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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사페르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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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사페르네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사르디스의 사트라프였으며, 처음에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으나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장기화하려 했다. 이후 키루스와 대립했으며,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지지하며 키루스와 전투를 벌였다. 쿠나크사 전투 이후 사르디스의 태수직을 되찾았지만,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스파르타와 적대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에서 패배했고, 결국 태후 파리사티스의 중상모략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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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395년 사망 - 리산드로스
    리산드로스는 기원전 5세기 스파르타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여 스파르타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전쟁 후 아테네에 친 스파르타 과두정부를 세우는 데 관여했으나 코린토스 전쟁 중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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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사페르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티사페르네스의 초상화
티사페르네스 (기원전 445년–395년)의 주화에 새겨진 초상. 그의 대부분의 주화에는 그의 초상 아래 그리스어로 "ΤΙΣΣΑ"(TISSA)라고 새겨져 있어 식별이 가능하다.
이름티사페르네스
출생기원전 445년
사망기원전 395년 (50세)
사망 장소콜로새, 헬레스폰트 프리기아, 페르시아 제국 (오늘날의 호나즈, 데니즐리, 튀르키예)
직업사트라프
소속[[File:Standard of Cyrus the Great (Blue).svg|20px]] 아케메네스 제국
관직
임기 시작기원전 415년
임기 종료기원전 408년
전임피수트네스
후임키루스 2세
임기 시작기원전 400년
임기 종료기원전 395년
전임키루스 2세
후임티리바주스
군사 활동
전투쿠나크사 전투
언어 정보

2. 어원

''치차파르나''(čiçafarnah)는 "빛나는 광채를 가진"이라는 뜻으로, 원시 인도유럽어 형용사 ''(s)koitrós''(밝은)에서 유래한 ''치차''(čiça)와 아베스타어 ''xvarənah''(행운, 영광)와 동일한 의미인 '빛나는'을 뜻하는 ''파르나''(farnah)로 구성된다.[5][1] ''치θ라''는 자연, 특히 살아있는 자연을 의미한다.

''치차-''는 고대 이란어 용어 ''치θ라-''의 고대 페르시아어 형태이며, 메디아어 형태의 이름인 ''*치θ라파르나-''(Τετραφέρνηςgrc)에 반영되어 있다.[2]

2. 1. 이름의 의미와 기원

''치차파르나''(čiçafarnah)는 "빛나는 광채를 가진"이라는 뜻으로, ''치차''(čiça) + ''파르나''(farnah)로 구성된다.[5] 여기서 ''치차''는 원시 인도유럽어 형용사 ''(s)koitrós'' ('밝은'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1] ''파르나''는 아베스타어의 xvarənah('행운', '영광'이라는 뜻)와 동일하며 '빛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치θ라''는 자연, 특히 살아있는 자연을 의미한다.

''치차-''는 고대 이란어 용어 ''치θ라-''의 고대 페르시아어 형태이며, 이는 메디아어 형태의 이름인 ''*치θ라파르나-''(Τετραφέρνηςgrc)에 반영되어 있다.[2]

3. 생애

티사페르네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사르디스사트라프로 처음에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으나,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으로 전쟁을 연장시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410년경,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왕자 키루스에게 사르디스 사트라프 직을 빼앗기고 카리아 태수직으로 한정되면서 키루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키루스가 왕위에 오른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편에서 키루스와 싸웠다. 기원전 401년 쿠나크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하자,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 태수직을 되찾았다.

이후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를 지원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여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으로 피해를 입었다. 티사페르네스는 아게실라오스 2세가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카리아에 집결시켰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아게실라오스 군과 교전했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가 기병에게 유리한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웠기 때문에 패배했다. 결국 티사페르네스는 아들 키루스를 잃은 원한을 품고 있던 태후 파리사티스의 모함과 패전의 책임을 물어, 대왕이 파견한 천부장 티토라우스테스에게 처형당했다. 후임 태수로는 티리바조스가 임명되었다.

