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기원전 138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78년에 사망했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유구르타 전쟁, 킴브리족과의 전쟁 등에서 공을 세웠다. 집정관을 거쳐 폰토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로마로 돌아와 민중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독재관에 취임했다. 그는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개혁을 추진했지만, 잔혹한 숙청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개혁은 로마 제정 시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킬리키아 총독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귀족 출신으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지휘 능력을 보였으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lucullan"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 킬리키아 총독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에 태어난 로마의 정치가이자 웅변가, 문인으로, 로마 공화정 시대에 활동하며 뛰어난 웅변술과 저술 활동으로 라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회색 동전, 오른쪽을 향한 남성 머리
기원전 54년에 그의 손자 Pompeius Rufus에 의해 주조된 데나리우스에 있는 술라의 초상
이름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별명펠릭스 (행운)
로마자 표기L. Cornelius L. f. P. n. Sulla
생애
출생기원전 138년
사망기원전 78년 (60세)
사망 장소포추올리, 이탈리아
사인알 수 없음
매장지알 수 없음
국적로마
가족
배우자율리아 (일리아?)
아엘리아
클로엘리아
카이킬리아 메텔라
발레리아
자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코르넬리아
파우스트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코르넬리아 파우스타
코르넬리아 포스투마
군사 경력
복무 기간기원전 107년 – 기원전 82년
참전 전쟁유구르타 전쟁
킴브리 전쟁
사회 전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 내전
수상풀잎 왕관
경력
관직재무관 (기원전 107년)
원(元) 재무관 (기원전 106-105년)
원(元) 법무관 (기원전 105년)
레가투스 (기원전 106-103년)
트리분 밀리툼 (기원전 103년)
레가투스 (기원전 102-101년)
수도 법무관 (기원전 93년)
원(元) 법무관 (기원전 92년)
레가투스 (기원전 90-89년)
집정관 I (기원전 88년)
아우구르 (기원전 88-78년)
프로콘술 (기원전 87-81년)
독재관 (기원전 82년-79년)
집정관 II (기원전 80년)
속주 총독킬리키아 (기원전 92년)
정치적 반대자가이우스 마리우스
주요 업적
업적술라의 헌법 개혁
전쟁
지휘 전쟁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09년)
동맹시 전쟁 (기원전 91년)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87년-85년)
로마 내전 (기원전 87년)

2. 생애

2. 1. 어린 시절

술라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출신이었다.[9]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가문이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9] 술라의 조상이자 그의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는 10파운드가 넘는 은식기를 소지한 것이 적발되어 상원에서 추방되었다.[10][30] 그 후 술라 자신이 등장할 때까지 그의 가문은 국가의 최고직에 오르지 못했다.[10][30]

젊은 시절 술라는 공동주택에서 거주했고 재산 수준은 같은 공동주택에 살던 해방노예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92] 돈이 부족했던 술라는 로마의 코미디언, 배우, 기타 연주자, 무용수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9] 처음에는 노래만 하다가 무대에서 활동하던 중 희극의 한 종류인 아텔란 희극을 쓰기 시작했다.[9]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마지막 부인인 발레리아와 결혼했을 때에도 여전히 "여배우, 음악가, 무용수들과 어울리며 밤낮으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고 언급한다.[93]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고 가난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92] 살루스티우스는 그를 박식하고 지능적이며 그리스어에 능통했다고 말한다.[93] 그는 계모와 정부 니코폴리스에게 상속을 받아 재산을 얻었다.

2. 2. 군사 경력

기원전 107년,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재무관으로 누미디아유구르타와의 전쟁에 참가했다.[49] 술라는 누미디아로 진격하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기병대를 조직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약탈을 일삼던 마리우스에게 늦게 합류했다.[49] 마리우스는 콘스탄틴에 동계 주둔지를 설치하고, 이동 중 유구르타와 그의 장인 보쿠스 1세의 습격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술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잘 싸웠다.[49] 보쿠스는 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원했고, 술라는 아울루스 만리우스와 함께 파견되어 보쿠스를 설득하여 그의 태도를 누그러뜨렸다.[49] 보쿠스는 마리우스가 없는 동안 술라에게 사절을 보냈고, 술라는 프로프라에토르 권한으로 수비를 맡아 사절을 접대했다.[49]

