여 테르볼라와 토르니오에서 소대를 지휘했다. 라피에서 순록 사육사 알렉시 힌나바라와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후 쿠올라얘르비와 쿠사모 지역 부대 지휘관을 맡았다. 1918년 3월에는 비에나 원정에서 북부 그룹을 지휘하며 동카렐리아 일부를 핀란드에 합병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1918년 2월, 발레니우스는 외교관을 포함한 5명의 러시아인을 처형하는 데 관여했다.[3] 이는 전쟁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4. 연대 지휘관
핀란드 내전 이후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북서부에서 살라 연대와 라플란드 제1 국경 경비 연대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1920년대에는 잠시 베를린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4. 1. 살라 연대와 라플란드 국경 경비 연대
내전 이후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북서부에서 살라 연대와 라플란드 제1 국경 경비 연대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1920년대에는 잠시 베를린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다.4. 2. 베를린 주재 무관
내전 이후 발레니우스는 핀란드 북서부에서 살라 연대와 라플란드 제1 국경 경비 연대에서 부대를 지휘했다. 1920년대에는 잠시 베를린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다.5. 라푸아 운동
1930년 스톨베리 납치 사건으로 강제 퇴역한 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는 라푸아 운동의 사무총장으로 우익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매르첼래 반란에 연루되어 내란 방조 혐의로 1년 넘게 투옥되었다.[4]
5. 1. 스톨베리 납치 사건 연루
1930년 발레니우스는 소장(Major General)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초대 핀란드 대통령 카를로 스톨베르그의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강제 퇴역했다.[4] 발레니우스는 재판 전 구금 상태에서 8개월을 보냈고, 처음에는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4]5. 2. 라푸아 운동 사무총장
발레니우스는 1930년대에 우익 활동에 참여하여 라푸아 운동의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매르첼래 반란에 연루되었으며, 내란 방조 혐의로 1년 넘게 투옥되었다.[4]6. 겨울 전쟁
겨울 전쟁에서 발레니우스는 핀란드군 라플란드 방면 지휘를 맡았다. 겨울 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헤임은 발레니우스를 라플란드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발레니우스의 지휘 아래 소련군을 살라와 페체츠키 구에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40년 2월, 라플란드 전선이 안정되자 발레니우스는 중장 에른스트 린더 휘하의 스웨덴 의용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1]
이후 발레니우스와 그의 병력 대부분은 비푸리 만 서쪽 해안의 전선 최남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붉은 군대가 얼어붙은 만을 건너오고 있었다. 발레니우스는 과거의 과오 때문에 처벌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새로운 임무에 항의했으나, 상황은 매우 위급했고 지형 또한 발레니우스와 그의 부대가 익숙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발레니우스는 붉은 군대가 만의 서쪽 해안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가 술을 많이 마셨다는 보고가 있었다. 결국 발레니우스는 지휘를 맡은 지 3일 만인 1940년 3월 초에 불명예 제대되었고, 중장 칼 레나르트 외슈로 교체되었다. 이후 발레니우스는 국방군 장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1]
6. 1. 라플란드 집단군 사령관
겨울 전쟁 당시 발레니우스는 핀란드군 라플란드 방면 지휘를 맡았다. 겨울 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헤임은 발레니우스를 라플란드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발레니우스의 지휘 아래 소련군을 살라와 페체츠키 구에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 1940년 2월, 라플란드 전선이 안정되자 발레니우스는 중장 에른스트 린더 휘하의 스웨덴 의용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1]6. 2. 비푸리 만 전투
겨울 전쟁 당시 발레니우스는 핀란드군 라플란드 지역을 지휘했다. 겨울 전쟁이 시작되자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헤임은 발레니우스를 라플란드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그의 지휘 아래 소련군을 살라와 페체츠키 구에서 격퇴했다. 1940년 2월, 라플란드 전선이 안정되자 발레니우스는 중장 에른스트 린더 휘하의 스웨덴 의용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1]발레니우스와 그의 병력 대부분은 비푸리 만 서쪽 해안의 전선 최남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붉은 군대가 얼어붙은 만을 건너오고 있었다. 발레니우스는 과거의 과오 때문에 처벌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새로운 임무에 항의했다. 상황은 매우 위급했고, 지형 또한 발레니우스와 그의 부대가 익숙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발레니우스는 붉은 군대가 만의 서쪽 해안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가 술을 많이 마셨다는 보고가 있었다. 결국 발레니우스는 지휘를 맡은 지 3일 만인 1940년 3월 초에 불명예 제대되었고, 중장 칼 레나르트 외슈로 교체되었다. 이후 발레니우스는 국방군 장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1]
7. 은퇴 이후
계속 전쟁이 1941년 6월에 시작되자 발레니우스는 지휘권을 얻지 못했다. 그는 로바니에미에서 은퇴하여 책과 기사를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7. 1. 저술 활동
계속 전쟁이 1941년 6월에 시작되자 발레니우스는 지휘권을 얻지 못했다. 그는 로바니에멘 마알라이스쿠나에서 은퇴하여 책과 기사를 쓰면서 살았다.7. 2. 계속 전쟁 불참
계속 전쟁이 1941년 6월에 시작되자 발레니우스는 지휘권을 얻지 못했다.[1] 그는 로바니에미에서 은퇴하여 책과 기사를 쓰면서 살았다.[1]참조
[1]
서적
Suomen jääkärien elämäkerrasto
[2]
서적
Suomen jääkärien elämäkerrasto 1975
[3]
간행물
Tornion tapahtumat ja venäläiset kevättalvella 1918
https://web.archive.[...]
Valtioneuvoston kanslia
2004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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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aku.hel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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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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