3. 1. 가문과 초기 생애

티사페르네스는 기원전 445년에 태어났다. 그는 페르시아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그리스 침공 당시 불멸부대를 지휘한 히다르네스 장군의 손자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아래에서 이오니아를 포함한 리디아의 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

3. 2. 리디아와 이오니아의 사트라프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점에 사르디스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는 처음에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14년, 티사페르네스는 다리우스 2세에 의해 리디아와 이오니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인 피수스네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의 직책을 인수하도록 임명되었다. 티사페르네스는 피수스네스의 그리스 용병들에게 그를 배신하도록 뇌물을 주고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다리우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3] 다리우스 2세가 티사페르네스에게 피수스네스의 아들 아모르게스의 지속적인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의 보호를 받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미납된 공물을 징수하라고 명령했을 때, 티사페르네스는 기원전 412년에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티사페르네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최선의 정책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헬레스폰트 프리지아의 그의 이웃 파르나바조스와의 경쟁은 그가 그리스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기원전 408년에 왕이 스파르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티사페르네스는 장군직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책임은 카리아의 사트라프로 제한되었으며, 리디아와 전쟁 수행은 키루스 2세에게 위임되었다.[6]

3. 3. 펠로폰네소스 전쟁 관여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사르디스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는 처음에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3]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으로 전쟁을 연장시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기원전 410년경, 티사페르네스는 대왕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왕자 키루스에게 사르디스의 사트라프 직을 빼앗기고 카리아 태수직으로 한정되었다. 이 때문에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와 대립하게 되었다.[6]

키루스가 왕위에 오른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편에서 키루스와 싸웠다. 기원전 401년 쿠나크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하자,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의 태수직을 되찾았다.[6]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를 지원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여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으로 피해를 입었다. 티사페르네스는 아게실라오스 2세가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카리아에 집결시켰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아게실라오스 군과 교전했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가 기병에게 유리한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웠기 때문에 패배했다. 결국 티사페르네스는 아들 키루스를 잃은 원한을 품고 있던 태후 파리사티스의 모함과 패전의 책임을 물어, 대왕이 파견한 천부장 티토라우스테스에게 처형당했다. 후임 태수로는 티리바조스가 임명되었다.

4. 아케메네스 왕조 내전

다리우스 2세가 기원전 404년에 사망한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페르시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키루스 2세가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티사페르네스는 이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알렸다.[4] 이로 인해 키루스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어머니 파뤼사티스의 간청으로 사면받고 자신의 사트라프(태수령)로 돌아갔다.

복수를 결심한 키루스는 피시디아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준비하는 척하며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 기원전 401년 봄, 키루스는 크세노폰의 "만 명"을 포함한 모든 병력을 사르디스에서 진격시켰다. 그는 능숙한 관리와 보상을 약속하며 그리스 군대의 불안감을 해소했다. 킬리키아로 파견된 스파르타 함대와 케이리소포스 휘하의 700명의 스파르타 병력이 키루스를 지원했다.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소집했다.

티사페르네스 동전, 목 아래에 ΤΙΣΣΑ ("TISSA")가 선명하게 보인다. 미시아, 아스티라. 기원전 400-395년


기원전 401년 10월, 쿠낙사 전투가 벌어졌다. 키루스는 10,400명의 그리스 호플리테스(중무장 시민 병사), 2,500명의 펠타스테스(경보병)와 아리아이오스 휘하의 약 10,000명의 아시아 군대를 이끌었다. 키루스는 전투의 결과가 왕의 운명에 달려있음을 알고, 그리스인 지휘관 스파르타의 클레아르코스에게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맞서 중앙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클레아르코스는 이를 거부했고, 티사페르네스 휘하의 페르시아군 좌익은 키루스 군과 교전할 수 있었다. 키루스는 중앙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돌격했으나 전사했다. 티사페르네스는 자신이 반역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키루스의 그리스 군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아리아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그는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스 군대는 티사페르네스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티사페르네스는 이들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식량을 공급하고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 사이, 티사페르네스는 페르시아 장군 아리아이오스와 그의 경보병들을 그리스 군대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스 고위 장교들은 티사페르네스의 연회 초대에 응했다가 포로로 잡혀 참수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의 딸 중 한 명과 결혼시키고 리디아 총독 및 소아시아 페르시아 군대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5]

4. 1. 다리우스 2세의 죽음과 왕위 계승 분쟁

다리우스 2세가 기원전 404년에 사망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페르시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 2세가 그의 형제를 암살하려던 계획을 알게 되어 왕에게 알렸고, 왕은 키루스를 투옥시켰다. 하지만 키루스의 어머니 파뤼사티스의 간청으로 키루스는 사면되어 그의 사트라피로 돌려보내졌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그[키루스의 체포]에 대한 분노는 그를 이전보다 더욱 왕국에 대한 열망을 갖게 만들었다."[4]

