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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에 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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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와에 쵸코는 오키나와현 출신의 정치인으로, 오키나와 시의 시장, 류큐 입법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오키나와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토지련 초대 회장으로서 미군 기지 토지 매입 계획에 반대했다. 입법원 의원, 오키나와 시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으나, 미군과의 관계, 의원 매수 의혹 등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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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에 쵸코
기본 정보
쿠와에 쵸코
원어 이름쿠와에 쵸코 (桑江 朝幸)
로마자 표기Kuwae Chōkō
출생일1918년 2월 3일
출생지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 고에촌
사망일1993년 12월 16일
사망지오키나와현 오키나와시
출신 학교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
친족 (정치인)쿠와에 조치오 (자)
정치 경력
정당(소속 정당 정보 없음)
당선 횟수1회
임기 시작1948년
임기 종료1950년
당선 횟수4회
임기 시작1960년
임기 종료1972년
당선 횟수3회
임기 시작1978년
임기 종료1990년

2. 생애

1918년 오키나와현에서 태어난 쿠와에 쵸코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1938년 징병되어 중일 전쟁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참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총기 오발 사고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1] 종전 후에는 오키나와인 연맹 활동에 참여하며 오키나와 출신 귀환자들을 도왔다.

1946년 고향으로 돌아온 쿠와에는 오키나와 민주 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1948년 고에쿠촌 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다.[1][4] 1953년 오키나와 시정촌 군용지 등 지주 연합회(토지 연)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미군 기지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1]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무기한 사용을 발표하자, 토지 연은 매입 계획 반대를 내걸고 류큐 정부와 함께 미국 본국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4] 쿠와에는 토지 연 회장으로서 두 차례 방미 사절단에 참여하여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1960년 입법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 1968년까지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오키나와 자유민주당 당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오키나와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1] 1966년 미국 상원이 오키나와에 대한 강화 전 보상 지불 법안을 가결하자, 토지 연맹 회장직을 사임했다.[1]

1978년 오키나와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쿠와에는 3선(1978~1990) 시장을 역임하며 제42회 국민체육대회 가을 메인 경기장 유치, 오키나와 시청 종합 청사 건설, 오키나와 직업 능력 개발 대학교 유치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3] 1987년 발표한 '동부 해안 지구 매립 구상'은 가데나 비행장과 가데나 탄약고 지구로 인해 잠식된 시의 개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239.5ha 규모의 대규모 매립 계획이었으나, 이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3]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18년(다이쇼 7년) 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 고에쿠 촌(현: 오키나와시)에서 태어났다[1]。아버지는 오기미촌 출신의 목수(오기미 대목)였다[1]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가 학비를 낼 수 없다는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2], 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현: 오키나와현립 북부 농림고등학교)에 진학했다[2]。1936년(쇼와 11년)에 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나하 오로쿠의 잠업 시험장 기술원 양성소[2], 국립 구마모토 잠업 시험소[2],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의 잠업 시험소 연습생을 거쳐[2], 나카이 잠종 제조소에 취직했다[3]

2. 2. 군 복무와 종전

1938년 징병 검사에 합격하여 근위보병 제3연대에 입대했다.[1] 1940년 근위수색연대로 소속이 변경되었다.[2] 중일 전쟁으로 광둥성 중산현에 파병된 부대에 합류했다.[3]

광둥성 작전 종료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동원된 부대를 따라 사이공(현재의 호찌민시)에 상륙했다.[4] 부대는 사이공에서 프놈펜, 따께오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총기 오발 사고로 왼손에 중상을 입어 사가미하라 육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퇴원 후 근위사단 병기부 이타바시 창고에서 근무했다. 1944년 오키나와에 있는 약혼녀와 결혼하고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집을 빌렸다.

1945년 본토 공습이 심해지면서 아내를 피난시켰다. 이타바시 창고도 공습 피해를 입어, 남은 물자를 사이타마현 미나미사이타마군 닛쇼 촌(현: 시라오카시) 등으로 옮기는 작업에 참여했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은 부대 숙소였던 사이타마현 닛쇼 촌의 절 경내에서 들었다. 이후 부대는 해산하고 군에서 제대한 뒤, 사이타마현 우라와시(현: 사이타마시)의 복원성 우라와 지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말에 복원성이 정리 축소되면서 오미야시에 있던 가타쿠라 공업의 임시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도쿄나 사이타마에서 오키나와인 연맹 활동에 참여하여 해외에서 온 오키나와 출신 귀환자들을 돕는 활동을 했다. 이때 오키나와 출신인 야마시로 젠코를 알게 되었다.

