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사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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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사티스 2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공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결혼한 여성이다. 그녀는 기원전 333년 이소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며,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결혼을 통해 아케메네스 왕조와의 결속을 다졌다. 결혼 이후 파리사티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녀가 알렉산더 사후 록사네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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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사티스 2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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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파리사티스 2세 |
로마자 표기 | Parisatis Ise |
출생 | 기원전 4세기 |
사망 | 기원전 323년 |
배우자 | 알렉산드로스 3세 |
아버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
어머니 | 아토사 (아케메네스 왕조) |
왕조 | 아케메네스 왕조 |
2. 초기 생애
기원전 338년, 아버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암살된 후, 오빠 아르세스가 잠시 페르시아를 통치했고, 기원전 336년에는 사촌 다리우스 3세가 왕위를 이었다.[1] 아버지의 죽음 이후 파리사티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계속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2]
2. 1. 이수스 전투와 포로 생활
기원전 338년 부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죽고, 그녀의 오빠인 아르세스가 잠시 페르시아를 통치했지만, 기원전 336년 둘째 조카였던 다리우스 3세가 왕위를 잇는다.[4] 아버지의 죽음 이후, 파리사티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페르시아 궁전에서 계속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다리우스 3세가 원정을 가 있는 동안, 파리사티스와 그녀의 자매들은 많은 페르시아 엘리트들과 함께 페르시아 군에 동행했다. 이소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파리사티스와 그녀의 친척들은 다마스쿠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장군 파르메니온에게 포로로 잡혔다.[5]3.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결혼
알렉산더가 인도 원정을 나갔을 때 파리사티스 2세는 다리우스 3세 가문의 여인들과 함께 수사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324년 파리사티스는 수사에서 알렉산더와 결혼했다. 같은 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와도 결혼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왕가와 탄탄한 결속을 다졌다.[5][6]
결혼 후 파리사티스 2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엘리자베스 도넬리 카니와 같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플루타르코스가 파리사티스를 스타테이라의 동생인 드리페티스로 오인했다고 추정한다. 카니는 파리사티스가 록사네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므로, 파리사티스 또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더 이치에 맞다고 주장한다.[5]
3. 1. 수사 합동 결혼식
기원전 324년, 파리사티스 2세는 수사에서 알렉산더와 결혼했다. 같은 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와도 결혼하여,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왕가와 탄탄한 결속을 다졌다.[5][6] 이 결혼 축하 행사는 5일간 진행되었으며, 다른 90명의 페르시아 귀족 여인들도 알렉산더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군인들과 결혼했다.[6]결혼 후 파리사티스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엘리자베스 도넬리 카니 등 일부 역사학자들은 플루타르코스가 스타테이라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파리사티스를 스타테이라의 여동생 드뤼페티스로 오인했다고 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사후, 첫 번째 왕비 록사네는 자신의 지위와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스타테이라와 그 자매를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카니는 파리사티스가 알렉산더의 왕비였고, 스타테이라처럼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어 록사네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므로, 파리사티스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5]
4. 알렉산드로스 사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을 떠났을 때, 파리사티스 2세는 다리우스 가문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수사에 남아 있었다.[5]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324년 파리사티스는 수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장녀 스타테이라와도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두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왕가와 굳건한 결속을 다졌다.[5][6] 결혼 축하 행사는 5일간 지속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90명의 다른 페르시아 귀족 여인들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군인들과 결혼식을 올렸다.[6]
결혼 이후 파리사티스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엘리자베스 도넬리 카니와 같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플루타르코스가 파리사티스를 스타테이라의 동생인 드리페티스로 오인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스타테이라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서 파리사티스가 언급되었을 수 있다고 믿는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후, 그의 첫 번째 왕비였던 록사네는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 4세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스타테이라와 그의 자매를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카니는 파리사티스 역시 이러한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5] 파리사티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비였다면, 스타테이라처럼 임신했을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록사네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5]
참조
[1]
서적
Garthwaite
2005
[2]
서적
Carney
2000
[3]
서적
O'Brien
2001
[4]
서적
Garthwaite
2005
[5]
서적
Carney
2000
[6]
서적
O'Brie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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