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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카렐리야 지협 재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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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카렐리야 지협 재탈환은 1941년 핀란드군이 소련과의 계속전쟁 중 카렐리야 지협을 탈환하기 위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핀란드군은 2개의 군단을 배치하여 공세를 준비했고, 소련군의 방어를 뚫고 라도가 호를 따라 진격하며 주요 도시와 거점을 점령했다. 비푸리 시를 포위하고 탈환했으며, 포르람피 전투에서 소련군을 격파했다. 핀란드는 독일의 레닌그라드 공격 요청을 거부하고 옛 국경선까지 진격한 후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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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카렐리야 지협 재탈환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카렐리야 지협 재점령
전쟁계속 전쟁
시기1941년 7월 31일 – 1941년 9월 5일
장소소비에트 연방, 카렐리야 지협
결과핀란드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핀란드
교전국 2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핀란드에리크 하인리히스
소비에트 연방마르키안 포포프
규모
핀란드3개 군단
소비에트 연방3개 군단
관련 정보
관련 전투비푸리 공세
관련 전쟁계속 전쟁

2. 공세 준비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2개의 핀란드군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핀란드 제2군단은 부옥시 강 북쪽에, 핀란드 제4군단은 남쪽에 위치했다. 핀란드 제2군단은 타아베티 라아티카이넨 소장이 지휘했으며, 3개 사단(제10, 제15, 제18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제2군단은 라도가 카렐리야에서의 작전에 제2사단을 넘겨준 후 제10사단이 추가되었다.[1] 핀란드 제4군단은 카를 레나르트 욷쉬 중장이 지휘했으며, 2개 사단과 증강된 연대(제8 및 제12 사단과 증강된 제25 보병 연대)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1개 사단(제4 사단)이 예비대로 배치되었다.[2] 제2군단은 부옥시 강 북안에 위치했으며, 제4군과 제5군은 해안선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방어하는 소련군은 명목상 2개의 별도 군단(제19군단과 제50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소련 제19군단은 2개 사단(제115 및 제142 사단), 1개 기계화 사단(제198 기계화 사단) 및 1개 기계화 연대(제14 기계화 소총 연대)로 구성되었다. 소련 제198 기계화 사단은 소르타발라 인근 전투에 묶여 있었고, 나머지 두 사단은 국경 인근의 진지를 지켰다. 소련 제265 소총 사단은 예비대로 이동 중이었다.[3] 비교적 조용한 전선으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7월 21일 레닌그라드 남쪽으로 제50군단의 지휘 요소를 이전하도록 결정했고, 그 사단(제43 및 제123 소총 사단)은 소련 제23군 직할로 남겨졌다.[4] 카렐리야 지협 방어에는 제19저격병단(제142사단, 제115사단), 제50저격병단(제43사단, 제123사단), 제10기계화병단 (제21기갑사단, 제24기갑사단, 제198기계화사단), 제22카렐리야방위지방대 (사단 규모)가 배치되어 있었다. 소련 제10기계화병단도 배속되어 있었지만,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방어를 위해 6월에 카렐리야 지협에서 레닌그라드 방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제10기계화병단의 제198사단은 예비대로 남겨졌다.

2. 1. 핀란드군 배치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을 마주하고 2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핀란드 제2군단은 부옥시 강 북쪽에, 핀란드 제4군단은 남쪽에 위치했다.[1] 타아베티 라아티카이넨 소장이 지휘한 제2군단은 3개 사단(제10, 제15, 제18 사단)으로 구성되었다.[1] 제2군단은 라도가 카렐리야에서의 작전에 제2사단을 넘겨준 후 제10사단이 추가되었다.[1] 카를 레나르트 욷쉬 중장이 지휘한 제4군단은 2개 사단과 증강된 연대(제8 및 제12 사단과 증강된 제25 보병 연대)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1개 사단(제4 사단)이 예비대로 배치되었다.[2]