2. 3. 오키나와 귀향과 정치 입문

1946년 12월, 나고야항에서 배를 타고 오키나와로 돌아갔다.[1] 고에쿠촌으로 돌아가 고에쿠촌 청년회를 조직했다.[2] 야마시로 젠코와 함께 오키나와 민주 동맹 결당에 참여했다.[3]

1948년, 고에쿠촌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4] 민주 동맹 기관지인 『자유 오키나와 신문』을 발간하여 민정부 비판을 게재했다. 같은 해 8월 20일, 야마시로 젠코와 함께 체포되어 23일간 치넨 경찰서에 유치되었다.

2. 4. 토지련 초대 회장

1953년, 오기미 촌 촌장이었던 다이쿠마와리 조세이 등의 의향으로 입법원 토지 위원 의원과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오키나와 시정촌 군용지 등 지주 연합회(현 오키나와현 군용지 등 지주회 연합회, 이후 '토지 연')가 발족되었고, 쿠와에 쵸코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1]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신년 일반 교서 연설에서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를 무기한 사용한다"고 발언했다. 3월 18일, 오키나와 타임스는 "미군 당국이 오키나와에서 45000acre의 토지를 매입하여 3,500 가족의 주민을 야에야마로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획득할 것이다"라는 워싱턴 전보 정보를 보도했다.[4] 이 매입 계획에 대해 류큐 정부 행정 수석이었던 히가 슈헤이는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4]

이에 토지 연은 매입 계획 반대를 내걸었다. 류큐 정부는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워싱턴에 시설단을 보내 미국 본국과 직접 교섭하게 되었다. 사절단은 행정 수석 히가 슈헤이를 단장으로, 입법원 의원에서는 오야마 조조, 토지 연 회장이었던 쿠와에 쵸코도 참가했다.

사절단 귀국 후, 미군은 군용지 접수를 통보해 왔다. 쿠와에 쵸코는 토지 연 회장으로서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제2차 방미 사절단이 파견되어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본국 정부와 다시 직접 교섭하게 되었다. 대표는 토마였다. 쿠와에 쵸코도 토지 연 회장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사절단은 1958년 6월 10일, 나하를 출발했다.

2. 5. 입법원 의원 시절

1960년, 제5회 입법원 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어[1] 오키나와 자유민주당의 당 조직위원장에 취임했다. 1962년, 입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 1965년, 입법원 의원에 3선되었다.

1966년 10월 7일, 미국 상원은 미국 정부가 오키나와에 강화 전 보상으로 21040000USD를 지불하는 법안을 가결했다.[1]

강화 전 보상 지불 성립을 계기로 토지 연맹 회장을 사임했다. 1968년, 입법원 의원에 4선되어 본토 복귀를 맞이했다.[1]

2. 6. 오키나와 시장 시절

1978년, 자유민주당 오키나와현 연합의 설득으로 오키나와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전 코자 시장 오야마 쵸조의 지지를 얻어 재선을 노리던 마치다 무네노리를 꺾고 보수 계열로는 처음으로 오키나와 시장에 당선되었다.[3] 그러나 시의회는 쿠와에 지지 보수계 의원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소수 여당이었고,[3] 시 직원 노동조합은 쿠와에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며 대립했다.[3] 노사 협의를 거듭하여 1981년 10월, 노사 양측이 모든 쟁송 사건을 철회하는 것으로 합의했다.[3]

1982년 4월, 오키나와 시장 선거에서 재선, 1986년 5월에는 3선에 성공했다.

