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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히데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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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고쿠 히데히사는 미노 시대에 사이토 씨 가문의 무사였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무장이다. 미노 공략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포로로 잡힌 후 오다 씨의 일원이 되어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아와지 섬의 다이묘를 거쳐 시코쿠 정벌에 참여했다.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실패하여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도쿠가와 씨족에 가담하여 오다와라 전투에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편에 섰고, 이후 시나노 고모로 번의 초대 번주가 되어 통치하다가 161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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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히데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센고쿠 히데히사 초상
센고쿠 히데히사 초상
본명센고쿠 히데히사 (仙石 秀久)
이명센고쿠 곤베에 (千石権兵衛)
출생1552년 2월 20일
출생지미노
사망1614년 6월 13일
사망지시나노
묘소나가노현우에다시 조반 성의 호센지
나가노현사쿠시 이와무라다의 사이넨지
사이타마현고노스시 덴쇼잔 료추인 쇼간지
계명엔가쿠인덴호요도주다이젠조몬(円覚院殿宝誉道樹大禅定門)
가명히데야스 (秀康), 모리나가 (盛長)
관직
관위종5위하, 에치젠노카미
영지시나노고모로번 번주
가문 정보
씨족센고쿠 씨 → 하기와라 씨 → 센고쿠 씨
아버지센고쿠 히사모리
양아버지하기와라 구니미쓰
형제센고쿠 히사카쓰, 센고쿠 히데토시
배우자정실: 혼요인(노노무라 유키나리의 딸)
측실: 게이소인(다케무라 신베에의 딸)
자녀센고쿠 히사타다
센고쿠 히데노리
센고쿠 다다마사
센고쿠 마사요시
센고쿠 마사나오
센고쿠 히사타카
히사카타
히사키요
딸 (후루타 시게히로의 아내)
딸 (오쿠보 모 씨의 아내)
딸 (도도 다카키요의 아내)
딸 (모리 모 씨의 아내)
딸 (사노 마사히데의 아내)
군사 정보
소속사이토 씨, 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도쿠가와 씨, 도쿠가와 막부
지휘히케타성, 고모로성
주요 전투야마자키 전투 (1582년)
히케타 전투 (1583년)
시코쿠 정벌 (1585년)
헤쓰기가와 전투 (1587년)
오다와라 정벌 (1590년)
우에다성 공방전 (1600년)
경력
주군사이토 다쓰오키 →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
봉록고모로번 번주
기타
일본어 표기仙石 秀久

2. 미노 시대

사이토씨의 낮은 계급 사무라이 가문 출신 센고쿠 히데히사는 넷째 아들이라 어린 나이에 다른 가문으로 입양되었지만, 형들이 병으로 사망하여 가문을 상속받기 위해 소환되었다. 미노 공략에서 그의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했고, 히데히사는 공격 중에 포로로 잡혔다.[9]

이후 오다 씨의 일원이 된 히데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의 휘하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오다 씨의 대부분의 군사 작전에 참여하며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계급을 올렸다.

히데히사는 노부나가 시절 용감하고 숙련된 전사로 묘사되며, 종종 오다 씨의 군사 작전 최전선에 있었다. 또한 히데요시의 카리스마를 일부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사무라이에게 좋지 않은 상황에 여러 번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면했다.

덴분|덴분일본어 21년(1552년) 1월 26일, 미노 국 토호 센고쿠 지헤에 히사모리의 넷째 아들로 미노 국 가모 군 구로이와 촌(현재의 가모군 사카호기정)에서 태어났다.[9] 족보에 따르면 센고쿠 씨는 후지와라노 토시히토를 시조로 하며, 본성은 후지와라 성이었다. 센고쿠 모토히데 대에 도키 씨 혈통을 잇는 친족 센고쿠 히사시게가 후계자로 지정되었고, 히사시게는 모토히데의 딸과 결혼하여 가독을 상속했다. 이후 센고쿠 씨는 겐 씨(도키 겐지 지류)를 칭하고 있다.[10] 도키 씨 몰락 후 대두한 사이토 씨를 섬겼고, 아버지 히사모리도 사이토 가문 3대에 걸쳐 봉사했다.