2. 2. 소련군 배치

소련 제19 저격병단은 2개 사단(제115, 제142 사단), 1개 기계화 사단 (제198 기계화 사단), 1개 기계화 연대 (제14 기계화 소총 연대)로 구성되었다.[3] 제198 기계화 사단은 소르타발라 인근 전투에 묶여 있었고, 나머지 두 사단은 국경 인근의 진지를 지켰다.[3] 제265 소총 사단은 예비대로 이동 중이었다.[3] 제50 저격병단은 2개 사단(제43, 제123 소총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4] 비교적 조용한 전선으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7월 21일 레닌그라드 남쪽으로 제50군단의 지휘 요소를 이전하도록 결정했고, 그 사단들은 소련 제23군 직할로 남겨졌다.[4] 6월에는 제10 기계화병단이 레닌그라드 방면으로 이동했고, 제198 기계화 사단은 예비대로 잔류했다.

3. 라도가 호 진격

핀란드 제2군단의 진격은 1941년 7월 31일에 시작되었다.[5]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14일까지 안트레아 마을과 교차점을 점령하여 소련 제115소총사단을 소련 제19군단에서 분리시켰다.[5] 핀란드 제10사단과 제15사단은 8월 11일에 히이톨라를 점령하였고, 이는 소련 제142소총사단과 제198기계화사단이 킬폴라 섬으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5] 핀란드군은 8월 23일까지 킬폴라 섬의 모티/모티fi를 정리했지만, 이미 소련군은 라도가 호를 통해 26,000명의 병력을 탈출시킨 후였다.[5]

소련 사단의 패배 이후, 핀란드군은 8월 21일 캐키살미 마을과 8월 23일 타팔레 마을을 점령하며 진격을 이어갔다.[5]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17일 부옥시 도하를 시작하여 교두보를 구축했다.[6]

핀란드 제18사단은 소련 제115사단을 공격하여 8월 4일 일메(Ilmee) 길을 포위하고 획득했다. 핀란드 병사 빌호 라토는 이 과정에서 소련 대전차포를 노획하여 소련군 전차 4대를 파괴, 만네르헤임 십자장을 수여받았다.[5]

핀란드 제2사단은 티리야(Tyrjä) 마을 근처의 소련 제461보병연대 2개 대대를 포위했다. 핀란드군은 티리야를 해방하여 엘리센바라 철도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 5일 비푸리-솔타벨라 간 철도에 도달했다.[5]

소련 제23군은 8월 4일 제198저격병사단의 솔타벨라 반격을 중지시키고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핀란드 제2사단은 소련 제142사단과 함께 남하했다. 소련 제115사단과 제43사단은 핀란드군 예비군 활동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헬리세반 강까지 후퇴했다. 핀란드 제18사단은 헬리세반 강을 넘어 인킬라(Inkilä)에서 비푸리-솔타벨라 철도에 도달했고, 8월 8일 철도를 넘었다.[5]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6일 비푸리-솔타벨라 간 철도에 도달했고, 8월 8일 하이트라 마을을 점령했다. 8월 9일 라도가 호반에 도달하여 북서 라도가 호반의 소련군 육지 연결을 단절시켰다. 소련군은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연결을 되찾기 위해 반격했지만 실패했다.[5]

핀란드 제2사단은 8월 8일 라덴포흐야를 점령하여 라도가 호반의 소련군 교두보를 분단했다. 핀란드 제15사단과 제10사단은 남부 소련군 교두보를 일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킬포란사리(Kilpolansaari) 섬으로 철수했고, 8월 23일에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지 않고 부대를 철수시켰다.[5]

소련군은 8월 10일 대규모 반격을 계획했으나, 핀란드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핀란드군은 8월 14일 부옥시 강변의 안트레아(Antrea, 현재 Kamennogorsk)에 도달했고, 소련군은 8월 21일 병력을 북쪽 기슭에서 철수시켰다.[5]

