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몽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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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몽케는 독일의 군인으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11년 뤼베크에서 태어나 나치당에 입당하고 친위대에 들어간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AH) 부대에서 복무하며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발칸 전역 등에 참여했다. 그는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제26 기갑척탄병 연대장, 제1 SS 기갑사단 사단장을 역임했으며, 베를린 전투에서 총통 관저 방어 사령관을 맡았다. 몽케는 전쟁 범죄 혐의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종전 후 소련에 포로로 잡혀 1955년 석방되었고, 200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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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몽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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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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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헬름 모온케 |
출생일 | 1911년 3월 15일 |
출생지 | 자유 도시 뤼베크, 독일 제국 |
사망일 | 2001년 8월 6일 |
사망지 | 바르스뷔텔, 독일 |
소속 | 나치 독일 |
군 종류 | 무장친위대 |
복무 기간 | 1931년–1945년 |
최종 계급 | 친위대 여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소장 |
지휘 | |
지휘 부대 | 제1SS기갑사단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캄프그루페 모온케 |
전투 및 전쟁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훈장 | |
수훈 | 기사철십자장 독일십자장 (금장) 전공십자장 |
경력 | |
사단장 | 제1SS기갑사단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
전임자 | 테오도어 비슈 |
후임자 | 오토 쿰 |
임기 시작 | 1944년 8월 20일 |
임기 종료 | 1945년 2월 6일 |
2. 초기 생애 및 친위대 경력
빌헬름 몽케는 1911년 뤼베크에서 태어나 초기 교육과 직업 경험을 쌓았다. 1931년 나치당과 친위대(SS)에 가입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인 'SS-Stabswache Berlin'에 선발되었고, 이 부대는 여러 개편을 거쳐 최종적으로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가 되었으며, 몽케는 이 부대의 창설 멤버로서 초기 경력을 쌓았다. 그는 부대 내에서 중대장 등 여러 직책을 맡으며 경력을 이어갔다.
2. 1. 초기 생애
몽케는 1911년 3월 15일 뤼베크에서 가구 제작자인 아버지 빌헬름 몽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유리 및 도자기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관리직까지 올랐고, 경제학 학위도 취득했다.1931년 9월 1일, 몽케는 당원 번호 649,684번으로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직후 친위대(SS)에도 SS 번호 15,541번으로 입대하여 SS-Mann|에스에스만deu(사병) 계급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독일 총리로 임명된 후, 베를린의 SS 본부는 모든 SS 연대에 히틀러 개인 경호 부대로 보낼 최우수 병사 3명의 명단을 요청했다. 몽케는 1933년 3월 이 부대에 선발되었고, 같은 해 3월 17일 SS 소위로 진급했다. 그는 처음 국회의사당 경비를 담당하는 SS-Stabswache Berlin|에스에스 슈타프스바헤 베를린deu에 배속되었다. 1933년 8월에는 중대장 중 한 명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이 부대는 훈련 부대인 SS-Sonderkommando Zossen|에스에스 존더코만도 초센deu과 SS-Sonderkommando Jüterbog|에스에스 존더코만도 위터보크deu를 흡수하여 요제프 디트리히의 지휘 아래 SS-Sonderkommando Berlin|에스에스 존더코만도 베를린deu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몽케는 제2대대로 옮겨 제3중대 지휘관을 맡게 되었다. 1933년 11월, 뮌헨 폭동 10주년을 맞아 Sonderkommando|존더코만도deu는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으며, 이 의식 이후 부대는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AH)라는 새로운 명칭을 받았다. 1934년 4월 13일,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부대 명칭을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로 최종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2. 2. 친위대 입대 및 초기 경력
몽케는 1911년 3월 15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빌헬름 몽케였으며, 가구 제작자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유리 및 도자기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관리직까지 올랐고, 경제학 학위도 가지고 있었다.몽케는 1931년 9월 1일 나치당에 입당(당원 번호 649,684)했으며, 직후 친위대(SS)에 SS 번호 15,541번으로 입대했다. 그는 SS-''Mann''(사병) 계급으로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독일 총리가 된 후, 베를린의 SS 본부는 모든 SS 연대에 히틀러 개인 경호 부대로 전출 보낼 최우수 병사 3명의 명단을 요청했다. 몽케는 1933년 3월 이 부대에 선발되어, 처음에는 국회의사당 경비를 담당하는 ''SS-Stabswache'' 베를린(SS-참모 경비 베를린)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8월까지 몽케는 두 명의 중대장 중 한 명이 되었다.
