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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미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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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 미치나가는 아와지 국 출신의 무장으로,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다. 모리 씨,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섬기며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수군으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도 다카토라에게 등용되었으나, 오사카 전투 당시 도쿠가와 측과의 갈등으로 할복했다. 그가 창시한 수군 전술인 '간류'는 후대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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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미치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간씨
이름간 미치나가
원어 이름菅達長
가명헤이우에몬(平右衛門), 에치고노카미
가몬
가몬
묘소효고현스모토시 아오초 진조지
생애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생년 미상
사망게이초 19년 음력 12월 26일 (1615년 1월 25일)
개명도나가
관직
관위에치고노카미
막부이마바리번 가로
주군불명 → 모리 데루모토 → 조소카베 모토치카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도 다카토라
가계
씨족간씨
부모아버지: 간 도토미노카미
자녀삼로병위 (와즈미노카미)
나가마사 (인자부로)
곤노스케 (우에몬하치)
한베에 요시
주자에몬
마사카게 (마타시로)
기타 정보
특기 사항삼로병위: 조소카베 모토치카 가신으로 활동.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해.
나가마사: 인자부로(二三郎), 와카사노카미. 후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가신, 이케다 데루타카 가신으로 전향했으나 가문은 단절됨.
곤노스케: 간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해 실지.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등용되어 다다쓰구 휘하에서 오사카 겨울 전투의 노다후쿠시마 전투에서 활약. 다다쓰구가 죽자, 아와지 스모토번의 다다나가 가신이 됨. 미쓰나카의 전봉에 따라 돗토리번으로 전거, 4가로 중 1인으로 3,000석의 녹봉을 받음.
한베에 요시: 돗토리번에서 곤노스케로부터 550석을 분지받았으나 단절되어 지행은 다섯째 아들에게 상속됨.
주자에몬: 돗토리번에서 곤노스케로부터 450석을 분지받음. 자손은 번사.
마사카게: 게이초 역의 벽파정하의 수전에서 전사. 미치나가의 자식이라고 하지만, 계도에는 이름이 없음.

2. 생애

간 미치나가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문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배출한 스가와라 씨(菅原氏)를 본성(本姓)으로 하는 도보조 가문(東坊城家)에서 파생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고, 아와지 국(淡路国)의 고쿠슈(国衆, 토호 세력)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치나가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덴쇼 연간(1573년 ~ 1592년)에 주고쿠 지방(中国地方)의 모리 씨(毛利氏)와 긴키(近畿) 지방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대립하게 되면서, 아와지 섬(淡路島)은 양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와지의 고쿠슈들은 어느 편에 가담할지 고민하던 중, 미치나가는 모리 씨(毛利氏) 편에, 아타케 노부야스(安宅信康)는 오다 씨 편에 섰다.

1576년(덴쇼 4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군세가 아와지의 이와야 성(岩屋城)을 함락시키고, 모리 측에 가담했던 미치나가가 성주가 되었다. 이후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도 모리 씨를 지원했다. 그러나 1581년(덴쇼 9년),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오다 군이 아와지를 침공하여 이와야 성을 함락시켰고, 미치나가는 도망쳐 은신했다.[9]

1582년(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미치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 편에 가담하여 센고쿠 히데히사가 소유하고 있던 스모토 성을 점령했으나, 곧 빼앗겼다.[9] 이후 시코쿠로 건너가 고소카베 지카야스의 요리키가 되었다. 1584년(덴쇼 1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사이가슈와 연합하여 기시와다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9]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결과, 미치나가는 주가(主家)인 조소카베 씨와 함께 도요토미 씨에게 항복했다.[9]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영지를 인정받아 1만 석에서 1만 5,000석을 다스리게 되었고, 아와지에서 이요 국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9] 히데요시 아래에서 수군을 이끌게 되었고,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은 물론 임진왜란정유재란에도 수군으로써 참전하였다. 『타이코키(太閤記)』에 따르면, 조선 침공에서는 후나부교(舟奉行)로서 250인을 거느리고 출진하여 주로 수송선 선단의 호위를 맡았고, 칠천량 해전 등에서 공을 세웠으나, 명량 해전에서 아들을 잃었다.[9]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패배하고, 전후 영지를 몰수당했다.[9] 이후 이요 국의 다이묘였던 도도 다카토라에게 5,000석의 사무라이다이쇼(侍大将)로 등용되었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 때 오사카 성 바깥 해자를 메우는 공사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으나,[9] 도쿠가와 측이 당초 약속과 달리 성 전체를 매립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공사 참여를 거부하고 다카토라와 언쟁을 벌였다. 다카토라는 미치나가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질책하며 할복을 명했고, 미치나가는 1614년 12월 26일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미치나가가 창시한 수군 전술인 「간류」(菅流)는 셋째 아들인 곤노스케(権之佐)에 의해 대대로 전해졌고, 『간류 수군 요략』(菅流水軍要略) 등의 기록으로 남겨졌다.

