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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1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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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1세는 1218년에 태어나 1291년에 사망한 독일 왕이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4세 백작의 아들로, 13세기 중반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의 항쟁에서 황제파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1273년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오스트리아 공국을 획득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루돌프는 아들 알브레히트 1세의 왕위 계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사후 나사우의 아돌프가 독일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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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1세 (독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돌프 1세의 인장. 문구는 "신에 의해 선택된 로마인의 왕 루돌프, 영원한 아우구스투스"
칭호로마 왕 (공식 명칭: 독일 왕)
재위 기간1273년 10월 1일 – 1291년 7월 15일
대관식1273년 10월 24일, 아헨 대성당
이전 통치자콘월의 리처드 (대공위 시대)
다음 통치자나사우의 아돌프
출생일1218년 5월 1일
출생지자스바흐암카이저스툴 근처 림부르크 성
사망일1291년 7월 15일
사망지슈파이어
왕가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알브레히트 4세
어머니헤드비히 폰 키부르크
배우자게르트루트 폰 호엔베르크
부르고뉴의 이사벨라
자녀더 보기...
매장지슈파이어 대성당
통치
오스트리아 공작 및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즉위1278년 8월 26일 - 1282년 12월 27일
이전 통치자오타카르 2세
다음 통치자알브레히트 1세
케른텐 공작 즉위1278년 8월 26일 - 1286년 2월 1일
이전 통치자오타카르 2세
다음 통치자마인하르트
합스부르크 백작 즉위1278년 12월 13일 - 1291년 7월 15일 (루돌프 5세와 공동 통치, 1282년-1283년)
이전 통치자알브레히트 4세
다음 통치자알브레히트 5세
루돌프 6세
가족 및 자녀
자녀 목록마틸데, 바이에른 공작 부인
알브레히트 1세
카타리나, 바이에른 공작 부인
아그네스, 작센 공작 부인
헤드비히,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부인
클레멘시아, 헝가리 왕비
루돌프 2세, 오스트리아 공작
유디트, 보헤미아 왕비

2. 젊은 시절

루돌프 1세는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오늘날의 스위스 슈바벤 지방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과 그 주변 영지를 물려받았다. 1254년 호엔베르크 백작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하여 슈바벤 지방의 유력한 귀족으로 떠올랐다.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대부로 둔 루돌프는 황제와 그의 아들 콘라트 4세와 친분을 맺었다. 1254년 콘라트 4세의 즉위를 반대했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파문당하기도 했다.

1232년경, 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삼촌인 라우펜부르크의 루돌프 1세 백작에게 시동으로 보내졌다.

2. 1. 출생과 가문

1218년 5월 1일[15], 알브레히트 4세(1188년 - 1239년)와 House of Kyburg|키부르크 가문|키부르크 가문영어 울리히 3세의 딸 하일비히(1260년 사망)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자스 북부 림부르크 바이 자스바흐에서 루돌프가 탄생했다는 전승이 남아있지만,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6] 합스부르크가를 신뢰한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루돌프의 대부가 되었다.[15]

13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2세와 로마 교황의 항쟁에서 루돌프는 아버지 알브레히트와 마찬가지로 황제파(기벨린)에 가담하여, 합스부르크 분가인 라우펜부르크 가문과 싸웠다. 1240년에 아버지 알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루돌프는 가문을 계승하면서 몇 년 사이에 라우펜부르크 가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세력을 확대했다. 세력 확대 과정에서 외삼촌인 키부르크 백작 베르너에게 토지를 요구하며 다퉜다. 바젤에 야습을 가한 뒤 여자 수도원에 방화하여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지만 몇 년 만에 파문이 해제되었고, 외삼촌 베르너와도 화해했다. 1250년에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루돌프는 그의 유복자인 로마 왕 콘라트 4세를 섬겼다.[18]

1253년, 루돌프는 슈바벤의 호엔베르크 백작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다.[19]

2. 2. 혼인과 초기 경력

루돌프 1세는 1218년 5월 1일 브라이스가우 지역의 림부르크 성에서 합스부르크 백작 알브레히트 4세와 키부르크 가문 울리히 백작의 딸 헤드비히 사이에서 태어났다.[15]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15]

