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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반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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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노 반보쿠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890년 기후현에서 태어나 1964년 사망했다. 메이지 대학 법학부 중퇴 후, 입헌정우회 국외 압력 단체에서 활동하며 야쿠자와 우익 폭력배들과 유착 관계를 맺었다. 1923년 도쿄 시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30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하토야마 이치로 파벌에 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자유당 결성에 참여,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간사장을 역임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 창당에 기여하고 부총재를 지냈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와의 약속 불이행으로 갈등을 겪었고, 1964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평가와 함께, 정치적 영향력 과시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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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반보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반보쿠 오노
원어 이름오노 반보쿠 (大野 伴睦)
로마자 표기Ono Banboku
출생일1890년 9월 20일
출생지일본 제국 기후현 야마가타군 다니아이촌 (현재 야마가타시)
사망일1964년 5월 29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
학력메이지 대학 전문부 법률학과 중퇴
칭호 및 훈장종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감수포장
영년 재직 의원
가족 관계아들: 오노 아키라 (운수대신)
며느리: 오노 쓰야코 (참의원 의원)
손자: 오노 야스타다 (참의원 의원)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입헌정우회
무소속
일본자유당
민주자유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국회의원중의원 의원 (13선)
선거구구 기후 1구
당선1930년 2월 20일 ~ 1942년 4월 29일
1946년 4월 10일 ~ 1964년 5월 29일
기타 직책자유민주당 총재 대행 위원
초・제2대 자유민주당 부총재
주요 직책
중의원 의장재임 기간: 1952년 8월 26일 ~ 1953년 3월 14일
소속 내각: 제5차 요시다 내각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재임 기간: 1954년 1월 14일 ~ 1954년 7월 27일

2. 생애

오노 반보쿠는 1890년 9월 20일 기후현 기후시 야마가타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다녔지만, 1913년 다이쇼 정국 중 폭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했다.[1] 이후 입헌정우회의 국외 압력 단체(''잉가이단'')에 합류하여 정치 깡패 행위에 관여했고, 야쿠자 조직 및 우익 폭력배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2][3] 오노는 이 ''잉가이단''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훗날 야쿠자 두목들의 공개 모임에 공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4]

1930년 중의원 선거에서 기후현 제1구 대표로 당선되어 하토야마 이치로 파벌에 속했다.[1] 1942년 대정익찬회 가입을 거부하고 "비추천"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노는 하토야마를 도와 자유당을 결성하고 1946년 국회에 재선되었다. 하토야마와 고노 이치로가 숙청되자,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자유당 간사장으로 활동하며 요시다 시게루를 도왔다. 1948년 쇼와 전공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1951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1] 1952년부터 1953년까지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고, 1953년 요시다 내각에서 국무 대신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을 맡았다.[1]

1955년 7월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계획하기 위해 만나는 보수 지도자들. 왼쪽부터: 오노 반보쿠, 미키 부키치,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1955년, 오노는 자유당 집행 평의회 의장으로서 자유민주당 (LDP)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그러나 자유민주당 형성 과정에서 하토야마가 미키 부키치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오노와 하토야마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오노는 하토야마 파벌을 떠나 자신의 파벌인 백정회(白政会)를 결성했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3선 연임을 추진하며 오노에게 차기 총리직을 약속했으나, 1960년 기시가 이케다 하야토를 지지하면서 약속은 파기되었다. 1960년 7월 14일, 기시는 칼을 든 괴한에게 공격받았는데, 많은 자유민주당 정치인들은 오노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8][9]

이케다 총리는 오노를 자유민주당 부총재로 임명하여 회유했다.[1] 오노는 1964년 5월 29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부총재직을 맡았다.[5] 사후, 그의 파벌은 일신회(후나다 파벌)와 일요회(무라카미 파벌)로 분열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오노 반보쿠는 1890년 9월에 기후현 야마가타군 다니아이촌(지금의 야마가타시)에서 오노 나오타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오타로는 생애 대부분을 촌정을 위해 힘썼기에 재산이 거의 없었다. 직물 장사도 했지만 친척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 가계를 겨우 꾸릴 정도였고, 항상 부채 문제로 고생했다.[30][31]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후 나고야 육군 유년 학교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했다.[10] 1908년에 상경하여[10] 1910년에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으나,[30] 다음 해 초여름에 급성 충수염으로 입원하여 휴학했다.[30]