2. 1. 초기 생애와 아와지 국에서의 활동

간 미치나가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자 문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배출한 스가와라 씨(菅原氏)를 본성(本姓)으로 하는 도보조 가문(東坊城家)에서 파생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다. 실제로는 아와지 국(淡路国)의 고쿠슈(国衆, 토호 세력)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치나가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덴쇼 연간(1573년 ~ 1592년)에 주고쿠 지방(中国地方)의 모리 씨(毛利氏)와 긴키(近畿) 지방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대립하게 되면서, 아와지 섬(淡路島)은 양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와지의 고쿠슈들은 어느 편에 가담할지 고민하던 중, 미치나가는 모리 씨 편에 가담했고, 아타케 노부야스(安宅信康)는 오다 씨 편에 섰다. 다른 고쿠슈들은 결정을 유보했다.

1576년(덴쇼 4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군세가 아와지의 이와야 성(岩屋城)을 함락시키고, 모리 측에 가담했던 미치나가가 성주가 되었다. 이후 미치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도 모리 씨를 지원했다.

2. 2. 오다-도요토미 정권 시기

1581년(덴쇼 9년),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오다 군이 아와지를 침공하여 이와야 성을 함락시켰다. 미치나가는 도망쳐 은신했다.[9] 1582년(덴쇼 10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미치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 편에 가담하여 센고쿠 히데히사가 소유하고 있던 스모토 성을 점령했으나, 곧 빼앗겼다.[9] 이후 미치나가는 시코쿠로 건너가 고소카베 지카야스의 요리키가 되었다.

1584년(덴쇼 1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사이가슈와 연합하여 기시와다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9] 1585년(덴쇼 1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결과, 미치나가는 주가(主家)인 조소카베 씨와 함께 도요토미 씨에게 항복했다.[9]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영지를 인정받아 1만 석에서 1만 5,000석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후 아와지에서 이요 국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9] 히데요시 아래에서 수군을 이끌게 되었고,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에 참전했다.[9]

2.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미치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수군 장수로 참전했다. 『타이코키(太閤記)』에 따르면, 후나부교(舟奉行)로서 250명을 이끌고 출진하여 주로 수송선단의 호위를 맡았으며, 칠천량 해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9] 그러나 명량 해전에서 아들 마사카게(正陰)를 잃었다. 히데요시 사망 시 유품인 소코노타치(長光の太刀)를 받았다.

2. 4. 도쿠가와 정권 시기와 최후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서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패배하고, 전후 영지를 몰수당했다.[9] 이후 이요 국의 다이묘였던 도도 다카토라에게 5,000석의 사무라이다이쇼(侍大将)로 등용되었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전투 때 오사카 성 바깥 해자를 메우는 공사의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으나,[9] 도쿠가와 측이 당초 약속과 달리 성 전체를 매립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공사 참여를 거부하고 다카토라와 언쟁을 벌였다. 다카토라는 미치나가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질책하며 할복을 명했고, 미치나가는 1614년 12월 26일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3. 간류(菅流) 수군 전술

미치나가는 "간류(菅流)"라는 독자적인 수군 전술을 창시했다. 간류 수군 전술은 셋째 아들인 곤노스케(権之佐)에 의해 대대로 전해졌고, 《간류 수군 요략(菅流水軍要略)》 등의 기록으로 남겨졌다.[9]

참조

[1] 문서 장남
[2] 문서 차남
[3] 문서 삼남
[4] 문서 사남
[5] 문서 오남
[6] 문서 또사부로
[7] 웹사이트 「오사카 역사 탐방」의 제7회를 실시했습니다 https://archive.md/2[...] 2012-12-19
[8] 문서 아와지 섬을 지배하는 해적의 무리
[9] 문서 오사카 성의 해자의 메운 터에서 미치나가 앞으로 보내는 표찰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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