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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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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푸아 운동은 1929년 핀란드 내전과 백위대의 국민행동주의 유산을 강조하며 반공주의, 루터교,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주의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계급 투쟁 가속화 명령과 핀란드 내 공산주의 활동 고조에 대응하여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좌파 및 노동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후 스톨베리 납치 사건과 맨챌래 반란 실패, 과격한 행보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잃고 1932년 불법화되었으며, 소련과의 관계 악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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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푸아 운동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라푸아 운동
로마자 표기Lapuan liike
스웨덴어 명칭Lapporörelsen
활동 기간1929년–1932년
지도부
지도자비흐토리 코솔라
이바리 코이비스토
비흐토리 헤르투아
목표
초기 목표핀란드 내 공산주의 불법화
후기 목표우익 독재 정권 수립
이념
이념파시즘
핀란드 민족주의
반공주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범죄 활동
범죄 행위폭행
살인
납치
폭동
공격
조직 상태
현재 상태1932년 불법화됨
규모최소 40,000명 (1930년 추정)
후신 조직
후신애국인민운동
재정

2. 배경

라푸아 운동은 1929년 핀란드 내전 직후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핀란드 내전은 핀란드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특히 반공주의 정서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핀란드 공산당은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는 보수적인 농촌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11월,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 동맹은 포흐얀마 지역의 라푸아에서 집회를 개최하려 했다. 그러나 라푸아는 과거 백위군 운동의 발상지였고,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결국 폭도들이 공산주의 청년 동맹 당원들을 공격하고 집회에 난입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라푸아를 중심으로 반공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9년 12월, 2,000명의 운동 지지자들이 라푸아에 모여 공산당의 불법화와 공산주의자 척결을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는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고, 정부와 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의회 및 지방 의회 추방과 언론 및 출판 금지를 요구했다.

라푸아 운동은 과격해져 공산당 관계자에 대한 테러 행위도 발생했지만,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선동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25]

2. 1. 핀란드 내전과 백위대

핀란드 내전 이후 핀란드 사회는 반공주의 정서가 강하게 자리 잡았으며, 특히 식자층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9년 라푸아 운동이 시작되었다. 라푸아 운동은 백위대의 국민행동주의 유산을 강조하며, 루터교, 민족주의,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내전 당시 백핀란드를 강력히 지지했던 포흐얀마 지역은 반공 감정이 특히 강했다. 1929년 11월 말, 라푸아에서 핀란드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이 집회를 열고, 만네르헤임 남작을 비롯한 기존 질서를 조롱하는 구호를 외치자 지역 주민들이 격분하여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27] 12월 1일에는 1천 명 이상이 모인 반공주의 집회가 열려 모든 공산주의 활동 금지를 요구했다.[27]

같은 해 요제프 스탈린이 전 세계 공산당에 계급 투쟁 가속화를 명령하면서 핀란드 내 공산주의 활동도 활발해졌다.[14] 8월 1일에는 전국적인 시위가 조직되었고, 11월에는 총파업이 선포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참여율은 저조했다.[14]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11월,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라푸아에서 행진을 벌였다. 이에 격분한 핀란드 백군 지지 주민들이 행진 참가자들을 폭행하면서 라푸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3] 초기에는 많은 정치인과 고위 군 장교들이 라푸아 운동에 동조했지만,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2. 2. 반공주의 확산

핀란드 내전백위대의 국민행동주의 유산을 강조한 반공 국민주의 집단인 라푸아 운동은 루터교, 민족주의,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핀란드 내전 이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반공주의가 일반적이었기에 많은 정치인과 고위 군 장교들이 라푸아 운동에 동조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라푸아 운동의 인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졌다.[27]

