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 스테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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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쿠바의 권투 선수로,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하며 아마추어 복싱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2년, 1976년, 1980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74년, 1978년, 1986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는 프로 전향 제안을 거절하고 아마추어 선수로 남았으며, 은퇴 후에는 스포츠 코치 및 관계자로 활동했다. 1987년 은퇴 후 2012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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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 스테벤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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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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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테오필로 스테벤손 로렌스 |
애칭 | 피롤로 |
체급 | 헤비급 |
신장 | 196cm (6 ft 5 in) |
팔 길이 | 198cm (78 in) |
출생일 | 1952년 3월 29일 |
출생지 | 라스투나스 주 푸에르토파드레 |
사망일 | 2012년 6월 11일 |
사망지 | 아바나 |
스타일 | 오소독스 |
총 경기 수 | 332 |
승리 | 302 |
패배 | 22 |
무승부 | 8 |
올림픽 메달 | |
올림픽 게임 | 금메달 3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기타 메달 | |
친선 경기 대회 | 금메달 1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세계 선수권 대회 | 금메달 3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팬아메리칸 게임 | 금메달 2개, 은메달 0개, 동메달 1개 |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경기 대회 | 금메달 2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중앙아메리카 선수권 대회 | 금메달 6개, 은메달 0개, 동메달 0개 |
총 메달 수 | 금메달 17개, 은메달 0개, 동메달 1개 |
올림픽 상세 정보 | |
1972 뮌헨 | 헤비급 금메달 |
1976 몬트리올 | 헤비급 금메달 |
1980 모스크바 | 헤비급 금메달 |
친선 경기 대회 상세 정보 | |
1984 하바나 | 슈퍼 헤비급 금메달 |
세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상세 정보 | |
1974 하바나 | 헤비급 금메달 |
1978 베오그라드 | 헤비급 금메달 |
1986 리노 | 슈퍼 헤비급 금메달 |
팬아메리칸 게임 상세 정보 | |
1975 멕시코 시티 | 헤비급 금메달 |
1979 산후안 | 헤비급 금메달 |
1971 칼리 | 헤비급 동메달 |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경기 대회 상세 정보 | |
1974 산토도밍고 | 헤비급 금메달 |
1982 하바나 | 슈퍼 헤비급 금메달 |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선수권 대회 상세 정보 | |
1970 하바나 | 헤비급 금메달 |
1971 산후안 | 헤비급 금메달 |
1972 산호세 | 헤비급 금메달 |
1973 멕시코 시티 | 헤비급 금메달 |
1974 카라카스 | 헤비급 금메달 |
1977 파나마 시티 | 헤비급 금메달 |
2. 어린 시절
테오필로 스테벤손 로렌스는 푸에르토 파드레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테오필로 스테벤손 패터슨은 세인트 빈센트에서 이민 온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돌로레스 로렌스는 토착 쿠바인이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영국어 사용의 세인트 키츠 섬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테오필로 시니어는 1923년 쿠바에 도착하여,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일을 하다가 돌로레스와 함께 카마구에이에 정착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적은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영어 레슨을 했다. 테오필로 시니어는 체격이 컸기 때문에, 지역 트레이너들의 권유로 복싱을 시작하여 일곱 번의 경기를 치렀지만, 젊은 선수들에게 제공되는 부패한 지불 구조에 실망했다.[3]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후보이자 197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자신을 꺾었던 미국의 드웨인 보빅을 3라운드 RSC로 물리치며 복싱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페터 후싱(서독)을 2라운드 TKO로 가볍게 이기고 결승에 진출, 루마니아의 이온 알렉세가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 쿠바 복싱팀은 올림픽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며 아마추어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테오필로 주니어는 산만했지만 영리한 아이였고, 9살 때 아버지의 단골이었던 임시 야외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하게 되었다.[3] 전 국가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존 헤레라의 지도 아래, 테오필로 주니어는 훨씬 경험이 많은 복서들과 싸우며 경력을 시작했지만, 헤레라에 따르면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스포츠에 대한 그의 참여가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스테벤손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어머니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결국 테오필로 시니어가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그녀는 격노했지만, 아들이 아버지와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동의했다.[3]
3. 복싱 경력
197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3명의 상대 선수를 총 7분 22초 만에 꺾고 결승에 진출, 루마니아의 미르세아 시몬을 KO로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80년 하계 올림픽 준결승에서는 헝가리의 레바이 이스트반의 회피적인 전술에 고전했지만, 결국 판정승을 거두었다. 결승에서는 소련의 표트르 자예프를 꺾고 판정승하며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써 스테벤손은 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스테벤손은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올림픽 4연속 우승을 달성할 수도 있었지만, 쿠바가 소련의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27][1]
8세 무렵 복싱을 시작하여, 1970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성인이 된 스테벤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너무 강해서 대전 중에 기권한 복서도 있었다[25]. 그의 패배는 데뷔 직후와 은퇴 직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올림픽 출전 시 이길 상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3. 1. 초기 경력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쿠바 라스투나스주 푸에르토파드레에서 태어났다. 스테벤손의 아버지는 세인트빈센트섬에서 이주해 왔고 외조부는 세인트키츠섬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8세 무렵 복싱을 시작하여, 1970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25]
