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란 카운티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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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란 카운티 USA는 1970년대 미국 광산 노동 운동과 브룩사이드 광산 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듀크 파워 컴퍼니와의 대립, 갈등의 심화, 협상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냈으며, 광부, 노조 관계자, 회사 관계자 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바라 코플 감독은 영화 제작 과정을 통해 파업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으며, 촬영 기법과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광부들의 문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기여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광부들의 용기와 끈기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했으며, 로튼 토마토에서 100%의 평점을 받았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국립 영화 등기소에 의해 문화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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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란 카운티 USA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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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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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할란 카운티 USA |
원제 | Harlan County, USA |
국가 | 미국 |
장르 | 다큐멘터리 |
감독 | 바바라 코플 |
제작 | 바바라 코플 |
음악 | 헤이즐 디킨스, 멀 트래비스, 데이비드 모리스 |
촬영 | 케빈 키팅, 하트 페리 |
편집 | 낸시 베이커, 메리 램프슨, 로라 헤이스 |
제작사 | 캐빈 크리크 필름 |
배급사 | 시네마 5 |
개봉일 | 1976년 10월 15일 (뉴욕 영화제) |
상영 시간 | 103분 |
언어 | 영어 |
2. 역사적 배경
다큐멘터리 제작자 바바라 코플은 본래 UMWA 내부의 민주화 운동과 토니 보일 퇴진 시도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의 브룩사이드 광산에서 광부들이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파업에 돌입하자, UMWA가 조직을 도운 이 파업을 촬영하기 위해 현장으로 갔다. 코플은 이 파업이 더 중요한 주제라고 판단하여 영화의 초점을 바꾸었다.[5]
이 파업은 광부들이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그리고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광부들은 유틸리티나 상수도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회사는 예상 생활비 상승률이 7%였던 해에 4%의 임금 인상만을 제안했다. 이는 같은 해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이 170%나 증가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회사가 새로운 계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하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3] 광부들은 이 조항이 향후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자신들의 협상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반발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노사 갈등 외에도, 당시 UMWA는 조셉 야블론스키 피살 사건과 W.A. "토니" 보일 회장의 연루 의혹 등 내부적인 부패와 폭력 문제로 얼룩져 있어, 파업의 배경은 더욱 복잡했다.
2. 1. 1970년대 미국 광산 노동 운동
1970년대 미국 광산 노동 운동은 UMWA 내부의 갈등과 현장의 치열한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UMWA 지도부의 부패와 폭력성은 심각한 문제였다. 1969년, 많은 광부들의 지지를 받던 조셉 야블론스키는 UMWA 회장 선거에서 현직 회장 W.A.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으나, 부정 선거 의혹 속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가족은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후 토니 보일은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위해 다른 노조 간부에게 2만달러를 제공하여 청부 살인을 교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건강했던 보일은 재판 후 쇠약해져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타나는 모습이 기록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당시 UMWA 지도부의 부패와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러한 배경에서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의 브룩사이드 광산 광부들은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은 UMWA의 지원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할란 카운티 USA''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5] 광부들은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그리고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당시 파업 광부들은 상수도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회사는 생활비 상승률이 7%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던 해에 고작 4%의 임금 인상을 제안했다. 반면,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은 단 1년 만에 170%나 증가한 상태였다.