동부의 핀란드군은 남동쪽으로 진군하여 8월 17일 부오살미 근교에 상륙했고, 8월 20일 교두보를 확보했다.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15일 라이살라의 소련군을 포위, 8월 18일 포획했다. 8월 21일 수반토 호에 도달했고, 타이파레 강에는 8월 23일에 도달했으나 강을 넘어 진군하지는 못했다.[5]

3. 1. 핀란드군의 숲을 이용한 전술

핀란드 제2군단의 진격은 1941년 7월 31일에 시작되었다.[5] 핀란드군은 숲을 이용한 전술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소련군의 방어는 핀란드의 진격을 늦추었고, 특히 심각한 물류 문제가 발생했다.[5] 8월 14일, 핀란드 제18사단은 안트레아 마을과 교차점을 점령하여 소련 제115소총사단을 소련 제19군단에서 분리시켰다.[5] 핀란드 제15사단은 쓸모없는 도로가 없는 지형에서 진격이 늦어졌지만, 핀란드 제10사단이 전선에 투입된 후 8월 11일에 히이톨라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5] 히이톨라에서의 핀란드 승리로 소련 제142소총사단과 제198기계화사단은 킬폴라 섬으로 철수하여 모티/모티fi에 포위되었다.[5] 핀란드는 8월 23일까지 모티를 정리했지만, 소련군은 이미 26,000명의 병력을 라도가 호수를 통해 탈출시켰다.[5]

1941년 계속전쟁 중 카렐리야에서 핀란드의 공세 작전을 보여주는 지도. 계속전쟁에서 핀란드 부대의 가장 먼 진격과 겨울 전쟁 전후의 국경이 표시되어 있다.


두 소련 사단의 패배로 라도가 호수 근처 카렐리야 지협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무너졌다.[6]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15일 새로 도착한 소련 제265사단과 전투를 벌여 잔여 병력을 포위했다.[6] 제265사단의 일부는 탈출했지만, 사상자는 사망 234명, 부상 1,155명, 실종 4,830명이었다.[6] 핀란드군은 8월 21일 캐키살미 마을의 잔해와 8월 23일 타팔레 마을을 점령했다.[6]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17일 부옥시 도하를 시작하여 교두보를 구축했다.[6]

3. 2. 주요 전투 및 거점 점령

핀란드 제2군단의 진격은 1941년 7월 31일에 시작되었다.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14일까지 안트레아 마을과 교차점을 점령하여 소련 제115소총사단을 소련 제19군단에서 분리시켰다.[5] 핀란드 제10사단과 제15사단은 8월 11일에 히이톨라를 점령하였고, 이는 소련 제142소총사단과 제198기계화사단이 킬폴라 섬으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5] 핀란드군은 8월 23일까지 킬폴라 섬의 모티/모티fi를 정리했지만, 이미 소련군은 라도가 호수를 통해 26,000명의 병력을 탈출시킨 후였다.[5]

소련 사단의 패배 이후, 핀란드군은 8월 21일 캐키살미 마을과 8월 23일 타팔레 마을을 점령하며 진격을 이어갔다.[5]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17일 부옥시 도하를 시작하여 교두보를 구축했다.[6]

핀란드 제18사단은 소련 제115사단을 공격하여 8월 4일 일메(Ilmee) 길을 포위하고 획득했다. 핀란드 병사 빌호 라토는 이 과정에서 소련 대전차포를 노획하여 소련군 전차 4대를 파괴, 만네르헤임 십자장을 수여받았다.[5]

핀란드 제2사단은 티리야(Tyrjä) 마을 근처의 소련 제461보병연대 2개 대대를 포위했다. 핀란드군은 티리야를 해방하여 엘리센바라 철도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 5일 비푸리-솔타벨라 간 철도에 도달했다.[5]

