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페터 회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터 회글은 1897년 딩골핑에서 태어난 인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경찰관이 되었다. 1933년 나치 친위대에 입대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원이 되었고, 국가보안국에서 요한 라텐후버의 부관으로 일했다. 1945년 4월, 헤르만 페겔라인을 체포했으며, 히틀러 사후에는 그의 시신을 화장하는 데 참여했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포위를 뚫으려다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급 1914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프리츠 바이에를라인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으로, 하인츠 구데리안과 에르빈 롬멜의 참모로 북아프리카, 동부, 서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기갑교도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과 떡갈잎 및 검을 수여받았으며, 종전 후에는 전쟁 포로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어 군사 관련 저술 활동을 했다.
  • 2급 1914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쿠르트 달루에게
    쿠르트 달루에게는 독일 군인이자 경찰, 나치 친위대 고위 간부로서, 나치당 입당 후 친위대에서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질서경찰 총책임자,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 대행을 역임하며 홀로코스트에 깊이 관여한 전범이다.
  • SS상급돌격대지도자 - 오토 스코르체니
    오토 스코르체니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특수작전 부대를 지휘하며 베니토 무솔리니 구출 작전 등 여러 중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전쟁 범죄 가담 및 나치 정권 부역 혐의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 SS상급돌격대지도자 -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서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 학살 실행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유대인 강제 이송 및 절멸 수용소 운영을 총괄, 종전 후 도피했으나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 후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재판은 홀로코스트 연구와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무장친위대원 - 귄터 그라스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을 비롯한 단치히 삼부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즘의 영향을 다룬 독일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조각가이며, 무장친위대 복무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치 과거 청산과 사회 정의를 위해 활동하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무장친위대원 - 프리츠 비트
    프리츠 비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SS 소장으로,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사단장으로 활동하며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지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연합군 포격으로 전사한 독일 군인이다.
페터 회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페터 회글
출생일1897년 8월 19일
사망일1945년 5월 2일
출생지딩골핑, 바이에른, 독일 제국
사망지베를린, 나치 독일
소속독일 제국
나치 독일
군 복무1916년–1919년
1934년–1945년
최종 계급하사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베를린 공방전
소속 부대국가보안국
지휘국가보안국 제1과

2. 생애

페터 회글은 바이에른 왕국 딩골핑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경찰로 복무하다 나치 친위대에 입대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임무를 맡았다. 국가보안국(RSD)에서 요한 라텐후버의 부관으로 일했으며, 베를린 공방전 당시 퓌러엄폐호에서 근무했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연락책 헤르만 페겔라인 체포 임무를 수행했고, 히틀러 사후 베를린을 탈출하려다 바이덴다머 교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페터 회글은 1897년 바이에른 왕국 딩골핑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하고 란트슈트에서 방앗간 일을 하다가 1916년 제16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하사 계급까지 달고 1919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 바이에른 경찰에 들어갔고, 1932년 형사경찰로 소속을 옮겼다.

2. 2. 나치 친위대 경력

회글은 1933년 나치 친위대에 입대했다(대원 번호 249,998).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원으로, 1934년에 상급돌격지도자(중위급)로 승진했다. 1935년 4월부터 국가보안국(RSD)에서 요한 라텐후버의 부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RSD 제1과 과장이 되었다. 오버잘츠베르크, 뮌헨, 베를린 등에서 근무했다. 1944년 11월 이후 베를린에 머무르며 형사이사관(소령급에 해당하는 게슈타포 계급) 직함을 달았다.




2. 3. 베를린 전투와 최후

1945년 1월부터 회글은 국가수상부 지하의 퓌러엄폐호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퓌러엄폐호는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되면서 히틀러의 최후의 퓌러본부가 되었다.

1945년 4월 27일, 회글은 하인리히 히믈러의 베를린 연락책인 헤르만 페겔라인 집단지도자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고 퓌러엄폐호에서 나왔다. 페겔라인은 히틀러를 버리고 중립국으로 도망치기 위해 퓌러엄폐호를 몰래 빠져나갔었다. 페겔라인은 베를린의 아파트에서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처형 에바 브라운의 소유인 보석류를 챙겨 스웨덴 또는 스위스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페겔라인의 자택에 들이닥친 회글과 RSD는 페겔라인을 마취시켜 퓌러엄폐호로 끌고 갔고 페겔라인은 급조한 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날 저녁, 히틀러는 BBC 방송을 통해 히믈러가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을 통해 서방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격노한 히틀러는 히믈러를 체포하고 페겔라인을 군법회의에 회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빌헬름 몽케 여단지도자가 회의 사회를 맡았고 요한 라텐후버, 한스 크렙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등이 참여했다. 몽케는 페겔라인이 명백한 탈영 행위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고 선고하고 라텐후버와 RSD에게 처분을 넘겼다. 페겔라인은 RSD에게 살해되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회글은 에발트 린들로프, 한스 라이서, 하인츠 링게와 함께 히틀러의 시체를 엄폐호 밖으로 운반하여 화장시켰다. 다음날 5월 1일 밤 회글은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소련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시도했다. 그러나 회글은 바이덴다머 교를 건너던 와중에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5월 2일 한밤중에 죽었다. 향년 47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