히데히사는 넷째 아들이라 가독을 상속받을 가능성이 낮아 친분이 있던 에치젠 국 호족 하기와라 구니미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오다 씨와 사이토 씨가 대립하는 가운데 적자가 잇따라 쓰러지자 히사모리로부터 급하게 소환되어 센고쿠 씨의 가독을 물려받았다. 에이로쿠|에이로쿠일본어 10년(1567년), 주군 사이토 타츠오키가 오다 노부나가와의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패하여 달아난 후, 노부나가는 히데히사의 용맹한 풍모를 마음에 들어하여[10]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기키로 임명했다.

3. 오다 가신 시대

에이로쿠 10년(1567년), 14세에 오다 가문에 들어간 이후, 하시바(키노시타) 대의 우마마와리로 각지를 전전하며, 최선임 가신으로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다. 겐키 원년(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 참가하여 아사이 측의 야마자키 신페이를 죽인 공으로[10], 덴쇼 2년(1574년)에 히데요시로부터 오미국야스군에 1,000석을 받았다. 같은 하시바 가신 노노무라 코세이의 딸 혼요인을 정실로, 가이국 낭인의 딸 케이소인을 측실로 맞아 10남 6녀를 두었다[11]

센고쿠 씨의 정문 「에이라쿠센(永楽銭)」.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로부터 주고쿠 공략을 명받자, 히데히사는 이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덴쇼 6년(1578년) 4,000석을 추가로 받았고, 덴쇼 7년(1579년) 차우스야마성을 맡아 아카마츠 고개를 넘는 하리마 길 경호를 담당했다. 미키 합전에서 미키성을 포위하던 시기에는 히데요시가 자주 이용하던 유노야마 가도와 아리마 온천을 통괄하는 유야마 봉행에 임명되었다. 덴쇼 9년(1581년) 구로다 간베 등과 함께 아와지섬으로 건너가 이와야성·유라성을 함락시켰다(아와지 원정).

덴쇼 10년(1582년) 6월,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하고, 히데요시의 주고쿠 대반환과 야마자키 전투가 시작되자, 히데히사는 아와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측 호족들을 토벌하며 아와지 평정에 기여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씨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대결했고, 히데히사도 하시바 히데카쓰와 함께 12번 대장으로 참전할 예정이었으나, 히데요시는 히데히사에게 시코쿠 세력 억제를 위해 급히 오미에서 아와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시바타 측에 가담한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대진하게 되었다. 아와지에 들어간 히데히사는 스게 다쓰나가를 격파하고 쇼도섬을 점령, 도고 소토하루를 구원(제2차 도고성의 전투)하기 위해 시코쿠로 건너갔다.

다카마쓰 요리무라가 지키는 요시오카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사누키국 히키타에 상륙, 히키타성에 입성했다. 덴쇼 11년(1583년) 4월 21일, 조소카베 세력의 가가와 노부카게 등이 쇄도했으나, 히데히사는 복병으로 맞이하여 첫 전투는 우세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가가와대가 태세를 정비하자 점차 밀렸고, 조소카베 세력 원군 공격으로 히키타성으로 철수했다. 다음 날 22일 히키타성은 조소카베군의 총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히데히사는 패주한다(히키타 전투). 일설에는 이 전투 중 히데히사가 노보리를 빼앗기는 실수를 했다고 한다. 패전 후 아와지섬과 쇼도섬 방비를 굳히고 세토 내해 제해권을 유지하여 시코쿠 세력을 견제했다.