4. 2. 키루스의 반란과 쿠낙사 전투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사르디스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연장하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410년 경,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아들 키루스에게 사트라프 직을 빼앗기고 카리아 태수직으로 제한되면서 키루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키루스가 왕위에 오른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편에 서서 키루스와 맞서 싸웠다.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키루스는 전사했고,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의 태수직을 되찾았다.[4]

기원전 404년, 다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가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왕에게 알렸으며, 이로 인해 키루스는 투옥되었다. 그러나 키루스는 어머니 파뤼사티스의 간청으로 사면받고 자신의 사트라피로 돌아갔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인해 키루스는 왕위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4]

복수를 결심한 키루스는 피시디아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준비하는 척하며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 기원전 401년 봄, 키루스는 크세노폰의 "만 명"을 포함한 모든 병력을 사르디스에서 진격시켰다. 그는 능숙한 관리와 보상을 약속하며 그리스 군대의 불안감을 해소했다. 킬리키아로 파견된 스파르타 함대와 케이리소포스 휘하의 700명의 스파르타 병력이 키루스를 지원했다.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소집했다.

기원전 401년 10월, 쿠낙사 전투가 벌어졌다. 키루스는 10,400명의 그리스 호플리테스(중무장 시민 병사), 2,500명의 펠타스테스(경보병)와 아리아이오스 휘하의 약 10,000명의 아시아 군대를 이끌었다.

키루스는 전투의 결과가 왕의 운명에 달려있음을 알고, 그리스인 지휘관 스파르타의 클레아르코스에게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맞서 중앙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클레아르코스는 이를 거부했고, 티사페르네스 휘하의 페르시아군 좌익은 키루스 군과 교전할 수 있었다. 키루스는 중앙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돌격했으나 전사했다. 티사페르네스는 자신이 반역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키루스의 그리스 군대는 그의 죽음 소식에 절망했다. 그들은 페르시아 동맹인 아리아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그는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스 군대는 티사페르네스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티사페르네스는 이들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식량을 공급하고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 사이, 티사페르네스는 페르시아 장군 아리아이오스와 그의 경보병들을 그리스 군대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스 고위 장교들은 티사페르네스의 연회 초대에 응했다가 포로로 잡혀 참수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의 딸 중 한 명과 결혼시키고 리디아 총독 및 소아시아 페르시아 군대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5]

4. 3. 키루스 사후

키루스가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편을 들어 키루스와 싸웠다.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키루스는 전사했고,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의 태수직을 되찾았다.[4]

티사페르네스는 자신이 키루스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키루스 편에 섰던 그리스 군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리스 군인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티사페르네스는 그리스 고위 장교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포로로 잡은 뒤 처형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의 딸 중 한 명과 결혼시키고 리디아 총독 및 소아시아 페르시아 군대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5]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 편을 들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에서 패배했는데, 그는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결집시켰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기병에게 유리한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워 승리했다. 결국 티사페르네스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다.

5. 스파르타와의 전쟁과 죽음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를 지원한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여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고, 기원전 399년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으로 타격을 입었다. 티사페르네스는 카리아로 진격할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집결시켰지만, 아게실라오스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를 공격했다.

이후 아게실라오스 군과 교전했지만, 기병에 유리한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 유리한 위치에서 싸운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패배했다. 결국, 아들 키루스를 잃고 원한을 품은 태후 파리사티스의 모함과 패전의 책임을 물어, 대왕이 파견한 티트라우스테스에게 처형당했고, 티리바조스가 후임 태수가 되었다.[6]

5. 1. 소아시아에서의 갈등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사르디스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는 처음에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으나,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으로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장기화시켜 양쪽 모두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410년경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아들 키루스에게 사트라프 직위를 빼앗기고 카리아 태수직으로 제한되면서,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와 대립하게 되었다.[6]

키루스가 왕위에 오른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편에 서서 키루스와 싸웠다. 기원전 401년 쿠나크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전사하면서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 태수직을 되찾았다.[6]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를 지원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티사페르네스는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군대를 집결시켰지만, 아게실라오스 2세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를 공격했다. 이후 아게실라오스 군과 직접 교전했지만,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운 아게실라오스 2세에게 패배했다. 결국 태후 파리사티스의 모함과 패전의 책임을 물어 대왕이 보낸 티트라우스테스에게 처형당했고, 티리바조스가 후임 태수로 임명되었다.[3][6]

기원전 478년에서 387년경의 포카이아, 이오니아의 주화. 사트라프의 머리 장식을 한 티사페르네스의 초상으로 추정되지만, 이 주화에는 표식이 없어 귀속은 불확실하다.