9월, 이 부대는 훈련 부대인 ''SS-Sonderkommando Zossen''과 ''SS-Sonderkommando Jüterbog''이 디트리히의 지휘 아래 합병되면서 ''SS-Sonderkommando Berlin''으로 개편되었다. 이 합병으로 몽케는 제2대대로 전출되어 제3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33년 11월 뮌헨 폭동 10주년에 ''Sonderkommando''는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했으며, 의식이 끝난 후 부대는 새로운 명칭인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AH)를 받았다. 1934년 4월 13일,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LAH의 명칭을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로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빌헬름 몽케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LSSAH 소속 중대장으로 참전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대대 지휘권을 인수했고, 이 시기 웜후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1941년 발칸 전역에서는 전투 중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회복 후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받았다.
1943년 SS 중령으로 승진하여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창설에 참여,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장을 맡았다.[1] 1944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대를 지휘하며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훈했지만, 캐나다군 포로 학살 사건 연루 혐의도 받았다. 같은 해 8월, LSSAH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단장으로서 몽케는 1944년 말 벌지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 중 예하 부대에 의한 말메디 학살이 발생했다. 1945년 1월 SS-''여단지도자(Brigadeführer)''로 승진했으나, 이후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최전선에서 물러났다.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 베를린 공방전 중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베를린 중심 정부 구역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묀케 전투단'을 지휘했다. 히틀러 자살 후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5월 2일 소련군에 항복했다.
3. 1. 주요 참전 전투
몽케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LSSAH 연대의 제5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9월 7일에 부상을 입고 프라하의 병원에서 회복했으며, 이로 인해 부상장 흑장을 받았다. 1939년 9월 29일에는 철십자 훈장 2급을, 11월 8일에는 철십자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LSSAH 제2대대 제5중대를 지휘했다. 5월 28일, 대대장이 부상을 입자 제2대대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 시기 몽케는 웜후트 인근에서 영국군 제48사단 및 프랑스군 포로 약 80명을 살해한 사건(웜후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적은 없으며, 1988년 독일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1993년 영국 정부의 관련 파일 미공개 사실이 드러나며 사건이 다시 불거졌으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41년 발칸 전역에서 제2대대를 지휘하던 중,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공습으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다리 절단을 권유했지만 몽케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발의 일부를 절제해야 했다. 부상 회복 중이던 1941년 12월 26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수여받았으며,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보충 대대로 전출되었다.
1943년 SS 중령으로 승진한 몽케는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제26 기갑척탄병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 후, 그는 이 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과 교전하여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의 지휘 하 부대가 퐁트네르페뉘에서 캐나다군 포로 3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4년 8월 20일, 몽케는 제1 SS 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벌지 전투(라인강 방어 작전 및 노르트빈트 작전)에 참전했다. 이 작전은 서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몽케의 사단은 제1 SS 기갑군단 소속으로 아르덴에서 작전 선봉을 맡았으나, 독일군의 연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4년 12월 16일 작전이 시작되었고, SS-''Obersturmbannführer''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전투단(''Kampfgruppe'')이 선두에서 진격했다. 12월 17일, 파이퍼 부대는 말메디 인근에서 최소 68명의 미국 전쟁 포로를 학살했는데, 이는 말메디 학살로 알려졌다. 몽케 사단의 진격은 미군의 저항과 중요 다리 및 연료 저장소 파괴로 인해 지연되었고, 12월 24일에는 진격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벌지 전투는 1945년 1월 27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몽케는 1월 30일 SS-''여단지도자(Brigadeführer)''(친위대 소장)로 승진했다. 이후 사단과 함께 헝가리로 이동하여 전선 강화를 시도했으나, 공습으로 귀 등에 부상을 입어 최전선에서 물러나 총통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1945년 4월 20일,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에 도달하며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4월 22일, 아돌프 히틀러는 몽케를 총통 관저를 포함한 베를린 중심 관청 지구의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몽케는 약 2,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묀케 전투단'을 편성하고 총통 지하 벙커에 사령부를 두었다. 그의 부대는 5월 2일 항복할 때까지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을 방어했다. 소련군에게 관청가 및 국회의사당은 나치 독일의 상징이었기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략 대상이었으며, 메이데이 퍼레이드 전에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다.