덴쇼 11년(1583년), 히데히사는 아와지 평정 군공으로 아와지국 5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되어 스모토성에 입성했다. 덴쇼 8년(1580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노부나가가 아와지에 평정군으로 히데요시를 파견한 것은 덴쇼 9년(1581년)이므로 자료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아와지 수령 후 아와지 수군,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이 요지베, 카지와라 야스케 등 여러 수군을 통괄하고, 기슈 정벌에서 유가와 일족 토벌에 공을 세웠다. 하시바군 본대의 시코쿠 공략 때 요시오카성을 공략, 키즈성 공격에서 성의 요점을 잡아 성내 수원을 끊는 등 분전했다. 덴쇼 13년(1585년), 시코쿠 공략 논공행상으로 사누키국 1국(그중 2만 석은 도고 씨 영지)을 받아 쇼츠지성(쇼츠지산성, 우타츠성), 또는 다카마쓰성에 입성했다[8]

4. 도요토미 가신 시대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초소카베 씨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초소카베 모토치카, 소고 마사야스와 함께 참전했으나,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씨에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소고 마사야스와 초소카베 노부치카가 전사했고, 히데히사는 성급하게 진격하다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3] 히데요시에게 돌아온 후, 직위와 영지를 모두 잃고 유배되었다.[4]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규슈 정벌의 선봉으로 파견되었고, 시코쿠 군대의 군감으로 임명되었다. 소고 마사야스, 초소카베 모토치카와 그의 아들 초소카베 노부치카 등의 군대와 함께 규슈로 건너가 시마즈 군과 대치했다. 히데히사는 3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분고국의 후나이에 주둔했다.[6] 시코쿠와 규슈의 동맹군인 오토모 가문의 군대를 합치면 총 2만 명에 달해 시마즈 군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토모 가문의 군대는 사기가 낮았다. 도요토미 군의 선봉을 맡은 시코쿠 군대는 원래 격렬하게 대립하던 세력들이 일시적으로 연합한 부대로, 특히 초소카베 씨는 시코쿠 공격에서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결력이 부족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씨와 고바야카와 씨 군대를 모지에 배치하여 시마즈 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사기가 꺾일 것이라 예상하고, 히데히사에게 지구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6] 그러나 히데히사는 조급한 마음에 도요토미 군 선봉만으로 공세를 펼치려 했다. 이 결정에 대해 소고 도모야스는 찬성했지만, 초소카베 부자는 반대했다.

도쓰가와 전투에서 겨울철 도하 작전을 펼친 도요토미 군 6,000명은 진군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시마즈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 군 1만여 명과 마주쳤다. 전투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우세했지만, 히데히사 본대가 너무 돌출되자 시마즈 군이 반격했다. 중앙과 우익에서의 증원으로 수적 우위를 확보한 시마즈 군은 히데히사 본대를 궤멸시켰고, 제2진인 초소카베 노부치카 부대와 소고 도모야스 부대도 무너져 노부치카와 도모야스는 전사했다. 제3진인 초소카베 모토치카 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이요국으로 패주했고, 전투는 도요토미 군의 패배로 끝났다.

히데요시는 분고국에서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전투를 벌여 패배한 히데히사를 크게 질책했다.[6] 게다가 패주하는 군대를 수습해야 할 군감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다른 제후들을 제쳐두고 고쿠라 성에 입성한 것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이었다. 고쿠라 성으로 물러난 후에도 방어 준비를 하지 않고 20명의 가신과 함께 원정군의 패잔병을 이끌고 사누키국으로 퇴각하여, 명성을 잃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센고쿠 씨에게 주었던 사누키국을 몰수하고(개역) 히데히사를 고야 산으로 추방했다.