파업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회사가 새로운 계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한 것이었다.[3] 광부들은 이 조항이 현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자신들의 교섭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고, 회사가 고용한 파업 파괴자들(광부들은 이들을 "총잡이들"이라 불렀다)과 광부들 양측 모두 공개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2] 파업 참가자들은 흑폐증의 고통을 호소했고, 파업 현장에서 총격을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파업이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지던 중, 젊은 광부 로렌스 존스가 몸싸움 끝에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은 파업 참여자들과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회사와 노조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합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이스 스콧과 같은 여성 활동가들이 파업 지지를 독려하고 투쟁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2. 브룩사이드 광산 파업의 배경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에 위치한 브룩사이드 광산은 듀크 파워 컴퍼니 소유였다. 이 광산의 노동자들은 전미광부노동조합(UMWA) 소속이었는데, 당시 UMWA는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69년, 많은 광부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개혁적인 노조 대표 조셉 야블론스키가 UMWA 회장 선거에서 현직 회장 W.A.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으나, 부정이 의심되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아내, 딸은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이후 보일은 이 살인 사건을 교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3] 이러한 노조 내부의 갈등과 폭력 사태는 브룩사이드 광산의 노사 관계에도 긴장감을 더하는 배경이 되었다.1973년 6월, 브룩사이드 광산의 광부들은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그리고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광부들은 흑폐증과 같은 직업병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기본적인 수도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회사는 파업 광부들에게 예상 생활비 상승률(7%)보다 훨씬 낮은 4%의 임금 인상을 제안했는데, 이는 같은 해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이 170%나 증가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5]
또한, 회사는 새로운 단체 협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했다.[3] 광부들은 이 조항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지역의 노동 환경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대응할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러한 노동 조건, 임금 문제, 그리고 노조 활동 제약 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브룩사이드 광산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파업의 전개 과정
바버라 코플 감독은 본래 민주주의를 위한 광부들(Miners for Democracy)과 토니 보일을 전미광부노동조합(UMWA) 회장직에서 몰아내려는 움직임에 관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의 브룩사이드 광산 광부들이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UMWA의 조직화 지원을 받으며 파업에 돌입하자, 코플은 이 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할란 카운티로 향했다. 그녀는 이 파업이 더 설득력 있는 주제라고 판단하여 영화의 초점을 바꿨으며, 준비와 편집을 포함해 총 4년 동안 이 작업에 매달렸다.[5]
코플과 촬영 기사 하트 페리가 파업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외부에서 온 이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뉴욕에서 온 히피 집단"이 염탐하러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코플이 자신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민들에게 말했다고 전해 들은 한 파업 참가자와 대면했을 때, 그는 코플에게 "여기 사람들에게 당신이 뭘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2]
코플과 그녀의 팀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과 수년을 함께 보내며, 광부들이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그리고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동안 겪었던 혹독한 현실을 기록했다. 촬영팀은 광부들을 따라 뉴욕 증권거래소 앞에서 벌어진 피켓 시위 현장을 촬영했고, 흑폐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파업 중 총격을 당한 광부들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파업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회사가 새로운 계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한 것이었다.[3] 광부들은 이 조항이 지역의 열악한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자신들의 교섭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 문제는 파업 이후 몇 년이 지나 UMWA가 이 파업에서 광부들이 얻어낸 합의 내용을 전체 계약에 반영하면서 해결되었다.
코플은 내레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파업 참가자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영화 초반, 파업 파괴자들과 회사가 고용한 소위 '총잡이들'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총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파업이 1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양측 모두 공공연하게 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플은 촬영팀의 존재가 폭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실제 촬영 중이 아닐 때도 촬영하는 시늉을 하면서 현장을 계속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영화는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극명한 경제적 불균형을 보여준다.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은 단 1년 만에 170%나 급증했지만, 기본적인 수도 시설조차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파업 광부들에게 회사가 제안한 임금 인상률은 고작 4%였다. 이는 같은 해 예상 생활비 상승률인 7%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파업의 배경에는 UMWA 내부의 심각한 갈등도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광부의 지지를 받는 열정적인 노조 대표였던 조셉 야블론스키는 1969년 UMWA 회장 선거에서 현직 회장인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으나, 부정 선거 의혹 속에서 패배했다. 그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아내, 딸은 자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영화 초반 건강해 보였던 보일은 이후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지시하기 위해 다른 노조 간부에게 2만달러를 건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휠체어에 의지할 정도로 쇠약해진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선고를 받기 위해 법원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장면이 영화에 담겼다.