13세기 중반, 프리드리히 2세와 로마 교황의 갈등에서 루돌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황제파(기벨린)에 가담하여 합스부르크 분가인 라우펜부르크 가문과 싸웠다. 1240년 아버지 알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가문을 계승하면서 몇 년 사이에 라우펜부르크 가문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세력을 확대했다.[17] 세력 확대 과정에서 외삼촌인 키부르크 백작 베르너와 토지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바젤에 야습을 가하고 여자 수도원에 방화하여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몇 년 만에 파문이 해제되었고 외삼촌 베르너와도 화해했다.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루돌프는 그의 아들인 로마 왕 콘라트 4세를 섬겼다.[18]

1253년 루돌프는 슈바벤의 호엔베르크 백작의 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다.[19] 1264년 외가인 키부르크 가문의 남자가 단절되자 루돌프는 외사촌 하르트만의 딸 안나의 후견인이 되었다. 루돌프는 안나를 라우펜부르크 가문의 에버하르트에게 시집보내고, 1273년 에버하르트 부부로부터 중앙 스위스 각지의 지배지, 추크 등의 도시를 구입하여 부모 대에서 분열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지를 재통일했다.[20] 그러나 계약 문서에 구입지로 기재되지 않은 옵발덴이 찬탈된 형태로 루돌프의 손에 넘어가고, 매수금도 전액 지급되지 않아 라우펜부르크 가문에는 큰 불만이 남았다.[21]

3. 독일 왕 즉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고 공위 시대가 끝난 후, 1273년 독일 왕 콘월의 리처드가 사망하자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루돌프 1세는 뉘른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을 받고,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2세에게는 자신의 딸들을 약혼시켜 매수하여, 7표의 만장일치를 얻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2]

독일 왕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루돌프는 교황령시칠리아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교황에게 넘겨주고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 보답으로 루돌프 1세를 승인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에게도 루돌프 1세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다.

127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갖고 있던 황제 직할령을 모두 돌려주는 법안이 의결되었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는 바벤베르크 가문 출신의 아내를 통해 얻은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등의 공작령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루돌프 1세는 바벤베르크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끊어졌음을 들어 오타카르 2세에게 영지의 상속권이 없음을 선언했고, 1276년 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루돌프는 오타카르의 동맹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9세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오타카르 2세에게 영토를 넘겨받았다. 이후 루돌프는 오타카르와 화해하기 위해 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재임명하고 자신의 딸을 오타카르의 아들과 약혼시켰으나, 오타카르는 루돌프가 협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다시 동맹을 맺어 루돌프를 공격했다. 이에 맞선 루돌프는 헝가리와 동맹을 맺어 오타카르와 전쟁을 벌였고, 오타카르 2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전사했다.

3. 1. 대공위 시대와 선출 배경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고 공위 시대에 접어들면서, 슈바벤 공국은 여러 작은 귀족령으로 분열되었다. 루돌프는 이 기회를 틈타 아내의 호엔베르크 영지, 외삼촌의 퀴부르크 영지를 획득하고, 스트라스부르 주교령과 바젤 등의 영지를 구입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루돌프는 제국 남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

1273년 독일 왕 콘월의 리처드가 사망하고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루돌프 1세는 친구인 뉘른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을 받고, 반대파인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2세에게는 자신의 딸들을 약혼시켜 매수했다. 이로써 루돌프의 반대자는 슈바벤의 필립의 외손자인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만 남게 되었다. 루돌프는 7표의 만장일치를 얻어 독일 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었다.[2]

독일 왕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루돌프는 교황령시칠리아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교황에게 넘겨주고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 보답으로 루돌프 1세를 승인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슈바벤의 필립의 또 다른 손자)에게도 루돌프 1세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다.

