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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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백은 신라 시대 귀족 대표자 회의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의문점이 존재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신라의 고대 국가 성립 이전에는 부족장 연맹 정치의 유물이었고, 이후에는 형식적인 제도로 변화했다. 《수서》, 《당서》 등 중국 측 기록과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신라 측 기록에서 화백 회의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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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 (신라) | |
---|---|
화백 | |
회의 정보 | |
이름 | 화백 |
원어명 | 和白 |
위치 | 신라 |
종류 | 귀족 회의 |
웹사이트 | 우리역사넷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1. 중앙통치조직 3) 화백회의 |
2. 화백 회의의 성격과 의의
화백 회의는 신라의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최고 의결 기구였다. 《수서》<신라전>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서》<신라전>에는 "정사는 반드시 중의(衆議)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화백 회의는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며, 신라가 고대 국가로 발전하면서 점차 형식적인 제도로 변화하였다.[4]
2. 1. 만장일치제
화백 회의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여 구성원 간의 합의를 중시했다. 《당서》<신라전>에는 "정사는 반드시 중의(衆議)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이는 만장일치라는 중의의 총화에 따른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다.[4]2. 2. 귀족 대표 회의
화백은 신라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씨족 공동사회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하였고,[4] 에는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를 말한다.[4] 이때 백관이란 진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리며, 그 의장이 상대등(上大等)이었다.[4]이것은 만장일치라는 중의(衆議)의 총화(總和)에 따른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으나, 실제 어떤 사건 처리에 만장일치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 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된 산악이란 점과 더불어 커다란 의문이 남는다.[4] 그러나 이것은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니, 결국 화백은 신라의 고대국가 성립 이전, 즉 정치제도의 미분화 시대인 귀족 연맹기에 있었던 부족장 연맹정치의 유물이었고, 고대국가가 완성됨에 따라 형식적인 제도가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4]
三國遺事한국어 眞德王한국어조에는 "왕(王)의 대(代)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 좌중(座中)으로 달려들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고 하여 6명의 대신이 우지산( 知山) 바위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했으며,[4] 三國史記한국어에 의하면 김춘추는 여기서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였다.[4]
2. 3. 왕권 견제 기능
화백은 신라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는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4] 《수서》 〈신라전(新羅傳)〉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당서》 〈신라전(新羅傳)〉에도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였음을 알 수 있다.[4]이 회의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만장일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회의 장소도 비공개된 산악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의문점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 회의는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다.[4]
결론적으로, 화백은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립하기 이전, 즉 정치 제도가 분화되지 않은 귀족 연맹기에 있었던 부족장 연맹 정치의 유물이었다. 고대 국가가 완성되면서 형식적인 제도로 변화하였다.[4]
3. 화백 회의의 변천
화백 회의는 신라의 정치, 사회 변화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이 변화했다. 초기에는 부족 연맹 회의의 성격을 띠었으나, 고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점차 귀족들의 회의체로 변화하였다.
3. 1. 부족 연맹 회의의 유산
화백은 신라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씨족 공동 사회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隋書중국어 新羅傳중국어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하였고, 唐書중국어 新羅傳중국어에도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를 말한다.[4] 이 때의 백관(百官)이란 진골(眞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리며, 그 의장이 상대등(上大等)이었다.[4] 이것은 만장일치라는 중의(衆議)의 총화(總和)에 따른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으나, 실은 어떤 사건 처리에 만장일치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그 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된 산악이란 점과 더불어 커다란 의문이 남는다.[4] 그러나 이것은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니 결국 화백(和白)은 신라의 고대 국가 성립 이전, 즉 정치 제도의 미분화 시대인 귀족 연맹기에 있었던 부족장 연맹 정치의 유물이었고, 고대 국가가 완성됨에 따라 형식적인 제도가 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4]3. 2. 고대 국가 성립 이후의 변화
隋書중국어 新羅傳중국어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唐書중국어 新羅傳중국어에도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를 언급한다. 이때 백관(百官)은 진골(眞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렸으며, 그 의장은 상대등(上大等)이었다. 이는 만장일치라는 중의(衆議)의 총화(總和)에 따른 민주적 방식이라 볼 수 있으나, 실제 사건 처리에 있어 만장일치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고, 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된 산악이란 점도 의문으로 남는다.[4]그러나 화백은 왕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며, 신라의 고대 국가 성립 이전, 즉 정치 제도가 미분화된 귀족 연맹기에 있었던 부족장 연맹 정치의 유물이었다. 고대 국가가 완성됨에 따라 화백은 형식적인 제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한국어 진덕왕한국어조에는 "왕(王)의 대(代)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호림공·염장공·유신공이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 좌중(座中)으로 달려들었다. 제공(諸公)이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났으나 …"라고 하여 6명의 대신이 우지산( 知山) 바위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한국어에 의하면 김춘추는 여기서 왕으로 추대되었다.[4]
4. 역사 기록에 나타난 화백 회의
화백은 신라 귀족 대표자 회의로서 씨족 공동사회의 유물이다. 만장일치제라는 특징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만장일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회의 장소인 4영지(四靈地)가 비공개였다는 점에서 의문이 남는다. 화백은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력을 가졌으며,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점차 형식적인 제도가 되었다.[4]
4. 1. 《수서》와 《당서》의 기록
《수서》 〈신라전〉에는 "큰일이 있을 때에는 여러 관헌을 모아 상세히 토의하여 결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당서》 〈신라전〉에는 "정사는 반드시 중의에 붙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하여 국가 중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백관회의(百官會議)를 언급하고 있다.[4] 여기서 백관(百官)이란 진골 대표로서 흔히 대등(大等)이라 불리며, 그 의장이 상대등이었다.[4]4. 2.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 〈진덕왕조〉에는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남산 우지암에 모여 국사(國事)를 의논할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 좌중(座中)으로 달려들자 제공(諸公)이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이곳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참조
[1]
문서
Unlike Baekje was majority rule in Jeongsa Rock Council
[2]
웹인용
우리역사넷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1. 중앙통치조직 3) 화백회의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1-03-21
[3]
웹사이트
화백
https://ko.wikisourc[...]
[4]
웹사이트
화백제도
https://ko.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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