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야마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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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야마 내각은 1947년 5월 24일부터 1948년 3월 10일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내각으로,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된 일본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일본국 헌법 하에서 국회의 지명을 받아 조각된 최초의 내각이자 무산 정당 출신이 수상이 된 첫 사례이다. 자유당과의 연립이 실패하고 민주당, 국민협동당과의 연립으로 출범했지만, 내각 내의 갈등과 정책 추진의 어려움으로 인해 1948년 2월 가타야마 데쓰가 총리직에서 사임하면서 붕괴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국가공무원법 제정, 내무성 해체 및 경찰 제도 개혁, 노동성 설치, 민법 개정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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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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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내각 명칭 | 가타야마 내각 |
일본어 명칭 | 가타야마 나이카쿠 (片山内閣) |
대수 | 46대 |
총리 | 가타야마 데쓰 |
총리 전 직책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위원장 |
성립 | 1947년 5월 24일 |
종료 | 1948년 3월 10일 |
정당 | 일본사회당, 민주당, 국민협동당, 연풍회회파로서 여당에 참여하지 않음. |
선거 | 1947년 참의원 의원 선거 1947년 일본 총선거 |
총리대신 | 가타야마 데쓰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정부 부수반 | 아시다 히토시 (1947년 6월 1일부터) |
국가 원수 | 쇼와 |
관할 | 일본 |
출범일 | 1947년 5월 24일 |
해산일 | 1948년 3월 10일 |
이전 내각 | 제1차 요시다 내각 |
다음 내각 | 아시다 내각 |
정치 상황 | |
입법부 | 제2차 국회 |
입법부 현황 | 다수 (연립) |
야당 | 자유당 일본공산당 일본농민당 |
정치 체제 | (연합군 점령 하) |
2. 성립 배경
일본국 헌법 하에서 처음으로 국회의 지명을 받아 조직된 내각이다.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된 일본사회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협동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무산 정당 출신 의원이 수상을 맡은 첫 내각이었다.
당초 가타야마 데쓰는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을 포함하여,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거국 일치 내각'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입각에 난색을 표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요시다와 자유당 간사장 오노 반보쿠는 당수 회담에서 "오늘의 내각회의 기밀을 내일은 모스크바에 누설할 분자(용공의 사회당 좌파)가 있는 사회당 정권에는 참가할 수 없다"며, "아무래도 입각해 주었으면 하면 (사회당) 좌파를 잘라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요구했다.[22] 결국 1947년 5월 24일, 가타야마는 단독으로 친임식을 거쳐 임시로 각료직을 겸임하는, 이른바 '1인 내각'을 출범시켰다.
요시다는 공식적으로는 '용공' 성향의 사회당 좌파 때문에 연립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4당 연립의 불안정한 정국 운영을 우려하여 함께 무너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자유당은 각료를 내지 않았고, 1947년 6월 1일, 3당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가타야마 내각이 발족되었다. 각료 구성은 사회당 7명, 민주당 7명, 국민협동당 2명, 녹풍회 1명으로 각 당의 균형을 중시했지만, 외무대신, 대장대신 등 주요 각료에 사회당 의원을 배치하지 못해 인재 부족을 드러냈다.
가타야마 내각은 국가공무원법 제정, 내무성 해체 및 경찰 제도의 개혁, 노동성 설치, 실업보험 창설, 봉건적 가족제도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일본사회당이 주도한 임시 석탄 광업 관리법(탄광 국가관리법)은 산업계와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에 부딪혀 정권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2. 1. 1947년 총선거와 연립 협상
일본국 헌법 하에서 치러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연립 내각 구성이 필요했다. 가타야마 데쓰는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을 포함한 거국 일치 내각을 구상했으나, 자유당은 사회당 좌파를 문제 삼아 연립 참여를 거부했다.[22] 요시다 시게루와 자유당 간사장 오노 반보쿠는 "오늘의 내각회의의 기밀을 내일은 모스크바에 누설할 분자(용공의 사회당 좌파)가 있는 사회당 정권에는 참가할 수 없다"며 사회당 좌파를 배제해야만 연립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결국 1947년 5월 24일, 가타야마는 단독으로 친임식을 갖고 대부분의 각료를 임시 대리하는 형태로 내각을 발족시켰다. 이후 민주당, 국민협동당과의 연립 협상을 통해 6월 1일 정식 내각이 출범했다. 각료 구성은 사회당 7명, 민주당 7명, 국민협동당 2명, 녹풍회 1명으로 균형을 맞췄으나, 주요 각료에 사회당 의원이 부족하여 인재난을 드러냈다.
