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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소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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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라소스 전투는 804년 동로마 제국 황제 니케포로스 1세와 아바스 왕조 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니케포로스 1세는 조공을 거부하고 아바스 왕조에 대항하려 했으나, 크라소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 군대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전투 후, 아바스 왕조는 조공을 받고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곧 반격을 시작하여 아바스 왕조 영토를 공격했고, 아바스 왕조는 806년 대규모 침공으로 보복했다. 이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양측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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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소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아랍-비잔티움 전쟁
날짜804년 8월/9월
장소프리기아 크라소스, 현대의 튀르키예
결과아바스 왕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아바스 왕조
교전 2비잔티움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하룬 알 라시드
지휘관 1-1이브라힘 이븐 지브릴
지휘관 2니케포로스 1세

2. 배경

802년 10월, 아테네의 이레네 황후(재위 797년–802년)가 폐위되고 니케포로스 1세가 즉위하면서 아랍-비잔틴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레네는 하룬 알 라시드의 첫 대규모 원정 이후 3년간의 휴전을 위해 합의된 조건과 동일하게, 798년에 하룬과 연간 조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체결했었다.[1][2] 그러나 니케포로스 1세는 이전의 조공 관계를 파기하고 더욱 호전적인 정책을 펼쳤다.[3]

2. 1. 니케포로스 1세의 대 아바스 정책

아테네의 이레네 (재위 797년–802년)가 802년 10월 쿠데타로 폐위되고, 니케포로스 1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오랜 아랍-비잔틴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호전적인 황제였던 니케포로스 1세는 이레네가 아랍인과 맺었던 조약을 파기하고, 공납금 지불을 중단함으로써 제국의 국고를 채우려 했다.[3][11]

당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대응하여 즉시 토벌군을 아들인 알 카심에게 주어 소아시아를 약탈하게 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는 제국 영내의 소아시아에서 장군 바르다네스 투르코스 등의 소아시아 군단의 반란 때문에 반격할 여유가 없었다. 바르다네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니케포로스 1세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가 직접 이끄는 두 번째 침공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징집하여 진군을 시작했다. 칼리파군이 국경 지대를 휩쓸고 다닐 무렵, 양군은 소아시아에서 약 2개월에 걸쳐 대치했지만, 전투에는 이르지 않았다. 니케포로스와 하룬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양자는 결국 일단 철수하여,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미납된 헌납금을 일괄적으로 칼리파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강화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4][12][13]

2. 2. 하룬 알 라시드의 대응

이리니가 802년 10월 쿠데타로 폐위되고, 이어서 니케포로스 1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오랜 아랍-비잔틴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된다. 호전적인 황제였던 니케포로스 1세는 이리니가 아랍인과 맺었던 조약을 파기하고, 공납금 지불을 중단함으로써 제국의 국고를 유지했다.[11] 당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대응하여 즉시 토벌군을 아들인 알 카심에게 주어 소아시아를 약탈하게 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는 제국 영내의 소아시아에서 장군 Bardanes Tourkos|바르다네스 투르코스영어 등 소아시아 군단의 반란 때문에 반격할 여유가 없었다. 바르다네스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니케포로스 1세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가 직접 이끄는 두 번째 침공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징집하여 진군을 시작했다. 칼리파군이 국경 지대를 휩쓸고 다닐 무렵, 양군은 소아시아에서 약 2개월에 걸쳐 대치했지만, 전투에는 이르지 않았다. 니케포로스와 하룬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양자는 결국 일단 철수하여,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미납된 헌납금을 일괄적으로 칼리파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강화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2][13]

3. 크라소스 전투 (804년)

804년 8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는 장군 이브라힘 이븐 지브릴을 보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아바스 군은 킬리키아 관문을 넘어 소아시아를 약탈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이에 대응하려 했으나, 음모로 인해 철수해야 했다. 타바리와 테오파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라소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크게 패배하고 황제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장교들의 용기로 구출되었다.