포흐얀마 지역은 내전 당시 백핀란드를 가장 강력히 지지한 지역이었으며, 반공감정이 유독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29년 11월 말, 포흐얀마의 라푸아에서 핀란드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이 집회를 열고 선동구를 외쳤는데, 이들은 루터교회와 기독교의 신, "부르주아"적인 조국, 핀란드 육군과 만네르헤임 남작을 조롱했다.[27] 지역 주민들은 이에 자극받아 집회를 폭력적으로 끝냈다. 12월 1일에는 반공주의 집회가 열렸고 1천 명 이상의 시위자가 모여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제6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요제프 스탈린은 전 세계 공산당에 계급 투쟁을 가속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1929년 핀란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고조시켰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한 8월 1일의 소위 "붉은 날"이 그 예이다. 11월에는 총파업도 선포되었지만 지지가 부족하여 노동자의 5~10%만이 참여했다.[14]

라푸아 운동은 1929년 11월,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라푸아에서 행진을 벌인 후 시작되었다. 이에 격분한 핀란드 백군 지지 주민들이 행진 참가자들을 폭행하면서 라푸아 운동의 형성이 촉진되는 계기가 되었다.[13] 민족주의자들의 시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 루터교회, '부르주아' 조국, 핀란드 군대, 만네르하임 장군을 조롱했다".[14] 이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격분하여 폭력적으로 집회를 종식시켰다. 반공 폭력은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12월 1일에는 반공 집회가 열려 1,000명 이상이 모든 공산주의 활동의 종식을 요구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 이외의 사람들도 표적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비타사리 애국 시민"이라는 단체는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을 나라에서 숙청하려고 했다.[15]

점차 라푸아 운동은 과격해져 공산당 관계자에 대한 린치와 공산당 관련 인쇄소 습격 등의 테러 행위도 발생했지만,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불법적인 혁명 선동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지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25]

1930년 6월에는 포얀마 지역 농민들이 공산당 불법화를 의회에 요구하기 위해 헬싱키를 향한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행진은 규모가 커져 1만 2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행진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7월 헬싱키 상원 광장에 도착하여 페르 에밀 쉰후우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10월에는 공산당원의 의회 및 지방 의회 출마를 제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라푸아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쉰후우와 만네르헤임은 처음에는 라푸아 운동을 단순한 애국 운동으로 생각하고 그 위험성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만네르헤임은 초기에는 라푸아 운동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운동의 특징은 신앙에 기반한 강한 헌신이다", "우리는 동보스니아에 깊이 뿌리내린 민주주의를 알고 있다. 그들의 운동 사상과 태도는 결코 반민주주의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라푸아 운동이 테러 활동과 폭력 혁명의 길로 들어섬에 따라 만네르헤임은 급히 태도를 바꿔 라푸아 운동을 경계하게 되었고, 자신이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라푸아 운동에 편승하지도 않았다.[25]

3. 전개

1929년 11월,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라푸아에서 행진을 벌이자, 이에 격분한 핀란드 백군 지지 주민들이 행진 참가자들을 폭행하면서 라푸아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반공주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 6월 16일에는 3천 명이 오울루에 모여 공산주의 신문 《포흐얀 보이마》의 윤전기와 편집실을 파괴했다. 같은 날 바사의 공산주의 언론도 공격받아 파괴되었다. 헬싱키를 향한 "농민 행진"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력시위였다. 1만 2천 명 이상의 시위자가 7월 7일 헬싱키에 도착했고, 그 압박을 받은 정부는 "공화국 수호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 신문들을 불법화했다.[25]

좌파 및 노동계 시위에 대한 방해도 이루어졌고, 대개 폭력적이었다. 라푸아 운동가들에 의해 해산된 노동계 지역 집회는 400건이 넘는다.

라푸아 운동의 흔한 수단은 "무일루투스(muilutus|무일루투스fi)"로, 사람을 납치해서 구타한 뒤 차에 실어 소련 국경에 버리는 것이었다. 라푸아 운동에 의해 추방된 많은 핀란드인들은 나중에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는데, 핀란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박해받았지만, 스탈린은 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했다.[17]

1930년 10월 14일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전 대통령 부부가 납치되어 요엔수로 끌려간 스톨베리 납치사건 이후, 라푸아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약화되었다. 온건파가 이탈하고 과격분자만 남게 되면서 운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3. 1. 반공주의 시위 확산

1929년 11월,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라푸아에서 행진을 벌이자, 이에 격분한 핀란드 백군 지지 주민들이 행진 참가자들을 폭행하면서 라푸아 운동이 시작되었다.[13] 초기에는 반공주의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으며, 핀란드 내전의 유산을 강조하며 반공주의를 지지했다.

