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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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사티스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이자 다리우스 2세의 아내로, 크세르크세스 2세,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의 이복 누이였다. 다리우스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키루스, 오스타네스, 옥사트레스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녀는 아들 키루스를 총애하여 그의 아나톨리아 서부 총지휘관 임명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남편 사망 후 키루스를 후계자로 밀었으나 실패했다. 이후 키루스가 쿠낙사 전투에서 사망하자 티사페르네스를 암살했으며,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의 권력 다툼, 며느리 스타테이라를 독살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파리사티스의 이름을 딴 소행성 파리사티스가 존재하며, 소설, 오페라, 미술 작품 등 대중문화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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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사티스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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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배 칭호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왕비 |
| 재위 | 기원전 422년 - 기원전 404년 |
| 아버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
| 어머니 | 안디아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다리우스 2세 |
| 자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키루스 (소키루스) 옥사트레스 |
| 이름 | |
| 페르시아어 | 파루샤티슈 (Parušyātiš) |
| 그리스어 | 파뤼사티스 (Parysatis) |
| 로마자 표기 | Parysatis |
2. 생애
파리사티스는 페르시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바빌론 출신 안드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크세르크세스 2세,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의 이복 누이였으며, 이복 형제인 다리우스 2세와 결혼했다.[1] 다리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키루스, 오스타네스, 옥사트레스[2], 아메스트리스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3]
파리사티스는 아들들 중 키루스를 가장 총애했으며, 기원전 407년경 키루스가 아나톨리아 서부 총지휘권을 얻은 것도 그녀의 영향력 덕분이었다.[10] 다리우스 2세 사후, 파리사티스는 키루스를 후계자로 밀었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왕위를 이었다. 태수 티사페르네스가 키루스의 반역을 고발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키루스를 용서하도록 설득했다. 쿠낙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하자, 파리사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책임을 물어 암살했다.
소행성파리사티스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파리사티스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대왕과 바빌론 출신 안드리아의 딸이었다. 그녀는 크세르크세스 2세,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의 이복 누이였다. 파리사티스는 이복 형제인 다리우스 2세와 결혼하여[1] 13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성인이 된 아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키루스, 오스타네스, 옥사트레스[2] 넷과 딸 아메스트리스 한 명이었다.[3]2. 2. 다리우스 2세와의 결혼
파리사티스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바빌론 출신 안드리아의 딸이었다. 크세르크세스 2세, 소그디아누스, 다리우스 2세의 이복 누이였던 그녀는 이복 형제인 다리우스 2세와 결혼하여[1] 13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성인이 된 아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키루스, 오스타네스, 옥사트레스[2] 넷과 딸 아메스트리스 한 명이었다.[3] 다리우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파리사티스는 왕비가 되었다.2. 3. 페르시아 궁정에서의 영향력
파리사티스는 첩자와 정보원 네트워크를 가진 매우 강력한 인물이였다. 그녀의 주치의였던 크테시아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녀가 왕위에 위협이 되는 다양한 사람들을 식별하고 처형을 명령하는 방법을 언급했다. 파리사티스는 매우 능숙했고, 사생아였고 적통 자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우스 2세의 왕위 등극을 돕는 데 성공했다. 크테시아스는 다리우스 2세가 그녀의 조언에 매우 의존했다고 기록했다.[4]그녀는 시리아, 메디아, 바빌론에 많은 토지와 마을을 소유한 것으로 언급된다. 또한 그녀와 그녀의 소유지와 세금 징수를 관리하는 하인인 에아-불리수에게 직접 지불된 세금 기록이 남아 있다.[4]
파리사티스가 아들들 중 가장 아낀 것은 키루스였으며, 기원전 407년경 아직 십 대였던 키루스에게 아나톨리아 서부의 총지휘권이 주어진 것은 파리사티스의 영향력 때문이었다.[10] 남편 다리우스 2세가 사망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어린 키루스를 후계자로 밀었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사트라프(태수) 티사페르네스가 키루스가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살해하려 한다고 고발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키루스를 용서하도록 간청했다. 키루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후 티사페르네스는 파리사티스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