2. 2. 요시다 시게루의 거국일치내각 구상 좌절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자유당을 포함한 거국일치내각 구상을 추진했지만, 자유당은 입각에 난색을 표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요시다와 자유당 간사장 오노 반보쿠는 "오늘의 내각회의 기밀을 내일은 모스크바에 누설할 분자(용공의 사회당 좌파)가 있는 사회당 정권에는 참가할 수 없다"며, "아무래도 입각해 주었으면 하면 (사회당) 좌파를 잘라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요구했다.[22]요시다는 공식적으로는 '용공' 사회당 좌파 때문에 사회당 정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4당 연립에 의한 불안정한 정권 운영을 예측하고 함께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연립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요시다의 예견은 다음 해에 현실화되었다.
2. 3. '1인 내각'의 출범
일본국 헌법 하에서 처음으로 국회의 지명을 받아 내각을 조직한 사례이다.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된 일본사회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협동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다. 무산 정당 출신 의원이 수상을 맡은 첫 내각이었다.당초 가타야마 데쓰는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을 포함하여,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거국 일치 내각'을 구상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입각에 난색을 표했다. 자유당의 오노 반보쿠는 당수 회담에서 "사회당 좌파를 제거해야만 입각하겠다"고 요구했다.[22] 결국 1947년 5월 24일, 가타야마는 단독으로 친임식을 거쳐 임시로 각료직을 겸임하는, 이른바 '1인 내각'을 출범시켰다.
요시다는 공식적으로는 '용공' 성향의 사회당 좌파 때문에 연립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4당 연립의 불안정한 정국 운영을 우려하여 함께 무너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자유당은 각료를 내지 않았고, 1947년 6월 1일, 3당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가타야마 내각이 발족되었다.
2. 4. 국가공무원법 제정
가타야마 내각 당시에는 공무원의 '공복'화를 목표로 하는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되었다.[22]2. 5. 내무성 해체와 경찰 제도 개혁
일본국 헌법하에서 가타야마 내각은 공무원의 ‘공복’화를 목표로 하는 국가공무원법을 제정하고, 내무성을 해체하였으며, ‘자치단체경찰’을 창설하는 등 경찰 제도의 개혁을 실현하였다.[22]2. 6. 노동성 설치와 노동 정책
가타야마 내각은 노동성을 설치하고 실업보험을 창설하는 등 노동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사회 안정을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20]2. 7. 가족 제도 개혁과 민법 개정
일본국 헌법 하에서 가타야마 내각은 봉건적 가족 제도의 폐지를 목표로 한 민법 개정을 실현하였다.[22]2. 8. 임시 석탄 광업 관리법 제정
일본사회당이 중심이 된 가타야마 내각은 사회주의 정책의 하나로 임시 석탄 광업 관리법(탄광 국가 관리법)을 만들고자 했다. 가타야마 총리는 이 법에 적극적이었지만, 산업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여당인 민주당 안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와 어려움을 겪었다.[22]2. 8. 1. 탄광 국가 관리법 논란과 정권의 취약성
일본사회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출범한 가타야마 내각은 주요 정책으로 임시 석탄 광업 관리법(통칭 ‘탄광 국가관리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는 사회주의 정책 구현을 목표로 한 사회당의 핵심 법안이었으며, 가타야마 총리도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22]그러나 탄광 국가관리법은 산업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야당인 자유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오면서 법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법안은 수정되어 성립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가타야마 내각의 취약성이 드러났다.[22]
법안 채결 과정에서 민주당 시데하라 기주로 파의 반발과 탈당, 사회당 우파 내 니시오 스에히로 관방장관과 히라노 리키조 농림상 간의 갈등, 사회당 좌파의 반대로 인한 보정 예산 부결 등 연립 내각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는 정권 운영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결국 가타야마는 1948년 2월 10일 총리직 사퇴를 표명했다.[22]
3. 내각의 구성
제23회 중의원 선거와 제1회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제1당이 되면서, 민주당, 국민협동당과의 연립 내각으로 가타야마 내각이 1947년 5월 24일부터 1948년 3월 10일까지 존속하였다.
1947년 5월 24일, 가타야마 데쓰 내각총리대신이 취임하였으나, 다른 국무대신은 임명되지 않아 6월 1일까지 9일 동안 가타야마 총리 1인 내각이 지속되었다.[3] 이 기간 동안 가타야마 총리는 내각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물가청 장관을 겸임하였다.