핀란드 내전 이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반공주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과 고위 군 장교들이 처음에는 라푸아 운동에 동정적이었다. 1929년 11월 말, 핀란드 공산주의 청년동맹은 오스트로보트니아의 라푸아에서 집회와 시위를 조직했는데, 민족주의자들의 시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 루터교, '부르주아' 조국, 핀란드 군대, 만네르하임 장군을 조롱했다".[14] 이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격분하여 폭력적으로 집회를 종식시켰다. 12월 1일에는 반공 집회가 열려 1,000명 이상이 모든 공산주의 활동의 종식을 요구했다.

이후 반공주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1930년 6월 16일에는 3천 명이 오울루에 모여 공산주의 신문 《포흐얀 보이마》의 윤전기와 편집실을 때려부쉈다. 같은 날 바사의 공산주의 언론도 공격받아 파괴되었다. 헬싱키를 향한 "농민 행진"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력시위였다. 7월 7일 1만 2천 명 이상의 시위자가 헬싱키에 도착했고, 그 압박을 받은 정부는 "공화국 수호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 신문들을 불법화했다.[25]

상원 광장에 모인 농민 행진 참가자들


공화국 수호법을 통과시키게 만든 라푸아 운동의 "농민 행진".


좌파 및 노동계의 시위에 대한 방해도 이루어졌고, 대개 폭력적이었다. 라푸아 운동가들에 의해 해산당한 노동계 지역 집회는 400건이 넘는다. 이들이 사용한 흔한 수단은 소위 "무일루투스(''muilutus''fi)"라는 것으로, 사람을 납치해서 두들겨 팬 뒤 차에 실어 소련 국경에 갖다버리는 짓 따위를 했다.[17]

3. 2. 농민 행진과 공화국 수호법



1930년 6월 16일, 오울루에서 3천여 명이 모여 공산주의 신문 《포흐얀 보이마》를 파괴했고, 같은 날 바사의 공산주의 언론도 공격받았다. 헬싱키를 향한 "농민 행진"은 1만 2천 명 이상이 참여한 무력시위였다. 7월 7일 헬싱키에 도착한 시위대의 압력으로 정부는 "공화국 수호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 신문들을 불법화했다.[16]

좌파 및 노동계 시위는 대부분 폭력적으로 방해받았다. 라푸아 운동가들에 의해 해산된 노동계 지역 집회는 400건이 넘는다.[16]

라푸아 운동은 사람을 납치, 구타한 뒤 소련 국경에 버리는 "무일루투스(''muilutus''fi)"를 자주 사용했다. 1930년 10월 14일,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전 대통령 부부가 납치되어 요엔수로 끌려간 사건(스톨베리 납치사건) 이후 대중의 지지는 급격히 하락했다. 온건파가 이탈하며 과격분자들만 남게 되었다.[16]

1930년 6월 4일 바사 폭동 당시 라푸아 운동 지지자들이 바사 법원 앞에서 "적색 장교" 에이노 니에미넨을 구타하는 모습


라푸아 사건 이후, 쿠스타 티투와 아르투리 레이노넨은 "전국 회의"를 소집, 전국에서 약 2천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정부에 의회와 군에서 공산주의자 제거, "핀란드 국민의 도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의 기초를 모독하는" 연설 금지, 핀란드 공산당 활동 중단 등을 요구했다. 전국 각지에서 유사한 회의가 조직되었고, 정부가 행동하지 않으면 "다른 수단"으로 국가를 구하겠다는 요구를 보냈다.[17]

