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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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 3세는 1823년 루카에서 태어난 파르마 공작이었다. 그는 루카 공작 카를 2세의 아들이자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의 외아들로, 1849년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했다. 그는 엄격한 교육 환경에서 성장했고, 군대에 관심을 가져 피에몬테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다. 1845년, 그는 프랑스 왕위 요구자의 여동생인 아르투아의 루이즈 공주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그는 권위적인 통치 스타일을 보였지만, 반성직주의적이었고 사형제도를 반대했으며, 하층 계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854년 암살당했으며, 그의 아들 로베르토 1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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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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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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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페르디난도 카를로 주세페 마리아 비토리오 발다사레 |
출생일 | 1823년 1월 14일 |
출생지 | 루카 공국, 루카, 빌라 델레 피아노레 |
사망일 | 1854년 3월 27일 |
사망지 | 파르마 공국, 파르마 |
매장지 | 비아레조 인근, 빌라 보르보네, 마키아 예배당 |
왕가 | 부르봉-파르마 가문 |
아버지 | 카를로 2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 |
통치 | |
전임자 | 카를로 2세 |
후임자 | 로베르토 1세 |
공작위 계승 | 파르마 공작 |
통치 기간 | 1849년 5월 17일 – 1854년 3월 27일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루이즈 다르투아 (1845년 11월 10일 결혼) |
자녀 | 마르게리타 공주, 마드리드 공작부인 로베르토 1세 알리체, 토스카나 대공비 엔리코, 바르디 백작 |
2. 유년 시절
카를로 3세는 1823년 1월 14일 루카 근처 빌라 델레 피아노레에서 루카 공작 카를 루이와 그의 아내 사보이 공주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페르디난도 카를로 비토리오 주세페 마리아 발다사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 1849년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그는 페르디난도 카를로 또는 페르디난도라고 불렸다. 그의 가족은 그를 단두치오라고 불렀다. 그의 할머니 마리아 루이사 데 에스파냐 (루카 공작 부인)가 1824년 3월 13일에 사망하자 페르디난도는 "루카 세습 공"이 되었다.[1]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처음 10년 동안 부모님을 따라 드레스덴 근처의 우르센도르프와 바이스트로프 성과 빈 궁정으로 자주 여행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4살 때, 그의 교육은 헝가리 사제 지그몬드 데아키에게 맡겨졌다. 그는 루카 도서관장이었던 라차로 파피로부터 이탈리아 역사와 언어를 배웠다. 그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를 배웠다.[1]
1833년, 그가 10살이 되어 궁정이 루카로 돌아올 때까지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엄격하고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외동아들인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부모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페르디난도의 어머니는 매우 독실했고 점점 더 종교에 몰두했다. 십 대부터 페르디난도는 그녀를 거의 보지 못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루카 궁정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처음에는 빌라 디 마릴리아에서, 나중에는 피아노레의 별장에서, 사제와 수녀들에 둘러싸여 종교에 헌신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페르디난도는 아버지와 더 공통점이 많았다. 즉 언어 능력, 여행에 대한 열정, 거친 유머 감각, 불안정한 성격이 그것이었다.[1] 그러나 카를 루이는 향락적인 사람이었고 아들을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동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페르디난도는 불안정하고 매우 버릇없이 자랐다. 그의 선생님들은 그의 반항적인 성격도, 그의 무절제한 무책임함도 통제할 수 없었다.[1]
청소년기에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군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루카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일반 병사로 생활하며 병영 생활을 공유하고,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펜니노 산맥 기슭에서 장시간 훈련을 받았다. 그는 병사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의 군사 훈련을 규제하고, 군대가 그의 성격을 개선해주기를 바라면서, 페르디난도의 아버지는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로부터 그를 피에몬테 군대에 입대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1841년, 18세의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보내졌다. 그는 노바라 기병대에서 대위 계급으로 피에몬테 군대에 임관되었다.[1] 그러나 1년의 복무 후, 그는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게, 심지어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낸 국왕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더욱 사이가 나빠져 집으로 돌아갔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루카의 페르디난도는 지난 여름 나에게 화를 내며 이곳을 떠났고,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모든 행복을 빌어주며, 또한 좋은 감각도 빌어주는데, 나는 그가 절대 얻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2]