티사페르네스는 소아시아로 돌아온 후 키루스에게 충성한 그리스 도시들을 처벌하기 위해 공격했고,[6] 이는 기원전 399년에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396년, 스파르타의 왕이자 지휘관인 아게실라오스 2세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다. 티사페르네스는 휴전을 제안하고 협정을 맺었지만, 페르시아 증원군이 도착하자마자 협정을 파기했다. 아게실라오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카리아로 진격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를 공격했다. 기원전 395년, 아게실라오스는 사르디스를 공격할 것이라고 밝혔고, 티사페르네스는 이를 속임수라고 판단하여 카리아에 군대를 집중시켰지만, 아게실라오스는 실제로 사르디스를 공격했다.[3]

파르나바조스 2세가 티사페르네스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티트라우스테스와 태후 파뤼사티스가 이를 지지했다. 결국 티트라우스테스는 티사페르네스를 암살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티사페르네스는 콜로새에서 아리아에우스에게 유인되어 기원전 395년에 살해되었다.[6]

5. 2. 몰락과 처형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사르디스사트라프였던 티사페르네스는 스파르타아테네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여 양쪽 모두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410년경, 다리우스 2세의 둘째 아들 키루스에게 사르디스 태수직을 빼앗기고 카리아 태수직으로 한정되면서,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와 대립하게 되었다.[6]

키루스가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티사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편에 서서 쿠나크사 전투(기원전 401년)에서 키루스와 싸웠다. 키루스가 전사한 후, 티사페르네스는 사르디스 태수직을 되찾았다.[6]

티사페르네스는 키루스를 지원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공격하면서 스파르타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기원전 399년,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티사페르네스는 카리아로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아게실라오스 2세는 평야를 피하고 보병에게 유리한 위치에서 싸워 승리했다.[6]

이후 티사페르네스는 아게실라오스 2세와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페르시아 증원군이 도착하자마자 협정을 파기했다. 아게실라오스 2세는 카리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헬레스폰토스 프리지아를 공격했다. 기원전 395년, 아게실라오스 2세가 사르디스를 공격하겠다고 하자, 티사페르네스는 이를 속임수로 판단하고 카리아에 군대를 집중시켰으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실제로 사르디스를 공격하여 성공했다.[3]

결국 티사페르네스는 파르나바조스 2세의 주장과, 아들 키루스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태후 파뤼사티스의 압력으로 몰락했다. 페르시아 왕은 티사페르네스를 제거하기 위해 '킬리아르크'(재상) 티트라우스테스를 파견했다. 티트라우스테스는 티사페르네스를 콜로새에 있는 아리아에우스의 저택으로 유인하여 기원전 395년에 살해했다.[6]

6. 유산 및 평가

이란 백과사전(Encyclopædia Iranica)에서는 티사페르네스를 한편으로는 성급하고 솔직한 인물로,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쟁이자 믿을 수 없는 사기꾼으로 묘사했다.(그는 크세노폰에게 "《아나바시스》에서 불성실함과 맹세 위반의 최고의 예시"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학자가 언급했듯이, "그에게 공정하게 말하자면 . . . 배신이 일반화되고 있던 시대에 그는 자신이 섬긴 두 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 남았다"라고 평가했다. 티사페르네스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적 중 하나이자 부도덕한 외교관의 모델로 보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리스 전통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특히 페르시아 자료가 없고 크산토스 오벨리스크(Lycian Xanthos stele)의 관련 부분이 아직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5]

티사페르네스가 죽은 후, 카리아는 여전히 아케메네스 제국의 보호 아래, 헤카토미드 왕조라는 반독립적인 지역 군주 계통을 재건했다.[7]

참조

[1] 서적 The Oxford Introduction to Proto-Indo-European and the Proto-Indo-European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Iranica in the Achaemenid Period (c. 550–330 B.C.): Linguistic Study of Old Iranian Proper Names and Loanwords, Attested in Non-Iranian Texts Peeters
[3]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Little, Brown
[4] 서적 Plutarch's Lives http://www.gutenberg[...]
[5] 간행물 ČIΘRAFARNAH http://www.iranicaon[...] Encyclopaedia Iranica
[6] 문서 Tissaphernes
[7]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Ancient Greece and Rom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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