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2세 디 사보이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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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트로 2세 디 사보이아 백작은 13세기 사보이아 백작으로, 성직자에서 백작으로 전향하여 영토 확장과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로잔의 성직자로 시작하여 잉글랜드 왕실과도 인연을 맺었고, 리치먼드 영지를 받았다. 사보이아 백작이 된 후에는 건축, 법률, 재정 개혁을 시행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을 겪기도 했다. 피에트로는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그의 형제 필리포 1세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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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2세 디 사보이아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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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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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사보이아 백작 |
통치 기간 | 1263년 ~ 1268년 |
이전 통치자 | 보니파초 |
다음 통치자 | 필리포 1세 |
가문 | 사보이아 |
아버지 | 톰마소 1세 |
어머니 | 마르게리트 드 주네브 |
배우자 | 아녜스 드 포시니 |
자녀 | 베아트리체 디 사보이아, 담 드 포시니 |
출생일 | 대략 1203년 |
출생지 | 수사, 피에몬테 주 추정 |
사망일 | 1268년 5월 15일 |
사망지 | 샤토 드 피에르-샤텔, 뷔제 |
매장지 | 오트콩브 수도원 |
2. 초기 생애 및 교회 경력
피에트로 2세는 1203년경 이탈리아 수사에서 사보이아 백작 토마스 1세와 제네바의 마가렛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가문, 특히 누이인 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딸들(프랑스의 마가렛 여왕,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 여왕, 로마인의 산치아 여왕,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베아트리체 여왕)을 통해 훗날 많은 지위와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3]
피에트로는 교회 경력을 시작하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교구에서 직책을 얻었다.[4] 1234년 교회 생활에서 은퇴한 후, 형제들과의 협상을 통해 영토를 확보하고, 포시니의 아그네스와의 결혼으로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3]
그는 영토 확장을 위해 삼촌인 제네바의 윌리엄 2세와 갈등을 겪었다. 1236년경, 사촌인 루돌프에게 매복 공격을 당해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1237년에 분쟁이 종결되었고, 아마데우스 4세는 윌리엄 2세에게 20,000 마르크와 아를로드 성을 지불하도록 하는 조약을 서명하게 했다.[3] 1240년, 동생 필립이 로잔 주교 선거에서 제네바가 지지하는 후보와 경쟁했을 때, 피에트로는 군대를 이끌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3]
1244년, 그뤼에르 백작 루돌프 3세는 그뤼에르 성을 피에트로에게 항복했고, 피에트로는 이를 루돌프 3세의 둘째 아들에게 주었다.[3] 같은 해, 코소네는 상당한 영토를 피에트로와 아마데우스에게 항복시키고, 사보이아의 종주권 하에 두었다. 그는 파이 드 보 전역에서 주요 도시와 무역로를 장악했으며, 쉴롱 성의 개축을 담당했고, 1253년까지 베른의 보호자였다.[3]
2. 1. 출생 및 가문 배경
피에트로 2세는 사보이아 백작 토마소 1세와 마르게리타 드 제네바의 일곱 번째 아들로,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라 오브 프로방스의 숙부이다. 피에트로는 이탈리아의 수사에서 태어났다.[4]귀족 가문의 장남이 아니었던 피에트로는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226년부터 1233년까지 로잔의 캐논이었으며, 1231년에 새로운 상임 주교가 임명되기 전 잠시 주교 대행을 맡았다.[4] 또한 리옹의 캐논과 아오스타 및 제네바의 수도원장 직책을 맡았으며, 1234년에 교회 생활에서 은퇴했다.[4]
아버지 토마소 1세가 사망하자, 피에트로는 맏형인 아마데우스 4세에게 사보이아 백작령 내의 상당한 영토를 요구했다. 형제들은 1234년 시옹 성에서 만나 화해 협상을 벌여 아메데오 4세를 가문의 수장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피에트로는 생-랑베르-앙-뷔제에 있는 코르니용 성과 현재 오트빌-롬네스에 있는 앙제빌 성의 지배권을 받게 되었는데, 이 두 성은 모두 피에트로가 제네바 백작에게 위협을 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 그의 형 사보이아의 윌리엄은 그를 위해 포시니의 아그네스와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이는 그에게 영토를 제공하여 그의 형들에게 문제를 덜 일으키도록 도왔다.[3]
