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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야마번 (에치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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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야마번 (에치젠국)은 에치젠국에 위치했던 번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 오가사와라 가문을 거치며 존속되었다. 1624년 마쓰다이라 나오모토가 3만 석으로 가쓰야마번을 시작했으나, 나오요시 대에 오노번으로 이봉되며 폐지되었다가, 1691년 오가사와라 사다노부가 2만 2천 석으로 재설립했다. 막부 말기 기근과 농민 봉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번정 개혁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교토의 치안을 담당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가쓰야마현이 되었다가 후쿠이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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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야마번 (에치젠국)
지도
기본 정보
이름가쓰야마번
원어명越前勝山藩 (에치젠 가쓰야마 번)
위치에치젠국 가쓰야마
현재 위치후쿠이현 가쓰야마시
미쓰바아오이 문양
미쓰바아오이 문양
역사
성립1613년
해체1871년
주요 사건후쿠이번에서 분할
가문 변동마쓰다이라 씨
오가사와라 씨
통치
정치 체제다이묘 영지
번주마쓰다이라 다다마사 (1613년 ~ 1624년)
오가사와라 나가오키 (1691년 ~ 1732년)
오가사와라 나가타케 (1732년 ~ 1760년)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1760년 ~ 1795년)
오가사와라 나가쓰구 (1795년 ~ 1828년)
오가사와라 나가요시 (1828년 ~ 1853년)
오가사와라 나가토모 (1853년 ~ 1869년)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1869년 ~ 1871년)
지리
중심지가쓰야마성

2. 역사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치젠국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에게 68만 석의 영지로 주어졌다. 히데야스는 가신 하야시 사다마사에게 가쓰야마 9800석을 맡겼으나, 게이초 17년(1612년) 후쿠이번의 2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에 의해 추방되었다. 겐나 9년(1623년) 다다나오가 막부 명령으로 개역되면서 후쿠이번은 분할되었고, 이때 히데야스의 셋째 아들 마쓰다이라 나오마사오노번 5만 석, 다섯째 아들 유키 나오모토가 에치젠 가쓰야마번 3만 석(일설에는 2만 5천 석)을 받아 가쓰야마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나오모토간에이 12년(1635년) 오노번으로 옮겨갔고, 그의 동생 마쓰다이라 나오요시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쇼호 원년(1644년) 나오요시마저 오노번으로 이봉되면서 가쓰야마번은 폐번되어 후쿠이번 관할을 거쳐 조쿄 3년(1686년)에는 막부 직할령인 천령이 되었다.

겐로쿠 4년(1691년), 미노국 타카스번에서 오가사와라 사다노부가 2만 2천 석으로 들어오면서 가쓰야마번은 다시 세워졌다. 오가사와라 가문은 에도 시대 말기까지 가쓰야마를 통치했다. 이 시기 사다노부검지 등을 실시하여 번 통치의 기반을 다졌으며, 호에이 5년(1708년)에는 가쓰야마성 축성 허가를 받아 7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카 대에 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분세이 5년(1822년) 혼마루 화재로 성의 주요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분세이 9년(1826년)에 재건되었다.

막말에는 기근 등 자연재해로 인해 10여 차례의 백성 잇키(봉기)와 우치코와시(파괴 행위)가 발생하는 등 번의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가로(家老) 하야시 모센 주도로 담배 전매제 등 번정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주민 부담 가중으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교토 주변 경비를 담당했다.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으로 마지막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지번사가 되었고, 메이지 4년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에 따라 가쓰야마번은 가쓰야마현이 되었다. 나가모리는 면관되어 도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20일, 가쓰야마현은 다른 에치젠국의 현들과 통합되어 후쿠이현의 일부가 되었다.

2. 1.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시대 (1624년 ~ 1691년)

겐나 9년(1623년) 후쿠이번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막부의 명령으로 개역되면서, 후쿠이번은 분할되었다. 이때 유키 히데야스의 다섯째 아들인 유키 나오모토가 가쓰야마를 중심으로 3만 석(일설에는 2만 5천 석)의 영지를 받아 에치젠 가쓰야마번이 성립되었다. 이는 가쓰야마번의 시작이었으나, 초기에는 독립적인 번인지 후쿠이번의 지번인지 다소 불명확한 측면이 있었다.