파업이 거의 1년째 이어지던 무렵, 광부 로렌스 존스가 몸싸움 중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젊고 인기가 많았던 존스는 16세 아내와 갓난 아기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그의 장례식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열하는 어머니가 다른 조문객들의 부축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존스의 죽음은 파업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노사 양측은 마침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합의에 이르렀다.
한편, 광산 공동체의 여성 지도자인 로이스 스콧은 파업 지지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고 독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여러 장면에서 파업 대열에서 이탈하려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며 투쟁 의지를 다진다. 특히 한 장면에서는 브래지어에서 권총을 꺼내 보이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4. 주요 등장인물
영화 《할란 카운티 USA》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의 파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광부들과 그 가족들: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들이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흑폐증의 위협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듀크 파워 컴퍼니에 맞서 파업 투쟁을 벌인다. 파업 과정에서 희생된 젊은 광부 로렌스 존스의 이야기는 파업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광부 및 가족 섹션 참고)
- 로이스 스콧: 광산 공동체의 여성 리더로, 파업 지지를 위해 주민들을 조직하고 독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때로는 브래지어에서 권총을 꺼내 보일 정도로 투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광부 및 가족 섹션 참고)
- 조셉 야블론스키: 많은 광부들의 지지를 받았던 개혁적인 UMWA 지도자이다. 1969년 노조 회장 선거에서 토니 보일에게 패배한 후 가족과 함께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자세한 내용은 #노조(UMWA) 관계자 섹션 참고)
- 토니 보일: 부패한 UMWA 회장으로, 야블론스키 살해 교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영화는 그의 권력 남용과 몰락 과정을 대비시킨다. (자세한 내용은 #노조(UMWA) 관계자 섹션 참고)
- 바바라 코플과 제작진: 영화감독 코플과 그녀의 팀은 파업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투쟁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때로는 카메라의 존재 자체가 폭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바라 코플과 제작진 섹션 참고)
- 회사 관계자: 노먼 야브로(이스트오버 광산 사장), 존 코코란(통합 석탄 사장) 등 듀크 파워 컴퍼니 및 관련 회사 측 인물들은 파업 금지 조항 삽입을 시도하고 파업 파괴자("총잡이들")를 고용하는 등 노동자들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회사(듀크 파워 컴퍼니) 관계자 섹션 참고)
이 외에도 파업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 UMWA 관련 인물: 휴스턴 엘모어(UMW 조직자), 필 스팍스(UMW 직원), 해리 패트릭(UMW 사무총장), 톰 윌리엄스(보일 운동가) 등 노조 내부의 다양한 입장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포함된다. (자세한 내용은 #노조(UMWA) 관계자 섹션 참고)
- 전문가 및 기타 관계자: 존 오리어리(전 미국 광산국 국장), 도널드 라스무센(웨스트버지니아 흑폐증 클리닉), 하울리 웰스 주니어 박사, 윌리엄 E. 사이먼(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 등 파업의 사회적, 의학적, 정치적 맥락을 설명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4. 1. 광부 및 가족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의 브룩사이드 광산 광부들은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UMWA의 지원을 받아 파업에 돌입했다.[5] 영화 감독 바바라 코플과 그녀의 촬영팀은 이 파업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광부 및 그 가족들과 수년을 함께 보냈다. 처음에는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뉴욕에서 온 히피 집단"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2] 코플은 곧 광부들의 신뢰를 얻어 그들의 투쟁을 가까이에서 담아낼 수 있었다.영화는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그리고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광부들이 직면한 혹독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은 단 1년 만에 170%나 급증했지만, 회사 측은 파업 광부들에게 예상 생활비 상승률(7%)보다 훨씬 낮은 4%의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다. 많은 광부 가족들은 전기나 수도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파업을 이어갔다. 코플은 뉴욕 증권 거래소 앞에서 벌어진 피켓 시위에도 동행했으며, 직업병인 흑폐증으로 고통받는 광부들과 파업 중 총상을 입은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고통을 기록했다.
