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타 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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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리타 히사노리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와 2루수로 활약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대일본도쿄야구클럽 창단에 참여했다. 1936년 도쿄 세네터스로 이적하여 초대 도루왕을 차지했고, 1938년에는 최고 훈공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심판, 코치, 해설위원,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196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가리타는 2루 수비의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본 프로 야구 창설 시기 선수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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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타 히사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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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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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명 | 가리타 히사노리 |
영어 표기 | Hisanori Karita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생년월일 | 1910년 1월 19일 |
사망일 | 2001년 8월 3일 |
신장 | 170cm |
체중 | 66kg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수비 위치 | 2루수 |
프로 입단 | 1934년 |
첫 출장 | 1936년 |
마지막 출장 | 1951년 |
국적 | 일본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구제 혼모쿠중학교 구제 호세이대학교 도쿄클럽 |
프로 | 대일본도쿄야구클럽 (1934-1935) 도쿄 세네터스 츠바사군 (1936-1940) 다이요군 (1941-1942) 야마토군 (1942-1943) 도큐 플라이어스 규에이 플라이어스 (1947-1948)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0) 긴테쓰 펄스 (1950-1952) |
실업 | 가와사키 이스즈 |
감독/코치 경력 | |
수상 | |
선정 | 일본 |
선정 년도 | 1969년 |
선정 방법 | 경기자 표창 |
2. 선수 경력
(내용 없음)
2. 1. 프로 입단 전
요코하마 시립 고토부 초등학교와 구제 혼모쿠 중학교(현재의 요코하마 고등학교)를 거쳐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유격수로 활약하며 와카바야시 타다시와 함께 호세이 대학 야구부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대학 졸업 후인 1933년에는 아버지의 연줄로 일본방송협회(NHK) 도쿄 중앙 방송국에 취직하여 가입과에서 근무했다. NHK에 재직하면서도 클럽팀인 도쿄 클럽에서 야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도쿄 클럽에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출신의 라이벌이었던 미야타케 사부로와 함께 뛰었으며, 주로 7번 타자 겸 유격수로 활약했다. 같은 해 제7회 전일본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 2. 프로 선수 시절
193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대일본도쿄야구클럽 창단에 참여했으며, 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프로 입단 선수 제2호였다. 유격수로서 1935년 미일 대항전 및 미국 원정에 참가했다. 이 원정에서 메이저 리그의 명 2루수 프랭키 프리시를 보고 "내야의 요점은 2루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1]. 당시 일본에서는 2루수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포지션으로 여겨졌기에 이는 새로운 인식이었다.이 경험을 계기로 1936년 도쿄 세네터스로 이적하면서 입단 조건으로 2루수 전향을 요청했다. 이적 첫해인 1936년, 16도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초대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발이 특별히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주루 센스를 바탕으로 "다베는 발로 뛰지만, 가리타는 머리로 뛴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7년 가을 리그부터는 감독을 겸임하기 시작했고, 1938년 춘계 리그[2]에서는 타율 .299, 5홈런을 기록하며 MVP(최고 훈공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의 뛰어난 플레이는 "'''가리타 앞에 가리타 없고, 가리타 뒤에 가리타 없다. 일대(一代)의 명수(名手) 가리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며, 초기 프로 야구계에서는 "'''투의 사와무라 에이지, 타의 카게우라 마사시, 수비의 가리타'''"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단정한 외모로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 여성 팬들을 모으는 선수로도 알려졌다.
1941년 소속팀 도쿄 세네터스(당시 쓰바사군)가 나고야 킨코군과 합병하여 다이요군이 되자, 이시모토 슈이치 총감독과 함께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후 팀 내 불화로 인해 고립되었고, 1942년 야마토군으로 이적하여 선수로 활동하다 시즌 도중부터 감독을 겸임했다. 1943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한 차례 은퇴했다.