간에이 12년(1635년), 나오모토는 인접한 오노번으로 이봉되었고, 대신 그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나오요시(기노모토번 번주)가 가쓰야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쇼호 원년(1644년),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역시 오노번으로 이봉되면서 가쓰야마번은 폐번되었다. 그 영지는 후쿠이번의 관할을 거쳐 조쿄 3년(1686년)에는 막부의 직할령인 천령이 되었다. 이로써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쓰야마번 통치는 막을 내렸다.

2. 2. 오가사와라 가문 시대 (1691년 ~ 1871년)

겐로쿠 4년(1691년), 미노국 타카스번에서 오가사와라 사다노부가 2만 2000석으로 들어오면서 가쓰야마번이 다시 세워졌다. 사다노부는 검지 등을 실시하여 번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호에이 5년(1708년)에는 기존의 가쓰야마성 터에 성을 새로 짓는 것이 허가되었고, 7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카의 시대에 이르러 가쓰야마성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분세이 5년(1822년)에 성의 중심 건물인 혼마루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문, 높은 담, 창고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분세이 9년(1826년)에 다시 지어졌다.

막말 시기에는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10여 차례에 걸쳐 백성들의 봉기인 잇키우치코와시(파괴 행위)가 발생하는 등 번의 운영이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로(家老, 번의 중신) 하야시 모센 주도로 담배 개혁 회소를 설치하고 전매제를 실시하는 등의 번정 개혁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모센의 개혁은 주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기도 했으며, 결국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모센을 해임하고 근신 처분을 내렸다.

메이지 원년(1868년)에 발발한 보신 전쟁에서는 새로운 정부군에 가담하여 교토 주변의 경비를 담당했다.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 나가모리는 지번사가 되었다. 이후 메이지 4년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 정책에 따라 가쓰야마번은 가쓰야마현으로 바뀌었고, 나가모리는 지번사 자리에서 물러나 도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20일, 가쓰야마현은 에치젠국의 다른 현들과 통합되어 현재의 후쿠이현이 되었다.

2. 3. 역대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신판 다이묘로서 처음 번을 다스렸다.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모토1624년 3만 석으로 입봉하였고, 이후 그의 동생 마쓰다이라 나오요시1635년 3만 5천 석으로 뒤를 이었다.[1] 그러나 이는 상속이 아닌 전봉에 의한 교체였다. 1644년 나오요시가 오노번으로 옮겨간 후 가쓰야마 번은 잠시 폐번되어 후쿠이번 관할을 거쳐 1686년부터 막부 직할령(천령)이 되었다.[1]

1691년, 미노국 다카스번에서 오가사와라 사다노부가 2만 2천 석의 후다이 다이묘로서 새로 입봉하면서 오가사와라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1] 이후 폐번치현이 이루어질 때까지 8대에 걸쳐 오가사와라 가문이 가쓰야마 번을 다스렸다. 마지막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1871년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다.[1]

각 가문별 상세한 역대 번주 목록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3. 1.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신판 다이묘 3만 석

신판 다이묘 3만 5천 석

나오모토나오요시는 형제이다. 그러나 나오요시가 번주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가독 상속이 아니라 전봉에 의한 것이었다.[1] 나오요시가 다른 곳으로 전봉된 후, 가쓰야마 번은 잠시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관할에 속했다가 이후 막부 직할령(천령)이 되었다.[1]

#이름재임 기간벼슬관위고쿠다카
마쓰다이라 가문 문장
마쓰다이라 씨 (신판) 1624–1644
1마쓰다이라 나오모토 松平(結城)直基일본어 [1]1624–1635야마토노카미(大和守); 지주(侍従)종4위하30,000 석
2마쓰다이라 나오요시 松平直良일본어 [1]1635–1644도사노카미(土佐守); 지주(侍従)종4위하35,000 석


2. 3. 2. 오가사와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로서 고쿠다카는 2만 2천석이었다.

