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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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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접 통치는 식민지 국가가 현지 통치자를 통해 식민지를 통치하되, 식민 모국의 고문이 감독하는 통치 방식이다. 영국은 아프리카와 인도 등에서 이 방식을 활용했으며, 프레드릭 루가드는 아프리카 간접 통치 모델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간접 통치는 식민지 행정 비용 절감과 현지 문화 존중을 내세웠지만, 지역 지도자 선출의 문제점, 보수적인 시각 조장, 새로운 임무에 대한 지도자들의 미숙함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의 간접 통치와 프랑스의 직접 통치를 대비하는 시각이 우세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두 방식의 경계가 모호하며 간접 통치가 실제로는 직접적인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흐무드 맘다니는 간접 통치를 '분산된 전제주의'로 칭하며, 식민 지배 사회 내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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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통치
개요
스페인령 모로코 보호령의 국기
스페인령 모로코 보호령의 국기
존속 기간1912년 – 1956년
위치모로코 북부
수도테투안
정치
정치 체제보호령
스페인 고등 판무관1912년–1913년: 페르난도 수아레스 데 데사냐 이 리카르도스, 카사르루브리오 백작
1956년: 라파엘 가르시아 발리뇨 이 가르시아 데 우스셀
칼리파1913년–1956년: 무함마드 벤 엘 메흐디
역사
주요 사건1912년: 페스 조약
1921년–1926년: 리프 전쟁
1956년: 모로코 독립
성립1912년
해체1956년
인구
인구 통계1950년: 1,012,000명
통치
통치 언어스페인어
아랍어
기타 정보
현재 국가모로코

2. 영국

영국은 일부 식민지들을 런던의 식민지부에서 직접 통치했지만, 다른 식민지들은 영국 고문(advisor)의 감독을 받는 지역 통치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이를 고문정치라고 불렀다. 1890년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식민지가 아님), 영국 총리 솔즈베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The condition of a protected dependency is more acceptable to the half-civilized races, and more suitable for them than direct dominion. It is cheaper, simpler, less wounding to their self-esteem, gives them more career as public officials, and spares of unnecessary contact with white men.|보호받는 종속국의 조건은 반문명화된 인종에게 직접적인 지배보다 더 수용할 만하고 적합하다. 그것은 더 저렴하고, 더 단순하며, 그들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하고, 공무원으로서 더 많은 경력을 제공하며, 백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영어

인도의 번왕국 또한 간접적으로 통치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 간접 통치를 경험한 지역과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3]

2. 1. 아프리카

아프리카 간접통치의 선구자 프레드릭 루가드 경


영국은 일부 식민지들을 런던의 식민지 사무국에서 직접 통치했다. 그러나 일부 식민지들은 현지의 통치자가 통치를 하되, 영국 고문(advisor)이 감독을 하는 고문정치를 시행했다. 이를 통해 간접 통치를 구현했다.[2]

케냐, 나이지리아 간접통치의 모델은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국의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었던 프레드릭 루가드 경이 개발했다. 그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홍콩 총독을 지내기도 했다.

영국 총리 솔즈베리는 1890년 잔지바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을 때, 보호받는 종속국의 조건이 반문명화된 인종에게 직접적인 지배보다 더 수용할 만하고, 더 저렴하고 단순하며,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하고, 공무원 경력을 제공하며, 백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는 점에서 적합하다고 설명했다.[2]

인도의 번왕국 또한 간접적으로 통치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 간접 통치를 경험한 지역과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3] 이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서아프리카 보유 지역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4]

'간접 통치'는 프레데릭 루가드의 저작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의 고등 판무관이었다. 간접 통치는 송가이 제국아샨티 제국 등 역사 속 여러 제국에서 사용되어 왔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5]