3. 1. 전투의 경과

804년 8월, 하룬은 장군 이브라힘 이븐 지브릴에게 명하여 다시 동로마 제국 영토를 약탈하게 했다. 아바스 왕조 군대는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제국 영내로 침입하여 로마군의 반격을 받지 않고 약탈을 자행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이에 맞서려 했으나, 황제의 배후에서 다시 음모가 발각되어 이에 대처하기 위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워런 트레드골드는 제국 내부의 정치적 음모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수도로 철수하는 도중 니케포로스 1세의 군단에 아바스 왕조 군대가 크라소스(현재의 프리기아)에서 기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크라소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도에 인접한 평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바리에 따르면, 동로마 측은 40,700명의 군대와 4,000마리의 병참 동물을 잃었고, 황제 자신은 세 번이나 베여 부상을 입었다.[1] 동로마 연대기 편찬자 테오파네스는 "황제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니케포로스 자신도 죽을 뻔했으나, 용감한 호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1]

3. 2. 전투 결과에 대한 상반된 기록

알 타바리에 따르면, 비잔티움 제국군은 40,700명의 병력과 4,000마리의 짐승을 잃었고, 황제 니케포로스 1세는 세 번이나 부상을 입었다.[1] 고백자 테오파네스는 황실 군대가 많은 병력을 잃었고 니케포로스 1세 자신이 거의 죽을 뻔했지만, 그의 장교들의 용감함 덕분에 구출되었다고 기록했다.[1]

4. 전투의 여파

호라산 문제로 하룬 알라시드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포로 교환을 진행했다. 804년 겨울, 킬리키아의 라모스 강에서 약 3,700명의 무슬림이 비잔틴 포로와 교환되었다.[1][6]

이후 하룬은 806년 침공으로 니케포로스를 협상에 응하게 했으나,[8] 니케포로스는 곧 협정을 어기고 807년 아바스 왕조의 원정을 격퇴했다.[9] 호라산에서 문제가 다시 발생하자 808년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비잔틴 국경 지대가 보존되었고, 칼리프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 중단되었다.[10]

4. 1. 니케포로스 1세의 반격

하룬 알라시드호라산 문제에 집중하면서 조공을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고,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킬리키아의 라모스 강에서 겨울 동안 약 3,700명의 무슬림이 비잔틴 포로와 교환되었다.[1][6] 그러나 하룬이 호라산으로 떠나자, 니케포로스는 이 틈을 타 사프사프, 테바사, 앙카라의 파괴된 성벽을 재건하였다. 805년 여름, 니케포로스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비잔틴 군대를 이끌고 수구르를 침공하여 킬리키아의 아랍 변경 지역을 공격했다. 비잔틴 군대는 약탈과 포로 획득을 일삼았으며, 타르수스의 아바스 왕조 요새까지 점령하였다. 이와 동시에 다른 비잔틴 군대는 상 메소포타미아의 ''수구르''를 습격하여 멜리테네 요새를 포위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 한편, 키프로스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사주를 받은 현지 아랍 수비대의 반란이 일어났다.[1][7]

4. 2. 계속되는 분쟁

호라산 문제에 집중하던 하룬 알라시드는 조공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맺었다. 포로 교환이 이루어져 두 제국의 국경인 킬리키아의 라모스 강에서 겨울 동안 진행되었는데, 약 3,700명의 무슬림이 이전 몇 년 동안 사로잡힌 비잔틴인과 교환되었다.[1][6]

그러나 하룬이 호라산에 가 있는 동안 니케포로스는 사프사프, 테바사, 앙카라의 파괴된 성벽을 재건했다. 이듬해 여름, 그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비잔틴의 습격을 감행하여 킬리키아의 아랍 변경 지역(''수구르'')으로 쳐들어갔다. 비잔틴 군대는 진격하면서 약탈하고 포로를 잡았으며, 심지어 주요 타르수스의 아바스 왕조 요새까지 점령했다. 동시에 또 다른 비잔틴 군대는 상 메소포타미아의 ''수구르''를 습격하여 멜리테네 요새를 포위했으나 실패했으며, 키프로스에서는 비잔틴이 사주한 현지 아랍 수비대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었다.[1][7]

하룬은 806년 대규모 침공으로 보복했고, 이로 인해 니케포로스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8] 비잔틴 통치자는 곧 협정을 어기고 807년에 그에게 파견된 아바스 왕조의 원정을 물리쳤다.[9] 호라산에서 문제가 재발하자, 808년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비잔틴 국경 지대가 보존되었고 칼리프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 중단되었다.[10]

참조

[1]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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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arvnb
[4] harvnb
[5]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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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harvnb
[7]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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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harvnb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harvnb
[20] harvnb
[21]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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