소련 제23군은 8월 4일 제198저격병사단의 솔타벨라 반격을 중지시키고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핀란드 제2사단은 소련 제142사단과 함께 남하했다. 소련 제115사단과 제43사단은 핀란드군 예비군 활동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헬리세반 강까지 후퇴했다. 핀란드 제18사단은 헬리세반 강을 넘어 인킬라(Inkilä)에서 비푸리-솔타벨라 철도에 도달했고, 8월 8일 철도를 넘었다.[5]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6일 비푸리-솔타벨라 간 철도에 도달했고, 8월 8일 하이트라 마을을 점령했다. 8월 9일 라도가 호반에 도달하여 북서 라도가 호반의 소련군 육지 연결을 단절시켰다. 소련군은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연결을 되찾기 위해 반격했지만 실패했다.[5]

핀란드 제2사단은 8월 8일 라덴포흐야를 점령하여 라도가 호반의 소련군 교두보를 분단했다. 핀란드 제15사단과 제10사단은 남부 소련군 교두보를 일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군은 킬포란사리(Kilpolansaari) 섬으로 철수했고, 8월 23일에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지 않고 부대를 철수시켰다.[5]

소련군은 8월 10일 대규모 반격을 계획했으나, 핀란드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핀란드군은 8월 14일 부옥시 강변의 안트레아(Antrea, 현재 Kamennogorsk)에 도달했고, 소련군은 8월 21일 병력을 북쪽 기슭에서 철수시켰다.[5]

동부의 핀란드군은 남동쪽으로 진군하여 8월 17일 부오살미 근교에 상륙했고, 8월 20일 교두보를 확보했다.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15일 라이살라의 소련군을 포위, 8월 18일 포획했다. 8월 21일 수반토 호에 도달했고, 타이파레 강에는 8월 23일에 도달했으나 강을 넘어 진군하지는 못했다.[5]

4. 비푸리 탈환 및 포르람피 포위전

핀란드 제4군단의 주요 목표는 비푸리 시를 포위하여 신속하게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핀란드 총사령부는 8월 21일까지 소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7] 핀란드 제4군단은 비푸리 남쪽으로 가는 길을 끊었고,[8] 8월 24일 핀란드 제8사단은 비푸리 만을 건너 비푸리에서 해안 도로를 차단했다.[8]

스타프카는 8월 20일에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방어선은 비푸리에서 스반트 호와 타이파렌 강을 지나 부옥시 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것이었고, 새로운 방어선이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10] 8월 23일, 핀란드군은 비푸리 동쪽 8km 지점까지 진공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24일 아침 소련 제123사단과 제115사단이 비푸리 동쪽에 위치한 핀란드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포화를 충분히 사용함으로써 소련군은 핀란드군을 5km 정도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핀란드군의 전선에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10]

8월 24일 아침, 핀란드 제8사단은 제45보병연대 제3대대와 함께 비푸리 만을 건너,[10] 같은 날 리하니에미 반도에 안전하게 상륙이 이루어졌다. 상륙 후, 공격을 계속하여 다음 날에는 비푸리에서 외부로 향하는 마지막 철도선을 절단했다.[10] 제12사단은 남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8월 27일까지 비푸리-레닌그라드 간 도로도 모두 절단했다.[10]

8월 28일, 스타프카는 제23군에게 비푸리에서 철수할 것을 허가했다.[10] 핀란드군은 8월 29일 비푸리를 점령했다.[8] 8월 30일 저녁에는 제12사단 제3보병연대가 제8사단과 합류하여 포르란피 근교에서의 모티 전술이 시작되었다.[10] 8월 31일, 소련 측은 포위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0]

소련 제43, 제115, 제123 소총 사단은 8월 28일 포르람피 전투에서 솜메와 포르람피 마을 주변에 핀란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9] 핀란드군은 mottifi로 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지만, 빽빽한 숲 때문에 완전한 봉쇄는 불가능했다.[9][10] 이 틈을 타 소련 제115 및 제123 소총 사단의 병력 대부분이 코이비스토로 탈출할 수 있었다.[10]