의회는 협회법 수정안은 가결했지만, 언론 자유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이에 1930년 3월 28일 밤, 운동 내 급진주의자 13명이 ''Työn Ääni'' 신문사를 습격해 인쇄기를 파괴했다.[24] 4월 4일, 72명이 공개적으로 책임을 선언했지만, 위르외 니쿨라만 기소되었다. 두 달 후 바사 재판은 폭동으로 변했다. ''Työn Ääni'' 직원 에이노 니에미넨은 "적색 장교"로 비난받으며 구타당했고, 변호사 아서 살로는 라푸아로 납치되었다.[18]

라푸아 운동은 폭력으로 공산주의 활동 중단을 압박했다. 좌파 및 노동자 회의는 종종 폭력적으로 중단되었다. 납치와 구타로 시작되는 ''"무일루투스"'' 후 피해자를 소비에트 연방 국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라푸아 운동에 의해 추방된 많은 핀란드인들은 대숙청 때 "민족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다.[17]

퀴외스티 칼리오 정부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라우리 렐란데르 대통령은 P. E. 스빈후푸드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스빈후푸드는 코솔라 등을 설득, 의회를 통해 공산주의자를 제거하는 계획을 수립했다.[19]

1930년 7월 1일, 정부는 공산주의 법안을 표결에 부치고 사임했다. 스빈후푸드가 총리가 되었지만, 코솔라의 내각 참여와 공산주의 의원 체포는 거부했다. 코솔라는 얄마리 뢰트쾨와 에이노 페칼라를 납치했다. 라푸아 운동은 7월 7일 "농민 행진"을 계획했다. 스빈후푸드의 설득으로 코솔라는 납치자들을 석방했다. 농민 행진에는 1만 2,600명이 헬싱키에 모여 행진했고, 정치인과 장군들이 맞이했다.[20]

언론 자유법 변경은 단순 과반수로 통과되었지만, 공화국 보호법은 6분의 5의 찬성이 필요했다. 사회민주당은 3년 임시 조건으로 법안을 수용, 단순 과반수로 통과 후 다음 의회에서 재표결하기로 했다. 7월 15일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했다.[21]

1930년 가을, 라푸아 운동은 다시 납치와 구타를 자행했다. 코솔라는 독재를 위한 사회 혼란을 목표했지만, 온건 지도자들은 납치를 중단시켰다. 베이뇌 하키라 의회 부의장 납치, 오니 하포넨 살해 등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22]

선거 전, 라푸아 운동은 선거 사기에 연루되었다. 폭력적 평판으로 사회주의 유권자들을 위협, 투표를 방해하고, 공산주의자로 간주되는 유권자들을 선거 명부에서 제외했다.[23]

선거 후 우익 정당은 공산주의 법안 통과에 필요한 과반수를 확보했다. 그러나 1930년 10월 14일, 카를로 유호 스타흘베르그 전 대통령 부부가 납치되어 요엔수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운동에 대한 지지는 무너지고 극단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3. 3. 무일루투스와 폭력 사태

이후 반공주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 6월 16일, 3천 명의 시위대가 오울루에 모여 공산주의 신문 《포흐얀 보이마》의 윤전기와 편집실을 파괴했다. 같은 날 바사의 공산주의 언론도 공격받아 파괴되었다. 헬싱키를 향한 "농민 행진"은 그 자체로 상당한 무력시위였다. 1만 2천 명 이상의 시위대가 7월 7일 헬싱키에 도착했고, 압력을 받은 정부는 "공화국 수호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 신문들을 불법화했다.[16]

좌파 및 노동계 시위에 대한 방해도 이루어졌으며, 대개 폭력적이었다. 라푸아 운동가들에 의해 해산된 노동계 지역 집회는 400건이 넘는다.[16]

이들이 사용한 흔한 수단은 "무일루투스(''muilutus''fi)"라는 것으로, 사람을 납치해서 구타한 뒤 차에 실어 소련 국경에 버리는 짓이었다. 라푸아 운동에 의해 추방된 많은 핀란드인들은 나중에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는데, 핀란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박해받았지만, 스탈린은 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했다.[17]

1930년 10월 14일에는 전 대통령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와 그 아내가 납치되어 요엔수까지 끌려가는 사건(스톨베리 납치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라푸아 운동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약화되었다. 온건 성향의 사람들이 운동을 그만두자 과격분자들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더욱 과격해졌다.