젊은 스테벤손은 1960년대 중반 헤레라의 지도 아래 계속 발전하여 주니어 타이틀을 획득하고 아바나에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 그의 승리는 쿠바의 새롭게 시행된 국영 스포츠 시스템의 수석 코치인 안드레이 체르보넨코의 관심을 끌었다. 1962년부터 정부 결의안 83-A에 의해 섬 전체에서 프로 스포츠가 금지되었고, 모든 권투 활동은 정부가 후원하는 국가 권투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4] 은퇴한 권투 선수이기도 한 체르보넨코는 소련에서 파견되어 아바나의 낡은 체육관에 쿠바의 ''Escuela de Boxeo'' (권투 학교)를 설립했고, 스테벤손의 성장을 옹호하기 시작했다.[5]
스테벤손의 시니어 권투 경력은 17세에 경험 많은 헤비급 선수인 가브리엘 가르시아와의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좌절에도 불구하고 스테벤손은 난시오 카리요와 후안 페레즈, 쿠바의 이 체급 최고의 권투 선수 두 명에게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며 1970년 중앙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권투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3승 후 결승에서 패하며, 스테벤손은 쿠바 최고의 헤비급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체육관으로 돌아온 체르보넨코와 쿠바의 선도적인 권투 코치인 알시데스 사가라는 스테벤손의 주먹질을 연마했고, 이는 그의 궁극적인 무기가 되었으며, 쿠바 선수가 놀라운 베를린 관중 앞에서 동독의 베른트 안더스를 쉽게 꺾었을 때 그 효과가 나타났다. 이 승리는 아마추어 권투계 전체가 스테벤손을 진지한 헤비급 경쟁자로 주목하게 만들었다.[6]
성인이 된 스테벤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너무 강해서 대전 중에 기권한 복서도 있었다[25]. 그의 패배는 데뷔 직후와 은퇴 직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올림픽 출전 시 이길 상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스테벤손은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후보이자 197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자신을 꺾었던 미국의 드웨인 보빅을 물리치면서 복싱계에 충격을 주었다.
3. 2. 올림픽 3연패 (1972-1980)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라스투나스주 푸에르토파드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인트빈센트섬 출신 이민자였고, 외조부는 세인트키츠섬 출신이었다.
스테벤손은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우승 후보이자 197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자신을 꺾었던 미국의 드웨인 보빅을 3라운드 RSC로 물리치며 복싱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페터 후싱(서독)을 2라운드 TKO로 가볍게 이기고 결승에 진출, 루마니아의 이온 알렉세가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 쿠바 복싱팀은 올림픽 복싱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며 아마추어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3명의 상대 선수를 총 7분 22초 만에 꺾고 결승에 진출, 루마니아의 미르세아 시몬을 KO로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80년 하계 올림픽 준결승에서는 헝가리의 레바이 이스트반의 회피적인 전술에 고전했지만, 결국 판정승을 거두었다. 결승에서는 소련의 표트르 자예프를 꺾고 판정승하며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써 스테벤손은 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 3개를 획득한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스테벤손은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올림픽 4연속 우승을 달성할 수도 있었지만, 쿠바가 소련의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에 동참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27][1]
8세 무렵 복싱을 시작하여, 1970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성인이 된 스테벤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너무 강해서 대전 중에 기권한 복서도 있었다[25]. 그의 패배는 데뷔 직후와 은퇴 직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올림픽 출전 시 이길 상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3. 3. 세계 선수권 대회
스테벤손은 1974년 아바나, 1978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1978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헤비급으로 2연속 우승한 데 이어, 1986년에는 슈퍼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려 다시 정상에 섰다.[27][28] 1982년 세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뮌헨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이는 스테벤슨이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유일한 경우였다.[1]
1974년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1974년 세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에서 스테벤슨은 치방구 휘에이(자이르)를 부전승, 페터 후싱 (서독)을 1라운드 KO, 파타이 아비니아(나이지리아)에게 판정승, 마빈 스틴슨(미국)에게 5-0 만장일치 판정승으로 꺽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1978년 세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에서는 아다마 멘사(가나)를 1라운드 KO, 토니 텁스 (미국)에게 5-0 만장일치 판정승, 카를로스 리베라(베네수엘라)를 2라운드 KO, 드라거미르 부즈코비치 (유고슬라비아)에게 1라운드 기권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6년 세계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미국의 알렉스 가르시아를 꺾고 슈퍼 헤비급 금메달을 획득했다.[1]
3. 4. 프로 전향 제안과 거절
스테벤손은 프로 전향 제안을 받았으나 쿠바의 공산주의 체제를 지키며 아마추어 선수로 남았다.[27][28]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한 미국 프로모터로부터 100만 달러에 프로 전향을 제안받았지만 "나는 쿠바 국민을 세상의 모든 돈과 바꾸지 않겠다"라며 거절했다.[7]
무하마드 알리가 프로 복싱 헤비급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시기와 스테벤슨의 전성기가 겹치면서, 미국 언론은 스테벤슨에게 알리의 "공산주의 쌍둥이"라는 별명을 붙였다.[7] 프로 데뷔에서 세계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제안받은 유일한 아마추어 복서였던 스테벤슨은 알리와의 경기를 위해 쿠바에서 일주일을 보냈지만, 경기는 성사되지 않았다.[7] 알리는 스테벤슨에게 3~4라운드 경기를 제안했지만, 알리는 15라운드 챔피언십 경기를 원하며 거절했다.[17]
돈 킹과 밥 애럼 등 유명 복싱 프로모터들이 스테벤슨에게 프로 전향을 제안했다.[16] 애럼은 스테벤슨의 5차례 3라운드 시범 경기에 100만 달러를 제안했고 쿠바가 이를 수락했지만, 미국 재무부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 조치 위반을 이유로 허용하지 않았다.[7] 애럼은 레온 스핑크스와의 100만 달러 경기도 제안했다.[7]
스테벤슨은 "나는 조국도 가족도 사랑한다. 나라를 버리고 프로가 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며 프로 전향을 거부했다. 그는 은퇴 시에 알리와의 대전이 성사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를 표현했다.