127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갖고 있던 황제 직할령을 모두 돌려주는 법안이 의결되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바벤베르크 가문 출신의 아내를 통해 얻은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등의 공작령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루돌프 1세는 바벤베르크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끊어졌음을 들어 오타카르 2세에게 영지의 상속권이 없음을 선언했고, 1276년 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13세기 중반부터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청의 항쟁은 중부 유럽에서 제국의 권위를 쇠퇴시키고 있었다. 1272년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던 콘월 백작 리처드가 사망하자, 그레고리우스 10세는 선제후들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결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국왕 선거의 주도권을 잡은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 라인 궁정 백작 루트비히를 통해 선거를 진행한 뉘른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는 루돌프를 로마 황제로 추천했다. 루돌프는 선제후 누구와도 사투 상태(페데)에 있지 않았고, 세속 제후들에게는 평범한 동료로 여겨졌다. 또한 베르너와 프리드리히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에도 호엔슈타우펜가를 계속 지지하는 루돌프의 의리를 높이 평가했다.

국왕 선거 당시, 루돌프는 바젤 주교 하인리히와 토지·권한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1273년 9월 20일, 루돌프는 뉘른베르크 백작으로부터 로마 황제 선출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루돌프는 아헨에서 대관식을 받고, 1275년 로잔에서 그레고리우스 10세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선제후 중 프르셰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만이 루돌프의 로마 왕 선출에 반대하며, 루돌프를 '가난한 백작'이라고 폄하했다. 오타카르 2세도 로마 왕의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다른 선제후들은 야심적인 오타카르를 경계했다.

3. 2. 교황과의 관계 및 오토카르 2세와의 갈등

루돌프 1세(합스부르크)의 판화, c. 1640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1세


루돌프는 1273년 10월 24일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교황의 인정을 받기 위해 루돌프는 로마, 교황령, 시칠리아에 대한 모든 제국적 권리를 포기하고, 1275년에 십자군 서약을 하면서 새로운 십자군을 이끌 것을 약속했다.[4]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보헤미아오타카르 2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루돌프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1257년에 백작 윌리엄 2세 오브 홀란드의 후임으로 독일 (반)왕으로 선출되었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슈바벤의 필리프의 또 다른 손자)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도록 설득했다. 이로써 루돌프는 이전에 충성스럽게 섬겼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두 상속자를 능가했다.

1274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압류된 모든 왕실 영지를 반환하고, 오타카르 2세가 새로운 왕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회에 해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오타카르는 출석을 거부하고,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바벤베르크 가문의 상속녀를 통해 주장하고, 또 다른 바벤베르크 가문의 상속자인 바덴의 헤르만 6세와 분쟁하는 동안 점령했던 오스트리아 공작령, 슈타이어 공작령, 케른텐 공작령, 카르니올라 변경백령을 반환하기를 거부했다. 루돌프는 오타카르가 바벤베르크 영지를 계승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성 상속자가 없으므로 해당 지역이 제국 왕관으로 반환된다고 선언했다. 오타카르 2세는 제국 금지령에 처해졌고, 1276년 6월에는 그를 상대로 전쟁이 선포되었다.

루돌프는 오타카르의 이전 동맹국인 바이에른 공작 헨리 13세를 설득하여 편을 바꾸도록 했고, 1276년 11월에는 보헤미아 왕에게 네 개의 공작령을 왕실 행정부에 넘기도록 강요했다. 루돌프는 이후 오타카르에게 보헤미아 왕국을 재투자하고, 그의 딸 중 한 명을 오타카르의 아들 바츨라프 2세와 약혼시켰으며, 에 개선했다. 그러나 오타카르는 조약의 실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바이에른의 헨리 13세를 포함한 여러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루돌프는 헝가리의 라슬로 4세와 동맹을 맺고 빈 시민들에게 추가 특권을 부여했다. 1278년 8월 26일, 적대적인 군대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만났고, 오타카르는 패배하여 사망했다. 모라바 변경백령은 진압되었고 그 정부는 루돌프의 대표자들에게 위임되었으며, 오타카르의 미망인 슬라보니아의 쿤다는 프라하 주변의 지역만 통제하게 되었고, 어린 바츨라프 2세는 루돌프의 막내딸 합스부르크의 유디트와 다시 약혼했다.