1987년 3월, 아와세 갯벌 매립을 포함하는 '동부 해안 지구 매립 구상'을 발표했다.[3] 서쪽에는 가데나 비행장, 북쪽에는 가데나 탄약고 지구에 토지가 잠식되어 시의 개발 공간을 아와세 해안의 확장으로 확보하려 했으며, 초기에는 239.5ha에 달하는 광대한 매립 계획이었고, 이후 시 안팎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1990년, 4선에 도전했으나 혁신파의 추천을 받은 신카와 히데키요에게 패했다. 쿠와에는 3기 12년간 오키나와 시장을 역임했으며, 시장 시절 주요 업적은 제42회 국민체육대회 가을 메인 경기장 유치, 오키나와 시청 종합 청사 건설,[3] 오키나와 직업 능력 개발 대학교 유치이다.[3]

3. 정치 활동과 업적

쿠와에 쵸코는 오키나와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1951년 8월, 쿠와에는 오키나와 타임스에 군용지 사용료 지불 등을 미군 민정부나 군도 정부에 진정하기 위한 서명 호소 광고를 자비로 게재했고,[3][4] 11월에는 군용지 소유자 대표 회의 개최를 위한 공고 광고를 냈다.[3]

1953년, 오키나와 시정촌 군용지 등 지주 연합회(현 오키나와현 군용지 등 지주회 연합회, 이하 '토지 연')가 발족되면서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3]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무기한 사용 발언과 미군 당국의 토지 매입 계획 보도에 대해, 토지 연은 매입 계획 반대를 내걸었다. 류큐 정부는 워싱턴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미국 본국과 직접 교섭을 진행했고, 쿠와에도 토지연 회장 자격으로 참여했다.

사절단 귀국 후 미군의 군용지 접수 통보에도 쿠와에는 토지 연 회장으로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제2차 방미 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쿠와에는 다시 토지 연 회장으로 사절단에 합류하여 1958년 6월 10일 나하를 출발했다.

1966년 10월 7일, 미국 상원은 오키나와에 강화 전 보상으로 2104만달러를 지불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쿠와에는 이를 계기로 토지 연맹 회장을 사임했다.

3. 1. 오키나와 군용지 문제 해결 노력

1951년 8월, 쿠와에 쵸코는 자비로 오키나와 타임스에 군용지 사용료 지불 등을 미군 민정부나 군도 정부에 진정하기 위한 서명 호소 광고를 게재했다.[3][4] 11월에는 군용지 소유자 대표 회의 개최를 위한 공고 광고를 냈다.[3]

1953년, 오키나와 시정촌 군용지 등 지주 연합회(현 오키나와현 군용지 등 지주회 연합회, 이하 '토지 연')가 발족되면서 쿠와에 쵸코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3]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신년 일반 교서 연설에서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를 무기한 사용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오키나와 타임스는 미군 당국이 오키나와에서 45,000 에이커(약 20000ha)의 토지를 매입하여 3,500 가족의 주민을 야에야마로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획득할 것이라는 워싱턴 전보 정보를 보도했다. 이 매입 계획에 대해 류큐 정부 행정 수석이었던 히가 슈헤이는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토지 연은 매입 계획 반대를 내걸었다. 류큐 정부는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워싱턴에 시설단을 보내 미국 본국과 직접 교섭하게 되었다. 사절단은 행정 수석 히가 슈헤이를 단장으로 하고, 입법원 의원 오야마 조조, 토지 연 회장 쿠와에 쵸코도 참가했다.

사절단 귀국 후, 미군은 군용지 접수를 통보해 왔다. 쿠와에 쵸코는 토지 연 회장으로서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이후 제2차 방미 사절단이 파견되어 군용지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본국 정부와 다시 직접 교섭하게 되었다. 대표는 토마였다. 쿠와에 쵸코도 토지 연 회장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사절단은 1958년 6월 10일, 나하를 출발했다.

1966년 10월 7일, 미국 상원은 미국 정부가 오키나와에 강화 전 보상으로 2104만달러를 지불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강화 전 보상 지불 성립을 계기로 쿠와에 쵸코는 토지 연맹 회장을 사임했다.

4. 사상과 신념

桑江良光|쿠와에 쵸코일본어는 토지 소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자서전 《땅이 있으면 내일이 있다》의 후기에서 땅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양식"이라고 표현했다.[1] 특히 오키나와와 같이 작은 섬에서는 땅을 잃는 것이 곧 생존의 기반을 잃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1]

4. 1. 토지 소유의 중요성

桑江良光|쿠와에 쵸코일본어는 자서전 《땅이 있으면 내일이 있다》의 후기에서 토지 소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 그는 땅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양식"이라고 표현하며, 오키나와와 같이 작은 섬에서는 땅을 잃는 것이 곧 생존의 기반을 잃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1]