#이름재임 기간벼슬관위석고
-- 오가사와라 가문 (후다이) 1691-1871
1오가사와라 사다노부|小笠原貞信일본어[1]1691-1702도사노카미(土佐守)종5위하 (従五位下 )22000석
2오가사와라 노부토키|小笠原信辰일본어[1]1702-1721스루가노카미(駿河守)종5위하 (従五位下 )22000석
3오가사와라 노부나리|小笠原信成일본어[1]1721–1730노토노카미( 能登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4오가사와라 노부타네|小笠原信胤일본어[1]1730–1745사가미노카미( 相模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5오가사와라 노부후사|小笠原信房일본어[1]1745–1780히다노카미( 飛騨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6오가사와라 노부미치|小笠原長教일본어[1]1780–1799사가미노카미( 相模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7오가사와라 나가타카|小笠原長貴일본어[1]1799–1840사가미노카미( 相模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8오가사와라 나가모리|小笠原長守일본어[1]1840–1871사가미노카미( 相模守)종5위하 (従五位下)22000석



'''오가사와라 사다노부'''(小笠原貞信일본어, 1631년 9월 20일 ~ 1714년 7월 28일)는 초대 번주이다. 막부의 고타이요리아이 관리였던 다카기 사다카쓰의 아들로, 어머니가 오가사와라 노부유키의 딸이었기 때문에 세키야도 번주 오가사와라 마사노부의 양자가 되어 1640년 세키야도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두 달 만에 다카스 번으로 옮겨졌고, 1691년에 다시 부활한 에치젠 가쓰야마 번으로 옮겨와 번주가 되었다.[1] 1692년부터 1693년까지 오사카 가반을 맡았는데, 이 임무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자 농민 봉기와 폭동이 수년간 이어졌다. 1697년에는 번의 대표단이 에도까지 가서 막부에 직접 불만을 호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사다노부는 1702년에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번의 정치에 계속 관여하며 혼란을 일으켰다.[1] 그의 묘는 도쿄도 타이토구의 카이젠지 절과 가쓰야마의 카이젠지 절에 있다.

'''오가사와라 노부토키''' (小笠原信辰일본어, 1686년 3월 10일 ~ 1736년 4월 8일)는 2대 번주이다. 초대 번주 사다노부의 손자(사다노부의 막내아들 노부유키의 장남)로, 1702년 조부의 은퇴로 번주가 되었다. 하지만 조부 사다노부가 은퇴 후에도 번의 일에 간섭하며 상반된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가신들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1] 여러 차례(1703년, 1706년, 1711년, 1715년) 오사카 가반을 맡았고, 화재로 소실된 에도 번 저택을 재건하는 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1719년 병에 걸려 번의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되자 1721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하여 가와치 뇨도(河内入道일본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시로야마 온천에서 지내다 1736년에 사망했다.[1] 그의 부인은 마쓰모토 번의 미즈노 타다나오의 딸이었다. 그의 묘는 가쓰야마의 가이젠지 절에 있다.

'''오가사와라 노부나리'''(小笠原信成일본어, 1705년 7월 2일 ~ 1730년 8월 27일)는 3대 번주이다. 에도에서 사카이 타다츠구의 손자이자 하타모토로 태어났으며, 1720년에 오가사와라 노부토키의 양자가 되었다. 1721년에 번주가 되었다.[1] 1724년과 1727년에 오사카 가반으로 근무했으며, 1726년에는 화산 폭발로 인해 가쓰야마 지역에 흉작과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복구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1730년에 다시 오사카 가반으로 임명되자, 이러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병에 걸려 후사 없이 1730년에 사망했다.[1]