회사는 새로운 계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했으나,[3] 광부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권익을 스스로 지킬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긴장감은 고조되었고, 회사가 고용한 파업 파괴자들("총잡이들")과 파업 참가자들 모두 공공연히 무기를 소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코플은 카메라의 존재가 폭력 사태를 어느 정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촬영을 계속했다.
파업 과정에서 광부 사회 내부의 갈등과 비극도 조명된다. 많은 광부들의 지지를 받았던 개혁적 노조 지도자 조셉 야블론스키는 1969년 UMWA 회장 선거에서 부패한 토니 보일에게 패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영화는 건강했던 보일이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위해 다른 노조 간부에게 2만달러를 제공하고 살인 청부를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쇠약해진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타나는 장면을 대비시킨다. 파업이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졌을 무렵, 젊은 광부 로렌스 존스가 폭력 사태 중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결국 회사와 노조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화는 파업 투쟁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중요한 역할을 강조한다. 광산 공동체의 주요 인물인 로이스 스콧은 파업 지지를 위해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파업 참여가 저조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인다. 한 장면에서는 스콧이 브래지어에서 권총을 꺼내는 모습도 나온다.
4. 2. 노조(UMWA) 관계자
조셉 야블론스키는 많은 광부들에게 지지를 받는 열정적인 노조 대표였다. 그는 1969년 UMWA 회장 선거에서 현직 회장인 W.A.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부정 선거로 널리 알려진 선거에서 야블론스키는 패배했다. 같은 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아내, 딸은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영화 초반 건강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보일은 이후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위해 청부 살인업자 고용 자금으로 다른 노조 간부에게 2만달러를 제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병색이 완연하여 휠체어에 의지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선고를 받기 위해 법원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본래 감독 바버라 코플이 '민주주의를 위한 광부들'과 함께 보일을 UMWA 회장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에 초점을 맞추려 했으나, 1973년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에서 UMWA가 조직을 도운 파업이 발생하자 촬영 방향을 바꾸었다.[5]
다음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UMWA 관련 인물들이다.
이름 | 직책/역할 | 비고 |
---|---|---|
토니 보일 | UMWA 회장 | 조셉 야블론스키 살해 교사 혐의 유죄 판결 |
조셉 야블론스키 | UMWA 회장 후보 | 1969년 선거 출마 후 가족과 함께 피살 |
휴스턴 엘모어 | UMW 조직자 | 브룩사이드 파업 관련 |
필 스팍스 | UMW 직원 | 브룩사이드 파업 관련 |
톰 윌리엄스 | 보일 지지 운동가 | |
해리 패트릭 | UMW 사무총장 |
4. 3. 회사(듀크 파워 컴퍼니) 관계자
듀크 파워 컴퍼니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의 노동자들과 대립하며 파업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다. 회사는 새로운 노동 계약 협상 과정에서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3] 이는 광부들이 지역 작업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파업에 대응하여 회사는 파업 파괴자들을 고용했으며, 파업 참가자들은 이들을 "총 잡이들"이라고 불렀다. 영화에는 이들이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총기를 숨기려 하지만, 파업이 1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결국 공개적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영화는 듀크 파워 컴퍼니의 재정 상태와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회사의 수익은 단 1년 만에 170%나 급증했지만, 파업 중인 광부들에게는 당시 예상 생활비 상승률인 7%에도 미치지 못하는 4%의 임금 인상만을 제안했다. 이는 수도나 기본적인 생활 시설조차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파업을 이어가던 광부들의 처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에 등장하는 회사 측 또는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직책/소속 |
---|---|
노먼 야브로 | 이스트오버 광산 사장 |
존 코코란 | 통합 석탄 사장 |
윌리엄 E. 사이먼 |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 |
4. 4. 바바라 코플과 제작진