4월 28일, 하인리히 힘러가 연합국과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시도한 사실과 에바 브라운의 의붓동생인 헤르만 페겔라인의 탈영 사실이 알려지자 격분한 히틀러는 페겔라인 체포를 명령했다. 몽케는 페겔라인을 재판하기 위한 특설 군사 법정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페겔라인이 만취 상태라는 이유로 재판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종료시켰다. 이후 페겔라인은 요한 라텐후버가 이끄는 국가보안국(RSD)에 의해 4월 29일 심야에 총살되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자 몽케는 미리 계획된 탈출 작전을 실행했다. 목표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엘베강 서안의 미군 점령 지역이나 베를린 북부의 독일군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5월 1일 밤 11시, 몽케는 트라우델 융에, 게르다 크리스티안, 에른스트-귄터 쉔크, 발터 헤벨 등 약 20명으로 구성된 첫 번째 그룹을 이끌고 탈출을 시작했다. 이들은 U반 터널을 통해 이동하여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에서 지상으로 나왔고, 인근의 바이덴담 다리를 피해 샤리테 병원 방면으로 우회하여 슈프레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후속 그룹 중 일부는 바이덴담 다리를 직접 건너려다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후 몽케 그룹은 슐트하이스 맥주 양조장에서 수백 명의 피난민 및 패잔병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5월 2일, 베를린 방어 사령관 헬무트 바이트링이 베를린 시내 모든 독일군 부대에 즉시 항복 명령을 내리면서 탈출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몽케와 그의 그룹은 소련군에 항복했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생존자들은 자살을 택했다.
3. 2.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1943년 9월 1일, 1926년생 히틀러유겐트 출신 신병 16,000명이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창설 멤버가 되었다. 이 사단의 상급 부사관과 장교는 주로 동부 전선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었다.[1] 상급돌격대지도자(SS-Obersturmbannführer)였던 몽케는 1943년 9월 15일, 이 사단 예하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몽케는 1941년 4월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오른쪽 다리가 짧아져 심한 통증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때때로 모르핀과 같은 강한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고 후에 역사가 토마스 피셔에게 언급했다. 이러한 건강 문제가 그의 지휘 능력이나 판단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건강 상태는 보직에 영향을 미쳐, 1942년 3월부터 1943년 5월까지는 라이프슈탄다르테의 보충 대대 지휘관을 맡기도 했다. 이후 "통증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졌다"고 판단한 쿠르트 마이어의 설득으로 제12 SS 기갑사단의 연대장직을 수락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몽케는 노르망디 학살의 일환으로 퐁트네르 페스넬에서 캐나다군 포로 35명을 살해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직접적인 개입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전후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제12 SS 기갑사단은 팔레즈 포켓을 사수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단 병력의 약 40~50%에 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몽케는 자신이 지휘하는 캄프그루페(전투단)를 이끌고 디브 강 동쪽으로 후퇴했다. 노르망디 전역의 상황이 악화되어 전선이 센 강까지 밀려나자, 몽케는 센 강 서쪽 강둑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독일군의 도하 작전을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44년 7월 11일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몽케는 1944년 8월 31일까지 이 캄프그루페를 지휘했으며, 이후 심하게 부상당한 테오도르 비슈의 후임으로 라이프슈탄다르테(LSSAH)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3. 3. 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몽케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LSSAH 소속 제5중대장으로 참전했다. 9월 7일 부상을 입고 프라하 병원에서 치료받았으며, 이로 인해 부상장 흑장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29일 철십자 훈장 2급, 11월 8일 철십자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서는 LSSAH 제2대대 제5중대를 지휘했다. 5월 28일, 대대장이 부상을 입자 제2대대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 시기 몽케는 웜후트 인근에서 영국군 및 프랑스군 포로 약 80명을 학살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며, 1988년 독일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3년 영국 정부의 관련 파일 미공개 사실이 드러나며 사건이 다시 주목받았으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는 발칸 전역에서도 제2대대를 지휘했다.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침공 첫날 공습 중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절단을 권유했으나 몽케는 이를 거부했다. 부상이 심각하여 발의 일부를 절제해야 했다. 회복 중이던 1941년 12월 26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몽케는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3월에 보충 대대로 배치되었다.
