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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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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는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원으로, 기원전 14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형 프톨레마이오스 9세 간의 권력 다툼 속에서 키프로스 총독과 이집트 왕을 역임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 암살 후에는 형의 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으며, 테베 반란 진압을 위한 군자금 마련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훼손하여 백성의 지지를 잃고 암살당했다.

2. 배경 및 초기 생애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족으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손자이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출생 이름은 알렉산드로스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호루스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14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

기원전 116년,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8세(퓌스콘)가 사망하면서 이집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는 알렉산드로스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장자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라튀로스)를 옹립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 3세는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라튀로스를 파라오로 즉위시켰다.

2. 1. 가족 관계와 권력 투쟁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기원전 180년에 사망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6세, 클레오파트라 2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세 자녀를 남겼다. 이들은 기원전 169년부터 기원전 164년까지 공동 통치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형제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163년, 그는 추방되어 키레네(Cyrene, Libya)로 물러났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기원전 145년에 사망하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집트로 소환되어 왕위에 올랐고,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결혼)와 결혼했다.[3]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는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갈등은 결국 클레오파트라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간의 내전(기원전 132–126년)으로 이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승리했지만, 클레오파트라 2세와 화해하여 기원전 124년에 그녀를 공동 섭정으로 복위시켰다.[3]

콤옴보에 있는 호루스 앞에서 클레오파트라 3세, 그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2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벽 부조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장남은 기원전 144–3년경에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9세로, 클레오파트라 2세와의 내전 중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원전 140년경에 태어났는데, 그가 나중에 사용한 호루스 이름은 그가 기원전 140–39년에 태어났음을 나타낼 수 있다.[1]

기원전 116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남편 프스콘이 죽은 후 공동 통치자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이하 알렉산드로스)를 지명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연장자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이하 라튀로스)의 옹립을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라튀로스를 파라오로 옹립했다. 그러나 라튀로스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대립은 깊어져 기원전 110년에 라튀로스가 클레오파트라 암살을 꾀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옹립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어머니와 대립하게 되어, 기원전 109년에는 클레오파트라가 다시 라튀로스를 복위시키고, 기원전 107년에는 다시 알렉산드로스를 즉위시키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를 암살하고(기원전 101년), 형과 화해하여 그의 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88년, 테베에서 원주민 반란이 발생하여, 군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에서 보물을 약탈했다. 이것이 신민의 반감을 사서 인기가 없던 왕은 도망갔지만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형 라튀로스가 복위하게 되었다.

3. 키프로스 총독 및 왕 (기원전 116-107년)

기원전 116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남편 퓌스콘이 죽은 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장자인 라튀로스의 옹립을 요구했고, 결국 라튀로스가 파라오로 즉위했다.[4] 같은 해 10월의 현존하는 파피루스 문서에는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공동 통치자로 나열되어 있다.[6]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키프로스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파우사니아스는 클레오파트라 3세가 기원전 117년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키프로스로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계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주장한다.[5]

기원전 115년 4월 이전에 클레오파트라 2세가 사망하면서,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이집트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누이이자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해야 했고, 클레오파트라 4세는 안티오코스 9세와 결혼했다.[8][9] 클레오파트라 4세는 안티오코스 9세를 지원하기 위해 키프로스에 들러 군대를 모집하고 키프로스 함대를 장악했다.[10] 아마도 이로 인해 기원전 114년에서 기원전 113년 사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키프로스 왕'을 선포하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를 선언했다.[1][6]

기원전 10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9세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발생했다. 파우사니아스는 클레오파트라 3세가 자신의 내시 하인 여러 명에게 상처를 입히고, 아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증거로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알렉산드리아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도시에서 추방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1][12]

4. 이집트 왕 (기원전 107-88년)