'''오가사와라 노부타네'''(小笠原信胤일본어, 1716년 1월 12일 ~ 1745년 7월 28일)는 4대 번주이다. 이세칸베 번의 혼다 타다무네의 차남이었으며, 자식이 없었던 오가사와라 노부나리의 양자로 입적되어 1730년에 번주가 되었다.[1] 1731년에 겐푸쿠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의 젊음과 번 내부의 정치적 파벌, 그리고 심각한 재정 상황으로 인해 그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고, 1745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은 이와쓰키 번의 나가이 나오노부의 손녀였으나, 그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1]

'''오가사와라 노부후사'''(小笠原信房일본어, 1733년 3월 26일 ~ 1794년 2월 19일)는 5대 번주이다. 2대 번주 오가사와라 노부토키의 장남이었지만, 후계 계승에서 밀려났다가 오가사와라 노부타네의 사후 양자로 입적되어 1745년에 번주가 되었다.[1] 하지만 그는 겨우 13세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 번의 업무를 주로 연로한 가신들에게 맡겼다. 1771년 농민 반란으로 인해 세금을 감면해야 했다. 1775년에 병이 들어 1780년에 은퇴하여 시로야마 온천으로 물러났으며, 1794년에 사망했다.[1]

'''오가사와라 노부미치'''(小笠原長教일본어, 1760년 5월 26일 ~ 1799년 4월 14일)는 6대 번주이다. 5대 번주 오가사와라 노부후사의 장남이었으며, 아버지의 질병으로 인한 은퇴로 1780년에 번주가 되었다.[1] 그는 번의 법률을 제정하고 재정 긴축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경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1781년 가쓰야마 조카마치가 불타고, 1783년 덴메이 대기근이 번을 강타하면서 좌절되었다. 게다가 1786년에는 에도에 있는 번의 시모야시키(下屋敷, 별저)가 불탔고, 1791년에는 심한 폭풍으로 작물이 흉작을 겪었다. 1797년에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그는 1799년 에도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그의 부인은 오카 번의 나카가와 히사사다의 딸이었다.

'''오가사와라 나가타카'''(小笠原長貴일본어, 1793년 8월 12일 ~ 1840년 4월 10일)는 7대 번주이다. 6대 번주 오가사와라 노부미치의 장남이었으며, 1799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가 되었다.[1] 재난은 번을 계속 괴롭혀, 1781년 대화재 이후 재건된 가쓰야마 조카마치가 1799년에 다시 불탔고, 1803년에는 번의 에도 저택도 불탔다. 1811년에는 흉작으로 인해 번에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고, 1814년에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1833년부터 1837년까지의 덴포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1816년 쇼군 정권에서 소샤반을 지냈으며, 1829년부터 1840년까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와카도시요리를 역임했다.[1] 그의 부인은 히메지 번의 사카이 타다히로의 딸이었다.

오가사와라 나가모리


'''오가사와라 나가모리'''(小笠原長守일본어, 1834년 8월 29일 - 1891년 3월 8일)는 8대이자 마지막 번주이다. 7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카의 여섯 번째 아들로, 184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가 되었다.[1] 1848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정식으로 알현을 받았다. 그가 즉위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번은 고참 가신들이 운영했으며, 이들은 번의 행정과 재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려 노력했다. 1843년에는 한 학교가 설립되었고, 1848년부터는 무기를 현대화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쇼군으로부터 간토 지방의 강에서 홍수 방지 사업에 기여하라는 명령과 1854-1855년의 안세이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864년, 그는 ''오사카 가반''으로 임명되었고, 1865년부터는 번의 군대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돕기 위해 동원되었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 번은 재빨리 메이지 정부 편을 들었고, 1869년부터 1871년까지 가쓰야마의 제국 지사로 재임했다. 그는 1873년에 은퇴하여 1891년 사망할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1]

3. 막부 말기의 영지

막말기에는 가쓰야마는 기근 등의 천재지변으로 10번에 걸친 백성 잇키우치코와시가 발생하는 등, 번정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2][3]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로 하야시 모센이 주도하여 담배 개혁 회소를 설치하고 전매제를 실시하는 등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모센의 개혁은 영민에게 막대한 부담을 주기도 하여, 결국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영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모센을 해임하고 근신시켰다.