조지 포먼은 스테벤슨에 대해 "스테벤슨은 모든 면에서 챔피언이다. 그는 내가 본 어떤 선수보다 더 훌륭한 선수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의심할 여지 없이 프로 세계 챔피언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9]
3. 5. 이고르 비소츠키와의 라이벌 관계
스테벤손은 소련의 복서 이고르 비소츠키와의 두 차례의 경기로 유명했다.[12] 비소츠키는 1973년 쿠바에서 열린 "코르도바 카르딘" 토너먼트에서 스테벤손을 판정으로 이겼고,[12] 1976년 3월 민스크에서 열린 국제 토너먼트에서는 KO로 이겼다.[12] 비소츠키는 스테벤손을 두 번이나 꺾은 유일한 복서였다.[12] 스테벤손은 비소츠키에게 두 번째 패배를 당한 후 "불패는 없다"고 말했다.[13]
3. 6. 은퇴
스테벤손은 1987년 아마추어 선수로 남은 채 은퇴하였고, 1988년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28] 그는 프로 전향을 거부하고 쿠바의 공산주의 체제를 지켰다. 은퇴 후에는 복싱 코치와 스포츠 관계자로 일했으며, 쿠바 국립 스포츠·체육·레크리에이션 연구소(INDER)에서 근무했고 쿠바 권투 연맹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스테벤손은 여러 번 성사될 기회가 있었던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전에 내키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를 은퇴 시에 언급했다.[25]
스테벤손은 은퇴 후 고향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며 복싱과 거리를 둔 생활을 했다. 만년에는 고향 마을에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개관식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4. 은퇴 이후
1999년,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유나이티드 항공 티켓 카운터 직원과 말다툼을 벌여 체포되었다.[20] 스테벤손은 쿠바 권투 국가대표팀 전용 제트기를 타기 전, 직원의 머리를 들이받아 이빨을 여러 개 부러뜨린 혐의를 받았다.[20] 스테벤손은 한 "선동자"가 공항에서 그에게 다가와 쿠바 정부를 비난하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20] 그는 보석으로 풀려난 후 하바나로 돌아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20]
쿠바 국영 신문 ''Trabajadores''는 이 사건을 "마이애미 마피아"가 유발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쿠바계 미국 국립 재단이 스테벤손을 모욕하기 위한 공개 집회를 조직했다고 주장했다.[20] 신문은 이러한 도발의 동기가 쿠바 스포츠 스타에게 어떤 식으로든 먹칠을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0]
5. 사망
스테벤손은 2012년 6월 11일, 60세의 나이로 쿠바 아바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21] 쿠바 국영 언론에서 처음 보도되었으며,[22] "쿠바 스포츠계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의 죽음에 오늘 슬픔을 느꼈다"라고 전했다.
그는 두 자녀를 남겼다.[23]
브린-조나단 버틀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2022년 10월 기준)인 ''Split Decision''에는 스테벤슨의 마지막 인터뷰가 담겨 있다.
6. 경기 스타일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기본에 충실한 정통 스타일의 복서였다. 장신을 이용해 날카로운 잽과 좌우 스트레이트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선호했다. 상대의 펀치를 패링과 스웨이로 피하는 방어 기술과 일격에 다운을 빼앗는 하드 펀치를 겸비해, 매우 균형 잡힌 선수였다. 2m에 육박하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콤비네이션과 풋워크 등 스피드 면에서도 뛰어나 당시 아마추어 복싱계를 대표했다.
젊은 시절에는 적극적으로 인파이팅을 시도하며 힘으로 다운을 빼앗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피드를 살린 원투와 오른손 카운터 펀치로 정확하게 경기를 마무리하는 스마트한 스타일로 변화했다.
7. 수상 및 영예
테오필로 스테벤손은 1972년 하계 올림픽에서 뛰어난 복서에게 수여되는 발 바커 트로피를 수상했다. 같은 해, 소련 역사상 이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외국 선수 중 한 명인 소련 스포츠 명예 석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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