호헌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3년 다이쇼 정변 때 폭동에 가담하여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으며, 메이지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10] 그 후 입헌정우회와 인연을 맺어 당 간부였던 무라노 쓰네에몬의 권유로 원외 정치 활동에 종사했다. 1915년 5월에 외무상 가토 다카아키 공격 연설을 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제9조 위반으로 금고 3년형을 받아 이치가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1월에 사면을 받았다.[30]

1922년 도쿄시 시바구에서 시의원으로 당선됐다.[31]

2. 2. 정계 입문 및 초기 정치 활동

1923년 도쿄 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9년간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을 위한 미국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다.[5]

1930년, 총선기후현 제1구에서 출마해 처음 당선되었다. 중의원에서 하토야마 이치로 파벌의 일원이 되었다.[1] 정우회 하토야마파에 속했다.

1933년, 기독교 단체 미노 미션에 대해 "시민은 합법적으로 실력으로 미노 미션을 폐쇄하라"고 주장하며 배격 운동을 추진했다.

신체제운동이 한창이던 1939년에 정우회가 분열되자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구하라 후사노스케의 파벌인 정통파에 속했다. 1941년 익찬의원동맹에 반발하며 하토야마와 함께 동교회 결성에 참여했다. 1942년 총선에 비추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1]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일본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5] 1946년 총선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4년 만에 국정에 복귀했다. 총재 하토야마와 간사장 고노 이치로가 공직 추방을 당하자 오노는 당인파의 대표로서 요시다 시게루를 총재로 추대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수립되자 하야시 조지, 마스타니 슈지와 함께 관료 출신인 요시다를 보좌하여 당인파 고산케로 불렸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무너지자 사회당 우파의 니시오 스에히로가 연립내각 구성을 타진하며 내무상 취임을 요청했으나 오노는 "사회당 좌파를 잘라내지 않는 한 연립에 참여하지 않겠다"라며 고사했다.

1948년 6월 정치 자금에 관한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소환되었다.[32] 같은 해 쇼와전공 사건에 연좌돼 기소되었지만 1951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33]

1952년 8월 26일에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에 불시 해산이 이루어져 임기 3일 만에 의장에서 물러났다. 10월 총선 이후 의장으로 재선되었지만 이번엔 5개월 만에 바카야로 해산이 이루어져 또다시 금방 물러나야 했다.

하토야마와 고노는 공직 추방이 해제되자 미키 부키치 등과 함께 하토야마파를 구성해 요시다파와 대립하게 됐지만 오노는 요시다파에 남았다. 특히 전전에 정우회와 대립 관계였던 입헌민정당 출신으로 익찬의회 이후 급속도로 하토야마와 가까워진 미키에 대해선 격렬하게 반발했다.

1954년에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이 되어 제5차 요시다 내각에 입각했다. 이때 법무상으로 입각한 오하라 나오시는 전전에 오노가 체포되었을 때 기소를 담당했던 검사로 법정에서 "본래라면 극형에 처해야 한다"라는 말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시다에게 농담삼아 "여기에 나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신데 동석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때 오노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나카가와 이치로를 정계에 입문시켰다.

2. 4. 자유민주당 창당과 부총재 시절

1954년 일본민주당 총무회장 미키 부키치와 화해하고 보수합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재 자리를 두고 합의에 실패하여, 자유민주당 창당 후 선거를 통해 총재를 선출하기로 했다. 하토야마 이치로, 오가타 다케토라, 미키, 오노 4명이 총재 대행위원이 되었고, 1955년 12월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56년 4월 총재 선거에서 하토야마가 총재로 선출되었다.

1957년 초대 자유민주당 부총재에 취임했다. 또한 일본유족회 고문을 맡아 1958년 1월 유족들로 구성된 진정단을 조직해 정부와 자민당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요구했다.[36]

기시 노부스케 총재 시절, 오노는 기시로부터 차기 총재 자리를 약속받았으나, 기시는 이 약속을 어겼다.[37] 이는 1956년 12월 총재 선거 당시 기시의 부탁을 오노가 거절하고 이시바시 단잔이 승리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기시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기 전 우익 인사에게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노는 "꼴 좋다. 그 허풍쟁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1960년 총재 선거에서 오노는 이시이 미쓰지로와 함께 출마를 권유받았다. 그러나 가와시마 쇼지로가 이시이로 후보 단일화를 권유하자, 오노는 출마를 포기했다. 그런데 가와시마는 오노 지지 의사를 번복하고 이케다 하야토를 지지하여 이케다의 승리에 기여했다. 오노는 가와시마에게 속았다며 크게 슬퍼했다.[39]

1961년 오노는 이케다에게 접근하여 다시 부총재에 취임했다.