4. 절정과 몰락

라푸아 운동은 폭력을 사용하여 핀란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중단시키도록 정부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좌파 및 노동자 그룹이 개최한 회의는 종종 폭력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들의 일반적인 전술은 ''"무일루투스"'' 또는 ''"퀴디티스"''로, 납치와 구타로 시작하여 피해자를 차에 태워 소비에트 연방 국경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라푸아 운동에 의해 추방된 많은 핀란드인들은 나중에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는데, 핀란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박해받았지만, 스탈린은 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했다.[17]

바사 폭동 이후, 퀴외스티 칼리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라푸아 운동은 공산주의 조직과 신문에 관한 요구 사항을 반복하고 6월 15일을 이행 마감일로 선언했다. 정부는 군이나 경찰을 사용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운동에 동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신 렐란데르 대통령은 핀란드 우익에게 크게 존경받는 전 총리 스빈후푸드에게 운동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스빈후푸드는 코솔라와 다른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의회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도왔다.[19]

1930년 7월 7일, 라푸아 운동은 농민 행진이라는 대규모 무력 시위를 계획했다. 1만 2,600명의 남성이 헬싱키에 모여 도시를 행진하고 연설과 설교를 했으며, 저명한 정치인과 장군들이 그들을 맞이했다.[20]

그러나 1930년 10월, 라푸아 운동 참가자들은 핀란드 초대 대통령인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와 그의 부인을 납치했다. 스톨베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라푸아 운동의 과격함을 비판했을 뿐이었지만, 이들은 스톨베리의 자유주의적·의회 민주주의적 사상에 반발하여 그를 소비에트 연방 영내로 버려둘 계획이었다. 납치가 실패로 끝나고 구출된 스톨베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라푸아 운동은 스빈후푸드, 만네르헤임 등의 지지를 잃고 세력이 약해지며 정부와 의회를 적대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1년, 스웨덴어 계열 풍자 잡지 《가름》(Garm)에는 개명군주이자 핀란드의 자치를 기본법으로 보장한 알렉산드르 2세의 흉상을 끌어내리려는 민중의 모습을 그린 풍자화가 실렸다.[26]

1932년, 공산당 불법화에 성공한 라푸아 운동은 더 나아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불법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공산당과는 지지층도 달랐고, 의회에서 최대 정당이었던 만큼, 이 요구는 의회 정치의 부정으로 받아들여졌다.

4. 1. 맨챌래 반란

1932년 2월, 맨챌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원 모임에 무장한 라푸아 운동가들이 난입해 폭력적으로 모임을 해산시켰다. 이후 사태는 점점 커져 쿠데타 시도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를 맨챌래 반란이라고 한다. 쿠데타 지도자는 전 핀란드 육군 참모장 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 대장이었다. 그러나 발레니우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규군과 백위대 대부분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정부에 충성했다.[28]

많은 역사학자들은 쿠데타가 실패한 원인이 계획 자체가 엉성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애초에 지역 조직에서의 충돌이 격화되어 반란으로 비화한 것이고, 라푸아 운동 전국조직은 그 다음에 전면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28] 스빈후부드 대통령이 반란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자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28] 이후 재판을 거쳐 라푸아 운동은 1932년 11월 21일 활동이 금지되었고, 발레니우스를 비롯한 간부 50여 명은 감옥에 갔다.[28] 아이러니하게도 라푸아 운동이 금지당한 근거 조항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으라고 입법을 강요했던 공화국 수호법이었다.[28]