전후에는 이스즈 자동차에서 근무하며 사회인 야구팀 이스즈 자동차 야구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후 고니시 도쿠로의 설득으로 1946년 신생팀 세네터스에 입단하며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16][3]. 1947년 팀명이 도큐 플라이어스로 변경된 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으나, 시즌 도중 긴테쓰 펄스로 다시 팀을 옮겼다. 1951년 긴테쓰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으며, 1952년 코치 전임에 가까워지면서 최종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가리타는 일본 근대 야구에서 2루수 수비의 중요성을 알리고 수준을 끌어올린 선수로 평가받는다. 그의 포지셔닝, 점핑 스로우, 병살 플레이 등은 당시 일본 야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적인 내야 수비 포메이션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상대 주자를 속이는 숨겨진 공 플레이[13](가리타 자신은 도쿄 6대학 시절 호세이 대학 팀 동료였던 와카바야시 타다시에게 배웠다고 밝혔다[14])나 심판의 눈을 속이는 교묘한 터치 플레이 등 트릭 플레이에도 능했다[12]. 한편,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퇴장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심판 니데카와 노부아키에게 항의하다 "무례한 놈!"이라고 말해 퇴장당했으며, 미국 원정 중에도 영어로 금지어를 사용해 퇴장당할 뻔한 일화가 있다.
팀명 | 활동 기간 |
---|---|
도쿄 클럽 | ? ~ 1933년 |
대일본도쿄야구클럽 | 1934년 ~ 1935년 |
도쿄 세네터스·쓰바사군 | 1936년 ~ 1940년 |
다이요군 | 1941년 ~ 1942년 |
야마토군 | 1942년 ~ 1943년 |
세네터스·도큐 플라이어스·규에이 플라이어스 | 1947년 ~ 1948년 |
마이니치 오리온스 | 1950년 |
긴테쓰 펄스 | 1950년 ~ 1951년 |
2. 3. 은퇴 이후
1951년부터 코치를 겸임하다가 1952년 거의 코치 전임이 되면서 현역에서 은퇴했다.은퇴 후에는 퍼시픽 리그 심판원으로 활동했으며(1952년 ~ 1956년), 1957년부터 1958년까지는 마이니치 오리온스(1958년부터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헤드 코치를 역임했다. 심판원으로는 5시즌 동안 재임하면서 4번이나 일본 시리즈에 출전하는 등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4].
이후 야구 해설자와 평론가로 활동했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NHK의 프로 야구 해설자를 맡았는데, 시무라 마사요리와의 콤비로 분방하고 재미있는 해설을 선보였다[5]. 1977년부터는 tvk의 하이 업 나이터 해설자를 맡았고, 닛칸 스포츠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산뜻한 기술평으로 인기를 얻었다[6].
1969년에는 야구 전당에 경기자 표창으로 헌액되었다[7].
1975년 평론가 계약이 해지된 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연금이 적어 술과 담배를 끊고 근근이 생활했으며[8], 1984년 여름에는 위궤양으로 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에는 요코하마 자택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8]. 말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의 이야기꾼으로서 텔레비전에 종종 출연하기도 했다.
2001년 8월 3일 노쇠로 사망했다[9]. 향년 90세.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창설 당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3. 플레이 스타일
"일본 근대 야구의 2루 수비는 가리타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2루 수비 실력을 자랑했다. 당시 평가는 "가리타 씨의 2루 수비는 절품이었고, 천재적이었다. 같은 2루수로서 가리타 씨를 목표로 노력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라고 할 정도였다. 1934년 미·일 대항전에서 명 2루수 찰리 게린저를 보고 2루수의 중요성을 깨달아 1936년 도쿄 세네터스로 이적하면서 2루수로 전향했다.
2루수 전향 후, 현대적인 내야 수비 포메이션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대 타구 방향을 예측하는 뛰어난 위치 선정 능력과 더불어, 점핑 스로우, 정확한 송구, 유격수와의 병살 플레이 등 내야 수비 콤비네이션을 끊임없이 연마했다. 포수의 자세에서 갑자기 수비 위치를 바꾸거나, 주자를 태그한 후 1루로 던져 병살을 완성하는 플레이는 가리타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릭 플레이에도 능숙하여, 3루 주자를 보는 척하며 2루로 송구하거나[12], 포수의 송구가 글러브에 들어오기 전에 잡은 척 소리를 내어 주자를 태그 아웃시키거나, 태그하지 않고도 아웃처럼 보이게 하는 등 심판을 속이는 플레이도 종종 시도했다. 가리타 본인은 훗날 "심판 눈을 속이는 건 나쁜 놈이나 하는 짓"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숨겨진 공을 성공시킨 선수이기도 하다[13]. (가리타 자신은 도쿄 6대학 시절 호세이 대학 팀 동료였던 와카바야시 타다시에게 배웠다고 밝혔다[14].) 수비뿐 아니라 주자로서도 루와 루 사이에서 멈춰 서서 투수에게 말을 거는 등 시간을 끌다 2루를 훔치는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16도루로 초대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는데, 발이 특별히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주루 센스를 가져 "다베 다케오는 발로 뛰지만 가리타는 머리로 뛴다"는 평을 들었다.