2. 2. 교회 경력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피에트로는 로잔의 캐논(수석 사제)이 되어 교회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231년에는 상임 주교가 임명되기 전까지 잠시 주교 대행을 맡았다.[4] 또한 리옹의 캐논, 아오스타 및 제네바의 수도원장 직책을 맡기도 했다.[4]그러나 피에트로는 교회 생활에 어려움을 느꼈고, 1234년 아버지 토마소 1세가 사망하자 형 아메데오 4세에게 영토를 요구하며 교회 생활에서 은퇴했다.[4]
3. 사보이아에서의 정치 활동
피에트로는 1203년경 수사에서 사보이아 백작 토마스 1세와 제네바의 마가렛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귀족 가문의 차남으로서 교회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교구에서 직책을 얻었다.[4] 1226년부터 1233년까지 로잔의 캐논이었으며, 1231년에는 잠시 주교 대행을 맡기도 했다.[4] 이후 리옹의 캐논, 아오스타 및 제네바의 수도원장 직책을 맡았다.[4]
1234년, 피에트로는 교회 생활에서 은퇴하고, 아버지의 사망 후 맏형인 아마데우스에게 상당한 영토를 요구했다.[4] 형제들은 쉴롱에서 만나 아마데우스를 가문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합의를 맺었다. 이 합의로 피에트로는 생-랑베르-앙-뷔제에 있는 코르니용 성과 현재 오트빌-롬네스에 있는 앙제빌 성의 통제권을 얻었는데, 이 두 성은 모두 제네바를 위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
3. 1. 영토 분쟁 및 확장
피에트로는 영토 확장을 위해 숙부인 제네바의 윌리엄 2세와 분쟁을 일으켰다. 1236년경 피에트로는 제네바의 로돌프를 기습하여 사로잡았다.[3] 1237년에 분쟁이 해결되면서, 아메데오는 제네바의 윌리엄 2세에게 20,000 마르크와 아를로 (Arlod) 성을 지불하라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3] 1240년 피에트로의 형제 필리포가 로잔 주교 선거에서 제네바가 후원한 후보인 장 드 코소네와 경쟁했을 때, 피에트로는 6,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전투는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3]피에트로는 돈과 무력을 사용하여 사보이아 주변 영토를 계속 장악했다. 1244년 5월, 그뤼예르 백작 로돌프 3세는 그뤼예르 성을 피에트로에게 양도했고, 피에트로는 로돌프 3세의 차남 기욤과 그의 후계자들이 피에트로와 그의 가문에게 충성한다는 조건으로 그뤼예르 성을 기욤에게 주었다. 1244년 5월 29일, 코소네는 피에트로와 아메데오에게 주요 영토를 양도하고, 사보이아의 영지로 편입시켰다.[3] 그는 보(Vaud) 지역 전역의 무역로와 중요 마을들의 지배권을 얻으려고 하였고, 이전 통치자들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넘기도록 자주 강요했다.[3] 그는 시용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253년에는 베른의 보호자가 되었다.[3] 한 학자는 프랑스어가 스위스 서부 지역의 언어가 된 것이 부분적으로 피에트로의 그 지역 정복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
3. 2. 포시니의 아녜스와의 결혼
피에트로 2세는 1236년에 포시니의 아그네스와 결혼했다.[3] 아그네스는 아이몽 2세 드 포시니와 베아트리체 도소네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사보이 가문은 제네바 남동쪽에 위치하고 이전에는 제네바 백작의 영향권 안에 있던 포시니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장모인 베아트리체를 통해 프랑슈콩테에서도 영향력을 얻었다. 베아트리체 도소네가 시몽 드 주앙빌과 재혼하면서 피에트르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인 제프리 드 제네빌, 초대 남작 제네빌을 잉글랜드 궁정에 소개했고, 게 영주인 시몽 드 주앙빌을 포함하게 되었다.[3]그의 형제 굴리엘모는 그를 위해 아그네스와의 혼인 협상을 해주었고, 그녀는 그의 영토를 늘리는데 도움을 주어, 그는 형들과의 약간의 불화를 야기했다.[4] 이 결혼을 통해 그는 아그네스가 조인빌 가문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고뉴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아그네스의 이복 형제인 제프리 드 제네빌, 제1대 제네빌 남작을 잉글랜드로 데려왔다. 아그네스의 또 다른 이복 형제인 젊은 시몽 드 조인빌은 부르고뉴 기사들이 가스코뉴와 웨일스에서 잉글랜드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통로를 제공했다.[3]
이 둘 사이에는 포시니의 여주인 베아트리체 사보이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3]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포시니를 물려받았다. 당시에는 유리했지만 알봉이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사보이 백국에는 장기적인 문제를 야기한 알봉 백국과의 결혼 동맹이 있었다. 이로 인해 사보이 중심부에 영토가 위치한 포시니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가 생겨났다.
