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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넬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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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넬스도르프 전투는 1745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반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연합군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슐레지엔으로 이동했고, 헨넬스도르프에서 작센군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이 승리로 프로이센은 베를린 공격 위협을 제거하고 작센으로 진격할 수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의 슐레지엔과 브란덴부르크의 연결을 끊고 베를린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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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넬스도르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헤너스도르프 전투
부분 전쟁제2차 슐레지엔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헤너스도르프에 있는 한스 요아힘 폰 치텐 기념비
날짜1745년 11월 23일
장소슐레지엔 헤너스도르프 (프로이센 왕국, 현재 폴란드)
결과프로이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로이센
교전국 2작센
지휘관 및 지도자
프로이센 지휘관프리드리히 2세
치텐 장군
작센 지휘관카를 알렉산더
부흐너 장군
병력 규모
프로이센 병력20개 후사르 기병대
10개 퀴라시에 기병대
작센 병력6개 퀴라시에 기병대
2개 보병 대대
사상자 및 피해
프로이센 사상자알 수 없음
작센 사상자2,000명 (포로 1,000명 포함)
캠페인 정보 상자
프리드리히 대왕
범례[[파일:Red pog.svg|15px]] 제1차 슐레지엔 전쟁 [[파일:Red pog.svg|15px]] 제2차 슐레지엔 전쟁 [[파일:Red pog.svg|15px]] 제3차 슐레지엔 전쟁

2. 배경

마리아 테레지아조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로이센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오스트리아, 작센, 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작센군 주력은 독일 방면으로 진격하는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여 남쪽에서, 보헤미아의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작센군 일부는 남동쪽에서 베를린을 노렸다. 러시아는 북쪽에서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4]

이 계획은 작센 재상 브륄이 드레스덴 주재 스웨덴 대사에게 누설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알려졌다. 첩보를 통해 사전에 계획을 알았다는 설도 있다.[5] 프리드리히 대왕은 레오폴트 1세를 마그데부르크에 배치하여 작센 방면을 맡기고, 자신은 슐레지엔에서 군대를 준비 중이던 레오폴트 2세와 합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북상하는 연합군을 각개격파하고, 작센으로 진출하여 아군과 합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1월,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보헤미아에서 라우지츠로 진입하여 북동쪽으로 이동하며 프로이센 영토로 들어가 슐레지엔과 브란덴부르크의 연결을 끊고 베를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은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에게 3,000명의 경보병을 주어 나이세 강 주변에 배치, 연합군의 동태를 정찰하고 척후 활동을 저지하도록 했다.

3. 전투 경과

마리아 테레지아조르 전투 이후 프로이센과의 재강화를 거부하고 반격을 계획했다. 이는 작센군 주력과 오스트리아군이 합류하여 남쪽에서,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작센군 일부가 남동쪽에서 베를린을 노리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러시아는 북쪽에서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이 계획은 작센 재상 하인리히 폰 브륄이 드레스덴 주재 스웨덴 대사에게 흘린 것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 정설이나, 대왕이 첩보를 통해 사전에 알았다는 설도 있다.

대왕은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에게 마그데부르크에서 작센 방면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슐레지엔에서 군대를 준비 중인 아들 레오폴트 2세를 만나러 갔다. 대왕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북상하는 연합군을 격파하고, 작센으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아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11월, 보헤미아에서 라우지츠로 진입한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거리를 유지하며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프로이센 영토로 진입하여 슐레지엔과 브란덴부르크의 연결을 끊고 베를린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슐레지엔에 도착한 대왕은 한스 카를 폰 빈터펠트에게 경보병 3,000명을 주어 나이센 강 주변에 배치하여 적의 동태를 정찰하고 척후 활동을 저지시켰다. 프로이센군은 즉시 행동할 준비를 갖추었으나, 결정적인 정보를 기다리며 슐레지엔에 머물렀다.

11월 21일,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강행군을 벌여 작센군의 숙영지였던 헨넬스도르프 근처에 접근했다. 이때 프로이센군의 활동을 알아챈 오스트리아군 기병이 본대에 급보를 전하려 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의 경기병과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2일, 대왕은 빈터펠트로부터 적군이 괴를리츠에서 라우반에 걸쳐 배치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5] 대왕은 노 데사우에게 작센으로 진격을 명령하고, 자신도 11월 23일 나움부르크(Naumburg)에서 크바이스 강을 건너 4개 종대로 강행군하여 연합군에 접근했다. 작센군 후사르(Ulan)의 저항이 있었으나, 프로이센군 후사르가 이들을 추격했다.

이후 11월 23일 프로이센군의 헨넬스도르프 기습과 24일 괴를리츠 전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여 프로이센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고, 프리드리히는 작센을 굴복시키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했다.

3. 1. 프로이센군의 기습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2경기병연대가 헨넬스도르프에 접근하여 작센군 부대(기병 3개 연대, 보병 1개 연대)를 발견했다.[5][6] 치텐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들을 묶어두겠다고 보고했고,[6]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로호우에게 흉갑기병 2개 연대를 주어 급파했다.[6] 사무엘 폰 폴렌츠의 척탄병 3개 대대도 뒤따랐다.[6]

치텐은 기습에 성공했고, 작센군은 장비를 남기고 마을 밖으로 도망쳤으나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요제프 테오도르 폰 루에슈의 경기병 연대가 돌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로호우의 흉갑기병이 후사르와 함께 돌격하여 작센군 기병을 격파했고, 포위된 작센군 보병 1,000여 명은 방진을 짜고 저항했으나 폴렌츠의 척탄병 공격과 프로이센 기병의 돌격에 항복했다.[7]

대왕의 본대는 전투 후 도착했고, 치텐은 노획(鹵獲)한 작센 군악대를 받았다.[8] 치텐은 이 전투에서 아군의 오발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9]

3. 2. 오스트리아군 격퇴

프리드리히 대왕의 본대는 전투가 끝난 후에 헨넬스도르프에 도착했다. 다음날(24일) 프로이센군은 괴를리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여 거의 전투 없이 패주시켰다.[7] 11월 27일, 빈터펠트의 부대가 보헤미아 국경의 치타우에서 오스트리아군 후위를 공격하여 치타우 전투가 벌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쫓겨났다.[10] 카를 공자는 전투를 회피하고 보헤미아로 후퇴했으며, 프로이센군은 막대한 양의 물자를 노획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많은 병력을 손실했다.[10]

4. 결과 및 영향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센을 굴복시키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진군했다.[1] 이로써 프로이센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다.[1] 마리아 테레지아조르 전투 이후 프로이센과의 재강화를 인정하지 않고 반격을 계획했지만,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베를린 공격 계획은 좌절되었다.[1]

참조

[1] 서적 On war N/A 1908
[2] 서적 History of Prussia Houghton Mifflin 1888
[3] 서적 N/A N/A 1990
[4] 서적 N/A N/A 2008
[5] 서적 N/A N/A 1986
[6] 서적 N/A N/A 2008
[7] 서적 SECOND SILESIAN WAR, IMPORTANT EPISODE IN THE GENERAL EUROPEAN ONE N/A N/A
[8] 서적 N/A N/A 2006
[9] 서적 N/A N/A 2006
[10] 서적 N/A N/A 1986
[11] 서적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entry National Flags N/A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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