바바라 코플 감독은 원래 '민주주의를 위한 광부들'(Miners for Democracy)과 토니 보일을 UMWA 회장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의 광부들이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파업을 시작하자, 코플은 UMWA가 조직을 도운 이 파업 현장으로 가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이 파업이 더 설득력 있는 주제라고 판단하여 영화의 초점을 변경했으며, 준비와 편집을 포함해 총 4년 동안 영화 제작에 매달렸다.[5]처음 코플과 촬영 기사 하트 페리가 파업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뉴욕에서 온 히피 집단"이 염탐하러 왔다는 소문 속에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코플은 자신과 이야기하지 말라고 주민들에게 말한 한 파업 참가자와 대면했을 때 "여기 사람들에게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말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2]
코플과 제작진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과 수년을 함께 보내며,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동안 그들이 겪는 혹독한 현실을 기록했다. 제작진은 광부들을 따라 뉴욕 증권 거래소 앞 피켓 시위 현장까지 동행했으며, 흑폐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파업 중 총격을 당한 광부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회사는 새로운 계약에 파업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려 했으나[3], 광부들은 이것이 지역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자신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이 문제는 파업 후 몇 년이 지나 UMWA가 이들의 합의 내용을 전체 계약에 통합하면서 해결되었다.
코플은 내레이션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직접 담아내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 파업 파괴자들(파업 참가자들은 이들을 "총잡이들"이라 불렀다)이 등장했을 때, 회사 측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총을 숨기려 했다. 파업이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양측 모두 공개적으로 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플은 촬영 팀의 존재가 폭력 사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껴, 실제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촬영하는 척하며 현장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코플은 영화를 통해 회사와 노동자 간의 극명한 경제적 불균형을 드러냈다.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이 단 1년 만에 170%나 증가한 반면, 기본적인 수도 시설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파업 광부들에게는 생활비 상승률 예상치(7%)보다 훨씬 낮은 4%의 임금 인상만이 제안되었다.
영화는 UMWA 내부의 갈등도 다룬다. 많은 광부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조셉 야블론스키는 1969년 UMWA 회장 선거에서 W.A.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으나, 부정 선거 의혹 속에서 패배했다. 그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가족은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영화 초반 건강해 보였던 보일은 이후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위해 다른 노조 간부에게 2만달러를 제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쇠약해진 모습으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법정에 출두하는 장면으로 대비된다.
파업이 거의 1년이 되었을 무렵, 젊고 인기 있던 광부 로렌스 존스가 몸싸움 중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는 16세의 아내와 갓난 아기를 남겼다. 그의 장례식에서 어머니가 비통하게 오열하는 모습은 영화의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이다. 존스의 죽음은 파업 종결을 위한 협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산 공동체의 여성 리더인 로이스 스콧은 파업 지지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고 독려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파업 참여에 소극적인 이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기도 하며, 한 장면에서는 브래지어에서 권총을 꺼내 보이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영화의 2004년 크라이테리온 컬렉션 특별 부록 ''할란 카운티, USA 제작 과정''에서 부감독 앤 루이스는 스콧을 여성 해방 운동가에 비유했다. 또한, 파업 참가자였던 제리 존슨은 코플과 촬영 팀의 존재가 폭력 사태를 막고 파업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아마 카메라가 총격 사태를 막았을 겁니다. 촬영 팀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우리 편이라 감사합니다."[13]
이름 | 직책/설명 |
---|---|
노먼 야브로 | 이스트오버 광산 사장 |
휴스턴 엘모어 | UMW 조직자 |
필 스팍스 | UMW 직원 |
존 코코란 | 통합 석탄 사장 |
존 오리어리 | 전 미국 광산국 국장 |
도널드 라스무센 | 웨스트버지니아 블랙 렁 클리닉 |
하울리 웰스 주니어 박사 | |
톰 윌리엄스 | 보일 운동가 |
해리 패트릭 | UMW 사무총장 |
윌리엄 E. 사이먼 | 미국 재무부 장관 |
5. 영화의 제작 과정
바버라 코플 감독은 본래 UMWA 내부 개혁 운동에 관한 영화를 기획했으나,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에서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한 파업이 발발하자 이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의 방향을 전환했다. 코플 감독과 제작진은 파업 현장에 직접 들어가 광부들과 수년간 함께 생활하며, 열악한 노동 조건 개선과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그들의 투쟁 과정을 밀착 취재했다.[5] 초기에는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도 있었으나,[2] 제작진은 신뢰를 쌓아가며 파업 과정의 주요 국면들, 예를 들어 파업 금지 조항을 둘러싼 노사 갈등,[3] 파업 파괴자들과의 충돌, 조셉 야블론스키 피살 사건과 같은 노조 내부 문제, 그리고 파업 참가자 로렌스 존스의 사망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록했다. 코플 감독은 촬영 행위 자체가 폭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여 위험 속에서도 기록을 이어갔으며, 파업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들의 모습도 담아냈다. 이 영화의 제작에는 총 4년이 소요되었다.[5]