4. 잉글랜드에서의 활동
피에트로 2세는 1258년 옥스퍼드 조항 제정과 제2차 남작 전쟁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58년 4월 30일, 헨리 3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식적인 요구를 하기 전,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피에트로, 휴 비고드, 존, 피터 드 몽포르 등 많은 귀족들이 4월 12일에 왕국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서로 돕겠다는 엄숙한 선서를 했다. 피에트로는 헨리 3세의 이복형제들인 뤼지냥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개혁파 귀족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1260년 몽포르가 피에트로를 통치 평의회에서 해임하면서, 피에트로는 개혁파와 결별했다. 이후 피에트로는 사보이 백작이 되는 1263년까지 사보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265년 이vesham 전투 이후 페벤시 성과 리치몬드 성은 몽포르 정부에 의해 포위되었다. 두 성 모두 피에트로의 치안 판사와 관리들이 지켰다. 특히 페벤시 성은 피에트로가 플랑드르에서 보낸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았다. 피에트로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는 헨리 3세를 왕좌로 복위시키기 위해 플랑드르에서 군대를 모아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했으나, 에드워드 경의 탈출과 이vesham 전투로 인해 침공은 불필요해졌다.[3]
4. 1. 헨리 3세와의 관계 및 리치먼드 백작
1236년 1월, 피에트로의 조카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가 헨리 3세와 혼인했다. 1240년 4월 20일, 피에트로는 헨리 3세로부터 리치먼드 영지를 수여받았다. 비록 백작 자리에 임명되거나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기록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10] 1241년 1월 5일에는 기사에 임명되었고, 리치먼드 백작으로서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0]1246년 2월, 피에트로는 스트랜드와 템즈강 사이에 있는 땅을 수여받았고, 1263년 그곳에 사보이 궁전을 지었다. 사보이 궁전은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파괴되었다. 그의 유언으로 리치먼드 영지는 그의 조카 엘레오노르에게 남겨졌고, 이에 따라 영국의 왕실 영지로 넘어갔다.[11]
1241년, 헨리 3세는 푸아투 침입에 대한 지원을 모으기 위해 피에트로를 보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나바라의 국왕 테오발도 1세, 피에트로의 형제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 그의 처남 프로방스 백작 라이몽 베랑제 4세를 찾아갔다. 1242년 2월, 피에트로는 푸아투에 파견되어 헨리 3세에게 어떤 지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내졌고, 그곳에서 붙잡힐 뻔했지만 탈출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조카 프로방스의 상시와 헨리의 형제 리처드의 혼인 협상을 위해 프로방스로 갔다.
1246년에 피에트로는 아메데오 4세의 혼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보이아로 돌아갔다. 1247년 2월, 그는 베아트리체를 통해 아메데오의 손녀인 알리체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 해 5월 폰테프랙트 남작 에드먼드 드 레이시와 혼인했다.
위텀 강에 위치한 보스턴은 링컨 지역의 중요 항구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 도시는 1200년까지 브르타뉴 공작들이 보유했었다. 1241년, 피에트로는 그가 리치먼드 영지를 가졌을 시기와 비슷한 때 보스턴의 장원을 얻었다. 피에트로가 사망한 후, 장 1세 드 브르타뉴에게 돌아갔다. 도닝턴 장원도 토요일마다 장원에서 개최될 시장에 헌장이 주어졌던 1255년 쯤에 존 드 라 라이 (John de la Rye)에게서 피에트로에게 주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같은 해 상당한 재산을 지닌 유사한 헌장이 8월 15일에 수여되기도 했다. 1255년 4월 8일에 월요일 시장을 소유하도록 왕이 별도의 헌장을 피에트로에게 주기도 했다.