4. 1. 다이묘로의 길

1581년, 센고쿠 히데히사는 스모토성에서 아와지섬다이묘가 되었다.[1] 1583년, 히케타 전투에서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패배했다.[2]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초소카베 씨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1587년에는 초소카베 모토치카, 소고 마사야스와 함께 규슈 정벌에 나섰으나,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씨에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소고 마사야스와 초소카베 노부치카가 전사했고, 히데히사는 너무 성급하게 진격하다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3] 히데요시에게 돌아온 후, 직위와 영지를 모두 잃고 유배되었다.[4]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규슈 정벌이 시작되자 선봉으로 파견되었고, 시코쿠 군대의 군감으로 임명되었다. 소고 마사야스, 초소카베 모토치카와 그의 아들 초소카베 노부치카 등의 군대와 함께 규슈로 건너가 시마즈 군과 대치했다. 히데히사는 3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분고국의 후나이에 주둔했다.[6] 시코쿠의 다른 군대를 합쳐 선봉 부대의 총 병력은 6천 명 정도였고, 규슈의 동맹군인 오토모 가문의 군대를 합치면 총 2만 명에 달해 시마즈 군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오토모 가문의 군대는 사기가 낮았고, 전투 의욕이 높은 것은 도요토미 군뿐이었다. 도요토미 군의 선봉을 맡은 시코쿠 군대는 원래 격렬하게 대립하던 세력들이 일시적으로 연합한 부대로, 특히 초소카베 씨는 시코쿠 공격에서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결력이 부족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씨와 고바야카와 씨 군대를 모지에 배치하여 시마즈 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사기가 꺾일 것이라 예상하고, 히데히사에게 지구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6] 그러나 히데히사는 조급한 마음에 도요토미 군 선봉만으로 공세를 펼치려 했다. 이 결정에 대해 소고 도모야스는 찬성했지만, 초소카베 부자는 반대했다.

도쓰가와 전투가 시작되고, 겨울철 도하 작전을 펼친 도요토미 군 6,000명은 진군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시마즈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 군 1만여 명과 마주쳤다. 전투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우세했지만, 히데히사 본대가 너무 돌출되자 시마즈 군이 반격했다. 중앙과 우익에서의 증원으로 수적 우위를 확보한 시마즈 군은 히데히사 본대를 궤멸시켰고, 제2진인 초소카베 노부치카 부대와 소고 도모야스 부대도 무너져 노부치카와 도모야스는 전사했다. 제3진인 초소카베 모토치카 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이요국으로 패주했고, 전투는 도요토미 군의 패배로 끝났다.

히데요시는 분고국에서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전투를 벌여 패배한 히데히사를 크게 질책했다.[6] 게다가 패주하는 군대를 수습해야 할 군감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다른 제후들을 제쳐두고 고쿠라 성에 입성한 것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이었다. 고쿠라 성으로 물러난 후에도 방어 준비를 하지 않고 20명의 가신과 함께 원정군의 패잔병을 이끌고 사누키국으로 퇴각하여, 명성을 잃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센고쿠 씨에게 주었던 사누키국을 몰수하고(개역) 히데히사를 고야 산으로 추방했다.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자, 히데히사는 셋째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와 함께 미노국에서 20명의 옛 신하들을 모아[12] 낭인들을 이끌고 히데요시에게 합류했다. 히데요시의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히데요시를 알현할 수 있었다.[12] 히데히사는 특별히 눈에 띄는 복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방울 우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창술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즈국 야마나카성 공략에서 선봉을 맡았고, 오다와라성 하야카와구치 공격에서는 성곽의 중요한 출입구 중 하나를 점거하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으로 히데요시는 히데히사를 용서하고, 옛 영지의 절반인 5만 석을 시나노국 코모로에 하사하여 다이묘로 복귀시켰다. 코모로에 봉해진 후, 히데히사는 이름을 히데야스로 고쳤다.[11]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히데야스는 영지인 코모로성이 아닌 교토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11] 분로쿠 원년(1592년),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젠국 나고야성 축성 공사에서 공을 세워 종5위하·에치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분로쿠 3년(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시작된 후시미성 축성 공사에서도 공을 세워 7,000석을 추가로 받아 5만 7,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후시미성에서는 대도적 이시카와 고에몬을 체포했다는 전승이 남아있다.[13][8] 히데히사는 히데요시로부터 이시카와 고에몬이 훔치려 했던 https://bunka.nii.ac.jp/heritages/detail/85763 천조의 향로를 하사받았다.[8]

게이초 2년(1597년), 센고쿠 에치젠노카미 모리나가라고 적힌 류운사에 기진장이 남아 있어, 히데야스에서 다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11] 이 무렵부터 영지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 코모로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기 시작했다.[11]

