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하라 유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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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하라 유사쿠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일본 육군에서 공병 기술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통해 공병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공병의 아버지'로 불렸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모로 참여했으며,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 육군대신으로 재임하며 2개 사단 증설 문제로 내각 총사직을 유도하는 '다이쇼 정변'을 일으켰다. 이후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원수가 되었으며, 1933년 사망했다. 그는 시베리아 출병과 관련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육군 내에서 다나카 기이치와 대립하며 황도파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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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유사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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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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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자작 |
계급 | 원수 육군대장 |
출생일 | 1856년 12월 6일 |
출생지 | 미야코노조, 휴가, 일본 |
사망일 | 1933년 11월 8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9년–1933년 |
참전 | 청일전쟁 러일전쟁 |
경력 | |
정치 경력 | |
직책 | 제9대 육군대신 |
군주 | 메이지 다이쇼 |
임기 시작 | 1912년 4월 5일 |
임기 종료 | 1912년 12월 21일 |
이전 | 이시모토 신로쿠 |
이후 | 키고시 야스쓰나 |
직책 | 참모총장 |
군주 | 다이쇼 |
임기 시작 | 1915년 12월 17일 |
임기 종료 | 1923년 3월 17일 |
이전 | 하세가와 요시미치 |
이후 | 가와이 미사오 |
개인 정보 | |
출신 학교 | 조시칸 육군사관학교 (구 3기) |
배우자 | 우에하라 마키코 |
자녀 | 우에하라 시치노스케 (장남) 오쓰카 아이코 (장녀) 우에하라 유지로 (차남) 우에하라 유자부로 (3남) 오하시 나오코 (차녀) 오자와 시즈코 (3녀) |
친척 | 노즈 미치쓰라 (의붓 아버지) 오쓰카 유이세이 (사위)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 묘지 (분골묘) |
2. 생애
1856년(안세이 3년) 사쓰마번에서 태어나 1875년(메이지 8년) 우에하라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879년(메이지 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81년(메이지 14년) 프랑스로 유학, 프랑스 육군에서 수학하고 공병의 근대화에 공헌하여 ‘일본 공병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청일 전쟁 때 노즈 미치쓰라가 사령관을 맡은 제1군 참모, 러일 전쟁 때 제4군 참모장 등 여러 전쟁에 참모로 종군했고, 1907년(메이지 40년) 군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메이지 45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육군이 제출한 2개 사단 증설안이 내각에서 긴축 재정을 이유로 거부되자, 비밀 상소권을 행사하여 사임하고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하여 내각의 총사직을 유도하였다. 1921년(다이쇼 10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원수가 되었다.
1933년(쇼와 8년) 위궤양과 심장병으로 도쿄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56년(안세이 3년) 사쓰마번에서 태어나 1875년(메이지 8년) 우에하라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879년(메이지 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881년(메이지 1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 육군에서 수학하였으며, 공병의 근대화에 공헌하여 '일본 공병의 아버지'라고 불린다.[18][19][20] 청일 전쟁 때 장인인 노즈 미치쓰라가 사령관을 맡은 제1군의 참모, 러일 전쟁 때에는 노즈 미치쓰라가 사령관을 맡은 제4군의 참모장 등으로 종군하였고, 1907년(메이지 40년) 군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2. 2. 육군대신 시절과 다이쇼 정변
1912년(메이지 45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취임하였다. 육군이 제출한 2개 사단 증설안이 내각에서 긴축 재정을 이유로 거부되자 천황에게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하여 내각의 총사직을 유도하였다. 이 사건은 "다이쇼 정변"으로 알려져 있다.[4] 1921년(다이쇼 10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원수 칭호를 받았다.[5]2. 3. 참모총장 및 만년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시베리아 출병을 승인하여 백군을 지원,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적군에 대항하게 했다.1921년(다이쇼 10년) 4월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 귀족 작위는 남작에서 자작(子爵)으로 승격되었다.[5] 은퇴 후에는 예비역 장교 단체인 가이코샤(偕行社) 회장을 역임했다.
1933년(쇼와 8년) 위궤양과 심장병으로 도쿄의 자택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도쿄의 아오야마묘원(青山霊園)에 있다.
3. 연보
- 1856년(안세이 3년) 사쓰마번 출생.
- 1875년(메이지 8년) 우에하라 가문의 양자가 됨.
- 1879년(메이지 12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 1881년(메이지 14년) 프랑스 유학.
- 1890년 5월 9일 - 공병 소좌.
- 1894년 9월 25일 - 공병 중좌.
- 1897년 10월 11일 - 공병 대좌.