메이지 원년(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교토 주변의 경비를 담당했다.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 나가모리는 지번사가 되었다. 이후 메이지 4년 7월 14일(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가쓰야마번은 폐지되고 가쓰야마현이 설치되었다. 나가모리는 지번사에서 면관되어 도쿄로 이주하였다.

가쓰야마현은 같은 해 11월 20일, 에치젠국 내 다른 현들과 통합되어 후쿠이현의 일부가 되었다.

가쓰야마번은 다른 많은 들과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토지 조사(지적)와 예상 농업 생산량(고쿠다카)을 기준으로 할당된 여러 개의 분산된 영토로 구성되었다.[2][3] 막부 말기 당시 영지는 다음과 같았다.

4. 주요 인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주요 인물로는 번을 대대로 통치했던 오가사와라 가문다이묘들이 있다. 초대 번주인 오가사와라 사다노부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8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에 이르기까지 오가사와라 가문이 번의 역사를 이끌었다. 각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오가사와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로서 2만 2천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 '''오가사와라 사다노부''' (小笠原貞信|오가사와라 사다노부일본어, 1631년 9월 20일 ~ 1714년 7월 28일): 에도 시대다이묘. 막부의 ''고타이 요리아이''였던 다카기 사다카츠(高木貞勝)의 아들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오가사와라 노부유키(小笠原信之)의 딸이었기에 세키야도 번주 오가사와라 마사노부(小笠原政信)의 양자가 되어 1640년 번주 자리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두 달 후 다카스 번으로 이봉되었다. 1691년, 부활한 에치젠 가쓰야마 번으로 옮겨왔다. 1692년부터 1693년까지 오사카 가반을 맡았는데, 이 임무 수행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번 내 세금을 인상하려다 수년간 농민 봉기와 폭동에 시달렸다. 1697년에는 번의 대표단이 에도로 가 상급 기관에 직접 불만을 호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사다노부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702년 혼조의 영지 저택으로 은퇴했으나, 사망할 때까지 번의 정치와 문제에 계속 관여하며 혼란을 야기했다. 부인은 오가사와라 마사노부(小笠原政信)의 딸이다. 그의 묘는 도쿄도 타이토구의 카이젠지(海禅寺)와 가쓰야마의 카이젠지에 있다.

  • '''오가사와라 노부토키''' (小笠原信辰|오가사와라 노부토키일본어, 1686년 3월 10일 ~ 1736년 4월 8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2대 다이묘. 오가사와라 사다노부의 막내아들인 오가사와라 노부유키(小笠原信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02년 조부 사다노부의 은퇴로 번주가 되었으나, 은퇴한 조부가 번의 일에 계속 간섭하며 상반된 지시를 내리는 등 혼란을 초래했고, 이는 가신들 사이의 파벌 싸움과 끊임없는 갈등으로 이어졌다. 1703년, 1706년, 1711년, 1715년에 오사카 가반을 역임했으며, 화재로 소실된 번의 에도 저택 재건 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1719년 병에 걸려 번의 업무를 보기 어려워졌고, 1721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출가하여 가와치 뇨도(河内入道)라는 법명을 받았다. 시로야마 온천으로 물러나 지내다 1736년에 사망했다. 부인은 마쓰모토 번주 미즈노 타다나오(水野忠直)의 딸이다. 그의 묘는 가쓰야마의 카이젠지에 있다.

  • '''오가사와라 노부나리''' (小笠原信成|오가사와라 노부나리일본어, 1705년 7월 2일 ~ 1730년 8월 27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3대 다이묘. 에도에서 사카이 타다츠구의 손자이자 하타모토 신분으로 태어났다. 1720년 오가사와라 노부토키의 양자가 되었고, 1721년 번주 자리를 이었다. 1724년과 1727년에 오사카 가반을 지냈다. 1726년에는 화산 폭발로 가쓰야마 지역이 큰 피해를 입고 흉작이 들어 복구에 어려움을 겪던 중, 1730년 다시 오사카 가반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병에 걸려 후사 없이 1730년에 사망했다.