포로로 잡히는 유구르타 왕


보쿠스는 술라를 완전히 신뢰하여 마리우스에게 술라를 협상 대표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술라가 호위병들과 함께 출발하자 보쿠스의 아들 볼룩스가 그를 맞이했다. 정찰 결과 유구르타가 소수의 병력으로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술라는 볼룩스를 믿고 대담하게 진군하여 위기를 모면했다.[49] 술라는 보쿠스와 협상하여 평화를 원한다면 유구르타를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결국 보쿠스는 유구르타를 술라에게 넘겨주었다.[49] 이 공으로 술라는 큰 명성을 얻었다.[49]

킴브리 침입자들을 물리친 마리우스의 모습


기원전 113년부터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 등이 로마 영토에 침입하여 로마군은 여러 곳에서 패배했다.[49] 기원전 105년 10월 6일,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패하자, 마리우스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술라를 레가투스와 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49] 술라는 갈리아 부족의 왕을 사로잡고, 마르시족을 설득하여 동맹국으로 만드는 등 공을 세웠다.[49]

그러나 마리우스의 질투로 더 이상의 성과를 바라지 않게 된 술라는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휘하로 들어갔다.[49] 카툴루스 휘하에서 술라는 능력을 발휘하여, 마리우스의 군대가 식량 부족에 시달릴 때에도 카툴루스의 군대는 풍족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49] 기원전 101년, 베르켈라에 전투에서 술라는 카툴루스의 부하로서 참전하여 킴브리족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49]

소위 "술라"상. 기원전 2세기 중요 로마 인물의 초상을 본뜬 복제품(아우구스투스 시대 것으로 추정)이며, 소위 "마리우스"상과 유사하여 두 조각상이 형제 또는 라이벌로서 함께 기획되고 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뮌헨, 글립토테크.


기원전 97년 술라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50] 이듬해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대사를 만나 외교 협상을 벌여 로마의 이익을 가져왔다.[50] 킬리키아를 통치하는 동안, 술라는 원로원으로부터 카파도키아의 왕좌에 아리오바르자네스를 복위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50] 술라는 로마 군대를 이끌고 동맹군을 모집하여 험준한 지형으로 진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아리오바르자네스를 왕좌에 복위시켰다.[50] 그의 군대는 그의 지도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임페라토르''라고 불렀다.[50]

로마에서 주조된 데나리우스로, 율라가 유구르타 전쟁을 끝맺은 그의 첫 번째 큰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카파도키아에서의 술라의 원정은 그를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그는 파르티아 제국의 사절단을 만났다. 술라는 파르티아 사절 오로바주스와 아리오바르자네스 사이에 자리를 잡아 로마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50] 파르티아 사절 오로바주스는 파르티아로 돌아온 후 처형되었지만, 파르티아인들은 조약을 비준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의 명확한 경계로 설정했다.[50]

동맹시 전쟁 당시 로마 영토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술라는 남부 전선에서 활약하여 풀잎관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52] 술라는 폼페이아니족의 클루엔티우스 군대를 격파하고 놀라로 도주하는 적 2만 명 이상을 살해했으며,[59] 히르피니족의 도시 아에클라눔을 함락시키고 히르피니족을 항복시켰다.[59] 또한 삼니움족의 장군을 무찌르고 보비아눔과 같은 도시를 함락시켰다.[59]

2. 3. 첫 번째 내전 및 쿠데타

기원전 88년, 술라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94]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 술라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려 했다.[95] 술피키우스는 흉악한 인물로, 해방 노예와 외국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매매했으며, 주위를 3000명의 검사로 둘러싸고 반원로파를 자처했다.

이에 술라는 놀라에 주둔한 군사를 규합하여 로마로 진군하였다.[95]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술라의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로마에서 탈출했다. 술라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참수되었다.

옛날 술라의 흉상으로 여겨졌던 것, 코펜하겐 니카를스베르그 글립토테크.


술라는 술피키우스의 법률을 무효화하고, 상원의 지위를 강화하며, 평민 트리뷰누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제출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술라 독재 시대에 통과된 법률을 소급 적용한 것으로 본다.

이후 술라는 킨나에게 로마를 맡기고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나섰다. 킨나는 술라의 정책을 계승할 것을 맹세했지만, 취임하자마자 호민관에게 술라를 고발하게 했다. 술라는 이를 무시하고 전쟁에 출정했다.