1286년, 루돌프 왕은 알베르트의 장인인 고리치아-티롤의 마인하르트 2세 백작에게 오타카르에게서 빼앗은 정복 영토 중 하나인 케른텐 공작령을 완전히 투자했다.[5]

3. 3. 마르히펠트 전투와 오스트리아 획득



1246년 오스트리아 공국을 지배하던 바벤베르크가의 남계가 단절된 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는 바벤베르크가의 공녀 마르가레테와 결혼하여 지참금으로 바벤베르크가의 영토를 얻었다.[30][36] 1261년 오타카르는 마르가레테와 이혼했지만, 이혼 후에도 구 바벤베르크령과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확보할 권한을 유지했다.[30][36] 루돌프는 오타카르가 구 바벤베르크령을 획득한 것을 부당하다고 여겼다.[37]

1274년 11월 루돌프는 뉘른베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열고, 제후들에게 부당하게 획득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재산을 반환할 것을 촉구하고, 국왕과 제후의 교리를 거쳐 재수여를 시도했다.[38] 오타카르에게도 출석을 요구했지만, 오타카르는 회의에 나타나지 않았다.[39] 루돌프는 오타카르가 제국 회의에 불참하고 봉토 수여 신청을 게을리한 것을 문제 삼아, 1274년 11월 그에게 제국 추방령을 내렸다.[26]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도 오타카르는 출석하지 않고, 주교를 변론의 사절로 파견했다. 회의에서 제카우 주교가 라틴어로 변론을 시작하자, 루돌프는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며 라틴어 변론을 중단시켰다.[40] 반 교황 감정을 품고, 외국인이 로마 왕에 입후보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제국 제후들을 독일어와 라틴어를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묶어 오토카르에 대한 반대 의지를 하나로 만들었다.[41] 오스트리아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도 차츰 루돌프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민중 사이에서도 루돌프에 대한 호의가 확산되었다.[26] 1276년 6월,[26] 루돌프는 오타카르에게 중대한 제국 추방령을 내리고, 오타카르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한 후에 획득한 영지의 몰수를 선고했다.[39] 같은 해 1276년 루돌프는 제후들을 이끌고 빈 포위에 나섰고, 그해 11월 오타카르는 항복했다.

오타카르를 물리친 루돌프는 오스트리아에 란트 평화령을 공포하고, 귀족들에게 후한 대우를 제시하여 회유를 꾀했다.[42] 도시와 수도원에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며, 오타카르에게 후대받던 세력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42] 한편, 오타카르에 대한 제국 추방령이 철회되자, 오타카르는 루돌프와의 재전을 위해 군비를 정비했고, 니더바이에른의 하인리히 등 오타카르의 지지자들도 루돌프에게 반항했다. 오타카르는 합스부르크가와 프르셰미슬가의 혼인 계획을 파기하고, 가신과 동맹국을 모아 빈을 향해 진군했다. 1278년 8월 26일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루돌프는 보헤미아군을 요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오타카르를 전사시켰다.[39][36]

루돌프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 진군했지만, 전황이 교착되자 양군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합스부르크가와 프르셰미슬가는 양가의 화해를 촉진하기 위해 합동 결혼식을 거행하여, 루돌프의 아들 루돌프는 오토카르의 딸 아그네스(아네슈카)와, 루돌프의 딸 구타는 오토카르의 아들 벤체슬라프와 결혼했다.[43]

4.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 강화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고 공위 시대가 시작되면서, 슈바벤 공국은 여러 작은 귀족령으로 분열되었다. 루돌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내와 외삼촌의 영지를 획득하고, 슈트라스부르크 주교령과 바젤 등의 영지를 구입하여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루돌프는 제국 남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떠올랐다.

1273년 독일 왕 콘월의 리처드가 죽고 다음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루돌프는 친구인 뉘른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3세의 도움을 받고, 반대파인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2세에게는 자신의 딸들을 약혼시켜 매수했다. 이로써 루돌프의 반대자는 슈바벤의 필립의 외손자인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루돌프는 7표의 만장일치를 얻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왕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루돌프는 교황령시칠리아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교황에게 넘겨주고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 보답으로 루돌프 1세를 승인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슈바벤의 필립의 또다른 손자)에게도 루돌프 1세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다.