- 1900년 7월 11일 - 육군 소장, 육군포병학교장 겸임.
- 1904년 - 러일 전쟁에 참전, 제4군 참모장(제4군 사령관: 노즈 미치쓰라)을 맡음.
- 1906년 7월 6일 - 육군 중장.
- 1907년 군공으로 남작 작위 받음.
- 1908년 12월 - 제7사단장.
- 1911년 9월 - 제14사단장.
- 1912년 4월 5일 -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 취임.
- 1912년 12월 - 육군 2개 사단 증설안 거부로 육군대신 사직,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 내각 총사직 유도.
- 1913년 3월 - 제3사단장.
- 1914년 4월 - 교육총감.
- 1915년 2월 15일 - 육군대장, 군사참의관 겸임.
- 1915년 12월 - 참모총장(- 1923년 3월).
- 1921년 4월 27일 - 원수 육군대장, 자작 작위 받음.
- 1924년 5월 - 의정관.
- 1933년(쇼와 8년) 위궤양과 심장병으로 도쿄 자택에서 사망.
4. 평가 및 영향
우에하라 유사쿠는 '일본 공병의 아버지'로 불리며 일본 공병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참모로 종군하며 능력을 발휘했고,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군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하여 내각을 무너뜨리고, 시베리아 출병에서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철병을 거부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으며, 황도파 결성의 온상이 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1]
러일 전쟁 당시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고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요새 공략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 공병을 엄하게 단련했지만, 요새 공략, 특히 갱도 굴착 작전의 전술 연구와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은 소홀했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책임도 일부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지도하에 요새 공략전 연구가 시작되었고, 1906년(메이지 39년)에 고쿠라 연병장에서 제1회 요새 공략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면모도 보였다. 자신이 혹평한 공병 장교가 반론하자, 잠시 생각한 후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1912년(메이지 45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재임 중, 육군의 2개 사단 증설안이 거부되자 단독으로 사직서를 제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해 내각의 총사직을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시베리아 출병 철병 과정에서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우에하라는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철병에 반발했다. 내각과 육군성이 참모총장과 상의 없이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결국 철수 시기가 불명확해져 일본만 시베리아에 주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하라 다카시 수상은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비난했고, 다나카 기이치가 우에하라를 경질하려 하자, 우에하라는 원로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간청하여 경질을 막았다.[1]
육군 내에서는 원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장주파의 다나카 기이치와 대립했다. 다나카의 후계자 우가키 가즈나리에 의한 우가키 군축에 대항하여 그 반대파를 지원했고, 이는 훗날 황도파 결성의 온상이 되었다.[1]
도쿠토미 소호는 육군대신 사건 당시 우에하라를 "잘 참았다"라고 칭찬했다.
부관 이마무라 히토시에 따르면, 우에하라는 군사 서적을 중심으로 독서를 즐겼고 프랑스어 원서를 읽었으며, 군사 이외에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쇼와 6년)경에는 방공을 위해 항공성을 설치하고 독립 항공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4. 1. 긍정적 평가
우에하라 유사쿠는 '일본 공병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일본 공병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참모로 종군하며 능력을 발휘했고,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군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러일 전쟁 당시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고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요새 공략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 공병을 엄하게 단련했지만, 요새 공략, 특히 갱도 굴착 작전의 전술 연구와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은 소홀했다. 이것을 해 두었다면 여순에서 그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우에하라의 지도하에 요새 공략전 연구가 시작되었고, 1906년(메이지 39년)에 고쿠라 연병장에서 제1회 요새 공략 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면모도 보였다. 자신이 혹평한 공병 장교가 "병감의 말씀은 틀리십니다"라고 반론하자, 다른 장교들은 우에하라가 격노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우에하라는 잠시 생각한 후 "지금의 강평, 용작의 오류"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시베리아 출병 철병 과정에서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우에하라는 내각과 육군성이 참모총장과 상의 없이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철병을 결정한 것에 대해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반발했다. 그는 육군성에 공문을 통해 천황의 허가가 있으면 철병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육군성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철수 시기가 불명확해져 일본만 시베리아에 주둔하게 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하라 다카시 수상은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비난했고, 격노한 다나카 기이치가 우에하라를 경질하려고 하자, 우에하라는 원로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간청하여 경질을 막았다.
도쿠토미 소호는 육군대신 사건 당시 우에하라를 "잘 참았다.", "단순한 천둥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라고 칭찬했다.