술라의 로마 진군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종래에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에 의해 로마 군대가 사령관의 사병화된 결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라쿠스 형제에 대해 원로원 최종 결의가 내려졌고, 집정관이 치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진압한 선례가 있어, 같은 구도라는 지적도 있다.

2. 4. 미트라다테스 전쟁

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테네를 공격했다.[64] 당시 아테네는 피레우스에 주둔한 아르켈라오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며, 양측은 투석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싸웠다. 술라는 땅굴에 황과 역청을 넣어 불태워 많은 아테네군을 죽였다. 강화 사절이 술라에게 아테네 조상들의 업적을 설명하자, 술라는 "나는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이 아니라 아테네를 함락시키라고 보내진 장군"이라고 답했다.[72] 결국 식량이 떨어진 아테네는 항복했다.

기원전 86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술라는 15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으로 아르켈라오스의 12만 대군과 싸웠다.[72] 폰투스군은 기병과 낫 전차로 공격했으나 로마군은 이를 격퇴하고 15000명의 폰투스 밀집보병도 격파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정예기병으로 로마군 중앙을 돌파하려 했으나, 술라의 지원으로 로마군 좌익과 우익이 모두 적을 궤멸시켜 폰투스군은 1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72][16] 이러한 폰투스군의 피해 규모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5]

같은 해, 오르코메누스에서 아르켈라오스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이 달아나려 하자 술라는 "시민들이여 훗날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였냐고 물으면 오르코메누스였다고 답하라!"라고 외쳤다.[76] 이 말에 로마군은 다시 전투의지를 다지고 승리했다.

기원전 85년 술라와 미트라다테스 6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강화를 체결했다.[82]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미트라다테스를 굴복시키고,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대한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직전의 소아시아


기원전 87년부터 86년에 걸친 술라의 진군

2. 5. 두 번째 내전 및 로마 진격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는 동안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선포했다.[96] 마리우스는 곧 사망했지만, 뒤를 이은 킨나기원전 86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아시아로 파견했다.[78] 플라쿠스는 군대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가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핌브리아는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루쿨루스를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그의 병력은 술라에게 흡수되었다. 핌브리아는 자살했다.[79][80] 킨나는 이탈리아 방위를 준비하다 군단 폭동으로 사망했다.

기원전 85년 술라의 진군


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했다.[97] 메텔루스 피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크라수스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17][97] 당시 집정관은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였다.[98] 술라는 티파타 산 전투에서 노르바누스를 격파하고,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는 교섭 중 병사들이 술라에게 항복하여 스키피오는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17]

기원전 82년 카르보와 소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었다.[99] 술라는 사크리포르투스 전투에서 소 마리우스를 격파했고,[18] 프라에네스테에서 소 마리우스를 포위했다. 이후 술라는 카르보의 군대를 격파하고, 메텔루스 피우스는 파벤티아(Faventia)에서 카르보를 막아내고 10000명을 죽였다.[101]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에서 카르보군 2만 명을 죽였다.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는 로마로 진격했고, 술라는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텔레시누스와 싸워 승리하여 로마를 장악했다.[102][20]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자살했고,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났다가 폼페이우스에게 처형되었다.

콜리네 전투 다음 날,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반대파 학살을 시작했다.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학살하고,[103] 1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를 하사하여 정적 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살생부를 만들어 4천700명을 숙청했다.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부관참시되었으며,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104] 18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살생부에 올랐으나 도망쳤다. 술라는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 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평가했다.[104]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만이 술라에 대항했다.[84][105]

2. 6. 독재관 취임과 은퇴

기원전 81년 로마는 집정관이 모두 공석이었다. 술라는 10만의 병력을 배경으로 원로원을 압박해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에 취임했다. 원래 로마 공화정에서 독재관은 임기가 6개월이었지만 술라는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무기한 임기의 독재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의 제안으로 민회는 이를 승인했다.[106] 일반적으로 독재관은 집정관에 의해 임명되지만, 당시 집정관 선거를 위해 선출되는 인테르렉스(interrex)로서 원로원 제1인자(princeps senatus)였던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락쿠스(기원전 100년 집정관)가 임명되었고, 그가 소집한 켄투리아 민회(centuriata comitia)에서 선거 개최 대신 술라를 "법 제정과 국가 재건을 위한 독재관"으로 선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86] 동시에 과거 집정관이나 프로콘술(proconsul)로서 수행했던 행위도 승인되었고, 장래 수행할 조치에 대해서도 승인되었다. 키케로는 이 발레리우스 법을 시대적 요구이긴 하지만 폭군을 낳았다고 비판했다.[86]