2. 4. 키루스 지원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은 키루스였으며, 그녀의 영향으로 기원전 407년경 십 대의 나이에 서부 아나톨리아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남편이 죽자 그녀는 키루스를 지지했다. 키루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하자 그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티사페르네스에게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암살했다.플루타르코스의 "생애" 중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관한 장에 따르면, 미트라다테스라는 젊은 페르시아 병사가 쿠낙사 전투 중 실수로 키루스 2세를 쳐서 말에서 떨어뜨리고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5] 몇몇 환관들이 키루스를 발견하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의 짐꾼 중 한 명인 카우니아인이 다트로 그의 무릎 뒤 정맥을 쳐서 그를 넘어뜨리고 머리를 돌에 부딪치게 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했다. 미트라다테스는 어리석게도 키루스를 죽였다고 궁정에서 자랑했고, 파리사티스는 그를 스카피즘으로 처형했다. 그녀는 또한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주사위 게임을 하여 키루스의 손과 머리를 자른 왕의 환관 마사바테스를 이겨 산 채로 껍질을 벗기는 방식으로 복수했다.[5]
2. 5.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의 관계 및 권력 투쟁
스타테이라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아내였다. 키루스의 왕위 찬탈 시도가 실패한 후, 파리사티스는 왕비 스타테이라와 함께 왕에게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앙숙이 되었다.[7]파리사티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첩을 들이도록 부추겨 아내를 괴롭히려 했다. 스타테이라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시어머니의 잔혹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예를 들어 환관 마사바테스의 잔혹한 처우를 비판하며 파리사티스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7]
결국 파리사티스는 스타테이라를 살해했다. 고전 자료는 이 행위에 대해 서로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한 버전에 따르면, 파리사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포로로 잡힌 스파르타 사령관 클레아르코스와 그의 동료 장군들의 생명을 구하고 싶었지만, 스타테이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포로들을 처형하도록 했다. 따라서 파리사티스는 스타테이라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전기를 저술하면서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파리사티스는 아들이 아내에게만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고 며느리를 살해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파리사티스가 기기스라는 충실한 하인의 도움을 받아 암살을 감행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독이 든 칼로 새를 조각하여 동물의 절반만 독과 섞이게 했다. 이 절반은 함께 식사할 때 스타테이라에게 제공되었다. 독이 든 식사는 스타테이라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초래했다.[7]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격분하여 파리사티스의 거처에 숨어 있던 기기스를 체포하려 했다. 결국 기기스는 가족을 방문했을 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파리사티스는 바빌론으로 추방되었지만, 이후 돌아와 왕에게 조언과 충고를 계속 제공했다.[8] 그녀는 궁정에 경험이 적은 딸 아메스트리스와 아토사를 왕과 결혼시켜 그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조언했다.
다리우스 2세가 사망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키루스를 후계자로 밀었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키루스가 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살해하려 한다고 사트라프(태수) 티사페르네스가 고발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키루스를 용서하도록 간청했다. 키루스가 쿠낙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을 때, 파리사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후 티사페르네스는 파리사티스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
3. 대중문화 속 파리사티스

- 잔 디외라푸아는 1890년 소설 ''파리사티스''를 썼다. 이 소설은 1902년 카미유 생상스의 기악 음악과 함께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 제임스 앙소르는 마사바테스의 처형을 묘사한 La Reine Parysatis ecorchant un eunuque|환관을 벗기는 파리사티스 여왕프랑스어라는 제목의 에칭 작품을 만들었다.
- ''시스터 보니파스 미스터리''의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살인자는 복숭아의 절반에 시안화물을 넣어 피해자에게 제공하고, 살인자는 나머지 절반을 먹고 무사하다.
참조
[1]
서적
Agesilaos and the crisis of Spart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
문서
Lives, Life of Artaxerxes
[3]
웹사이트
Artaxerxes II Mnemon
https://www.livius.o[...]
[4]
웹사이트
Parysatis I (fl. 440–385 bce)
https://www.encyclop[...]
[5]
웹사이트
Artaxerxes," Plutarch's Lives
http://www.gutenberg[...]
Project Gutenberg
1996
[6]
문서
Persica
Photius I of Constantinople
[7]
문서
Artaxerxes
[8]
웹사이트
Photius' Excerpt of Ctesias' Persica
https://www.livius.o[...]
[9]
서적
Persians: The Age of the Great Kings
Headline Publishing Group
[10]
서적
Agesilaos
[11]
문서
Lives, Life of Artaxerxes
[12]
서적
Agesilaos
[13]
문서
Lives, Life of Artaxerxes
[14]
서적
Agesil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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