2. 1. 탄생과 가족
카를로 3세는 1823년 1월 14일 루카 근처 빌라 델레 피아노레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루카 공작 카를로 2세이며, 어머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이다.[1] 세례명은 페르디난도 카를로 비토리오 주세페 마리아 발다사레이고, 가족들은 그를 단두치오라고 불렀다.[1] 1824년 할머니 마리아 루이사 데 에스파냐 (루카 공작 부인)가 사망하자 루카 세습공이 되었다.[1]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드레스덴 근처의 우르센도르프와 바이스트로프 성, 빈 궁정 등지로 자주 여행했다.[1] 4살 때 헝가리 사제 지그몬드 데아키가 그의 교육을 맡았고, 라차로 파피로부터 이탈리아 역사와 언어를 배웠다. 또한 스페인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를 배웠다.[1]
1833년 궁정이 루카로 돌아온 후,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엄격하고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외동아들이었던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부모는 서로 정반대의 성격이었다.[1]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는 매우 독실하여 종교에 몰두했고, 페르디난도는 십 대 시절부터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했다.[1] 페르디난도는 아버지와 언어, 여행, 유머 감각, 불안정한 성격 등 공통점이 많았지만, 아버지 카를 루이는 향락적인 사람이었기에 아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1]
청소년기에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군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루카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1] 1841년에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 노바라 기병대에서 대위 계급으로 피에몬테 군대에 임관되었다.[1] 그러나 1년 후,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불화를 겪고 집으로 돌아갔다.[1][2]
2. 2. 초기 교육
카를로 3세는 1823년 1월 14일 루카 근처 빌라 델레 피아노레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그를 단두치오라고 불렀다.[1] 그의 할머니 마리아 루이사 데 에스파냐 (루카 공작 부인)가 1824년 3월 13일에 사망하자 페르디난도는 "루카 세습 공"이 되었다.[1]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드레스덴 근처의 우르센도르프와 바이스트로프 성, 빈 궁정 등지로 자주 여행했다.[1] 4살 때부터 헝가리 사제 지그몬드 데아키에게 교육을 받았고, 루카 도서관장이었던 라차로 파피로부터 이탈리아 역사와 언어를 배웠다.[1] 또한 스페인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를 습득했다.[1]
1833년, 궁정이 루카로 돌아온 이후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엄격하고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1] 그의 부모님은 서로 다른 성격으로 인해 불화가 있었고, 특히 그의 어머니는 매우 독실하여 종교에 몰두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1] 페르디난도는 아버지와 언어 능력, 여행에 대한 열정, 거친 유머 감각, 불안정한 성격 등에서 공통점이 많았다.[1] 그러나 아버지의 향락적인 생활로 인해 페르디난도는 불안정하고 버릇없이 자랐으며, 그의 선생님들은 그의 반항적인 성격을 통제하지 못했다.[1]
2. 3. 성장 환경
카를로 3세는 1823년 1월 14일 루카 근처 빌라 델레 피아노레에서 루카 공작 카를 루이와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 세례명은 페르디난도 카를로 비토리오 주세페 마리아 발다사레였다.[1] 가족들은 그를 단두치오라고 불렀으며, 1824년 할머니 마리아 루이사 데 에스파냐 (루카 공작 부인)가 사망하자 "루카 세습 공"이 되었다.[1]페르디난도 카를로는 10살 때까지 부모를 따라 드레스덴 인근의 성과 빈 궁정을 오가며 생활했다.[1] 4살 때부터 헝가리 사제 지그몬드 데아키에게 교육을 받았고, 루카 도서관장 라차로 파피로부터 이탈리아 역사와 언어를 배웠다. 또한 스페인어, 프랑스어, 헝가리어, 독일어, 영어를 익혔다.[1]
1833년 루카로 돌아온 후,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어머니의 엄격하고 종교적인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1] 외동아들이었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았으나, 부모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에 몰두하여 아들과의 교류가 적었다.[1] 반면 아버지 카를 루이는 향락적인 성격으로 아들과 자주,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다.[1] 그 결과 페르디난도는 불안정하고 버릇없는 성격으로 자랐으며, 반항적인 성격과 무절제함은 통제하기 어려웠다.[1]
청소년기에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군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루카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1] 1841년에는 토리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노바라 기병대 대위로 피에몬테 군대에 임관되었다.[1] 그러나 1년 후,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 국왕 및 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불화를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1][2]
3. 청년 시절
3. 1. 군 복무
3. 2. 결혼
1845년, 루카 공국이 재정난을 겪자, 아버지 카를로 2세는 아르투아의 루이즈 공주(1819–1864)와 카를로 3세를 정략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3] 루이즈 공주는 프랑스 왕위 요구자 샹보르 백작 앙리의 여동생이자, 샤를 10세의 손녀였다.[3] 카를로 3세는 처음에는 나이 차이, 가까운 친척 관계, 정치적 이념 등의 이유로 결혼을 꺼렸으나, 아버지의 압력으로 결국 승낙하였다.[3]1845년 11월 10일, 오스트리아 란젠키르헨 근처 Schloss Frohsdorff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 신혼여행은 오스트리아 Urschendorff 성, 영국 등지로 이어졌다.[3] 결혼 초기 몇 년간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2]
카를로 3세와 루이즈 공주 사이에는 2남 2녀가 태어났다.