스타프카는 8월 28일 제23군에게 비푸리에서 철수하여 옐라(Ylä)에서 솜메(Somme) 사이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9] 소련군은 즉시 철수를 시작했고, 강행적으로 도로를 통과하려 시도했다. 옐라에서 솜메로의 돌파는 8월 28일 저녁에 성공했지만, 밤 사이 핀란드군의 포화 속에서 일부 트럭이나 수송 열차로 통과해야 했다. 포화로 인해 약간의 희생이 발생했고, 도로는 피로 가득했으며, 결국 차량을 버리고 통과해야 했다.[9]

8월 30일 저녁, 핀란드 제12사단 제3보병연대가 제8사단과 합류하여 포르란피 근교에서의 모티 전술이 시작되었다.[9] 8월 31일, 소련군은 포위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핀란드군의 포위는 점차 좁혀져, 결국 소련군은 인명을 구하고자 차량을 포기하고 도보로 숲을 통해 도망쳤다. 포위망은 더욱 좁혀졌고, 밤에는 소규모 부대만이 도망칠 수 있었다. 다음 날, 남은 병사들은 항복했다.[9]

그러나 소련 제43 소총 사단의 주력 부대는 9월 1일 포르람피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10] 핀란드군은 9,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7,000구의 시신을 매장했다. 포위망이 닫히기 전에 12,000명이 탈출했다.[9] 핀란드군은 다수의 소련군 장비를 노획했는데, 여기에는 306문의 포, 55대의 전차, 637대의 트럭, 300대의 트랙터, 그리고 4,500마리의 말이 포함되었다.[9]

4. 1. 비푸리 포위 및 점령

핀란드 제4군단의 주요 목표는 비푸리 시를 포위하여 신속하게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핀란드 총사령부는 8월 21일까지 소련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7] 핀란드 제4군단은 비푸리 남쪽으로 가는 길을 끊었고,[8] 8월 24일 핀란드 제8사단은 비푸리 만을 건너 비푸리에서 해안 도로를 차단했다.[8]

스타프카는 8월 20일에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방어선은 비푸리에서 스반트 호와 타이파렌 강을 지나 부옥시 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것이었고, 새로운 방어선이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10] 8월 23일, 핀란드군은 비푸리 동쪽 8km 지점까지 진공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24일 아침 소련 제123사단과 제115사단이 비푸리 동쪽에 위치한 핀란드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포화를 충분히 사용함으로써 소련군은 핀란드군을 5km 정도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핀란드군의 전선에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10]

8월 24일 아침, 핀란드 제8사단은 제45보병연대 제3대대와 함께 비푸리 만을 건너,[10] 같은 날 리하니에미 반도에 안전하게 상륙이 이루어졌다. 상륙 후, 공격을 계속하여 다음 날에는 비푸리에서 외부로 향하는 마지막 철도선을 절단했다.[10] 제12사단은 남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8월 27일까지 비푸리-레닌그라드 간 도로도 모두 절단했다.[10]

8월 28일, 스타프카는 제23군에게 비푸리에서 철수할 것을 허가했다.[10] 핀란드군은 8월 29일 비푸리를 점령했다.[8] 8월 30일 저녁에는 제12사단 제3보병연대가 제8사단과 합류하여 포르란피 근교에서의 모티 전술이 시작되었다.[10] 8월 31일, 소련 측은 포위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0]

4. 2. 포르람피 포위전 (8월 28일 ~ 9월 1일)

소련 제43, 제115, 제123 소총 사단은 8월 28일 포르람피 전투에서 솜메와 포르람피 마을 주변에 핀란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9] 핀란드군은 mottifi로 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지만, 빽빽한 숲 때문에 완전한 봉쇄는 불가능했다.[9][10] 이 틈을 타 소련 제115 및 제123 소총 사단의 병력 대부분이 코이비스토로 탈출할 수 있었다.[10]