로마를 완전히 장악한 술라는 숙청(그가 국가의 적이라고 간주한 자들의 처형 및 재산 몰수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술라의 영웅전』에서 "술라는 이제 피를 흘리기 시작했고, 수도 없이 한계 없는 죽음으로 도시를 채웠다"라고 기술하며, 살해된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술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술라는 그의 추종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숙청 대상자를 돕거나 은닉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졌고, 숙청 대상자를 죽이는 것은 탈렌트 두 개의 보상을 받았다. 숙청 대상자의 가족도 처벌에서 제외되지 않았고, 노예도 보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편들은 아내의 품에서, 아들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도살되었다."[23] 숙청 대상자의 대다수는 술라의 적이 아니었고, 대신 그들의 재산을 위해 살해되었으며, 그 재산은 몰수되어 경매되었다. 경매된 재산의 수익은 숙청 대상자를 죽인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비용을 충분히 충당하고 국고를 채웠다. 미래의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술라는 숙청 대상자의 아들과 손자들이 정치 직에 출마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 제한은 30년 이상 해제되지 않았다. 킨나의 사위였던 십 대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술라의 표적이 되었고 도시에서 도망쳤다. 그는 그의 친척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술라의 지지자였던 사람들의 노력으로 구조되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살려주는 데 동의하면서, 술라는 그의 편을 들어주던 사람들에게 미래에 그가 그들에게 위험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이 카이사르에게는 많은 마리우스들이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한다.[24][25]

독재관에 취임한 후 그는 대대적인 국정 개혁에 나섰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원로원 개혁''' :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늘리고 권한을 강화했다.
  • '''복지문제''' :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작한 곡물법을 폐지하여 무산계급의 이익을 떨어뜨리고 식민도시에 퇴역병을 이주시켰다.
  • '''사법 개혁''' : 그라쿠스 형제 이후 기사계급으로 구성되던 배심원을 다시 원로원 의원으로만 구성하였다.
  • '''군사개혁''' : 로마 직할령(루비콘강 이남)에는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군단을 가지는 전직 집정관,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하게 함
  • '''호민관 개혁''' : 호민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게 하고 연임은 10년의 휴지기가 있게함


술라 체제는 유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로마 제국의 시작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질서가 되었다. 그 외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유노, 미네르바 신전(ユピテル神殿)의 재건과 타불라리움(tabularium)(포로 로마노) 건설, 포메리움(pomerium) 확장과 호민관(護民官) 권한 축소, 프로스크립티오(proscription) 발령에 의한 민중파의 숙청, 원로원 의원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증원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 외에 예비역 병사들에게는 이탈리아의 식민 도시에 토지를 분배하여 이주시키고,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를 속주화하며, 집정관과 법무관 경험자를 속주 총독(proconsul, propraetor)으로 파견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 제도는 이미 마리우스 시대부터 관습으로 존재했지만, 술라는 이것들을 법으로 명문화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코르넬리우스 법(コルネリウス法))。

술라의 개선식을 새긴 아우레우스(aureus) 금화


독재관으로 이러한 개혁을 2년동안 정력적으로 실시한 술라는 기원전 80년 말, 돌연 사임을 발표하고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고 나폴리 근처의 바닷가의 소박한 별장에서 은둔하였다. 술라는 1년여 한가한 은퇴생활을 한 후 기원전 78년 시골에서 세상을 떠났다. 술라의 장례식은 그의 부하들이 참가한 가운데 로마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유해는 나중에 반대파에게 시신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과는 다르게 화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였다고 전한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38]

3. 개혁

술라는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다.[28] 술라는 원로원 의원 수를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리고, 법정을 원로원 의원으로만 구성하도록 했다. 모든 ''퀘스토르''들이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도록 하여 ''검열관''이 원로원 의원 명단을 작성할 필요가 없어졌다.[28] 법정의 통제권은 그라쿠스 개혁 이후로 통제권을 쥐고 있던 ''에퀴테스''에서 원로원으로 이관되었다.[28]