1944년 8월 20일, 몽케는 제1 SS 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라인강 방어 작전(Operation Watch on the Rhine)과 노르트빈트 작전(Operation Nordwind)으로 이어진 아르덴 공세에 참여했다. 이는 서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몽케의 사단은 제1 SS 기갑군단 소속으로 공세의 선봉을 맡았으나, 독일군의 고질적인 연료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1944년 12월 16일 작전이 시작되었고, SS-''Obersturmbannführer'' 요아힘 파이퍼가 이끄는 전투단(''Kampfgruppe'')이 선두에서 진격했다.
1944년 12월 17일, 파이퍼 부대는 뷜링겐의 미군 연료 저장소를 점령했다. 같은 날 말메디 인근 교차로에서는 파이퍼 휘하 LSSAH 병사들이 최소 68명의 미국 전쟁 포로를 학살하는 말메디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몽케 사단의 진격은 미군의 저항과 퇴각하는 미군에 의한 교량 및 연료 저장소 파괴로 지연되었고, 12월 24일경에는 공세가 중단되었다. 1945년 1월 1일 루프트바페의 공습 지원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독일 공군에 큰 손실을 안겼다. 이때 연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낼 준비를 마쳤다. 아르덴 공세는 1945년 1월 27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으며, 3일 후인 1월 30일 몽케는 SS-''Brigadeführer''로 승진했다. 이후 LSSAH와 제1 SS 기갑군단은 전황이 악화되던 헝가리 전선으로 이동했으나, 몽케는 1945년 2월 공습으로 귀 등에 부상을 입고 사단장 직에서 물러나 총통 예비대(Führerreserve)로 배치되었다.
3. 4. 베를린 전투

부상에서 회복한 후, 몽케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베를린 중심부 정부 구역(라이히스칸츨라이 및 총통 벙커 포함, '치타델레' 구역) 방어 사령관으로 직접 임명받았다. 그의 지휘소는 라이히스칸츨라이 지하 벙커에 위치했다. 몽케는 '캄프그루페 몽케'(Kampfgruppe Mohnke, 몽케 전투단)를 편성했으며, 이는 두 개의 약한 연대로 구성되었다. 주력 부대는 LSSAH 방공포 중대, SS-슈탄다르텐퓌러 안할트 휘하의 LSSAH 훈련 및 보충 대대 병력, LSSAH 경호대대(Leibstandarte (LSSAH) SS Guard Battalion) 소속 병력 800명(총통 경호 임무) 등 약 2,000명 규모였다.
1945년 4월 20일, 소련군이 베를린 외곽에 도달하고 시내 중심부를 향해 포격을 개시하면서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헬무트 바이드링 포병대장을 베를린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몽케는 라이히스칸츨라이와 총통 벙커 방어 임무를 위해 바이드링의 지휘 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몽케의 SS 전투단과 바이드링 장군의 LVI 기갑군단 및 기타 부대를 합친 총 병력은 약 45,000명의 정규군과 40,000명의 국민돌격대였다. 이들은 베를린 포위 및 공격을 위해 투입된 약 150만 명의 소련 붉은 군대 병력과 맞서 싸워야 했다.