- 마르게리타 (1847년 - 1893년): 마드리드의 카를로스 공작과 결혼, 다섯 자녀를 두었다.
- 로베르토 1세 (1848년 - 1907년): 부르봉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 결혼, 열두 자녀를 두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인판타와 재혼하여 열두 자녀를 두었다.
- 알리체 (1849년 - 1935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와 결혼, 열 자녀를 두었다.
- 엔리코 (1851년 - 1905년): 부르봉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임마콜라타 공주와 결혼, 이후 포르투갈의 아델군데스 인판타와 재혼.
4. 파르마 공작 즉위
1847년 12월 17일, 파르마 여공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자, 아버지 카를로 2세가 파르마 공국을 계승하였고, 루카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되었다.[4] 이에 따라, 카를로 3세는 파르마 상속공이 되었다.[4]
1848년 혁명이 파르마에서 발발하자, 카를로 3세는 크레모나에서 체포되어 밀라노에 포로로 잡혔으나, 영국 정부의 협상으로 석방되었다.[4] 이후 몰타, 나폴리, 리보르노를 거쳐 영국으로 피신하여 서비턴에 정착했다.[4]
1849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르마에 입성하여 카를로 2세를 복위시켰으나, 카를로 2세는 카를로 3세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하며 시기를 조율하였다.[4]
4. 1. 파르마 계승
1847년 12월 17일, 파르마 여공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자, 아버지 카를로 2세가 파르마 공국을 계승하였고, 루카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되었다.[4] 이에 따라, 카를로 3세는 파르마 상속공이 되었다.[4]1848년 혁명이 파르마에서 발발하자, 카를로 3세는 크레모나에서 체포되어 밀라노에 포로로 잡혔으나, 영국 정부의 협상으로 석방되었다.[4] 이후 몰타, 나폴리, 리보르노를 거쳐 영국으로 피신하여 서비턴에 정착했다.[4]
1849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르마에 입성하여 카를로 2세를 복위시켰으나, 카를로 2세는 카를로 3세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하며 시기를 조율하였다.[4]
4. 2. 혁명과 망명
1848년 3월, 파르마에서 이탈리아 1848년 혁명이 발발하여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 국왕의 지원을 받았다.[4] 카를로 3세는 파르마에서 탈출했지만, 크레모나에서 체포되어 밀라노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4] 영국 정부가 그의 석방을 협상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억류되었다.[4] 석방 후, 몰타, 나폴리, 리보르노 등지를 거쳐 피렌체에서 망명 중이던 부인과 재회했다.[4] 이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피신하여 런던 남서부 서비턴에 정착했다.[4]4. 3. 퇴위와 즉위
1847년 12월 17일,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자 페르디난도 카를로의 아버지인 카를로 2세가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했다. 루카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되었고,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루카의 상속 공"이 아닌 "파르마의 상속 공"이 되었다.[4]1848년 3월, 이탈리아 1848년 혁명이 파르마에서 발발하여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 국왕의 지원을 받았다.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파르마에서 탈출했지만, 크레모나에서 체포되어 밀라노의 포로로 잡혔고, 영국 정부가 그의 석방을 협상할 때까지 몇 달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다. 석방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피신하여 서비턴의 코티지에 정착했다.[4]
1849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르마에 입성하여 카를로 2세를 공식적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카를로와 그의 가족은 오스트리아 군과 피에몬테 군 사이의 적대 행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에 머물렀다. 카를로 2세는 페르디난도 카를로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아들을 위해 더 안전해지기를 바라며 이를 미루었다.[4]
5. 통치
1849년 3월 24일, 카를로 2세의 퇴위가 발표되었다. 페르디난도 카를로는 여전히 영국에 머물고 있었지만, "파르마, 피아첸차, 그리고 부속 국가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계승하여 카를로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49년 5월 18일, 그는 파르마로 재입성했지만, 이틀 뒤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올로모우츠로 떠났다. 그는 8월 25일, 새로운 공작으로서 파르마에 입성하기 전까지 공국의 행정을 맡지 않았다.[4]