스타프카는 8월 28일 제23군에게 비푸리에서 철수하여 옐라(Ylä)에서 솜메(Somme) 사이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9] 소련군은 즉시 철수를 시작했고, 강행적으로 도로를 통과하려 시도했다. 옐라에서 솜메로의 돌파는 8월 28일 저녁에 성공했지만, 밤 사이 핀란드군의 포화 속에서 일부 트럭이나 수송 열차로 통과해야 했다. 포화로 인해 약간의 희생이 발생했고, 도로는 피로 가득했으며, 결국 차량을 버리고 통과해야 했다.[9]

8월 30일 저녁, 핀란드 제12사단 제3보병연대가 제8사단과 합류하여 포르란피 근교에서의 모티 전술이 시작되었다.[9] 8월 31일, 소련군은 포위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핀란드군의 포위는 점차 좁혀져, 결국 소련군은 인명을 구하고자 차량을 포기하고 도보로 숲을 통해 도망쳤다. 포위망은 더욱 좁혀졌고, 밤에는 소규모 부대만이 도망칠 수 있었다. 다음 날, 남은 병사들은 항복했다.[9]

그러나 소련 제43 소총 사단의 주력 부대는 9월 1일 포르람피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10] 핀란드군은 9,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7,000구의 시신을 매장했다. 포위망이 닫히기 전에 12,000명이 탈출했다.[9] 핀란드군은 다수의 소련군 장비를 노획했는데, 여기에는 306문의 포, 55대의 전차, 637대의 트럭, 300대의 트랙터, 그리고 4,500마리의 말이 포함되었다.[9]

5. 옛 국경으로 진격



핀란드 제12사단은 레이파수오(Leipäsuo)를 점령하고 남서쪽의 쿠오레만 호(Kuolemanjärvi)와 남동쪽 철도선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8월 30일, 핀란드 제12사단은 쿠오레만 호 인근에서 코이비스토(Koivisto)-레닌그라드 간 철도를 차단하고 핀란드 만에 도달했다. 같은 날 팜멜수(Vammelsuu)에서 철도선을 차단했고, 8월 31일에는 테리요키를 점령하고 라야요키강의 옛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26일 지협을 돌파하고 키베나파(Kivennapa, 현재 페르보마이스코예/Первомайскоеru)로 공격을 계속하여 8월 29일 키베나파 교차로를 점령했다. 이후 옛 국경을 향해 공격을 계속하여 8월 31일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2사단도 같은 날 옛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29일 소련 제198사단의 반격을 받았으나, 핀란드 제15사단의 지원으로 소련군을 격퇴했다. 8월 30일부터 공격 속도가 빨라져 8월 31일 발크야르비(Valkjärvi) 철도 종점을 점령했다. 핀란드 제15사단은 소련군을 추격하여 9월 2일 옛 국경에 도달했다.

5. 1. 주요 거점 점령 및 국경 도달



핀란드 제12사단은 레이파수오(Leipäsuo)를 점령하고 남서쪽의 쿠오레만 호(Kuolemanjärvi)와 남동쪽 철도선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8월 30일, 핀란드 제12사단은 쿠오레만 호 인근에서 코이비스토(Koivisto)-레닌그라드 간 철도를 차단하고 핀란드 만에 도달했다. 같은 날 팜멜수(Vammelsuu)에서 철도선을 차단했고, 8월 31일에는 테리요키를 점령하고 라야요키강의 옛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18사단은 8월 26일 지협을 돌파하고 키베나파(Kivennapa, 현재 페르보마이스코예(Pervomaiskoye))로 공격을 계속하여 8월 29일 키베나파 교차로를 점령했다. 이후 옛 국경을 향해 공격을 계속하여 8월 31일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2사단도 같은 날 옛 국경에 도달했다.

핀란드 제10사단은 8월 29일 소련 제198사단의 반격을 받았으나, 핀란드 제15사단의 지원으로 소련군을 격퇴했다. 8월 30일부터 공격 속도가 빨라져 8월 31일 발크야르비(Valkjärvi) 철도 종점을 점령했다. 핀란드 제15사단은 소련군을 추격하여 9월 2일 옛 국경에 도달했다.