플레베이 집회(주요 민중 집회)에 제출되기 전에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 호민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게 하고, 연임은 10년의 휴지기가 있게 했다. 군사 개혁을 통해 루비콘강 이남에는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군단을 가지는 전직 집정관,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하게 했다.[28]

술라는 ''쿠르수스 호노룸''을 성문화하여 개인이 공직에 출마하기 전에 특정 연령과 경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 또한 개인이 공직에 재선되기 전에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집정관과 법무관이 재임 기간 동안 로마에서 근무한 다음 퇴임 후 1년 동안 주지사로서 주의 군대를 지휘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28]

기원전 80년 메텔루스 피우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직을 시작하면서 술라는 독재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군단을 해산했고, 자신의 ''리크토르''들을 해임하고 포럼에서 무방비 상태로 걸어 다니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시민에게도 설명할 것을 제안했다.[29][30]

4. 평가

술라는 일반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 진군과 독재정치의 선례를 남긴 인물로 여겨진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가 "술라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없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39] 술라의 예는 그것이 가능함을 증명했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한 시도를 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로마 공화정 몰락의 또 다른 단계로 여겨져 왔다. 술라는 속주에서 장군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지만, 이 법률들은 제국 시대까지도 효력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결연한 장군들이 상원에 대항하여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39]

술라가 제정한 상원 입회 자격, 사법 제도 개혁, 총독직 규정 등의 법률은 원수정 시대까지 로마 법령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지만, 그의 많은 법률은 사망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거부권을 가진 호민관과 그들의 입법권은 곧 회복되었는데,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집정관 시대에 이루어졌다.[40]

술라의 후손들은 제국 시대까지 로마 정치에서 계속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독재자의 이름을 새긴 데나리우스를 발행했고, 손자인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도 마찬가지였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문의 후손들은 제국 시대에 네 번의 집정관직을 역임했다. 카라칼라 황제는 술라의 무덤을 보수하고, 트로이에 있는 한니발의 석상 옆에 술라의 석상을 세우도록 명령했다.[41]

술라의 라이벌인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술라를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용기를 가진 자라고 묘사했지만, 그의 교활함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격의 혼합은 나중에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통치자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다.[42]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술라가 승리하기 전까지는 스키피오처럼, 승리한 후에는 한니발처럼 행동했으며, 귀족 사회는 지켰지만 무자비하게 이탈리아 전역에 시민들의 피바다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술라는 로마와 그리스 문화에 정통했고, 쾌락을 좋아했지만 거기에 빠지지 않았으며 유능하고 냉정했고, 사교성이 좋았지만 교묘하게 속마음을 감추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네아폴리스에서는 그리스식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87]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는 로마의 독재관 제도는 설립 이래 줄곧 절도 있게 운영되어 국가의 위기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술라는 유일하게 잔혹하게 이 권력을 행사하여 비난과 증오를 불러모았고, 이로 인해 로마인들은 독재관 제도가 전제정치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한다.[88] 술라는 원로원을 평범한 사람들로 채우고, 호민관의 권한을 극한까지 줄였으며, 다른 왕국들을 마음대로 폐립·부흥시켰고, 항복한 시민들조차 4만 명이나 학살했고, 여러 도시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89]

술라는 그 냉혹함과 보수적인 정책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개혁가로서의 면도 있으며, 그 개혁은 후에 아우구스투스 등에 의해 그대로 남은 것도 많다.

5. 연표


  • 기원전 138년경 - 로마에서 태어났다.
  • 기원전 110년 - 첫 번째 아내와 결혼했다.
  • 기원전 107년 -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관이 되었다.
  • 기원전 107–105년: 누미디아에서 유구르타 전쟁에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의 퀘스토르 및 프로퀘스토르로 참전했다.
  • 기원전 106년 - 유구르타와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 기원전 104년 - 트란살피나 갈리아에서 마리우스(두 번째 집정관 재임 중) 휘하의 레가투스로 참전했다.
  • 기원전 103년 - 트란살피나 갈리아에서 마리우스(세 번째 집정관 재임 중) 휘하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참전했다.
  • 기원전 102년–기원전 101년 - 키살피나 갈리아에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당시 집정관) 휘하의 레가투스 및 프로콘술로 참전했다.
  • 기원전 101년 -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킴브리족을 대패시키는데 참여했다.
  • 기원전 97년 - 도시 법무관(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에 당선되었다. 술라는 군사 경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기원전 95년에 법무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중은 그에게 아이딜리스가 되기를 바라며 낙선시켰다. 그러나 다음 기원전 94년에 재도전하여 법무관에 취임했다.[50]
  • 기원전 96년 - 킬리키아 속주 총독(프로프라이토르), 프로콘술로 부임했다.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의 동향을 감시하고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의 복위를 지원했다.[50] 파르티아와 로마의 최초 교류를 가지기도 했다.[50]
  • 기원전 92년경 - 귀국 후 뇌물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취하되었다.[50]
  • 기원전 90년기원전 89년 - 레가투스 프로 프라이토레로서 동맹 전쟁에서 고위 장교로 활동했다.
  • 기원전 88년 -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첫 번째 집정관에 취임했다. 로마 진군 및 마리우스 추방했다.