1279년에 루돌프 1세는 제국이 이탈리아에 가지고 있던 권리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행정 권한과 행사자를 로마 교회의 권위에 복종시켰다.[10] 같은 해에 로마냐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로마냐의 기증으로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교황청과의 동맹이 성립되었고, 루돌프가 가진 로마 왕위의 세습화도 검토되었다.[45]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합스부르크가에 우리의 제국 대관직을 부여한 이래,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의 도시들과 적대했지만, 어떤 때는 도시 간의 항쟁의 중재자 역할도 했다.[58] 루돌프 1세의 스위스 통치는 중세 스위스 국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47]

루돌프는 알자스의 영지와 북스위스의 지배지를 잇는 요충지인 바젤 제압을 꾀했다.[59] 1264년에 교황파(겔프)의 하인리히 폰 노이엔부르크가 바젤 주교가 되자 루돌프는 바젤시와 충돌했다. 루돌프의 로마 왕 선출 직후 맺은 평화 조약에 의해 바젤의 독립은 유지되었고, 알자스와 스위스에 걸쳐 있는 합스부르크 영방 국가의 성립은 중단되었다.[59]

로마 왕으로 선출된 루돌프는, 지금까지 적대했던 스위스 도시 공동체에 자유와 자치를 보장하는 "보호자"로 입장이 바뀌었다.[60] 우리는 자유와 자치를 인정하는 "제국 자유"의 특허장을 승인했지만, 슈비츠에는 특허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루돌프는 로마 왕 재위 중에 오스트리아 획득에 주력하고 있어, 스위스에서는 적극적인 억압책을 펼치지 않았다.[60][61] 하지만, 루체른, 추크, 글라루스 등 스위스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평야부로 나가는 요지를 구입하여, 스위스 도시에 포위를 가했다.[60] 1280년대 말부터 스위스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여, 독립성을 높여가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의 삼림 주와 대립했다.[61]

1291년에 루돌프 사망 소식이 스위스에 전해지자,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니트발덴) 대표는 뤼틀리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여, 맹약자 동맹을 맺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62]

4. 1. 영지 분배와 제후들의 견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고 신성 로마 제국이 공위 시대에 접어들면서, 슈바벤 공국은 여러 작은 귀족령으로 분열되었다. 루돌프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아내와 외삼촌의 영지를 획득하고, 슈트라스부르크 주교령과 바젤 등의 영지를 구입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로써 루돌프 1세는 제국 남서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부상했다.[44]

1274년 뉘른베르크 제국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황제 직할령 반환이 의결되었으나, 오타카르 2세는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등의 공작령 반환을 거부했다.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에게 영지 상속권이 없음을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오타카르 2세는 패배 후 영지를 넘겨주었으나, 이후 다시 동맹을 맺고 루돌프 1세를 공격했다가 1278년 전사했다.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두 아들 알브레히트와 루돌프 2세에게 상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루돌프 1세는 이를 진압했다. 또한 아들 알브레히트를 슈바벤 공작에 임명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모든 영지를 소유하는 것을 경계했다. 루돌프 1세는 동맹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케른텐 공국을 마인하르트 백작에게 주었다.

1281년, 루돌프 1세는 알브레히트를 오스트리아의 영방 섭정으로 임명했지만,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알브레히트의 정책에 반발했다.[46] 1282년 12월, 루돌프 1세는 제후들과의 협상을 통해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을 몰수했다. 케른텐은 마인하르트에게 주었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알브레히트와 루돌프에게 봉토로 주었다.