5. 1. 촬영 기법 및 특징
바버라 코플 감독은 본래 켄지, 민주주의를 위한 광부들 운동과 토니 보일을 UMWA 회장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에 관한 영화를 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73년 6월, 켄터키주 할란 카운티 브룩사이드 광산의 광부들이 듀크 파워 컴퍼니를 상대로 파업에 돌입하자, 코플은 UMWA가 조직화를 도운 이 파업 현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이 파업이 더 강력한 주제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영화의 초점을 변경했으며, 준비와 편집을 포함해 총 4년 동안 이 영화에 매달렸다.[5]코플과 촬영 기사 하트 페리가 처음 파업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외부인인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뉴욕에서 온 히피 집단"이 염탐하러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 파업 참가자는 코플에게 사람들이 그녀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며 "여기 사람들에게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했다.[2]
이러한 초기 불신을 극복하고, 코플과 촬영팀은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과 수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갔다. 이를 통해 더 안전한 작업 환경, 공정한 노동 관행, 적절한 임금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동안 광부들이 직면한 혹독한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코플은 광부들을 따라 뉴욕 증권 거래소 앞 피켓 시위 현장까지 동행했으며, 흑폐증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파업 중 총격을 당한 광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영화는 파업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던 파업 금지 조항 문제를 다룬다. 회사는 새로운 계약에 이 조항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광부들은 이것이 지역의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교섭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 우려하며 반대했다.[3] 이 문제는 파업 이후 몇 년이 지나 UMWA가 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합의 내용을 전체 계약에 반영하면서 결국 해결되었다.
코플은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흔히 사용되는 해설(내레이션)을 배제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신,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달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영화 초반 파업 파괴자들과 회사가 고용한 소위 "총잡이들"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총을 숨기려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파업이 1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양측 모두 공개적으로 무기를 드러내게 되는데, 코플은 촬영을 계속하는 것(때로는 실제 촬영 없이 촬영하는 척하는 것만으로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촬영팀의 존재 자체가 현장의 폭력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는 객관적인 사실과 통계를 제시하며 노동자와 회사 간의 극명한 상황 차이를 보여준다. 듀크 파워 컴퍼니의 수익이 단 1년 만에 170%나 급증한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 같은 해 파업 광부들에게 제안된 임금 인상률은 고작 4%였다. 이는 당시 예상 생활비 상승률 7%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며, 광부들은 여전히 기본적인 수도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영화는 또한 UMWA 내부의 권력 투쟁과 비극적인 사건을 조명한다. 많은 광부들의 지지를 받았던 개혁적인 노조 대표 조셉 야블론스키는 1969년 UMWA 회장 선거에서 현직 회장 토니 보일에게 도전했으나, 부정 선거 의혹 속에서 패배했다. 그해 말, 야블론스키와 그의 아내, 딸은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영화 초반 건강해 보였던 보일은 이후 야블론스키 부부 살해를 청부한 혐의(다른 노조 간부에게 살인 청부 대가로 2만달러를 제공)로 유죄 판결을 받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선고를 받기 위해 법원 계단을 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파업이 거의 1년에 이르렀을 때, 젊고 인기가 많았던 광부 로렌스 존스가 몸싸움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16세의 아내와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그의 장례식에서 슬픔에 잠겨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이 사건이 파업에 미친 충격을 전달한다. 존스의 죽음은 길고 격렬했던 파업의 전환점이 되었고, 마침내 노사 양측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합의에 이르게 된다.