데나리우스에 새겨진 술라(왼쪽)와 동료 집정관 루푸스(오른쪽)

  • 기원전 87년 -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와의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군을 지휘했다.
  • 기원전 86년 - 아테네 약탈, 카이로네이아 전투 및 오르코메누스 전투에 참여했다.
  • 기원전 85년 - 마케도니아, 아시아, 킬리키아 속주를 폰투스 점령에서 해방했다.
  • 기원전 84년 - 아시아 속주를 재편했다.
  • 기원전 83년 - 이탈리아로 귀환하여 마리아파 정부에 맞서 내전을 수행했다.
  • 기원전 83년–기원전 82년 - 젊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킨나의 추종자들과 전쟁을 벌였다.
  • 기원전 82년 - 콜리나 문 전투에서 승리했다.
  • 기원전 82/81년 - 법률 제정 및 공화정 수립을 위한 독재관( ''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 causa'')에 임명되었다.
  • 기원전 80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메텔루스 피우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연초에 독재관직을 사퇴했다.[48]
  • 기원전 79년 - 집정관직 이후 키살피나 갈리아 속주 지휘권을 거부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카피톨리노 언덕의 사원 재건을 위한 감독직(curatio)은 유지했다.
  • 기원전 78년 - 아마도 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로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6. 가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리아(Ilia)였는데, 율리아 카이사리스(Julia Caesaris)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딸 코르넬리아 술라(Cornelia Sulla)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세 번째 아내가 된 폼페이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세 번째 아내)(Pompeia (wife of Julius Caesar))(폼페이아)를 낳았고, 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두 번째 아내는 아일리아(Aelia)였고, 세 번째 아내는 클로엘리아(Cloelia)였으나 불임으로 인해 이혼했다. 술라는 50세에 집정관에 당선되었을 때 유력 귀족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 출신의 카이킬리아 메텔라(Caecilia Metella)와 네 번째로 재혼했다. 메텔라와의 사이에서는 쌍둥이 남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기원전 54년 퀘스토르)(Faustus Cornelius Sulla (quaestor 54 BC))(파우스투스)와 파우스타 코르넬리아(Fausta Cornelia)(파우스타)를 포함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파우스타는 가이우스 멤미우스, 티투스 아니우스 밀로와 결혼했다. 메텔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하나는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했다.

메텔라가 죽은 후, 술라는 웅변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의 여동생인 발레리아(술라의 아내)(Valeria (wife of Sulla))와 다섯 번째로 재혼했다.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는 딸 코르넬리아 포스투마(Cornelia Postuma)(코르넬리아 포스투마)를 두었는데, 술라가 사망한 후에 태어났다.

술라의 자손들은 로마 제정 시대에도 살아남았지만, 네로 황제의 숙청으로 술라 가문은 단절되었다.