기원전 116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8세(별명 퓌스콘)가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이하 알렉산드로스)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장자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이하 라튀로스)의 옹립을 요구했고, 결국 라튀로스가 파라오로 즉위했다. 하지만 라튀로스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기원전 110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라튀로스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하고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옹립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역시 어머니와 대립했고, 기원전 109년에는 클레오파트라 3세가 다시 라튀로스를 복위시켰다. 기원전 107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다시 알렉산드로스를 파라오로 즉위시키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키프로스를 떠나 펠루시움으로 항해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와 새로운 공동 섭정으로 왕위에 앉혔다.[13] 그는 왕위에 오른 방법 때문에 '파레이삭토스'(παρείσακτοςel, ''pareísaktos'', "밀입국자")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었다.[14][1]

기원전 101년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를 암살하고, 키프로스에서 세력을 키우던 형 라튀로스와 화해했다. 이후 형의 딸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기원전 88년,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분으로 약화된 군대의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도굴했다. 이는 백성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암살당했다. 그 후 라튀로스가 파라오로 복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두상,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2세기. 독일 노이에스 박물관

4. 1.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의 전쟁 및 유대 개입

기원전 107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몰아내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왕위에 앉혔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키프로스로 갔으나, 기원전 106년에 다시 침공하여 섬을 정복했다.[16] 키레네는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기원전 105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에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4]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가 프톨레마이스 아코를 공격하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유대를 침공했다.[19]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유대를 발판으로 이집트를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유대를 침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해상으로 페니키아를 침공한 후 다마스쿠스로 진격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프톨레마이스 아코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이들을 피해 이집트로 들어가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돌아와 그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기원전 102년 초에 키프로스로 돌아갔다.[18]

4. 2. 베레니케 3세와의 통치

기원전 101년 9월, 클레오파트라 3세는 공식 문서에서 사라진다. 유스티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이하 알렉산드로스)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살해했다고 기록한다.[20] 같은 해 10월,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1세의 딸인 조카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칭호를 '필라델포스'(형제애)로 바꾸었고, 부부는 '테오이 필라델포이'(형제애를 가진 신)로서 왕조 숭배에 들어갔다.[29][18]

기원전 91년, 상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후그로나포르(기원전 205~185년)와 하르시에시(기원전 131~130년)의 반란에 이어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토착 이집트 봉기 중 최신 사건이었다. 반란 지도자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이전 반란 지도자처럼 파라오의 칭호를 주장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반군은 테베를 장악했고 테베 사제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의 군대는 또한 라토폴리스와 파티리스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반란은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트리아콘타스케누스(하 누비아) 지역과의 접촉을 잃게 만들었다. 메로에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로마 이집트 시대까지 유지했다.[21]

기원전 88년 5월경, 알렉산드리아인들과 군대가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여 그를 추방했다. 포르피리오스는 반란이 알렉산드로스가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분노의 결과라고 보고한다.[22] 스트라본은 알렉산드로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금관을 녹여 유리로 만든 관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말한다.[23]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알렉산드로스와 베레니케 3세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 해군을 모았지만 전투에서 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미라에서 두 번째 군대를 모집하여 키프로스를 침공했지만 살해당했다.[24][1][25]

이 마지막 군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로마 공화국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이 대출에 대한 담보 제공에는 상속자가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넘기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26]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유언장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개입 가능성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통치 기간 내내 그를 억눌렀고, 그는 로마인들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하도록 강요했다.[25]

4. 3. 상 이집트 반란과 몰락

기원전 116년, 클레오파트라 3세는 남편 프스콘이 죽은 후 공동 통치자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이하 알렉산드로스)를 지명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연장자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 (이하 라튀로스)의 옹립을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라튀로스를 파라오로 옹립했다. 그러나 라튀로스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대립은 깊어져 기원전 110년에 라튀로스가 클레오파트라 암살을 꾀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옹립되었다.[20]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어머니와 대립하게 되어, 기원전 109년에는 클레오파트라가 다시 라튀로스를 복위시키고, 기원전 107년에는 다시 알렉산드로스를 즉위시키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기원전 101년 9월, 클레오파트라는 공식 문서에서 사라진다. 유스티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살해했다고 기록한다.[20]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를 암살하고 형과 화해하여 그의 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다. 같은 해 10월, 프톨레마이오스는 조카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1]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자신의 칭호를 '필라델포스'(형제애)로 바꾸었고, 부부는 '테오이 필라델포이'(형제애를 가진 신)로서 왕조 숭배에 들어갔다.[29][18]