2. 5. 사망

오노는 1964년 5월 2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자유민주당 부총재 직책을 맡고 있었다.[5] 오노가 사망한 후, 그가 이끌던 중의원 의원 파벌은 일신회(후나다 파벌)와 일요회(무라카미 파벌)로 분열되었다.[1]

3. 평가

오노는 의리와 인정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평판을 받았다.[41] 지역구와 관계없는 노파의 하수구 정비 민원을 즉시 해결해 준 일화,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돈을 건네며 더 필요한지 물어본 일화 등은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애주가이자 하이쿠를 즐겨 짓는 하이진으로도 알려져 있다.

기시 노부스케와는 총재직 약속 문제로 갈등을 겪은 후 그를 평생 증오했으며,[18][19][20] 기시가 피습당했을 때 "고소하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기시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에게도 반감을 가졌다.[41] 1960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카와시마 쇼지로에게 속아 출마를 포기하기도 했다.[24][25]

3. 1. 긍정적 평가

오노 반보쿠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역구와 상관없는 노파가 하수구 정비 민원을 제기했을 때 즉시 시청에 연락하여 해결해 준 일화가 있다.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돈을 건네며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더 필요한가?"라고 물었던 일화도 유명하다. 당황한 도둑은 "앞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반드시 이 돈을 갚으러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41]

오노는 애주가로도 유명하며, "술을 마신다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이쿠를 좋아하여 하이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반보쿠'''('''万木''')라는 俳号를 사용하여 많은 하이쿠 작품을 남겼다. 몇몇 작품은 비석으로도 세워졌고, 사후인 1966년에는 시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반보쿠를 죽이는 데는 칼이 필요 없다, 대의 대의라고 말하면 된다"라는 익살스러운 노래는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오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보수 합동 당시, 미키 부키치가 "보수 합동은 구국의 위업"이라는 논리로 설득하자, 오노는 즉시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오노의 의리와 인정에 대한 평판 때문에,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여러 일화들이 전해진다. 자신의 선거구와는 관계없는 한 노부인이 하수구 덮개 정비를 부탁했을 때, 오노가 즉시 관청에 전화하여 담당 과장이 직접 사과하고 바로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노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외유를 위해 준비해 둔 돈을 건네며 "지금 이것밖에 없는데, 더 필요한가?"라고 물었다는 일화, 사무실에 찾아온 청년에게 흔쾌히 돈을 빌려주었다는 일화 등이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오노가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노는 주호로도 알려져 있으며, "술은 마시는 이상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3. 2. 부정적 평가

오노 반보쿠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 기시 노부스케와의 갈등: 오노는 기시 노부스케와 총재직 약속을 파기당한 후 그를 평생 증오했다.[18][19][20] 기시가 피습당했을 때 "고소하다, 저 뻥쟁이"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21]

  • 사토 에이사쿠에 대한 반감: 기시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에게도 강한 반감을 품고 "내 눈이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사토는 총재로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28] 사토 역시 오노를 혹평했다.[41]

  • 카와시마 쇼지로에게 속은 사건: 1960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카와시마 쇼지로의 말을 믿고 출마를 포기했지만, 카와시마는 이케다 하야토를 지지하여 오노는 "카와시마에게 속았다"며 울었다고 한다.[24][25]

  • 기시 노부스케 피습 사건 연루 의혹: 1960년 기시 노부스케 피습 사건 당시, 오노가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9]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노 나오타로야이즈 시의 타니아이 촌장, 부촌장 등을 역임한 명망가이다.[10][12]
어머니구니에(1868년 - ?), 우스이 한시로의 차녀[11]
넷째 아들아키라(1928년 - 1996년),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 운수 대신·노동 대신을 역임했다.[11]
며느리 (아키라의 배우자)쓰야코(1934년 - 2021년), 참의원 의원
손자 (아키라의 차남)야스마사(1959년 - ), 참의원 의원


5. 기타

오노 반보쿠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구와 관계없는 노파가 하수구 덮개 정비를 호소하자 즉시 시청에 전화해 해결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는 돈을 건네며 "더 필요한가?"라고 물어 도둑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애주가이자 하이쿠 애호가로도 유명하며, "술을 마신다면 취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이쿠 작품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를 싫어하여 "내가 살아있는 동안 사토가 총재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토가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직할 때부터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사토는 오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서민성을 칭찬했지만, 훗날 "달리 칭찬할 말이 없었다"라며 혹평했다.[41]