4. 2. 규슈 정벌과 도쓰가와 전투

1587년, 센고쿠 히데히사는 초소카베 모토치카, 소고 마사야스와 함께 규슈 정벌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씨에게 패배했는데, 소고 마사야스는 초소카베 노부치카와 함께 전사했다. 히데히사는 너무 성급하게 진격했고, 위험을 느끼자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았다.[3] 히데요시에게 돌아온 후, 히데히사는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4]

덴쇼 14년(1586년),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규슈 정벌의 선봉으로 파견되었고, 시코쿠 군대의 군감(軍監)으로 임명되었다. 소고 도모야스, 초소카베 모토치카 · 노부치카 부자 등과 함께 규슈로 건너가 시마즈 군과 대치했다. 히데히사는 3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분고국 후나이에 주둔했다.[6] 시코쿠 군대와 규슈의 동맹군인 오토모 가문의 군세를 합치면 총 2만 명에 달해 시마즈 군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오토모 가문의 군세는 사기가 낮았고, 도요토미 군의 선봉을 맡은 시코쿠 군대는 원래 적대 관계였던 세력들이 모인 혼성 부대여서 단결력이 부족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 고바야카와 군을 모지에 배치하여 시마즈 군의 사기를 꺾고, 점차 군대를 늘려 자신이 직접 본군을 이끌고 오면 시마즈 군을 섬멸할 것이라며 지구전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6] 그러나 히데히사는 도요토미 군 선봉만으로 공세를 펼치려 했고, 소고 도모야스는 찬성했지만 초소카베 부자는 반대했다.

도쓰가와 전투에서 도요토미 군 6,000명은 겨울철 도하 작전으로 인해 진군이 더뎠고, 시마즈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 군 1만여 명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반에는 도요토미 측이 우세했지만, 히데히사 본대가 너무 돌출되자 시마즈 군의 반격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2진인 초소카베 노부치카 부대와 소고 도모야스 부대도 붕괴되어 노부치카와 도모야스는 전사했다. 제3진인 초소카베 모토치카 부대는 이요국으로 패주했고, 전투는 도요토미 측의 패배로 끝났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전투에 임해 패배하고, 군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채 고쿠라 성으로 퇴각한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6] 사누키국 영지를 몰수당하고 고야 산으로 추방되었다.

5. 도쿠가와 가신 시대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히데히사가 형식적으로 도쿠가와 씨족에 가담하도록 주선했고, 히데히사는 오다와라 전투에 참전하여 호조 씨족에 맞서 싸워 용맹함으로 명예를 회복했다.[4] 이후 5만 곡의 수입으로 고모로다이묘가 되었다.[5][1]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 편에 섰다.

1600년,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대에 속해 있었으나, 우에다 성 전투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의 지연 전술로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히데히사는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히데타다를 살려두도록 했다. 히데타다는 이후 히데히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히데히사의 가문은 메이지 유신까지 다이묘로 남았다.

5. 1. 고모로 번 통치와 사망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히데히사가 도쿠가와 씨족에 합류하도록 주선했고, 오다와라 전투에 참전하여 호조 씨족에 맞서 싸웠다.[4] 이후 5만 곡의 수입으로 고모로다이묘가 되었다.[5][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다.

1600년, 히데히사는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에 있었는데, 우에다 성 전투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의 지연 전술로 인해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데히사는 이 실수 이후 분노한 이에야스를 설득하여 그와 히데타다를 살려두도록 했다. 히데타다는 남은 생애 동안 히데히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무단파문치파의 대립, 오대로오봉행 등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이에야스와 친밀했던 히데히사는 도쿠가와 씨에게 접근하여, 1600년의 아이즈 정벌에 참가했다.[11]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나카센도와 호쿠리쿠 가이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코모로를 지켰다.[10]