기원전 91년, 상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후그로나포르(기원전 205~185년)와 하르시에시(기원전 131~130년)의 반란에 이어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토착 이집트 봉기 중 최신 사건이었다. 반란 지도자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이전 반란 지도자처럼 파라오의 칭호를 주장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반군은 테베를 장악했고 테베 사제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의 군대는 또한 라토폴리스와 파티리스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반란은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트리아콘타스케누스(하 누비아) 지역과의 접촉을 잃게 만들었다. 메로에는 이 지역을 장악하여 로마 이집트 시대까지 유지했다.[21]

기원전 88년에는 테베에서 원주민 반란이 발생하여, 군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알렉산드로스 3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묘에서 보물을 약탈했다. 이것이 신민의 반감을 사서 인기가 없던 왕은 도망갔지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인들과 군대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에 대항하여 그를 추방했다. 포르피리오스는 반란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분노의 결과라고 보고한다.[22] 스트라본은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금관을 녹여 유리로 만든 관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말한다.[23] 알렉산드리아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아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베레니케는 왕국을 되찾기 위해 해군을 모았지만 전투에서 패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미라에서 두 번째 군대를 모집하여 키프로스를 침공했지만 살해당했다.[24][1][25] 이 때문에 형 라튀로스가 복위하게 되었다.

이 마지막 군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로마 공화국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이 대출에 대한 담보 제공에는 상속자가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넘기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26] 로마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사후 이 유언장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개입 가능성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통치 기간 내내 그를 억눌렀고, 그는 로마인들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를 취하도록 강요했다.[25]

5. 결혼 및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원전 109년 왕위에 오르면서 누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결혼했었다. 그들은 기원전 103/02년에 그녀가 안티오코스 8세와 재혼하기 전에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낳았을 것이다.[27][15]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를 살해한 후, 기원전 101년 10월에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베레니케 3세와 결혼했다(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의붓딸이자 조카).[28] 그들은 딸 클레오파트라 5세를 낳았을 것이다.[29]

이름이미지출생사망비고
프톨레마이오스 11세기원전 80년 4월기원전 80년 4월 며칠 동안 어머니 베레니케 3세와 공동 섭정.
클레오파트라 5세기원전 57년사촌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결혼하여 기원전 79-69년 그와 공동 섭정, 딸 베레니케 4세와 기원전 58-57년 공동 섭정.


6. 가계도

Πτολεμαῖος Ἀλέξανδρος|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grc 10세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1대2대3대4대
프톨레마이오스 9세프톨레마이오스 8세 퓌스콘[30]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30]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클레오파트라 1세[30]아르시노에 3세
클레오파트라 3세[30]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30]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30]
클레오파트라 2세[30]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30]
안티오코스 3세
라오디케 3세


참조

[1] 웹사이트 Ptolemy X http://instonebrewer[...] 2019-11-13
[3] 서적
[4] 문서 Epitome of Pompeius Trogus
[5] 문서
[6] 서적
[7] 웹사이트 Cleopatra II http://instonebrewer[...] 2019-11-12
[8] 웹사이트 Antiochus IX at Livius.org https://www.livius.o[...]
[9] 웹사이트 Ptolemy VI Philometor and Cleopatra II at Livius.org https://www.livius.o[...]
[10] 문서
[11] 문서 Epitome of Pompeius Trogus
[12] 서적
[13] 웹사이트 Cleopatra III http://instonebrewer[...] 2019-11-12
[14] 문서 Geography
[15] 웹사이트 Cleopatra Selene http://instonebrewer[...] 2019-11-12
[16] 문서 Bibliotheca
[17] 웹사이트 Ptolemy Apion http://instonebrewer[...] 2019-11-12
[18] 서적
[19] 문서 Antiquities of the Jews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FGrH
[23] 문서 Geography
[24] 문서 FGrH
[25] 서적
[26] 문서 Agr.
[27] 간행물 Anc. Soc.
[28] 문서
[29] 웹사이트 Berenice III http://instonebrewer[...] 2019-11-12
[30] 서적 The Complete Royal Families of Ancient Egy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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