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무라 가게아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와무라 가게아키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사쓰영 전쟁과 보신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황실 근위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하기의 난과 사쓰마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으며, 특히 러일 전쟁에서 압록강군 사령관과 제5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전쟁의 공로로 남작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5년에는 원수로 진급했다. 1919년부터 제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으며, 1926년 사망하여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로열 빅토리아 훈장 - 아키히토
아키히토는 1933년 쇼와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나 1989년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2019년 퇴위하고 상황이 되었으며, 어류학자로 활동하며 아시아 국가에 대한 사죄와 국민과의 소통에 힘썼다. - 로열 빅토리아 훈장 - 가타오카 시치로
가타오카 시치로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사쓰에이 전쟁,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을 겪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함대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사할린 점령을 이끈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다. - 산마우리치오이라자로 훈장 수훈자 - 아베 요코
아베 요코는 기시-아베 가문의 중심 인물이자 서예가로, 남편과 아들들의 정치 활동을 지원하며 '정치계의 대모'로 불렸으나, 아베 신조 암살과 기시 노부오의 정계 은퇴 후 건강이 악화되어 95세에 사망했다. - 산마우리치오이라자로 훈장 수훈자 - 단게 겐조
단게 겐조는 일본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로, 전후 일본 건축계를 대표하며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 요요기 국립 경기장 등을 설계했고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요소를 융합한 건축 스타일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 사쓰에이 전쟁 관련자 - 이노우에 요시카
이노우에 요시카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사쓰마 번 출신이며 보신 전쟁에 참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해군 대장과 원수까지 진급하여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 사쓰에이 전쟁 관련자 - 이토 스케유키
이토 스케유키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원수로, 사쓰마 번 해군에서 시작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원수 칭호와 백작 작위를 받았다.
가와무라 가게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가와무라 가게아키 (川村 景明) |
출생 | 1850년 4월 8일 |
출생지 | 가고시마, 사쓰마 번 |
사망 | 1926년 4월 28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묘소 | 아오야마 묘원 |
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1년 - 1919년 |
최종 계급 | 원수 육군 대장 |
참전 | 영국-사쓰마 전쟁 보신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
주요 지휘 | 일본 제국 근위병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 |
훈장 | |
훈장 내역 | 금치훈장 (1등) 욱일대수장 (1등, 오동화대수장) 대훈위국화장경식 |
기타 정보 | |
작위 | 자작 |
2. 생애
가와무라 가게아키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초기 군 경력부터 시작하여,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등 주요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공을 세웠다.
1890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8여단장을 맡았고, 1894년 근위 보병 제1여단으로 옮겨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 1895년 전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1] 1897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01년에는 제10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
러일 전쟁 이후, 도쿄 주둔지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915년에는 원수 지위에 올랐다. 1919년부터 제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았으며, 1926년 회장 재임 중 사망했다. 사망 직후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1]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그는 금계 훈장 (1등), 욱일대수장 (1등, 桐花大綬章) 및 최고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 그의 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육군에서 장군으로 복무한 오바타 히데요시와 결혼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가와무라 가게아키는 가고시마현(사쓰마번)에서 태어났다. 사무라이로서 영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보신 전쟁에서 사쓰마 군의 일원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황실 근위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하기의 난과 사쓰마 반란 등 메이지 시대 초기의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현장 지휘관으로 복무했다.사쓰마 번 무사 노자키 키치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후에 가와무라 신자에몬 카게나오의 양자가 되어 가와무라 가문을 잇고, 가와무라 겐주로라고 칭했다. 사쓰영 전쟁과 보신 전쟁에 종군, 1869년(메이지 2년) 4월, 사쓰마 번 보병 제1대대 제1소대 소두에 취임했다.[1]