부관을 역임한 이마무라 히토시에 따르면, 우에하라는 군사 서적을 중심으로 독서를 즐겼고 프랑스어 원서를 읽었으며, 군사 이외에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마무라는 우에하라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우에하라는 1931년(쇼와 6년)경에 방공을 위해 항공성을 설치하고 독립 항공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2. 부정적 평가
우에하라 유사쿠는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하여 내각을 무너뜨린 전적이 있으며, 시베리아 출병에서는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철병을 거부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다. 또한 황도파 결성의 온상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내각 총사직 유도: 1912년(메이지 45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재임 중, 육군의 2개 사단 증설안이 긴축 재정을 이유로 내각에서 거부되자 천황에게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는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이용한 것으로, 내각의 총사직을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 시베리아 출병 철병 거부: 시베리아 출병에서 국제 협정에 따라 철병이 결정되었으나,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우에하라는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는 내각과 육군성이 참모총장과 상의 없이 천황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우에하라는 육군성에 공문을 통해 천황의 허가를 받으면 철병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육군성의 대응은 더뎠다. 결국 철수 시기가 불명확해져 일본만 시베리아에 주둔하게 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하라 다카시 수상은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비난했고, 격노한 다나카 기이치가 우에하라를 경질하려 하자, 우에하라는 원로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간청하여 경질을 막았다.[1]
- 파벌 항쟁: 육군 내에서는 원수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장주파의 다나카 기이치와 대립했다. 다나카의 후계자 우가키 가즈나리에 의한 우가키 군축에 대항하여 그 반대파를 지원했고, 이는 훗날 황도파 결성의 온상이 되었다. 우에하라 파벌에서 황도파가 나온 원인은 우에하라가 존황주의였던 것이 부하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파벌 항쟁은 군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
- 여순 공방전 관련 발언: 러일 전쟁 당시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고전한 것을 두고, "일본 공병을 엄하게 단련했지만, 공병에 의한 요새공략, 특히 갱도굴착 작전의 전술 연구와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이 유일한 소홀함"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자신의 책임도 일부 인정하는 발언이지만, 당시 일본군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1]
4. 3. 기타
- 육군의 공병 기술 육성에 힘을 쏟았으며, 자비를 들여 목수와 도장을 자택에 초청하여 실연시키면서 기초 작업 교범을 썼다는 일화가 있다. 그 때문에 공병감이 된 후에도 훈련에 나가서는 병사의 작업까지 직접 해 보이고, 공병 장교들은 전전긍긍했다고 한다.[1]
- 자신이 혹평한 어떤 공병 장교가 "병감의 말씀은 틀리십니다"라고 반론했을 때, 다른 장교들은 우에하라가 격노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한참 생각한 우에하라는 "지금의 강평, 용작의 오류"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등 정당한 의견은 제대로 듣는 면도 있었다.[1]
- 러일전쟁 당시 여순포위전에서 일본군(노기 마레스케 대장 지휘)이 고전한 것을 받아들여, 우에하라는 "나는 일본의 공병을 엄하게 단련했지만, 단 하나의 소홀함은 공병에 의한 요새 공략, 특히 갱도 굴착 작전의 전술 연구와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이다. 이것을 해 두었다면 여순에서 그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러일전쟁이 끝난 후 우에하라의 지도하에 즉시 요새 공략전의 연구가 시작되어, 1906년(메이지 39년)에 고쿠라 련병장에서 제1회 요새 공략 훈련을 실시했다.[1]
- 제7사단장 취임을 장주파에 의한 좌천 인사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실정은 다소 다르다. 보병과 이외에서 사단장을 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우에하라는 오사쿠 포병감, 아키야마 기병감과 함께 테라이 육상에게 직접 탄원했다.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공병감이었던 우에하라가 공병과 최초의 사단장이 되었다. 테라이에게 희망을 묻자 "대신이 너무 간섭하지 않는 지방으로…" 즉 공병감 시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더욱이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곳이라면 기꺼이 가겠다."라고 덧붙였다. 보병과의 중요한 자리를 빼앗는 것이므로 후일의 인간관계를 고려한 우수한 참모로서의 모범 답변이었다. 테라이도 우에하라가 그렇게 대답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홋카이도는 어떻습니까"라고 즉답했다. 즉 '''영전시켜 중앙에서 멀리 보냈던''' 것이다. 한편, 테라이는 우에하라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제3사단의 특별 시찰을 허가하고 예산도 그대로 통과시켰다.[1]