1246년, 왕은 페븐시 성을 피에트로에게 주었다.

4. 2. 잉글랜드 정치 참여
1236년 1월, 피에트로의 조카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가 헨리 3세와 혼인했다.[10] 1240년 4월 20일, 피에트로는 헨리 3세로부터 리치먼드 영지를 수여받았고, 그해 말 헨리 3세의 초청으로 잉글랜드로 갔다. 1241년 1월 5일, 헨리 3세는 피에트로를 기사로 임명했고, 그는 공식적으로 백작 작위를 받은 적이 없었음에도 리치먼드 백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0]1241년, 헨리 3세는 푸아투 침공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피에트로를 파견했다. 피에트로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나바라 왕 테오발도 1세,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피에트로의 형제), 프로방스 백작 라이몽 베랑제 4세(피에트로의 처남)를 방문했다. 1242년 2월, 피에트로는 푸아투에 파견되어 헨리 3세에 대한 지원 상황을 확인했다. 그는 그곳에서 붙잡힐 뻔했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피에트로는 그의 조카 프로방스의 상시와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의 혼인 협상을 위해 프로방스로 갔다.
1246년, 피에트로는 아메데오 4세의 혼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보이아로 돌아갔다. 1247년 2월, 그는 베아트리체를 통해 아메데오의 손녀 알리체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알리체는 그 해 5월 폰테프랙트 남작 에드먼드 드 레이시와 혼인했다.
위텀 강에 위치한 보스턴은 오랫동안 링컨 지역의 중요 항구였다. 1200년까지 이 도시는 브르타뉴 공작들이 소유했다. 1241년, 피에트로는 리치먼드 영지를 소유하게 된 시기와 비슷하게 보스턴의 장원을 얻었다. 피에트로가 사망한 후, 이 장원은 장 1세 드 브르타뉴에게 반환되었다. 1255년경, 도닝턴 장원도 존 드 라 라이에게서 피에트로에게 넘어갔고, 토요일마다 장원에서 시장을 열 수 있는 헌장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15일, 장원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대한 유사한 헌장도 수여되었다. 1255년 4월 8일, 왕은 피에트로에게 월요일 시장을 열 수 있는 별도의 헌장을 부여했다.
1246년, 왕은 피에트로에게 페븐시 성을 주었다. 피에트로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으나, 결국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3]
피에트로는 1258년 잉글랜드에서 제정되어 제2차 남작 전쟁으로 이어진 옥스퍼드 조항과 관련된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58년 4월 30일 헨리 3세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하기에 앞서, 많은 귀족들은 1258년 4월 12일에 왕국의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서로 돕겠다는 엄숙한 선서를 했다. 이 선서를 한 귀족들은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의 핵심이 되었으며, 6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 4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 6대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피에트로 디 사보이아, 휴 비고드, 존 피터 드 몽포르였다. 피에트로 디 사보이아는 헨리 3세의 이복 동생인 뤼지냥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개혁 중인 귀족들을 지지했다. 헨리 3세는 피에트로와 왕비 엘리너 오브 프로방스가 궁정에서 과도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1260년에 몽포르가 피에트로를 통치 평의회에서 해임했기 때문에, 피에트로는 개혁파와 결별했다. 그 후 피에트로는 1263년에 사보이아 백작이 될 때까지 사보이아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5. 사보이아 백작으로서의 통치
피에트로 2세는 1263년 조카 보니파초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톰마소 3세 디 사보이아와 사보이아 백작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그는 사보이아로 돌아와 백작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로 인해 톰마소 3세와의 분쟁이 발생했다.[3]
피에트로는 유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보이아에 여러 개혁을 도입했다. 둥근 형태의 성을 짓기 시작했고, 백작령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 구역을 나누고 샹베리에 회계소를 설치했다. 또한 백작령 전체에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하여 사법 제도를 정비했다.[3]
피에트로는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와 갈등을 겪었다. 루돌프는 시용 성을 포함한 피에트로의 영지를 점령했지만, 피에트로는 1266년에 군대를 이끌고 가 영지를 되찾았다.
피에트로는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으며,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시용 성과 피에르샤텔이라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12] 그는 형제인 필리포에게 백작 자리를 물려주었다.