참조

[1] 서적 Valerius Maximus
[2] 서적 Appian
[3] 서적 Life of Sulla
[4] 서적 Velleius Paterculus
[5] 간행물 Broughton 1952
[6] 문서 Felix (name) 2024-11
[7] 서적 The world of Pompeii https://www.worldcat[...] Routledge 2007
[8] 논문 Sulla Felix https://www.jstor.or[...] 1951
[9] 백과사전 Sulla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 Company 1870
[10] 백과사전 Rufinus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 Company 1870
[11] 간행물 Badian 2012
[12] 논문 Sulla's March on Rome in 88 B.C. https://www.jstor.or[...] 1982
[13] 서적 SPQR: a history of ancient Rome https://www.worldcat[...] Liveright Publishing 2015
[14] 간행물 Hind 1994
[15] 간행물 Hind 1994
[16] 간행물 Hind 1994
[17] 간행물 Seager 1994
[18] 간행물 Seager 1994
[19] 간행물 Seager; Steel 1994, 2013
[20] 간행물 Seager 1994
[21] 간행물 Mackay 2009
[22] 서적 Cicero
[23] 서적 Roman Lives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4] 웹사이트 The Life of Julius Caesar https://penelope.uch[...] 2012-05-30
[25] 웹사이트 The Life of Caesar https://penelope.uch[...]
[26] 논문 The Dictator’s Mistake: Caesar’s Escape from Sulla http://www.jstor.org[...] 2000
[27] 서적 Aspects of Roman history, 82 BC–AD 14: a source-based approach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0
[28] 웹사이트 Pomerium https://penelope.uch[...]
[29] 서적 Life of Sulla
[30] 간행물 Keaveney 2005
[31] 웹사이트 Julius https://penelope.uch[...] 2012-05-30
[32] 서적 Life of Sulla
[33] 서적 Memorable Deeds and Sayings
[34] 서적 Natural History
[35] 서적 Life of Sulla
[36] 서적 Bellum Civile
[37] 웹사이트 Plutarch, Sulla, chapter 36 https://www.perseus.[...] 2015-12-09
[38] 서적 Heroes of History: a Brief History of Civilization from Ancient Times to the Dawn of the Modern Age Simon & Schuster 2002
[39] 서적 Ad Atticum
[40] 웹사이트 Life of Pompey https://penelope.uch[...]
[41] 서적 The Eastern Roman Empire under the Severans: Old Connections, new Beginnings? Vandenhoeck & Ruprecht
[42] 서적 The Prince
[43] 서적 A Pillar of Iron Doubleday 1965
[44] 논문 Ciceronian oratory and the ghosts of the past University of Michigan: UCLA 1999
[45] 서적 Swords against the Senate: the rise of the Roman army and the fall of the Republic Da Capo Press 2002
[46] 웹사이트 Plutarch, Life of Sulla https://penelope.uch[...] 2008-05-01
[47] 서적 Roman Lives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48] 서적 The date of his formal abdication of the dictatorship... still seems best put at the beginning of 80... the older view that he remained dictator until 79 has been abandoned
[49] 서적 有名言行録
[50] 서적 ペリオカエ
[51] 서적 Strategemata
[52] 서적 内乱記
[53] 서적 ペリオカエ
[54] 서적 Strategemata
[55] 서적 内乱記
[56] 서적 博物誌
[57] 서적 占いについて
[58] 서적 占いについて
[59] 서적 内乱記
[60] 서적 歴史叢書
[61] 서적 内乱記
[62] 서적 有名言行録
[63] 서적 有名言行録
[64] 서적 ミトリダテス戦争
[65] 서적 ペリオカエ
[66] 서적 ミトリダテス戦争
[67] 서적 ミトリダテス戦争
[68] 서적 ミトリダテス戦争
[69] 서적 ペリオカエ
[70] 서적 地理誌
[71]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72]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73] 서적 Strategemata
[74]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75]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76] 서적 Strategemata
[77]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78] 서적 로마 내전사
[79]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80]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81]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82]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83] 서적 미트리다테스 전쟁
[84] 서적 유명언행록
[85] 서적 유명언행록
[86] 서적 농지법에 관하여
[87] 서적 유명언행록
[88] 서적 로마 고대사
[89] 서적 로마 고대사
[90] 웹사이트 작품 정보 실라 https://opera.tosei-[...] 쇼와 음악대학 오페라 정보센터 2023-01-15
[91] 웹사이트 파비오 비온디 지휘 유로파 갈란테 헨델 '실라' 전3막 일본 초연 (이탈리아어 상연 일본어 자막 부) https://www.kanagawa[...] 가나가와 현립 음악당 2023-01-15
[92] 서적 유구르타 전기
[93] 문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94] 문서 술라의 사위
[95] 문서 술라의 제1차 로마 진군
[96] 문서 포풀라레스의 주요 인물
[97] 문서 폼페이우스
[98] 문서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99] 문서 카르보와 소 마리우스
[100] 서적 술라
[101] 서적 로마 내전사
[102] 서적 술라
[103] 서적 로마 내전사
[104] 문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105] 문서 세르토리우스
[106]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