4. 2. 스빈후부드의 진압

1932년 2월, 맨챌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원 모임에 무장한 라푸아 운동가들이 난입해 폭력적으로 모임을 해산시켰다. 이후 사태는 점점 커져 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가 이끈 맨챌래 반란으로 알려진 쿠데타 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발레니우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규군과 백위대 대부분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정부에 충성했다.[28] 많은 역사학자들은 쿠데타가 실패한 원인이 계획 자체가 엉성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애초에 지역 조직에서의 충돌이 격화되어 반란으로 비화한 것이고 라푸아 운동 전국조직은 그 다음에 전면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28] 스빈후부드 대통령이 반란군들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자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28] 이후 재판을 거쳐 라푸아 운동은 1932년 11월 21일 활동이 금지되었고 발레니우스를 비롯한 간부 50여 명은 감옥에 갔다.[28] 아이러니하게도 라푸아 운동이 금지당한 근거 조항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으라고 입법을 강요했던 공화국 수호법이었다.[28]

5. 지도부

라푸아 운동의 지도자는 비흐토리 코솔라였다. 그는 17세기 농민 반란 운동 지도자 클라우스 플레밍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실생활에서는 알코올 중독을 앓았다.[1]

5. 1. 비흐토리 코솔라

라푸아 운동의 지도자는 17세기 농민 반란 운동 지도자 클라우스 플레밍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비흐토리 코솔라였다.[1]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핀란드의 파랑과 파시즘의 검정을 섞은 완장을 차는 등 그를 모방했다고 여겨진다.[1]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총리감인지 의심받았다고 한다.[1]

6. 영향

라푸아 운동이 금지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국 인민 운동이 결성되었다. 전신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 또한 민족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이었다. 정치적 성공은 제한적이었으며, 계속 전쟁 이후인 1944년 소련의 명령에 따라 금지되었다.

6. 1. 소련의 핀란드 인식과 겨울 전쟁

볼셰비키 지도부는 라푸아 운동을 구 차르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집단으로 여기는 오래된 오해를 가지고 핀란드를 위협적으로 인식했고, 소련 민간인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도록 부채질했다. 소련인들의 핀란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겨울전쟁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9] 차르 체제 당시 수도였으며 여전히 대도시였던 레닌그라드는 핀-소 국경에서 지척이었기에 실질적 위협이 존재했다. 18세기에도 핀란드 국경을 통해 수도 앞전까지 적군이 들이닥쳤었고, 핀란드가 독립한 직후인 1918년에도 핀란드 내전을 틈타 독일군이 핀란드에 상륙했었다.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을 맺은 것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러시아 언론들은 라푸아 운동에 의해 소련 국경에 버려진 피해자들과의 면담을 기사화하며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테러리즘의 실체라고 선전함으로써 이러한 공포를 증폭시켰다.[29] 그러나 라푸아 운동의 극우 민족주의로 인해 소련으로 쫓겨난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앞서 핀란드 내전에 패배하고 먼저 소련으로 망명했던 적핀란드 인사들과 함께 대숙청 때 핀란드 민족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29]

6. 2. 대숙청

한편 소련에도 라푸아 운동에 대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소련은 핀란드를 위협하던 오래된 오해와 더불어 그들을 구 차르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집단으로 여겼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소련 민간인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도록 부채질했다. 이러한 소련인들의 핀란드에 대한 인식은 겨울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차르 체제 당시 수도였으며 여전히 대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핀-소 국경에서 지척이라는 점도 실질적 위협으로 존재했다. 18세기에도 핀란드 국경을 통해 적군이 수도 앞까지 들이닥쳤었고, 1918년 핀란드 독립 직후 핀란드 내전을 틈타 독일군이 핀란드에 상륙하기도 했다.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을 맺은 것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러시아 언론들은 라푸아 운동에 의해 소련 국경에 버려진 피해자들과의 면담을 기사화하며,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테러리즘의 실체라고 선전함으로써 이러한 공포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라푸아 운동의 극우 민족주의로 인해 소련으로 쫓겨난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앞서 핀란드 내전에 패배하고 먼저 소련으로 망명했던 적핀란드 인사들과 함께 대숙청 때 핀란드 민족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다.[29]

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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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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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간행물 Iltalehti Teema Historia: Lapuan liike Alma Media
[29] 간행물 Iltalehti Teema Historia: Lapuan liike Alma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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