5. 1. 사보이아 계승 및 분쟁
사보이아 백작 보니파초가 1263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사보이아의 계승은 혼란에 빠졌다. 피에트로 외에도, 그의 형 플랑드르 백작 토마의 15세 장남 톰마소 3세 디 사보이아 (1248년–82년)가 또 다른 계승 가능성이 있었다. 피에트로는 사보이아로 돌아와 그의 조카에게서 백작 자리를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피에트로와 톰마소보다 오래 지속된 사보이아와 피에몬테의 분쟁이 일어났다.[3]피에트로는 사보이아를 개선하기 위해 유럽을 돌아다녔던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사보이아에 많았던 정사각형의 성보다 둥근 형태의 성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백작령을 베일리프(bailli)들에게 나누어주고, 성주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그는 또한 재정 문제를 완전히 다루기 위해 샹베리에 회계소를 설치했다. 그는 백작령 전체에 발생하는 문제와 법 문제를 다룬 첫 사보이아 백작이었다.[3]
5. 2. 행정 및 사법 개혁
피에트로는 유럽을 여행하며 얻은 많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보이아를 개선하였다. 그는 당시 사보이아에 많았던 정사각형 성 대신 둥근 형태의 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백작령을 관리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성관구로 나누었다. 또한 샹베리에 회계소를 설치하여 재정 문제를 보다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 그는 백작령 전체에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한 최초의 사보이아 백작이었다.[3] 이 법령에는 재판관이 잉글랜드의 마그나 카르타에 기인한 정의를 지연시키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3]5. 3. 건축 및 문화적 업적
피에트로는 유럽을 여행하며 사보이아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사보이아에 이전까지 존재했던 사각형 성 대신 더 둥근 형태의 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백국을 관리구역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성관구로 나누었다. 또한 재정 문제를 보다 완벽하게 관리하기 위해 샹베리에 회계 사무소를 설립했다. 그는 백국 전체에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한 최초의 사보이 백작이었다.[3] 이 법령에는 그의 판사들이 잉글랜드의 마그나 카르타에 기인한 정의를 지연시키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3]5. 4.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피에트로는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와 분쟁을 겪었는데, 루돌프는 시용 성을 포함한 보 지역의 피에트로 영지를 점령했다. 피에트로는 1266년 군대를 이끌고 피에몬테로 돌아와 성과 영지를 되찾았다.이미 노년이었던 피에트로는 남자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했다. 피에트로가 사망한 장소에 대한 기록은 서로 다르다. 일부에서는 그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시용 성에서 사망했다고 하며, 다른 곳에서는 현재 이제르 주의 피에르샤텔에서 사망했다고도 한다.[12] 피에트로는 자신의 형제이자 전 리옹 대주교였던 필리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6. 사망 및 유산
피터는 1268년 비르니(현재)의 피에르-샤텔 성에서 아들 없이 사망하여 오트콤 수도원에 묻혔다.[4] 그의 유언은 그의 영국 영지를 잉글랜드 여왕이자 조카인 프로방스의 엘레노어에게 남겼고, 그의 서식스 영지는 그의 조카 아메데우스와 루이에게 남기도록 수정되었다. 이 유증은 리치먼드 명예를 사위인 브르타뉴의 존, 리치먼드 백작에게, 서식스 영지를 영주 에드워드에게 준 잉글랜드의 헨리 3세 국왕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에 따라, 사보이 백작 지위는 그의 남은 형제이자 전 관재인이자 리옹 대주교인 필리프에게 돌아갔다.[8][3]
7. 가족 관계
피에트로 2세는 1236년 포시니의 아그네스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3]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베아트리체 드 포치니 | 1237년경 - 1310년 | 어머니로부터 포시니를 상속받았으나, 비엔누아의 기그 7세와 혼인하여 사보이아 가문과 대립하던 도팽에게 포시니를 넘겨주었다.[3] 이후 가스통 7세 드 베아른과 재혼했다. |
피에트로 2세는 또한 서자 1명을 두었다.
- 이사벨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4세의 서자인 피에트로 디 살리넨토와 결혼했다.
참조
[1]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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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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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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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Genealogy of the House of Savoie
http://www.sabaudia.[...]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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