영국 제국에 정복된 소코토 칼리파테에서 루가드는 외부, 군사, 세금 통제는 영국인이 수행하고, 그 외 모든 측면은 정복 전 지역 토착 귀족에게 맡기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마무드 맘다니는 이를 '토착민 문제'라고 언급했다.[5] 루가드는 ''영국 열대 아프리카의 이중 위임''에서 간접 통치 시스템을 만들고 발전시킨 이전의 수많은 제국들을 모방했다고 설명했다.[6]

루가드에 따르면 간접 통치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문화적으로 매우 다르다는 정치적 교리였다. 아프리카인을 아프리카인 고유의 제도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추장 또는 왕족이 백성에 대한 전통적인 권력을 계속 행사하도록 하고, 추장이 없는 지역에는 추장을 임명했으며, 인신 제사 폐지와 같이 "정부에 대한 유럽의 생각"에 반하는 전통 정부의 측면을 수정했다.[7]

영국은 식민지 행정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제적 이익에는 관심이 있었고, 자원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전통적인 제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고 판단했다.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간접 통치의 본질과 운영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루가드와 그의 부하들이 북부 나이지리아의 소코토 칼리파테를 정복했을 때,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소코토 칼리파테는 에미르가 이끄는 고도로 발달된 행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소코토 술탄이 최고 수장이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간접 통치 시스템에 이상적이었는데, 영국이 에미르를 통제하고 에미르는 자신의 백성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1920년대 중반, 영국은 탄자니아에 간접 통치 시스템을 도입했다.[8]

2. 2. 인도

인도의 번왕국은 간접적으로 통치되었으며, 간접 통치를 경험한 인도의 영토는 아프리카에서 간접 통치를 경험한 지역과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3]

3. 일본

일본은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고문을 임명했다.[1] 메가타 다네타로는 재정고문으로 부임하여 1906년까지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고 화폐개혁을 주도했다. 더럼 스티븐스는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다.[1]

3. 1. 대한제국

1904년 8월 22일 대한제국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모든 부서에 고문을 임명했다.[1]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11500000JPY에 달하는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고, 화폐개혁을 주도하면서 한국인 화폐자산을 수탈했다.[1]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임명했다.[1]

4. 간접 통치의 실제



영국은 일부 식민지들을 런던의 식민지 사무국에서 직접 통치했지만, 다른 식민지들은 현지 통치자가 통치하되 영국 고문(advisor)이 감독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를 했다. 이를 고문정치라고 불렀다.[2]

프레드릭 루가드 경은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북부 나이지리아 보호국의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으로 재직하면서 케냐, 나이지리아 간접 통치의 모델을 개발했다. 그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홍콩 총독을 지내기도 했다.

1890년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는데, 당시 영국 총리 솔즈베리는 "보호받는 종속국의 조건은 반문명화된 인종에게 직접적인 지배보다 더 수용할 만하고 적합하다. 그것은 더 저렴하고, 더 단순하며, 그들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하고, 공무원으로서 더 많은 경력을 제공하며, 백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라고 설명했다.[2]

인도의 번왕국 또한 간접 통치를 받았으며, 이는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3][4]

프레데릭 루가드는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의 고등 판무관으로 재직하면서 '간접 통치'의 이념적 토대와 실제 적용을 저술했다. 간접 통치는 인도, 우간다, 송가이 제국, 아샨티 제국 등에서 이미 시행되었던 방식이었다.[5]

소코토 칼리파테를 정복한 루가드는 외부, 군사, 세금 통제는 영국이 맡고, 나머지 삶의 영역은 정복 이전 지역 토착 귀족에게 맡기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영국 열대 아프리카의 이중 위임''에서 소수의 외국인이 막대한 인구를 통제하는 이론적 배경을 설명했다.[6]

루가드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문화적 차이를 이유로 간접 통치를 주장하며, 아프리카인을 아프리카인 고유의 제도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추장이나 왕족이 전통적인 권력을 유지하도록 하고, 추장이 없는 지역에는 추장을 임명했으며, 인신 제사와 같이 "정부에 대한 유럽의 생각"에 반하는 전통 정부의 측면을 수정했다.[7]

영국은 식민지 행정 비용을 감당할 자원이 부족했지만, 경제적 이익에는 관심이 있었다. 북부 나이지리아의 경우, 루가드는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어려웠지만, 소코토 칼리파테의 발달된 행정 시스템을 활용하여 에미르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간접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7]

1920년대 중반, 영국은 탄자니아에도 간접 통치 시스템을 도입했다.[8]

1930년 촬영된 프랑스령 상 볼타의 나바 콤 2세, 모시족 왕. 식민 이전의 정치적 단위를 보존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간접 통치의 기반이 되었다.