광산 공동체의 여성 지도자인 로이스 스콧은 파업을 지지하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여러 장면에서 파업 대열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며 투쟁 의지를 다진다. 특히 한 장면에서는 브래지어에서 권총을 꺼내 보이는 단호한 모습을 통해 파업에 임하는 여성들의 강인함과 결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 2. 영화에 사용된 음악
'''할란 카운티 USA'''에 사용된 음악은 광부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이 음악은 할란 카운티 사람들의 문화를 반영했으며, 그들의 문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민요의 힘을 보여주었다. 광부들의 이야기는 종종 노래를 통해 전달되었다.[4]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은 다음과 같다.
곡명 | 작사/작곡 | 가수/연주 |
---|---|---|
어둡고 깊은 동굴처럼 (Dark as a Dungeon) | 멀 트래비스 | 데이비드 모리스 (David Morris) |
42년 (Forty-Two Years) | 님로드 워크맨 | 님로드 워크맨 (노래), 케니 코세크 (Kenny Kosek) (연주) |
모든 석탄 광부여 오라 (Come All You Coal Miners) | 사라 거닝스 | 사라 거닝스 |
매닝턴 (Mannington) | 헤이즐 디킨스 | 데이비드 모리스 (David Morris) |
검은 폐 (Black Lung) | 헤이즐 디킨스 | 헤이즐 디킨스 |
냉혹한 살인 (Cold Blooded Murder) | 헤이즐 디킨스 | 헤이즐 디킨스 |
광부의 삶 (Miners Life) | 전통 곡 | 데이비드 모리스 (David Morris)의 밴드 |
당신은 어느 편인가 (Which Side Are You On) | 플로렌스 리스 (추가 가사: 조슈아 왈레츠키) | 플로렌스 리스 |
나의 작은 빛 (This Little Light of Mine) | 해리 딕슨 로스 (Harry Dixon Loes) | 빌 워싱턴 (Bill Worthington) |
석탄 문신 (Coal Tattoo) | 빌리 에드 휠러 (추가 가사: 데이비드 모리스) | 데이비드 모리스 (David Morris) |
1년생 사이의 문제 (Trouble Among Yearlings) | 컨트리 쿠킹 (Country Cookin') | |
론 프레리 (Lone Prairie) | 로스코 홀콤 (Roscoe Holcomb), 웨이드 워드 (Wade Ward) | |
그들은 우리를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They'll Never Keep Us Down) | 헤이즐 디킨스 | 헤이즐 디킨스 (노래), 라마 그리어 (Lamar Grier), 존 카타라키스 (John Katarakis), 존 오츠카 (John Otsuka), 게리 헨더슨 (Gary Henderson) (반주) |
6. 영화에 대한 평가
6. 1. 비평적 반응
워싱턴 포스트의 게리 아놀드는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하며, 감독 바버라 코플이 "석탄 채굴에 생계를 의존하는 애팔래치아 남녀의 용기, 끈기, 존엄성에 대한 감동적이고, 드러나는 증언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코플과 사진작가 하트 페리가 브룩사이드 광부들과 파업을 조직한 아내들의 경험, 열망, 불만을 소박하면서도 힘있게 전달했다고 덧붙였다.[5]2006년 재개봉 당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영화가 지닌 힘이 여전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켄터키주 광부들의 파업 이야기에서 모든 힘을 유지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용병들을 고용해 파업 파괴자들을 광산으로 호송했고, 가장 효과적인 피켓 시위대는 광부들의 아내였으며, 그들은 분명하고, 불굴의, 용감했다"고 썼다. 또한 새벽에 총격으로 파업 참가자들을 공격하는 장면과 코플 감독과 카메라맨이 폭행당하는 생생한 순간을 담아냈다고 언급했다.[6]
영화 평론가 데니스 슈워츠는 다큐멘터리를 호평하면서도, 오직 광부들의 시각에서만 투쟁을 바라본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했다. 그는 이 영화가 "미국에서 계급 전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더 좋고 감동적인 노동 파업 영화 중 하나이지만, 문제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나 균형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슈워츠는 영화가 광부들의 고난을 잘 기록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며, 특히 헤이즐 디킨스의 '우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나 플로렌스 리스의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건가요?' 같은 의미 있고 매력적인 석탄 채굴 노래들이 사건의 감정적 영향을 더하고 애팔래치아 광부들의 분위기와 노동조합의 열기를 느끼게 해준다고 덧붙였다.[7]