- 시베리아 출병에서는 국제 협정에 따라 철병이 결정되었고, 다이쇼 9년 1월 하라 내각이 육상 다나카 기이치의 동의를 얻어 철병을 각의 결정했지만,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우에하라는 "통수권 침해"를 이유로 거절했다. 이는 내각과 육군성이 참모총장과 상의 없이 천황의 재가도 얻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것과 비공식적인 서류 한 통으로 통보해 온 것에 대해 반발한 것이었다. 우에하라는 육군성에 공문을 가지고 천황의 허가가 얻어지면 철병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육군성의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육군성은 기간이 불투명한 순차 철수를 주장한 반면, 참모본부는 즉시 철수를 주장하여 양측의 의견이 대립했다. 육군성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요새를 건설하여 일부 점령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평행선 속에서 치타 방면에서 제5사단이 공격받은 것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연속 전투로 이행하여, 철수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철수 시기가 불명확해져 일본만 시베리아에 주둔하게 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하라 다카시 수상은 "참모본부의 음모"라고 단정 짓고 우에하라를 비난했고, 격노한 다나카가 우에하라를 경질하려고 하자, 우에하라는 원로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간청하여 경질책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2개월 후의 니항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철수 협상을 위해 휴전 지시를 내려 상황을 악화시킨 육군성과 다나카가 책임을 지게 된다.[1]
- 우에하라 파벌은 야마가타 파벌의 분파이지만, 야마가타와 마찬가지로 번벌(藩閥)에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수적으로는 장주파를 능가하게 되어 많은 대장, 중장(이도가와 다쓰조, 우스쿠 행스케, 요쿠라 키헤이, 타카시마 토무타케, 타카야마 코미치, 나가사카 켄스케, 곤도 데쓰지, 사타 타케히코, 이다니 마쓰오, 이와고세 코이치, 하시모토 구니, 하야시 류사부로, 사쿠마 타메히토 등)을 배출했다. 사쓰마벌(오사쿠 나오미치, 마치다 케이우, 다나카 쿠니시게, 히시카리 타카시)을 시작으로 규슈파(우쓰노미야 다로, 후쿠다 마사타로, 오노 산신, 무토 신기, 마사키 진사부로), 육사 구 3기(+구 2기)파(아키야마 요시후루, 오타니 키쿠조, 우치야마 코지로, 시바 고로), 제5(노즈 미치쓰라)사단파(아사다 노부오키, 이치도 헤이), 부관파(나라 무네쓰구, 이마무라 히토시), 공병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주파와 중복되는 것(다나카 기이치, 이노우에 이쿠타로)도 있었다. 육사(구 8-11기), 육대(8-11기)에서 우에하라의 제자였던 사람이 많다. 우에하라가 참모총장 시절, 교육총감은 우에하라 파벌이었고, 육군대신은 야마가타 파벌에서 선택되었다. 당시의 군사참의관의 대부분은 우에하라 파벌, 준우에하라 파벌이었고, 시종무관장(우치야마 코지로, 나라 무네쓰구)도 우에하라 파벌이었다.[1]
- 대머리 장군으로 일화가 많다. 다나카 기이치가 대신 시절, 다나카의 앞을 걷는 대머리 장군이 있었다. 동기인 하시모토 캇타로와 착각한 다나카는 "하게카츠! 하게카츠!"라고 연호하며 불렀다. "그게 나를 부르는 건가"라고 돌아본 것이 우에하라였기 때문에, 다나카는 굽실거리며 사과했고, 우에하라는 웃으며 이를 용서했다. 연장자 장군들에게는 "스님"이라고 불렸다. 이름을 지은 것은 아사다 노부오키이다.[1]
- 곤도 데쓰지가 우에하라 옆에 앉으려고 하자 손으로 멀리하려고 했다. 곤도가 당황하자 "대만 중(원형 탈모)이 전염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곤도를 웃겼다.[1]
- 테라이 마사타케와는 사관학교 시절,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관계로 우에하라는 여러 번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설교를 좋아하는 선생님과 똑똑한 학생이라는 관계가 평생 계속된다. 프랑스 유학 중, 테라이는 주재 무관으로 우에하라 등을 돌보면서 설교를 자주 했다. 테라이가 참모차장, 우에하라가 제3본부장 시절, 서양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 테라이에게 장난을 쳤다. 참모본부 식당에 "양식에 한정한다"라고 쓰인 테라이를 암살한 듯한 쪽지를 붙였다.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우에하라가 "나는 농민 출신이라 일본 음식이 입에 맞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에하라가 범인임을 알아챈 테라이는 화가 나서 그 다음날부터 식당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1]