간접 통치는 유럽 열강에게 더 저렴하고 쉬웠지만,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당국이 지역 전통 지도자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적절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 통치자를 선택하기도 했다.[9] 케냐나이지리아 남부에서는 "보증 추장"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유럽 지배 계급은 자신의 특성과 유사한 지역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들은 원주민 지도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간접 통치는 원주민들 사이에 보수적인 시각을 조장하고 젊은 지식인을 소외시키기도 했다. 변화하는 사회적 성격에 덜 유연한 서면법, 옛 보복 및 정의 관습의 변화, 새로운 임무에 익숙하지 않은 지도자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0]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영국 작가들은 영국의 간접 통치와 프랑스 식민의 직접 통치를 구분했다. 프랑스 식민 관리들은 중앙집권적이고 균일하며 식민지 피지배자를 프랑스 정치 체제에 동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랑스식 통치 방식을 옹호했다.[11][12][13][14] 프랑스 통치는 본국의 중앙 집권적 단일 정부와 동화주의라는 이념에 기반하여, 프랑스 법과 시민권이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식민지법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Évolués")에게 동등한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했다.[15][16][17][18][1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의 "4개 코뮌" 중 일부만이 소수의 교육받은 아프리카 엘리트를 제외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확대했다.[20][21]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 모델은 1930년대부터[22] 1970년대까지 학계에서 지배적이었으나,[23][24][25] 1970년대 이후 학자들은 이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실제로는 두 시스템이 뒤섞여 있으며 간접 통치에 대한 인식이 직접적인 통치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26][27][28]

마흐무드 맘다니 등은[29][30]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 모두 외국 통치의 목표를 구현하려는 시도였지만, "간접" 전략이 민족적 긴장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논의했다.[31][32] 맘다니는 간접 통치를 "분산된 전제주의"라고 칭했다.[33]

일부 정치학자들은 직접 통치 대 간접 통치 경험이 현대 통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을 식민 통치를 경험하지 않은 정부의 기능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하기도 했다.[34]

5. 간접 통치에 대한 해석



영국은 일부 식민지들을 런던의 식민지 사무국에서 직접 통치하기도 했지만, 일부 식민지에서는 현지 통치자가 통치하되 영국 고문(advisor)이 감독하는 고문정치 방식을 사용했다. 1890년 잔지바르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을 때, 영국 총리 솔즈베리는 "보호받는 종속국의 조건은 반문명화된 인종에게 직접적인 지배보다 더 수용할 만하고 적합하다. 그것은 더 저렴하고, 더 단순하며, 그들의 자존심을 덜 상하게 하고, 공무원으로서 더 많은 경력을 제공하며, 백인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한다."라고 설명했다.[2]

인도의 번왕국 또한 간접 통치를 받았으며, 이는 아프리카에서 간접 통치를 경험한 지역과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3] 영국과 프랑스 제국의 서아프리카 보유 지역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4]

'간접 통치'는 1899년부터 1906년까지 나이지리아 북부 보호령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프레데릭 루가드의 저작에서 비롯되었다. 간접 통치는 송가이 제국아샨티 제국 등 역사 속 여러 제국에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영국 제국에 정복된 소코토 칼리파테에서 루가드는 외부, 군사, 세금 통제는 영국인이 수행하고, 삶의 다른 모든 측면은 정복 전 지역 토착 귀족에게 맡기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루가드는 ''영국 열대 아프리카의 이중 위임''에서 간접 통치 시스템을 자세히 설명했다.[6]

루가드에 따르면 간접 통치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문화적으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아프리카인을 아프리카인 고유의 제도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추장 또는 왕족이 백성에 대한 전통적인 권력을 계속 행사하도록 하고, 추장이 없는 지역에는 추장을 임명했으며, 인신 제사 폐지 등 "정부에 대한 유럽의 생각"에 반하는 전통 정부의 측면을 수정했다.