몽케의 전투단은 나치 독일의 심장부에 위치했기 때문에,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부터 5월 2일 전투 종료 시까지 격렬한 포격을 받았다. 특히 독일 국회의사당과 라이히스칸츨라이 주변에서의 시가전은 매우 치열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소련군에게 국회의사당은 나치 독일의 상징이었기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점령 목표였다.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메이데이 퍼레이드 전에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다.
베를린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히틀러는 몽케에게 하인리히 힘러의 부관이자 에바 브라운의 처제 남편인 SS-Gruppenführer 헤르만 페겔라인의 탈영 혐의에 대한 군사 재판을 열도록 명령했다. 4월 27일 페겔라인이 총통 벙커에서 도주했고, 다음 날인 28일에는 힘러가 연합국과 단독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격분한 히틀러는 페겔라인 체포를 명령했고, 몽케를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 군사 법정에 회부했다. 재판에는 한스 크렙스 장군,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요한 라텐후버 등이 배석했다. 몽케는 훗날 작가 제임스 P. O'Donnell에게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나는 직접 재판을 주재해야 했다... 나는 피고인 [페겔라인]이 고위 장교들의 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군사 재판을 열었다... 우리 군사 재판관들은 독일 육군 군사 재판 매뉴얼을 앞에 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피고 페겔라인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행동하여 재판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 만취한... 페겔라인은 먼저 법정의 자격을 뻔뻔스럽게 문제 삼았다. 그는 ... 힘러에게만, 히틀러가 아니라 그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남자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 울부짖고, 칭얼거리고, 토하고, 사시나무 잎처럼 떨었다...
: 나는 이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이전 진술을 포함한 모든 가용 증거에 기초하여, 이 불쌍한 장교는 명백한 탈영 죄를 범했다... 그러나 독일 육군 매뉴얼은 독일 병사는 그의 정신과 신체가 분명하고, 그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내 생각과 동료 장교들의 생각으로는 헤르만 페겔라인은 재판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절차를 종료했다... 그래서 나는 페겔라인을 [SS] 라텐후버 장군과 그의 경비대에 넘겼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재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몽케는 절차를 종료시켰고, 페겔라인은 요한 라텐후버가 이끄는 RSD(Reichssicherheitsdienst)에 넘겨져 4월 29일 심야에 총살되었다.
4월 30일, SS-Sturmbannführer 오토 귄셰로부터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몽케는, 사전에 계획된 탈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했다. 계획은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베를린 서쪽 엘베강의 연합군 점령 지역이나 북쪽의 독일군 부대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몽케는 자신이 지휘하는 '치타델레' 구역 내 모든 지휘관들에게 히틀러의 죽음과 탈출 계획을 알렸다.
5월 1일 밤 11시, 약 10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탈출이 시작되었다. 몽케가 이끈 첫 번째 그룹에는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 게르다 크리스티안, 엘제 크뤼거, 히틀러의 영양사 콘스탄체 만치아르리, 의사 에른스트-귄터 쉥크, 외교관 발터 헤벨 등 약 20명이 포함되었다. 몽케는 베를린 북부 프린첸알레(Prinzenallee)에 있는 독일군 부대와 합류할 계획으로, U반 터널을 따라 이동했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 부근에서 지상으로 나온 후, 슈프레강을 건너기 위해 인근 바이덴담 다리(Weidendammer Brücke)를 피해 샤리테 병원 방면으로 우회하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슐트하이스-파첸호퍼(Schultheiss-Patzenhofer) 양조장 건물에 도착하여 그곳에 피신해 있던 수백 명의 독일 민간인 및 군인들과 합류했다.
