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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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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이었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로 돌아와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지만, 결혼 19일 만에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사망했으며, 그의 사촌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남계 혈통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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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
기본 정보
프톨레마이오스 11세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역할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 기간기원전 80년
이전 통치자베레니케 3세
다음 통치자프톨레마이오스 12세
배우자베레니케 3세
아버지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어머니클레오파트라 셀레네
개인 정보
출생기원전 115년경
사망기원전 80년
묻힌 곳알려지지 않음
이름

2. 생애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그의 삼촌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기원전 81년 또는 기원전 80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유일한 적통 딸인 베레니케 3세가 잠시 단독 통치를 했다. 로마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친로마 성향의 통치자를 원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어린 아들을 이집트로 보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나, 19일 만에 베레니케 3세를 암살했다. 이로 인해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남계 혈통은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의 뒤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망명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와 아마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할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싸웠을 때, 재산을 가지고 코스 섬으로 피난했지만, 로마와 싸우고 있던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로마로 망명했다.

2. 2. 이집트 귀환과 즉위

기원전 81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사망하자, 이집트에서는 베레니케 3세가 단독으로 통치했다.[2] 그러나 로마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친로마 성향의 통치자를 원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이집트로 보냈다. 술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의 유언을 로마에서 공개하여 이러한 간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2]

이 유언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베레니케 3세와 강제로 결혼하고 기원전 80년에 파라오로 즉위했다. 베레니케 3세는 그의 계모이자 사촌, 그리고 이복 여동생일 수도 있었다.[2] 공동 통치를 시작했지만, 19일 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베레니케 3세를 암살했다. 베레니케 3세는 매우 인기가 있었기에, 이 암살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결국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다.[2]

2. 3. 베레니케 3세 살해와 죽음

기원전 81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사망하자, 이집트에서는 베레니케 3세가 단독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로마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친로마 성향의 통치자를 원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이집트로 보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유언을 로마에서 공개하여 이러한 간섭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2]

이 유언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나, 결혼 19일 만에 베레니케 3세를 암살했다. 베레니케 3세는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는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결국 그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다.

3. 왕조의 몰락과 로마의 개입

알렉산드로스 2세는 친할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아버지인 알렉산드로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싸우고 있을 때, 재보를 가지고 코스 섬(Kos)에 피난했다. 그러나 로마와 싸우고 있던 폰투스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포로로 잡혔다.[2]

기원전 81년에 라튀로스가 사망하자, 이집트에서 그의 딸인 베레니케 3세가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 2세는 로마의 장군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원조를 받고, 기원전 80년에 이집트로 귀국하여 베레니케 3세와 억지로 결혼하여 파라오로 즉위했다. 공동 통치를 시작했지만, 19일 뒤 알렉산드로스 2세는 베레니케 3세를 암살했다.[2]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살해당했고,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남계 혈통이 완전히 끊기게 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2]

참조

[1] 문서
[2] 서적 The Encyclopedia of Ancient History (13 Vols.) Wiley-Black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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