마이니치 신문 기자였던 와타나베 쓰네오는 오노의 총애를 받았으며, 오노파의 인사에 조언하기도 했다. 오노 사후 오노파 분열에도 관여했다.[42]


  • 고향인 기후현도카이도 신칸센 기후하시마역을 유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 앞에는 오노 부부의 동상이 있다.
  • 산케이 신문에 따르면, 기후현은 기후시오가키시에 신칸센역 설치를 요구했지만, 일본국유철도(국철)는 난색을 표했다. 오노의 중재로 신칸센 노선을 우회하지 않는 기후하시마역이 설치되었다. 이는 오노가 지역의 이권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신칸센의 속달성을 우선시한 결과였다.
  • 중부 횡단 운하 계획의 강력한 추진자였다.
  • 주요 지방도 히타치오미야 선을 국도293호로 지정하는 데 노력하여, 토치기현 - 이바라키현 경계의 고개는 "반보쿠 고개"로 명명되었다. 국도258호도 오노의 노력으로 국도로 승격되었다.
  • 하자마(間組)의 댐 건설 수주에 오노에게 적극적인 공작이 이루어졌다.
  • 기후현 출신으로 총리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정치인으로 불린다.[18]
  • 취미는 독서, 바둑, 골동품, 하이쿠[11], 마작[12] 등이다. 니치렌종을 신봉했다.[11][12]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성격으로 "반보쿠를 죽이는 데는 칼이 필요 없다, 대의 대의라고 말하면 된다[27]"라는 익살스러운 노래로도 알려졌다.

자신의 선거구와 관계없는 노부인이 하수구 덮개 정비를 부탁하자 분개하여 즉시 관청에 전화해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외유를 위해 준비해 둔 돈을 건네며 "더 필요한가?"라고 물었고, 사무실에 돈을 빌려달라는 청년에게 흔쾌히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는 정치인의 집에 도둑이 들거나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은 곤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주호로 알려져 있으며, "술은 마시는 이상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야 한다"라는 명언이 있다.

리키도잔을 아꼈으며, 일본 프로레슬링의 커미셔너를 맡기도 했다. 리키도잔도 오노를 따랐고, 오노가 술을 자제하라고 하자 순순히 따랐다고 한다. 다만 재일 조선인 자체는 삼국인 집단에게 습격당한 이후 매우 싫어했으며, 한일기본조약에 평생 반대했다.

6.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회차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30년 총선17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입헌정우회2등당선중선거구제
1932년 총선18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입헌정우회2등당선중선거구제
1936년 총선19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입헌정우회3위당선중선거구제
1937년 총선20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입헌정우회3위당선중선거구제
1942년 총선21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무소속낙선중선거구제
1946년 총선22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전현구자유당6위당선중선거구제
1947년 총선23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당4253014.5%2등당선중선거구제
1949년 총선24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민주자유당4225412.4%2등당선중선거구제
1952년 총선25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당8000621.7%1위당선중선거구제
1953년 총선26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당6575319%1위당선중선거구제
1955년 총선27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당6470316.8%1위당선중선거구제
1958년 총선28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민주당8173419.9%1위당선중선거구제
1960년 총선29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민주당9593123%1위당선중선거구제
1963년 총선30회중의원 의원기후현 제1구자유민주당10734424.6%1위당선중선거구제


참조

[1] 웹사이트 Ōno Banboku https://kotobank.jp/[...] 2023-05-16
[2] 서적 Ruffians, Yakuza, Nationalists: The Violent Politics of Modern Japan, 1860–1960 Cornell University Press 2008
[3] 서적 Ruffians, Yakuza, Nationalists: The Violent Politics of Modern Japan, 1860–1960 Cornell University Press 2008
[4] 서적 Ruffians, Yakuza, Nationalists: The Violent Politics of Modern Japan, 1860–1960 Cornell University Press 2008
[5] 뉴스 Bamboku Ono, 74, Japanese Leader; Liberal‐Democratic Party's Vice President Dead https://www.nytimes.[...] 1964-05-29
[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The assassination attempt of Nobusuke Kishi https://www.japantim[...] 2021-09-21
[9] 웹사이트 岸信介の退陣 佐藤栄作との兄弟酒「ここで二人で死のう」 吉田茂と密かに決めた人事とは… https://www.sankei.c[...] 2021-09-21
[10] 간행물 『大野伴睦 小伝と追想記』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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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戦後保守政治の軌跡 岩波書店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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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뉴스 朝日新聞1964年3月14日夕刊記事 朝日新聞 196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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