처음에는 알브레히트와 루돌프가 오스트리아를 공동 통치했지만, 1283년 6월 1일 라인펠덴 조약에 따라 알브레히트가 단독 오스트리아 영방 군주가 되었다.[46][44] 루돌프 1세의 가문 영지 정책으로 합스부르크 가는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지배지를 넓혔다.[12] 합스부르크 가문은 아르가우의 하비히츠부르크 성에서 빈으로 본거지를 옮겼다.[47]

1291년, 루돌프 1세는 아들 알브레히트를 독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선제후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4. 2. 알브레히트 1세의 왕위 계승 실패

1291년 루돌프 1세는 아들 알브레히트를 독일 왕에 즉위시키려 했으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한 선제후들의 반대로 실패했다.[50][51] 선제후들은 알브레히트의 성격과 자질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성장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선제후들은 왕권이 제한된 연방제 국가의 존속을 원했고, 루돌프 사후 세력을 확대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로마 왕위를 넘겨받아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53]

5. 죽음과 유산

루돌프 1세는 1291년 7월 15일 슈파이어에서 사망하여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6] 그의 통치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국 남동부의 강력한 왕조로 세운 것으로 가장 기억된다. 다른 영토에서는 서임권 투쟁 이후 수 세기 동안 제국의 권위가 쇠퇴했고, 제후들은 대체로 스스로를 방임했다.

슈파이어 대성당에 있는 루돌프의 사리탑


1286년, 루돌프 1세는 유대인을 'servi camerae'("금고의 농노")로 선언하여 정치적 자유를 부정하는 새로운 박해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랍비 메이어 폰 로텐부르크는 가족 및 추종자들과 함께 독일을 떠났지만 롬바르디아에서 붙잡혀 알자스의 요새에 투옥되었다. 전통에 따르면, 로쉬가 그를 위해 23,000 마르크 은의 거액의 몸값을 모금했지만, 랍비 메이어는 다른 랍비들의 투옥을 조장할까 두려워 이를 거절했다. 그는 7년 후 감옥에서 사망했다. 사후 14년 만에 알렉산더 벤 슐로모 (수스킨트) 빔펜이 그의 시신에 대한 몸값을 지불했으며, 이후 그는 마하람 옆에 안치되었다.[6]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루돌프를 동시대 인물들과 함께 연옥 문 밖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그를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한 자"라고 특징지었다.[7]

오스트리아에서는 알브레히트와 슈바벤 지방 출신 신하들의 강압적인 통치가 현지인들의 원성을 샀다.[48] 1287년 빈에서 알브레히트의 통치에 대한 반란이 발생했다. 1290년 헝가리 왕 라슬로 4세가 사망한 후, 루돌프는 헝가리에 개입하려 했고, 장남 알브레히트에게 헝가리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이 옹립한 헝가리 왕 언드라시 3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콘라트와 동맹하여 오스트리아로 진군했고, 알브레히트의 군대를 격파했다.[49] 또한, 국고에서 제국 제후와 도시의 분쟁 중재에 필요한 자산이 부족해졌고, 부르고뉴 지방을 둘러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의 대립이 제국의 안정을 위협했다.[10]

선제후들은 성장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알브레히트의 성격 및 자질을 두려워하여 알브레히트의 로마 왕 선출을 거부했다.[50][51] 1291년 7월 15일, 루돌프는 슈파이어 시로 가는 도중 게르머스하임에서 사망했다.[52] 선제후들은 왕권이 제한된 연방제 국가의 존속을 원했고, 루돌프 사후 세력을 확대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로마 왕위를 몰수하고,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53]

5. 1. 죽음과 후계

루돌프 1세는 1291년 7월 15일 슈파이어에서 죽었다. 많은 자식을 두었으나 성인이 되어 살아남은 아들은 알브레히트 한 명뿐이었다.[6] 그의 사후 독일 왕에는 나사우 백작 아돌프가 즉위했고, 알브레히트는 나사우 백작의 뒤를 이어 독일 왕으로 즉위했다.[6]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후일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루트비히 4세는 그의 딸 마틸다의 아들이었다.[6]

5. 2. 가족 관계

루돌프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1251년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와, 두 번째는 1284년 부르고뉴의 이사벨과 결혼했다.[63] 모든 자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다.