- 연장자 사쓰마벌에서 준장주파라고 비웃을 정도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테라이 마사타케에 접근했다. 육군대신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다나카 기이치와의 관계도 좋았다. 다나카는 우에하라 파벌의 신참자로 여겨졌지만, "다음 참모총장은 우에하라씨 외에는 없다"라고 주위에 칭찬했고, 우에하라에게 인정받았다. 다나카가 육군대신이 되자 "다나카를 대신으로 삼았다"라고 우에하라는 말했다. 하지만 다나카가 육상이 되자 두 사람 사이에 점차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야마가타의 사망으로 파탄으로 가속화된다. 말년, 이치도가 사망했을 때 아사다 요시히토 중장에게 들은 우에하라는 "우에하라와 다나카의 일인가. 그건 다나카는 정치가니까 말이지."라고 말했을 뿐, 그 이상 다나카와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1]
- 육군대신 사건 직후에는 면회한 우가키 카즈나리에게 다나카 기이치의 예비역 진출을 말할 정도로 분개했지만, 관동 대지진 이후 날이 얕은 것과 다이쇼 천황의 병세를 고려하여 사태의 진정을 우선했다. 반대로 정우회가 다나카의 추대를 모의하고 있던 것을 알게 되자 다나카를 원수로 하여 정계 진출을 저지(원수는 종신 현역이며 치안경찰법에 따라 정당에 소속될 수 없다)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효과적이지 않았다.( 연구회로부터 수반 지명의 가능성) 결국 1년 이상 처분 보류했다. 그러나, 후쿠다를 중심으로 한 군사참의관의 요구가 강하여, 1925년 4월 8일에 다나카를 예비역으로 하게 한다. 토쿠토미 소호는 당시 우에하라를 "잘 참았다.", "단순한 천둥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라고 칭찬했다.[1]
- 육군 내에서는 원수로서 영향력을 계속 가지고 장주파의 다나카 기이치와 대립했다. 다나카의 후계자 우가키 카즈나리에 의한 우가키 군축에 대항하여 그 반대파를 지원하고, 후일의 황도파 결성의 온상이 되었다. 우에하라 파벌에서 황도파가 나온 원인은 우에하라가 존황주의였던 것이 부하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파벌 항쟁·확집의 원인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1]
- 천둥 할아버지라고 불렸던 우에하라이지만 젊은 사관에 대해서는 호호 할아버지였다. 교육총감부 참모 사이토 류에게 "왜 과장을 그렇게 꾸중하십니까."라고 묻자 우에하라는 "과장 정도 되면 무엇이든 연구하고 알지 못하면 안 된다. 너희 꼬마들과는 다르다. 꼬마들은 꾸중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1]
- 부관을 역임한 이마무라 히토시에 따르면, 군사 서적을 중심으로 독서를 좋아하고 프랑스어 원서를 읽었으며, 군사 이외에도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입이 많아 주위에서 싫어했지만, 그것은 광대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며, 감복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하며 부관 시절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1931년(쇼와 6년)경에는 방공에는 항공성을 설치하여 독립 항공대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1]
- 이마무라에 따르면, 우에하라는 타니 스즈오가 작성한 기밀 일러 전사의 내용에 관하여 "(제3군과 노기의 평가는) 객관성이 부족하고 사실과 다르다. 여순을 함락시킨 것은 노기이고, 고다마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비난했다고 한다.[1]
5. 수상 내역
연도 | 훈장 | 비고 |
---|---|---|
1893년 | [6] | |
1895년 | ||
1896년 | ||
1899년 | ||
1901년 | ||
1906년 | ||
1907년 | 남작 | [22][41] |
1908년 | ||
1915년 | ||
1916년 | ||
1918년 | 중화민국: 일등 문호훈장 [54], 중화민국: 일등 대수보광 가화훈장 [55] | |
1920년 | ||
1921년 | 자작[22][46], 원수[22][48] | |
1925년 | 어문부 은배 | [49] |
1926년 | --[56] | |
1928년 | 대례기념장(쇼와) | [22] |
1933년 | ||
해당년도 미상 | --, --, ![]() ![]() ![]() |
연도 | 계급 | |
---|---|---|
1880년 | 정팔위 | [22] |
1882년 | 종칠위 | [22] |
1885년 | 정칠위 | [22] |
1891년 | 종육위 | [22][23] |
1894년 | 정육위 | [22][24] |
1897년 | 종오위 | [22][25] |
1900년 | 정오위 | [22][26] |
1905년 | 종사위 | [22][27] |
1909년 | 정사위 | [22][28] |
1912년 | 종삼위 | [22][29] |
1915년 | 정삼위 | [22][30] |
1920년 | 종이위 | [22][31] |
1927년 | 정이위 | [22][32] |
1933년 | 종일위 | [33]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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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第3717号「宮廷録事 - 恩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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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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