내각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 | 대수 | 성명 | 의석 및 출신 정당 | 재임 기간 |
---|---|---|---|---|
내각총리대신 | 46 | 가타야마 데쓰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위원장 | 1947년 5월 24일 ~ 1948년 3월 10일 |
부총리 겸 외무대신 | 아시다 히토시 | 중의원 의원 민주당 총재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내무대신 | 기무라 고자에몬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7년 12월 31일[23] | |
대장대신 | 야노 쇼타로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7년 6월 25일 | |
구루스 다케오 | 참의원 의원 료쿠후카이 | 1947년 6월 25일 ~ 1948년 3월 10일 | ||
사법대신 법무총재 | 스즈키 요시오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24] | |
1 | 1948년 2월 15일 ~ 1948년 3월 10일 | |||
문부대신 | 모리토 다쓰오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후생대신 | 히토쓰마쓰 사다요시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농림대신 | 히라노 리키조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일 ~ 1947년 11월 4일 | |
임시 대리 | 가타야마 데쓰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위원장 | 1947년 11월 4일 ~ 1947년 12월 13일 | |
하타노 가나에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12월 13일 ~ 1948년 3월 10일 | ||
상공대신 | 미즈타니 조자부로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운수대신 | 도마베치 기조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7년 12월 4일 | |
기타무라 도쿠타로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12월 4일 ~ 1948년 3월 10일 | ||
체신대신 | 미키 다케오 | 중의원 의원 국민협동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노동대신 | 요네쿠보 미쓰스케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9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겸 물가청 장관 | 와다 히로오 | 참의원 의원 료쿠후카이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복원청 장관(~1947년 10월 15일) 배상청 장관(1948년 2월 1일~) | 사사모리 준조 | 중의원 의원 국민협동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행정조사부 총재 | 사이토 다카오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건설원 총재 | 기무라 고자에몬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8년 1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지방재정위원회 위원장 | 다케다 기이치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8년 1월 7일 ~ 1948년 3월 10일 | |
국무대신 겸 내각관방장관 | 니시오 스에히로 | 중의원 의원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
국무대신 | 하야시 헤이마 | 중의원 의원 민주당 | 1947년 6월 1일 ~ 1947년 11월 25일 | |
법제국 장관 | 사토 다쓰오 | 1947년 6월 14일 ~ 1948년 2월 15일 | ||
내각관방차장(정무) | 소네 에키 | 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7일 ~ 1948년 3월 10일 | |
내각관방차장(사무) | 다키가와 스에카즈 | 1947년 6월 10일 ~ 1948년 3월 10일 |
니시오 스에히로는 국무대신 겸 내각관방장관을 맡았으며, 사토 다쓰오는 법제국 장관을, 소네 에키와 다키가와 스에이치는 각각 내각관방차장(정무)와 내각관방차장(사무)를 맡았다.
정무차관은 다음과 같다.
직명 | 성명 | 출신 등 | 비고 |
---|---|---|---|
외무 정무차관 | 마쓰모토 다키조 | 중의원/국민협동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내무 정무차관 | 나가노 나가히로 | 중의원/민주당 | 1947년 6월 24일 ~ 1947년 12월 31일 |
대장 정무차관 | 고사카 젠타로 | 중의원/민주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사법 정무차관 | 사카키바라 지요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8년 1월 21일 ~ 1948년 2월 14일 |
법무 정무차관 | 사카키바라 지요 | 1948년 2월 15일 ~ 1948년 3월 10일[24] | |
문부 정무차관 | 나가에 가즈오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후생 정무차관 | 가네미쓰 요시쿠니 | 중의원/민주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농림 정무차관 | 이노우에 료지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상공 정무차관 | 도미요시 에이지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운수 정무차관 | 다나카 겐자부로 | 중의원/민주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체신 정무차관 | 시이구마 사부로 | 중의원/민주당 | 1947년 6월 18일 ~ 1948년 3월 10일 |
노동 정무차관 | 도이 나오사쿠 | 중의원/일본사회당 | 1947년 9월 1일 ~ 1948년 3월 10일 |
3. 1. 국무대신
일본사회당 위원장민주당 총재
민주당
민주당
료쿠후카이
법무총재
일본사회당
일본사회당
민주당
일본사회당
일본사회당 위원장
일본사회당
일본사회당
민주당
민주당
국민협동당
일본사회당
료쿠후카이
배상청 장관(1948년 2월 1일~)
국민협동당
1948년 2월 1일 ~ 1948년 3월 10일
민주당
민주당
민주당
일본사회당
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