루돌프 1세의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비고
게르트루트 (1225년 - 1281년)
이자벨 (1270년 - 1323년)자녀 없음부르고뉴 공작위그 4세의 딸. 루돌프 사후 피에르 드 샹브리와 재혼[63]



루돌프는 혼인 외교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발전을 꾀했으며, 보헤미아의 프르셰미슬 가문, 제국 제후, 잉글랜드 왕국, 나폴리 왕국 등과 혼인 관계를 구축했다.[63][64]

5. 3. 역사적 평가

루돌프 1세는 1291년 7월 15일 슈파이어에서 사망하여 슈파이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7] 그의 많은 자녀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알브레히트 1세뿐이었다. 그의 사후 독일 왕위는 나사우 백작 아돌프가 계승했고, 알브레히트 1세는 나사우 백작의 뒤를 이어 독일 왕이 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그의 딸 마틸다의 아들이었다.

루돌프의 통치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국 남동부의 강력한 왕조로 일으켜 세운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영토에서는 서임권 투쟁 이후 수 세기 동안 제국의 권위가 쇠퇴하여 제후들은 대체로 스스로를 방임했다.

단테는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루돌프를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연옥 문 밖에 앉아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한 자"라고 묘사했다.[7]

루돌프 1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어깨가 넓고 머리가 작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17] 머리카락은 숱이 적었고, 특징적인 큰 매부리코를 가졌다.[17][54]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가들은 루돌프의 체력, 기력, 지혜를 칭찬했다.[17] 그러나 역사가들이 기록한 온화하고 겸손한 루돌프의 모습은 오히려 그가 노련하고 음흉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41] 카롤루스 대제와의 동일성을 부각하기 위해 관대함이 강조되었지만, 재치와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주는 기록도 많이 남아있다.[55] 왕위에 오른 루돌프는 시정 방침에서도 관용을 전면에 내세웠고, 당시 제후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여 제국의 치안 회복을 꾀했다.[56]

매 사냥에 나선 루돌프가 길에서 만난 사제를 돕고, 그 사제로부터 루돌프의 신앙심과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마인츠 대주교가 루돌프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23] 아헨에서 봉토 수여식 때 의식에 필요한 홀이 발견되지 않아 의식을 방해하려는 사람까지 나타났지만, 루돌프는 제단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상을 들고 "신성한 의식에 적합하다"며 홀을 대신하는 기지와 신앙심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57] 대관식 때 하늘에 십자형 붉은 구름이 나타났다는, 루돌프의 신앙심을 강조하는 전설도 있다.[56]

참조

[1] 간행물 Encyclopædia Britannica 1911
[2] 서적 Die Habsburger. Eine Europäische Familiengeschichte 1996
[3] 서적
[4] 서적 Heart of Europe: A History of the Holy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04-04
[5] 서적 Letters of Rudolph I Habsburg https://books.google[...] Dalcassian Press 2012-12
[6] 웹사이트 Saturday, March 4, 2006 / Adar 4, 5766 - Jewish Calendar - Hebrew Calendar http://www.chabad.or[...]
[7] 서적 The Divine Comedy; Purgatorio: Canto VII https://archive.org/[...] Boston and New York, Houghton, Mifflin and company
[8] 웹사이트 Rudolf I king of Germany https://www.britanni[...]
[9] 문서
[10] 서적 世界伝記大事典 世界編
[11] 서적 ハプスブルク家
[12] 서적 ドイツ史 山川出版社 2001-08
[13] 서적 ハプスブルク家
[14] 서적 図説 スイスの歴史
[15]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16]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17]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18]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19]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20] 서적 スイス・ベネルクス史
[21]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22]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23] 서적 物語スイスの歴史
[24]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25]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26] 서적 オーストリア史
[27]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28]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29] 서적 ハプスブルク家
[30]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31]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32] 서적 ハプスブルク家
[33]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34]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35]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36] 서적 神聖ローマ帝国
[37] 간행물 ドナウ・ヨーロッパの形成
[38] 간행물 ドイツ王国の国制変化
[39] 서적 物語 チェコの歴史
[40]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41] 서적 ハプスブルク家の皇帝たち
[42] 서적 オーストリア史
[43] 서적 オーストリア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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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서적 ハプスブルク家
[58] 서적 図説 スイスの歴史
[59]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60] 간행물 盟約者団の形成と発展
[61]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62] 서적 スイス独立史研究
[63]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64] 서적 ハプスブルク家史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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