  • '''오가사와라 노부타네''' (小笠原信胤|오가사와라 노부타네일본어, 1716년 1월 12일 ~ 1745년 7월 28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4대 다이묘. 이세칸베 번주 혼다 타다무네(本多忠統)의 차남으로, 자식이 없던 오가사와라 노부나리의 양자가 되어 1730년 번주가 되었다. 1731년에 겐푸쿠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어린 나이, 번 내부의 정치적 파벌 다툼, 심각한 재정 문제 등으로 인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고, 1745년 병으로 사망했다. 부인은 이와쓰키 번주 나가이 나오노부(永井直陳)의 손녀였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 '''오가사와라 노부후사''' (小笠原信房|오가사와라 노부후사일본어, 1733년 3월 26일 ~ 1794년 2월 19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5대 다이묘. 오가사와라 노부토키의 장남이었으나 후계 계승에서 밀려났다가, 오가사와라 노부타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1745년 번주가 되었다. 당시 13세로 어렸고 건강도 좋지 않아 번의 업무는 주로 연로한 가신들에게 맡겨졌다. 1771년 농민 반란이 일어나 세금을 감면해야 했다. 1775년 병이 들어 1780년에 은퇴하고 시로야마 온천으로 물러났으며, 1794년에 사망했다.

  •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小笠原長教|오가사와라 나가노리일본어, 1760년 5월 26일 ~ 1799년 4월 14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6대 다이묘. 오가사와라 노부후사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은퇴로 1780년 번주가 되었다. 번의 법률을 정비하고 재정 긴축 정책을 시행하는 등 경제 개혁을 시도했으나, 1781년 가쓰야마 조카마치 대화재, 1783년 덴메이 대기근, 1786년 에도 번 저택 소실, 1791년 극심한 폭풍으로 인한 흉작 등 연이은 재난으로 인해 개혁은 좌절되었다. 1797년에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1799년 에도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인은 오카 번주 나카가와 히사사다(中川久貞)의 딸이다. (원문 소스에는 나가미치(長教)와 나가노리(長教) 표기가 혼재되어 있으나, 인물 링크 및 일반적인 표기를 따라 '나가미치'로 통일하고 일본어 발음 표기는 '나가노리'로 병기함)

  • '''오가사와라 나가타카''' (小笠原長貴|오가사와라 나가타카일본어, 1793년 8월 12일 ~ 1840년 4월 10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7대 다이묘. 오가사와라 나가미치의 장남으로, 1799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가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도 재난은 끊이지 않아, 1799년에는 1781년 대화재 이후 재건된 가쓰야마 조카마치가 다시 불탔고, 1803년에는 에도 번 저택이 소실되었다. 1811년 흉작으로 번 전체에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으며, 1814년에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1833년부터 1837년까지 이어진 덴포 대기근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에도 막부에서 1816년 소샤반을 지냈고, 1829년부터 1840년까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 아래에서 와카도시요리를 역임했다. 부인은 히메지 번주 사카이 타다히로(酒井忠実)의 딸이다.



'''오가사와라 나가모리''' (小笠原長守|오가사와라 나가모리일본어, 1834년 8월 29일 ~ 1891년 3월 8일): 에치젠 가쓰야마 번의 8대이자 마지막 다이묘. 오가사와라 나가타카의 여섯 번째 아들로, 184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가 되었다. 즉위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번의 운영은 고참 가신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번의 행정과 재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려 노력했다. 1843년에는 번교가 설립되었고, 1848년부터는 무기 현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에도 막부로부터 간토 지방 하천의 홍수 방지 사업에 대한 재정적 기여 명령과 1854년~1855년 안세이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복구 비용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64년 오사카 가반으로 임명되었고, 1865년부터는 번의 군대가 교토의 치안 유지를 돕기 위해 동원되었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번은 재빨리 메이지 정부 편에 섰다. 나가모리는 1869년부터 1871년 폐번될 때까지 가쓰야마의 지번사를 지냈다. 1873년에 은퇴하여 1891년 사망할 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1906
[2]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3]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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