1871년(메이지 4년) 4월 상경하여 같은 해 7월부터 어친병 부속·육군 군조로서 메이지 신정부에 종사했다. 1872년(메이지 5년) 7월, 육군 소위·근위 보병 제2대대 부속이 되었고, 이듬해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이 사이에 이시모토 신로쿠로부터 불어를 배웠다. 1874년(메이지 7년) 4월, 육군 대위·히로시마 진대 근무를 명받았고, 1876년(메이지 9년) 4월, 보병 제11연대대대장 직무 대행을 받들어 하기의 난에 출정했다. 이듬해 2월부터 정토 제3여단 예하로 세이난 전쟁에 출정, 전쟁 중 4월에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1연대 대대장이 되었다. 1882년(메이지 15년) 2월, 육군 중좌·보병 제4연대장, 그 후 구마모토 진대참모장, 제6사단 참모장, 참모 본부 제1국장을 역임하고 계급은 육군 대좌로 승진했다.[1]
2. 2.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가와무라는 제1차 중일 전쟁에서 황실 근위 사단을 이끌었고, 타이완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화족'' 귀족 제도 하에서 ''단샤쿠'' (남작) 칭호를 받았다.[1]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가와무라는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의 뒤를 이어 일본 제10사단 사령관이 되었고, 압록강 전투에서 현장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05년 1월, 대장으로 승진하여 일본 제5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봉천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의 승리 후, 메이지 천황은 그를 ''시샤쿠'' (자작) 칭호로 높였다.[1]
러일 전쟁 중, 새롭게 압록강군이 편성되었다. 이 군단은 만주군과는 별개로 행동할 수 있는 부대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에서 용맹하기로 알려진 제11사단을 차출하여 참모본부가 직접 지휘할 수 있도록 편성되었다 (이는 나가오카 가이시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고 한다). 현지군 사령관이었던 오야마 이와오는 이에 불만을 제기했지만, 압록강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가와무라는 오야마와 회담했을 때 "총사령부(만주군)의 지휘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명언하며, 사실상 만주군 지휘 하의 군단으로서 작전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군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제11사단을 주축으로 하였지만, 실제 주력은 노병 (30세 이상의 병사)을 중심으로 한 예비역 제1사단 병사였으며, 편성 당시부터 실전에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많았다.[1]
가와무라는 사기와 전투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압록강군을 일선 부대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일부러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전선의 참호로 나가 각 병사에게 거리낌없이 말을 걸어 병사들을 고무했다. 병사들도 격의 없는 가와무라의 모습에 친밀감을 느꼈다고 한다.[1]
가와무라의 노력으로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압록강군은 잘 싸웠으며, 특히 봉천 회전에서는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알렉세이 쿠로파트킨에게 일본군 주력 부대로 오인될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1]
2. 3. 러일 전쟁 이후
러일 전쟁에서 가와무라는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의 뒤를 이어 제10사단의 사령관이 되었고, 압록강 전투에서 현장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05년 1월, 그는 대장으로 승진하여 제5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봉천 전투에 참전했다.[1] 메이지 천황은 일본의 승리 후, 그를 ''시샤쿠'' (자작)의 칭호로 높였다.러일 전쟁 중, 새롭게 압록강군이 편성되었다. 이 군단은 만주군과는 별개로 행동할 수 있는 부대로서,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으로부터 용맹하기로 알려진 제11사단을 차출하여 참모본부가 직접 지휘에 관여할 수 있는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는 나가오카 가이시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지군의 사령관이었던 오야마 이와오는 불만을 제기했지만, 압록강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가와무라는 오야마와 회담했을 때 "총사령부(만주군)의 지휘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명언하며, 사실상 만주군 지휘 하의 군단으로서 작전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군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제11사단을 주축으로 하였지만, 실제 주력은 노병 (30세 이상의 병사)을 중심으로 한 예비역 제1사단의 병사였으며, 편성 당시부터 실전에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많았다.