카를로 3세는 권위적인 통치자였지만, 그의 통치는 나폴리와 토스카나에 있던 사촌들의 통치보다 덜 반동적이었다. 그는 반성직주의자였으며 사형제도에 반대했다. 그의 5년 통치 기간 동안 사형 집행은 한 건도 없었다. 그는 영국을 매우 좋아하여, 공작위 등극 후 다시 한번 영국을 방문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왕위를 얻었음에도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을 느끼지 않았다. 카를로 3세는 개인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하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4] 귀족들은 그를 경계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그를 경멸했으며, 그는 그들을 경멸했다. 그는 하층 계급과 가장 잘 지냈다. 그는 발레를 매우 좋아했고, 무용수, 군인, 농민,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4] 그는 항상 자신의 지위를 의식했고 -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팡이를 사용했다 - 매너가 단순하고, 매우 접근하기 쉬웠으며, 뛰어난 개인적인 매력을 지녔다.[4]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결정들은 신하들이 그와 그의 왕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존경심을 잃게 만들었고, 그는 인기를 잃었다. 1853년까지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음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4]
그의 개인적인 삶 또한 혼란스러웠다. 그는 점점 비대해진 아내와 멀어졌다.[2] 공작 부인은 톡 쏘는 말투를 가진 여성이었고, 음모와 그녀의 강한 성격으로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좋아했다.[2] 카를로 3세가 엠마 구아다니 백작 부인(엠마 구아다니 백작 부인/Contessa Emma Guadagniit, 1829–1866)[5], 트렌토의 오스트리아 총독의 처제와 공개적으로 불륜을 시작하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들은 1852년 2월, 카를로 3세가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의 손님으로 피렌체에 머물 때 만났다. 1853년 12월,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를 공식 방문했을 때, 카를로 3세는 정부를 동반하여 결혼 생활을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했다.[2] 1854년 2월 중순, 카를로 3세는 파르마로 돌아왔다.
5. 1. 통치 스타일
카를로 3세는 권위적인 통치자였지만, 나폴리와 토스카나의 사촌들보다는 덜 반동적이었다.[4] 그는 반성직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사형제도에 반대했다. 재위 5년 동안 사형 집행은 한 건도 없었다.[4] 영국을 매우 좋아하여 공작 즉위 후 다시 한번 영국을 방문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왕위를 얻었음에도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4]카를로 3세는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4] 귀족들은 그를 경계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그를 경멸했으며, 그는 그들을 경멸했다.[4] 그는 하층 계급과 가장 잘 지냈으며 발레를 매우 좋아했고, 무용수, 군인, 농민,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4] 그는 항상 자신의 지위를 의식했고,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팡이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소탈한 매너와 뛰어난 개인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4] 그러나, 그의 독단적인 결정들은 신하들이 그와 그의 왕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존경심을 잃게 만들었고, 그는 인기를 잃었다. 1853년까지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음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4]
그의 개인적인 삶 또한 혼란스러웠다. 그는 점점 비대해진 아내와 멀어졌고,[2] 엠마 구아다니 백작 부인(1829–1866)[5]과 공개적으로 불륜을 저지르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5. 2. 대외 관계
카를로 3세는 영국을 매우 좋아하여 공작 즉위 후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4]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왕위를 얻었지만, 오스트리아에 대한 동정심은 없었다.[4]5. 3. 대중적 이미지
카를로 3세는 개인적인 매력이 뛰어났지만, 신하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4] 귀족들은 그를 경계했고, 부르주아 계급은 그를 경멸했다.[4] 그는 하층 계급과 가장 잘 지냈으며, 발레를 좋아하여 무용수, 군인, 농민, 일반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4]그는 자신의 지위를 항상 의식했고,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팡이를 사용하기도 했다.[4] 단순한 매너와 접근하기 쉬운 성격, 뛰어난 개인적 매력을 지녔지만,[4] 독단적인 결정으로 신하들의 존경심을 잃고 인기를 잃었다.[4] 1853년에는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음모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기도 했다.[4]