영국은 식민지 행정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관심이 있었고, 자원도 충분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루가드와 그의 부하들이 북부 나이지리아의 소코토 칼리파테를 정복했을 때,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것은 매우 비실용적이었다. 그러나 소코토 칼리파테는 에미르가 이끄는 고도로 발달되고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을 이미 갖추고 있었고, 소코토 술탄이 최고 수장이었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영국이 에미르를 통제하고, 에미르는 자신의 백성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간접 통치 시스템에 이상적이었다.[7]

1920년대 중반, 영국은 탄자니아에 간접 통치 시스템을 도입했다.[8]

간접 통치는 유럽 열강에게 더 저렴하고 쉬웠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당국이 우간다의 군주제와 같이 지역 전통 지도자에게 권한을 부여했지만, 적절한 지도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 유럽인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 통치자를 선택했다.[9] 이는 케냐나이지리아 남부의 경우였으며, "보증 추장"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도자들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유럽 지배 계급은 자신의 특성과 유사한 지역 지도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러한 특성은 원주민 지도자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보수적인 장로였으며, 따라서 간접 통치는 원주민들 사이에 보수적인 시각을 조장하고 젊은 지식인을 소외시켰다. 구두법을 대체한 서면법은 변화하는 사회적 성격에 덜 유연했고, 옛 보복 및 정의 관습은 제거되거나 금지되었으며, 더 폭력적인 처벌도 제거되었다. 게다가, 유럽 열강 정부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은 지도자들은 징집과 세금과 같은 새로운 임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10]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영국 작가들은 인도 번왕국과 북부 나이지리아 행정에 대한 루가드의 저술로 대표되는 영국의 간접 통치와 프랑스 식민의 직접 통치 사이의 이분법을 확립했다. 펠릭스 에부에 또는 로베르 들라비네트와 같은 프랑스 식민 관리들은 중앙집권적이고 균일하며 식민지 피지배자를 프랑스 정치 체제에 동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뚜렷한 프랑스식 통치 방식을 옹호하고 저술했다.[11][12][13][14] 프랑스 통치는 프랑스 본국의 중앙 집권적 단일 프랑스 정부와 동화주의라는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에 기반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식민지법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Évolués")이라면 누구나 동등한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했다.[15][16][17][18][19]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는 세네갈의 "4개 코뮌" 중 일부만이 소수의 교육받은 아프리카 엘리트를 제외하고 프랑스 시민권을 확대했다.[20][21]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라는 이 모델은 1930년대부터[22] 1970년대까지 학계에서 지배적이었다.[23][24][25] 1970년대 이후 학자들은 직접 통치 대 간접 통치 이분법에 문제를 제기하며,[26] 이 시스템이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뒤섞여 있으며, 간접 통치에 대한 인식은 때때로 매우 직접적인 통치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홍보되었다고 주장했다.[27][28]

5. 1. 마흐무드 맘다니의 비판

마흐무드 맘다니와 다른 학자들은[29][30] 직접 통치와 간접 통치 모두 외국의 통치라는 동일한 목표를 구현하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다만, 맘다니는 "간접" 전략이 지배 사회 내에서 적대적인 공동체 관계와 기능 장애적인 정부 전략으로 지속되는 민족적 긴장을 어떻게 조성하는 데 기여했는지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했다.[31][32] 맘다니는 간접 통치를 "분산된 전제주의"라고 칭했다.[33]

일부 정치학자들은 직접 통치 대 간접 통치 경험이 현대 통치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식민 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정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확장하기도 했다.[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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