영화 평점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는 100%의 신선도 평가를 받았다.[8]
6. 2. 수상 내역
wikitext시상식/기관 | 수상 부문 | 연도 |
---|---|---|
아카데미상 |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 | 1976년 |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 | 특별상 | 1977년 |
벨기에 영화 비평가 협회 | 그랑프리 | 1979년 |
6. 3. 사회적 영향
1990년, 이 영화는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아 미국 국립 영화 등기소에 의해 의회 도서관 보존작으로 선정되었다.[9] 이는 영화가 지닌 사회적 메시지와 영향력이 공식적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2014년, 영국의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발표한 역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 목록에서 다른 두 작품과 함께 공동 24위에 오르며 그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10][11]7. 보존 및 복원
1990년, 이 영화는 "문화적, 역사적 또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미국 국립 영화 등기소에 의해 의회 도서관에 보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9] 2004년에는 영화 아카데미 보존소가 뉴욕 여성 영화 & 텔레비전과 공동으로 영화를 보존 처리했다.[12] 또한, 2014년에는 영국의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목록에서 다른 두 편의 영화와 함께 공동 24위에 올랐다.[10][11]
참조
[1]
간행물
Oral History Interview with Daniel H. Pollitt, April 17, 1991.
http://docsouth.unc.[...]
UNC Library
1991-04-17
[2]
웹사이트
Back to Harlan County, USA
https://www.theattic[...]
2018-07-25
[3]
논문
Harlan County, USA, The miners' struggle
http://www.ejumpcut.[...]
1977
[4]
간행물
Documentary Noise: The Soundscape of Barbara Kopple's Harlan County, U.S.A.
https://muse.jhu.edu[...]
2017
[5]
뉴스
'Harlan County': Ardent, Absorbing
https://www.washingt[...]
2020-09-08
[6]
뉴스
Harlan County, U.S.A. movie review (2006)
https://www.rogerebe[...]
2011-02-14
[7]
웹사이트
Ozus' World Movie Reviews
https://web.archive.[...]
2011-02-14
[8]
웹사이트
Harlan County, USA
https://www.rottento[...]
[9]
웹사이트
Complete National Film Registry Listing
https://www.loc.gov/[...]
2020-04-30
[10]
웹사이트
Sight and Sound Publishes Top 50 Documentaries List IndieWire
https://www.indiewir[...]
2024-02-20
[11]
웹사이트
The Best Documentaries of All Time Sight & Sound
https://www2.bfi.org[...]
BFI
2017-02-28
[12]
웹사이트
Preserved Projects
https://www.oscars.o[...]
[13]
인터뷰
Interview with Jerry Johnson
[14]
뉴스
Barbara Kopple Reflects on Joys and Dangers of Filming 'Harlan County, USA'
https://variety.com/[...]
201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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