한편,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퇴장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심판 니데카와 노부아키에게 "무례한 놈!"이라고 항의하다 퇴장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원정 시절에도 심판에게 영어로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해 퇴장당할 뻔했으나, 동료가 "가리타가 아는 유일한 영어 단어인데 뜻을 모르고 쓴 것"이라고 변호해 위기를 넘긴 일화도 있다.
4. 평가 및 영향
가까운 사이였던 치바 시게루는 "대전 전의 대천재는 가리타, 대전 후는 나가시마 시게오"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뛰어난 플레이 센스는 "가리타 앞에 가리타 없고, 가리타 뒤에 가리타 없다. 일대의 명수 가리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당대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다. 주루 능력 또한 발이 특별히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센스를 바탕으로 "다베 다케오는 발로 뛰지만 가리타는 머리로 뛴다"는 평을 들으며 1936년 초대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다.
1934년 미일 야구 대항전에서 미국의 명 2루수 찰리 게린저의 플레이를 보고 '내야의 핵심은 2루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2루수가 수비력이 부족한 선수들이 맡는 포지션으로 여겨졌으나, 가리타는 1936년 도쿄 세네터스로 이적하며 2루수로 전향했다. 가리타의 2루 수비는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적인 내야 수비 포메이션 정립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단정한 외모 덕분에 '메이지 진구 구장에 여성 팬을 모으는 선수'로 불리기도 했다.
5. 상세 정보
구제 혼모쿠 중학교(현재의 요코하마 고등학교)와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다. 1933년 아버지의 연줄로 도쿄 중앙 방송(NHK)에 입사하여 가입과에서 근무했다. 야구는 클럽 팀 도쿄 클럽에서 활동했으며, 미야타케 사부로와 함께 주로 7번 타자 겸 유격수로 뛰었다. 같은 해 제7회 전일본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193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대일본도쿄야구클럽 창단에 참여하여(자이언츠 프로 입단 선수 제2호) 유격수로서 미일 대항전과 1935년 미국 원정에 참가했다. 이 미국 원정에서 명 2루수 찰리 게린저의 플레이를 보고 "내야 수비의 핵심은 2루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에서는 2루수가 상대적으로 수비력이 약한 선수들이 맡는 포지션으로 여겨졌다.
1936년 도쿄 세네터스로 이적하며 2루수로 전향했다. 1938년에는 선수 겸 감독을 맡아 춘계 리그에서 활약하여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그의 플레이는 "'''가리타 앞에 가리타 없고, 가리타 뒤에 가리타 없다. 일대의 명수 가리타'''"라는 유행어를 낳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또한 준수한 외모로 "메이지 진구 구장에 여성 팬을 모으는 선수"로 불리기도 했다.
1936년 추계 리그에서는 16도루를 기록하며 초대 도루왕이 되었다. 발이 특별히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주루 센스가 뛰어나 "'''다베 다케오는 발로 뛰지만 가리타는 머리로 뛴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3년에는 야마토군의 감독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스즈 자동차 직원으로 일하며 사내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고니시 도쿠로의 설득으로 1946년 신생팀 세네터스에 입단하며 프로 야구계에 복귀했다[16]. 1950년에는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고, 시즌 중 다시 긴테쓰 펄스로 옮겨 195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마이니치와 긴테쓰에서 코치를 역임했고, 심판 및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1969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하여 퇴장당한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심판 니데카와 노부아키에게 "무례한 놈!"이라고 외쳐 자주 퇴장당했으며, 미국 원정 중에도 심판에게 영어 비속어를 사용했다가 퇴장당할 뻔한 적이 있다. (당시 동료가 "가리타가 아는 유일한 영어 단어인데 뜻을 모르고 쓴 것"이라고 변호하여 퇴장은 면했지만, 경기 중 발언 금지 조치를 받았다.)
말년에는 요코하마 자택에서 지내며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로 TV에 종종 출연했다. 2001년 8월 3일, 노쇠로 인해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창설 당시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5. 1. 수상 및 타이틀 경력
5. 2.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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