桑江良光|쿠와에 쵸코일본어는 따뜻한 오키나와에서는 땅만 있으면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고, 땅을 딛고 전진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1] 그는 전쟁 전 자산가들이 토지를 팔아 어려움을 겪는 반면, 작은 땅이라도 소유했던 농부들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사례를 통해 "땅이 있으면 만물이 거기에서 생존하고, 내일을 향해 거기에서 번영한다"라는 신념을 강조했다.[1]

5. 논란과 비판

쿠와에 쵸코는 미군과의 관계, 의원 매수 의혹 등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쿠와에는 미국 민정부에 코자시 행정에 대한 의견을 자주 제시했으며, 이는 공문서에 기록되어 있다.[3] 특히, 쿠와에와 대립했던 오야마 조조 코자 시장에 대해 미국 민정부는 오야마의 "반미" 언행을 감시하는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4]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미국 민정부는 보수 정치인인 쿠와에의 입장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3] 쿠와에는 특정 업자가 반미 인물이라며 사업 철회를 요청했고, 미국 민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육군에 제안한 사례도 있다.[3]

오키나와 타임스는 쿠와에 쵸코의 이름이 적힌 봉투에 5USD가 들어있는 사진을 보도하며 의원 매수 의혹을 제기했다.[1] 쿠와에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으며,[1] 오키나와 타임스 측은 쿠와에가 미국 민정부 고등 변무관에게 사진 촬영 기자를 강제 송환하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다.[1]

5. 1. 미군과의 관계

쿠와에는 미국 민정부에 코자시 행정에 대한 진언과 요청을 자주 했으며, 이는 공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3] 쿠와에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오야마 조조 코자 시장에 대해, 미국 민정부 외교국은 오야마의 "반미" 언행을 보고하는 문서를 여러 개 작성하여 그의 언행을 감시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민정부는 보수 계열의 유력 정치인으로서 쿠와에의 입장을 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3]

예를 들어, 쿠와에는 어떤 A사인 업자가 반미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A사인 철회를 요청했고, 미국 민정부 외교국도 육군 참모에게 A사인 취소를 제안했다.[3]

쿠와에와 오야마 조조는 같은 고에쿠 촌 출신으로, 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근위사단에 입영한 것까지 경력이 일치한다. 그러나 고에쿠 촌 촌의회 의장 선출 문제로 갈등이 생겼고, 1950년 군도 의회 선거에서 오야마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며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1][2]

1974년, 오키나와시로의 합병을 계기로 코자 시장을 퇴임한 오야마는 후임으로 마치다 무네노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1978년 선거에서는 마치다의 시정 운영이 방만한 재정을 초래하고 나카구스쿠만 항만 설비 개발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쿠와에 지지로 돌아섰다.

1954년, 주일 미군 기지의 토지 임대료를 지주로부터 매입하려는 계획이 밝혀졌다. 류큐 정부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미국 정부와 직접 교섭을 진행했는데, 쿠와에는 자서전과 토지 연합의 공식 문서에서 사절단이 "전원 토지 임대료 일괄 지급 반대"로 통일되어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오야마는 이를 부정하며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찬성했다"고 주장했다. 1956년 3월 제3회 입법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야마는 쿠와에가 "토지 임대료 일괄 지급"에 찬성했다고 폭로했고, 이 선거에서 오야마는 쿠와에를 꺾고 당선되었다.

5. 2. 의원 매수 의혹

오키나와 타임스에 쿠와에 쵸코의 이름이 적힌 봉투에 5USD가 들어있는 사진이 게재되어 의원 매수 의혹이 보도되었다.[1] 쿠와에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다.[1] 오키나와 타임스 측 주장에 따르면, 쿠와에가 미국 민정부의 고등 변무관에게 이 사진을 촬영한 아마미 군도 출신 기자를 강제 송환하라고 의뢰했다고 한다.[1]

6. 평가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평가' 섹션 작성이 불가합니다.)

참조

[1] 서적 全国歴代知事・市長総覧 日外アソシエーツ 2022
[2] 간행물 2015年沖縄市市勢要覧 沖縄市 2015-04-01
[3] 웹사이트 これまでの経緯 {{!}} 東部海浜開発事業について {{!}} 東部海浜開発計画 {{!}} 沖縄市の情報 {{!}} 沖縄市役所 https://www.city.oki[...] 2021-02-20
[4] 서적 全国歴代知事・市長総覧 日外アソシエー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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