5. 4. 사생활
카를로 3세는 아내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와 사이가 멀었다.[2] 공작 부인은 톡 쏘는 말투를 가진 여성이었고, 강한 성격으로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좋아했다.[2] 카를로 3세가 트렌토의 오스트리아 총독의 처제인 엠마 구아다니 백작 부인(1829–1866)[5]과 공개적으로 불륜을 시작하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들은 1852년 2월, 카를로 3세가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 2세의 손님으로 피렌체에 머물 때 만났다. 1853년 12월,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를 공식 방문했을 때, 카를로 3세는 정부를 동반하여 결혼 생활을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했다.[2]6. 암살
1854년 3월 26일 일요일 오후 4시경, 카를로 3세는 리세르바 궁을 나와 파르마 거리를 산책했다. 그는 부관 바치네티 백작과 함께였다. 산책 중, 마차에 앉아 야외 콘서트를 듣고 있던 부인 루이즈 공작 부인을 보고 서로 정중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후 5시 45분, 궁으로 돌아가던 중 산타 루치아 성당 근처에서 두 남자에게 공격당했다. 그는 길 건너편 위층 창문의 소녀에 대한 질문과 군인들에게 인사를 하던 도중, 뒤에서 미행하던 두 남자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들 중 한 명이 공작을 넘어뜨리고 삼각형 칼날로 배를 깊숙이 찔렀다.
카를로 3세는 "맙소사, 이제 끝났어. 나를 찔렀어"라고 말하며 쓰러졌다. 범인들은 혼란 속에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군중 속에 섞였다. 칼날이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공작은 팔과 다리에 붙들려 궁으로 옮겨졌다.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지 물었으나, 의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신이 든 순간, 공작은 자신의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는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부 성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본 후, 3월 27일 오후 5시 30분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를로 3세의 시신은 비아레조 근처의 카펠라 델라 마키아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파르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역 지하 묘지에 있는 항아리에 안치되었다.
공작을 공격한 이레네오 보치와 안토니오 카라는 기소되지 않았다. 증인들은 혼란스러워했고, 핵심 증인인 바치네티 백작은 루이즈 공작 부인이 싫어해 파르마에서 추방당했다. 보치와 카라는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누가 그들에게 공작을 죽이라고 돈을 지불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6. 1. 암살 사건
1854년 3월 26일 일요일 오후 4시경, 카를로 3세는 리세르바 궁을 나와 파르마 거리를 산책했다. 그는 부관 바치네티 백작과 함께였다. 산책 중, 마차에 앉아 야외 콘서트를 듣고 있던 부인 루이즈 공작 부인을 보고 서로 정중하게 손을 흔들었다.오후 5시 45분, 궁으로 돌아가던 중 산타 루치아 성당 근처에서 두 남자에게 공격당했다. 그는 길 건너편 위층 창문의 소녀에 대한 질문과 군인들에게 인사를 하던 도중, 뒤에서 미행하던 두 남자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들 중 한 명이 공작을 넘어뜨리고 삼각형 칼날로 배를 깊숙이 찔렀다.
카를로 3세는 "맙소사, 이제 끝났어. 나를 찔렀어"라고 말하며 쓰러졌다. 범인들은 혼란 속에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군중 속에 섞였다. 칼날이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공작은 팔과 다리에 붙들려 궁으로 옮겨졌다.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지 물었으나, 의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신이 든 순간, 공작은 자신의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는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종부 성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본 후, 3월 27일 오후 5시 30분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를로 3세의 시신은 비아레조 근처의 카펠라 델라 마키아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파르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역 지하 묘지에 있는 항아리에 안치되었다.