가와무라는 사기나 전투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압록강군을 일선 부대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일부러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전선의 참호로 나가 각 병사에게 거리낌없이 말을 걸어 병사들을 고무했다. 병사들도 격의 없는 가와무라의 모습에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가와무라의 노력으로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압록강군은 잘 싸웠으며, 특히 봉천 회전에서는 러시아군을 지휘하는 알렉세이 쿠로파트킨에게 일본군 주력 부대로 오인될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1]。
전쟁 후, 가와무라는 도쿄 주둔지의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1915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3. 일화
가와무라는 사무라이로서 영일 전쟁에 참전했고, 보신 전쟁에서는 사쓰마 군의 일원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는데 기여했다.[1] 메이지 유신 이후 황실 근위대 사령관을 역임했고, 하기의 난과 사쓰마 반란 등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제1차 중일 전쟁에서 황실 근위 사단을 이끌었고, 타이완 전선에서 현장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전쟁 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화족'' 남작 칭호를 받았다.[1]
러일 전쟁에서는 압록강 전투에서 현장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봉천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승리에 기여했다. 메이지 천황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자작'' 칭호를 수여했다.[1]
전쟁 후, 도쿄 주둔지 사령관을 거쳐 1915년 원수가 되었다.[1] 금계 훈장 (1등), 욱일대수장 (1등, 동화대수장) 및 최고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받았다.[1]
가와무라는 사기가 저하된 압록강군을 이끌면서 일부러 짚신을 신고 전선의 참호를 방문하여 병사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1] 그의 노력으로 압록강군은 봉천 회전에서 러시아군에게 일본군 주력 부대로 오인될 정도의 활약을 펼쳤다.[1]
러일 전쟁 중, 노즈 군 사령관의 지시에 종종 이의를 제기했고, 우에하라 유사쿠 참모장이 설득했지만 결국 가와무라의 뜻대로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
산괴석산 전투에서 제10사단이 위험한 전술을 실행하던 중, 노즈 군 사령관이 최전선 시찰을 오자 가와무라는 "누가 사령관을 여기에 데려왔는가! 여기는 군 사령관이 올 곳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노즈를 돌려보냈다. 전후에도 노즈에게 면전에서 간언한 사단장은 없었기에, 제10사단 참모들은 가와무라를 존경했다고 한다.[1]
시베리아 출병 당시, 총사령관 제의를 받았으나 고사했고, 대신 오타니 키쿠조가 파견군 사령관으로 선택되었다.[1]
4. 서훈
수여일 | 훈장 |
---|---|
1878년 1월 31일 | 훈4등 욱일소수장 |
1885년 11월 19일 | 훈3등 욱일중수장 |
1895년 12월 4일 | 남작 · 공3급 금치훈장 · 훈2등 서보장 |
1904년 5월 27일 | 훈1등 서보장 |
1906년 4월 1일 | 공1급 금계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 |
1907년 9월 21일 | 자작 |
1915년 11월 7일 | 금배 1조 · 다이쇼 3·4년 종군기장 |
1915년 11월 10일 | 대례기념장 (다이쇼) |
1920년 11월 1일 | 금배 1조 · 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 종군기장 |
1926년 4월 28일 | 대훈위 국화대수장 |
수여일 | 훈장 |
---|---|
1926년 3월 26일 | Virtuti Militari영어 2등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훈장 대십자 기사단장 | |
로열 빅토리아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 |
가와무라는 제1차 중일 전쟁에서의 공로로 1895년 12월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러일 전쟁 이후 1907년 9월에는 자작으로 승작되었다.[4] 1906년에는 금계 훈장 1등급과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4] 1915년 원수가 되면서 금배 1조와 다이쇼 3·4년 종군기장을 받았다.[4] 사망 직후인 1926년 4월 28일에는 최고 훈장인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4]
5.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노자키 키치베 (사쓰마 번 무사) |
양아버지 | 가와무라 신자에몬 카게나오 |
아들 | 가와무라 가게토시 |
사위 | 나리타 마사미네 (육군 중장), 후지쓰 준이치 (육군 소장), 마쓰오카 마사히로 (육군 대위), 도지 타미요시 (철도 관료) |
손자 | 가와무라 게이이치 (육군 대좌) |
기타 | 오바타 히데요시와 결혼한 딸이 있음. |
참조
[1]
서적
別冊宝島・激闘!日露戦争 日本人がもっとも輝いた戦い
宝島社
[2]
간행물
元帥陸軍大将子爵川村景明特旨叙位ノ件
A111136229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06-17
[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3-23
[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2-05-01
[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5-05-13
[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0-05-23
[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7-05-31
[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6-04-29
[1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12-05
[1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4-05-28
[1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6-12-30
[13]
간행물
授爵敍任及辞令
官報
1907-09-23
[1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5-01-11
[1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7-15
[16]
간행물
辞令
官報
1916-12-13
[1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1-04-19
[18]
간행물
官報第4077号
"{{NDLDC|2956228/5}}[...]
官報
1926-03-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