5월 2일, 베를린 방어 사령관 바이드링 장군은 베를린에 남아있는 모든 독일군의 즉각적인 항복을 명령했다. 소련군의 포위망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몽케는 소련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몽케 그룹의 일부 인원(SS 병력 포함)은 항복을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4.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몽케는 소련군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는 NKVD에 인계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약 10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1955년 10월 10일 석방되었다. 전쟁 중 그의 부대가 캐나다군 포로 살해 및 웜후트 학살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석방 이후에는 서독 바르스뷔텔에서 거주하며 자동차 판매업 등에 종사하였고, 2001년 8월 6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담프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1. 포로 생활
항복 후, 몽케와 그의 부대 '캄프그루페 몽케'의 다른 고위 장교들은 소련군 제8근위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의 허가를 받아 군 참모장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5월 3일 밤, 몽케와 나머지 독일군 장교들은 NKVD에게 넘겨졌다. 1945년 5월 9일, 그는 심문을 위해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루비앙카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후 6년 동안 독방에 갇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다. 그 후 모스크바 근교 보이코보에 있는 장교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4년간 더 복역했으며, 1955년 10월 10일에 석방되었다.
몽케의 연대는 1944년 노르망디에서 캐나다군 전쟁 포로 3명을 살해한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하여 몽케는 캐나다 당국의 조사를 받았으나, 기소되지는 않았다. 또한 영국 국회의원 제프 루커는 웜후트 학살과 관련하여 몽케가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기소를 추진했다. 그러나 몽케는 이러한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며, 포로 처형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재수사한 독일 검찰은 기소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석방 후 몽케는 서독 함부르크 인근 바르스뷔텔에 거주하며 소형 트럭 및 트레일러 판매업에 종사했다. 그는 2001년 8월 6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담프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2. 석방 후 삶
항복 후, 몽케와 그의 부대 '캄프그루페 몽케'의 다른 고위 장교들은 소련군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의 허가를 받아 제8근위군 참모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5년 5월 3일 밤, 이들은 NKVD에 인계되었다. 5월 9일, 몽케는 심문을 위해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루비앙카 감옥 독방에 6년간 수감되었다. 이 기간 동안 히틀러의 최후에 대해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다. 이후 모스크바 근교의 보이코보(또는 볼코보) 장교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4년을 더 복역한 뒤, 1955년 10월 10일에 석방되었다.
몽케의 부대는 1944년 노르망디에서 캐나다군 전쟁 포로 3명을 살해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당국의 조사를 받았으나,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또한 영국 노동당 하원 의원 제프 루커는 웜후트 학살과 관련하여 몽케를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하려 했으나, 몽케는 "나는 영국군 포로를 받지 않거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사건 재조사 후 독일 검찰은 기소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석방 후 몽케는 서독 함부르크 인근 바르스뷔텔에 정착하여 소형 트럭 및 트레일러 판매업(자동차 판매업)에 종사했다. 그는 2001년 8월 6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에커른페르데 근교의 담프(Damp)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전쟁 범죄 의혹
몽케가 지휘했던 연대는 1944년 노르망디에서 캐나다군 전쟁 포로 3명을 살해하는 데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몽케 본인도 캐나다 당국의 조사를 받았으나, 기소되지는 않았다.
또한 영국의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제프 루커는 웜후트 학살과 관련하여 몽케가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기소를 추진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몽케는 이러한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으며, 역사학자 토마스 피셔에게 "나는 영국군 포로를 받지 않거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은 재조사되었지만, 독일 검찰은 기소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6. 훈장
- 1939년판 철십자 훈장
- * 2급: 1939년 9월 21일
- * 1급: 1939년 11월 8일
- 1939년판 전상장
- * 흑장: 1940년 2월 10일
- * 은장: 1941년 9월 15일
- 보병돌격장: 1940년 10월 3일
- 검장 무공십자장: 1940년 10월 3일
- 독일 십자장 금장: 1941년 12월 26일, 제1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제II대대 슈투름반퓌러로서 수훈
-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7월 11일,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 연대장, 오버슈투름반퓌러로서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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