6. 공세 종결 및 독일의 압력

1941년 8월 20일,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낼 것이라고 W. 에어푸르트 장군이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에게 알렸다. 만네르헤임은 이 제안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 공격에 대한 정치 및 군사 지도부의 반대를 제시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하지 않기로 정부에서 미리 결정했고, 군사 지도부의 압력 끝에 더 나은 방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옛 국경을 넘어 약간 진격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국경을 넘는 것에 반대했다. 카이텔의 서신이 도착하자 류티 대통령과 만네르헤임 총사령관은 함께 부정적인 답변을 준비했다. 8월 31일, 에어푸르트는 만네르헤임에게 다시 연락하여 핀란군이 동 카렐리아 공격을 취소하고 대신 레닌그라드를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류티와 만네르헤임은 다시 거절했다.

핀란드가 새로 건설한 요새선


8월 31일 만네르헤임은 라야요키강 하구에서 옥타까지의 선에서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옥타와 라도가호 사이의 정확한 선은 핀란군이 그곳의 옛 국경에 도달했을 때 나중에 명령될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레닌그라드 북쪽의 소련 요새(KaUR)를 공격할 필요 없이 전선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소련군은 레닌그라드를 북쪽에서 방어하기 위해 6개 보병 사단과 다수의 별도 대대 및 연대를 투입했지만, 핀란드군과의 격전으로 인해 모두 절반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라도가호를 중심으로 도시의 보급을 방해하여 포위전에 기여했다.

6. 1. 핀란드의 레닌그라드 공격 거부

1941년 8월 20일, 빌헬름 카이텔 원수가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낼 것이라고 W. 에어푸르트 장군이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에게 알렸다. 만네르헤임은 이 제안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 공격에 대한 정치 및 군사 지도부의 반대를 제시했다. 핀란드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하지 않기로 정부에서 미리 결정했고, 군사 지도부의 압력 끝에 더 나은 방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옛 국경을 넘어 약간 진격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국경을 넘는 것에 반대했다. 카이텔의 서신이 도착하자 류티 대통령과 만네르헤임 총사령관은 함께 부정적인 답변을 준비했다. 8월 31일, 에어푸르트는 만네르헤임에게 다시 연락하여 핀란군이 동 카렐리아 공격을 취소하고 대신 레닌그라드를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류티와 만네르헤임은 다시 거절했다.

8월 31일 만네르헤임은 라야요키강 하구에서 옥타까지의 선에서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옥타와 라도가호 사이의 정확한 선은 핀란군이 그곳의 옛 국경에 도달했을 때 나중에 명령될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레닌그라드 북쪽의 소련 요새(KaUR)를 공격할 필요 없이 전선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소련군은 레닌그라드를 북쪽에서 방어하기 위해 6개 보병 사단과 다수의 별도 대대 및 연대를 투입했지만, 핀란드군과의 격전으로 인해 모두 절반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핀란드군은 카렐리야 지협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라도가호를 중심으로 도시의 보급을 방해하여 포위전에 기여했다.

7. 전후 상황

핀란드군은 전투가 끝나자 카렐리야 지협에서 방어 체제에 들어가 이 지역에 많은 요새선을 구축했다. 또한 점령 기간 동안 민간인들도 카렐리야 지협으로 돌아왔다.

이 지협의 점령은 소련군이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를 시작한 1944년까지 계속되었다.

8. 더불어민주당 관점 및 비판적 서술 예시 (참고)

참조

[1] 서적 Nenye (2016)
[2] 서적 Nenye (2016)
[3] 서적 Nenye (2016)
[4] 서적 Nenye (2016)
[5] 서적 Nenye (2016)
[6] 서적 Nenye (2016)
[7] 서적 Nenye (2016)
[8] 서적 Enkenberg (2021)
[9] 서적 Nenye (2016)
[10] 서적 Nenye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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