공작을 공격한 이레네오 보치와 안토니오 카라는 기소되지 않았다. 증인들은 혼란스러워했고, 핵심 증인인 바치네티 백작은 루이즈 공작 부인이 싫어해 파르마에서 추방당했다. 보치와 카라는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누가 그들에게 공작을 죽이라고 돈을 지불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6. 2. 죽음과 장례
1854년 3월 26일 오후, 카를로 3세는 리세르바 궁을 나와 파르마 거리를 산책하던 중 산타 루치아 성당 근처에서 암살자의 공격을 받았다. 범인은 공작을 미행하던 두 남자 중 한 명으로, 삼각형 칼날로 공작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카를로 3세는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고, "맙소사, 이제 끝났어. 나를 찔렀어"라고 말했다.칼날이 꽂힌 채 쓰러진 카를로 3세는 궁으로 옮겨졌고, 의사들은 그의 생명이 위험한지 묻는 질문에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그는 "나는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반복하며 종부 성사를 받고 부인과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3월 27일 오후 5시 30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를로 3세의 시신은 비아레조 근처 카펠라 델라 마키아에 안치되었고, 심장은 파르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성역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다. 암살범들은 체포되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누가 암살을 사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6. 3. 암살범과 배후
카를로 3세의 암살범인 이레네오 보치와 안토니오 카라는 기소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체포되었지만, 서로 매우 닮았기 때문에 증인들은 혼란스러워했고 그들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핵심 증인인 바치네티 백작은 루이즈 공작 부인에게 미움을 받아 파르마에서 추방당했다.보치와 카라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그들에게 공작을 죽이라고 돈을 지불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7. 계보
1. 카를로 3세 |
---|
2. 카를로 2세 |
3.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 |
4. 루도비코 1세 |
5. 마리아 루이사 디 스파냐 |
6.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
7. 마리아 테레사 다우스트리아-에스테 |
8. 페르디난도 1세 |
9. 마리아 아말리아 다스부르고 |
10. 카를로스 4세 |
11. 마리아 루이사 데 팔마 |
12.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
13. 마리아 안토니아 디 스파냐 |
14. 페르디난트 폰 에스터라이히-에스테 |
15.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
8. 자녀
카를로 3세는 1845년 11월 10일 오스트리아 란젠키르헨 근처 샹보르의 망명지인 Schloss Frohsdorff에서 아르투아의 루이즈 공주(1819–1864)와 결혼했다.[3] 루이즈 공주는 정통왕위계승자(Legitimists)인 프랑스 왕위 요구자 샹보르 백작 앙리(Henri, comte de Chambord)의 유일한 여동생이자, 베리 공작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Charles X of France)의 손녀였다.[3] 둘은 사촌 관계였으며, 빈에서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다.[3] 결혼 후 몇 년 동안은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2]
카를로 3세 부부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2]
- 마르게리타 (1847년 - 1893년): 마드리드의 카를로스 공작(Carlos, Duke of Madrid)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 로베르토 1세 (1848년 - 1907년): 부르봉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Princess Maria Pia of Bourbon-Two Sicilies (1849–1882))와 결혼하여 열두 자녀를 두었고,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인판타(Infanta Maria Antónia of Portugal)와 재혼하여 열두 자녀를 두었다.
- 알리체 (1849년 - 1935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4세(Ferdinand IV, Grand Duke of Tuscany)와 결혼하여 열 자녀를 두었다.
- 엔리코 (1851년 - 1905년): 부르봉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임마콜라타 공주(Princess Maria Immacolata of Bourbon-Two Sicilies)와 결혼 후, 포르투갈의 아델군데스 인판타(Infanta Adelgundes, Duchess of Guimarães)와 재혼했다.
참조
[1]
서적
Assassination in Parma: The Life and Death of Duke Carlo III
[2]
서적
Assassination in Parma: The Life and Death of Duke Carlo III
[3]
서적
La Familia Rival
[4]
서적
Assassination in Parma: The Life and Death of Duke Carlo III
[5]
웹사이트
Carlo III of Bourbon, Duke of Parma and Emma Guadagni – The Guadagni Family Historical Archives
http://www.guadagnif[...]
2022-01-12
[6]
문서
ヴィアレッジョは1847年まで[[ルッカ公国]]の領土だった。
[7]
서적
Assassination in Parma: The Life and Death of Duke Carlo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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