시나노에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도착하자 히데히사는 단기로 맞이했고, 사나다 공격을 위해 코모로를 본진으로 정한 히데타다 군에 참전했다. 우에다 성 전투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의 선전으로 히데타다 군이 발이 묶이자, 히데히사는 자신을 인질로 내보내 히데타다가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향하도록 권했다. 세키가하라 본전에 지각하여 아버지의 분노를 산 히데타다를 중재하는 데에도 힘썼다. 토자마이면서 히데타다의 지휘를 보좌하여 깊은 신뢰를 얻어, 후에 히데타다가 정 이대장군으로 임명되자 중용되었다(준후다이 다이묘). 막번 체제에서 시나노 코모로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01년, 휘를 히데히사로 되돌렸다.[11]

코모로 번주로서 히데히사는 영지 개척과 정비에 힘썼고, 코모로 성의 오테몬과 쿠로몬, 니노마루를 증축하여 근대적인 성곽으로 완성시켰다.[11] 오테몬은 화려한 장식을 생략하고, 실질적인 구조로 만들어졌다.[11][14] 하치만궁을 권진하고, 가도의 전마 제도 및 숙장가를 정비하는 등 다양한 치적을 남겼다. 대규모 개척 사업 때문에 농민들에게 가혹한 과역을 줘 사쿠 군에서는 농민들이 도산하는 사태가 일어났지만,[15] 연공의 감액·유예, 농촌 유력자에게 은급을 주는 등 개선책을 실시했다.[15]

막부로부터 신뢰를 받아 도자마 다이묘로서는 과분한 대우를 받았으며, 히데타다 부속이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1608년 겨울에는 히데타다가 에도의 히데히사 저택을 방문하여 환담을 나누었다. 1609년에 히데타다의 쇼군 선하 어배하에 수행했고, 1611년 정월 2일의 어요이즈메 때에도 착좌를 허락받았다. 1614년, 에도에서 코모로로 돌아가는 도중에 발병하여, 무사시 코노스에서 5월 6일에 사망했다.[15] 향년 63세(혹은 64세).[11] 유해는 사쿠의 사이넨지에서 다비되었고, 분골이 행해져 묘소가 여러 개 존재한다. 호센지의 묘소를 정식 영묘로 하고 있다.[11] 가독은 셋째 아들인 타다마사가 이었다.

6. 인물 및 평가


  • 오다 노부나가가 센고쿠 히데히사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황금 한 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개선 센고쿠 가계도에 남아있다.
  • 조잔 기담에는 히데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닌자로서 상인으로 변장하여 규슈에 잠입, 지리를 그림으로 그려 공격 지점을 적어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도쓰가와 전투의 실패에 대해 호사군기와 오토모 공경 가각서는 "센고쿠는 시코쿠를 가리키며 도망갔다. 삼국 제일의 겁쟁이"라고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 루이스 프로이스는 플로이스 일본사에서 히데히사와 그의 가신들을 "부끄러움이나 자비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묘사했지만, 동시에 "결단력이 풍부하고 독선적이었지만, 우수한 무장으로 알려져 있었다"라고 평가했다.[16]
  • 이시카와 고에몬을 체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강담에서는 괴력 무쌍의 호걸로 등장하기도 한다.
  • 깃발 문양으로는 노부나가에게 하사받은 '영락전 문양'과 초상화에 그려진 '둥근 무 자 문양'이 있으며, 말인장은 '금폐'를 사용했다.[17]
  • 당세 구족은 검은색 갑옷에 짚 삿갓 모양의 장식이 달린 투구를 사용했는데, 이는 다른 구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17]
  • 안진 기요히메의 종을 진종으로 사용한 후 묘만사에 봉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8]
  • 켄소쿠 신사에 참배했던 기록이 남아있으며, 참배에 사용했던 언덕은 곤베에 언덕이라고 불린다.
  • 히데요시의 오랜 가신 중 실수를 범하고 처단된 자 중에서도 다이묘로 복귀를 허가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으며, 에도성 내 대기소는 부대 다이묘에 준하는 제감의 간에 있었다.
  • 고모로 번주 시절 메밀을 특산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메밀국수를 통해 영민과 소통하여 '센고쿠 씨'라는 이름으로 존경받았다.[19]
  • 이즈시 쟁반 소바는 신슈의 메밀 장인이 센고쿠 가문의 소령 이동 때 이주하여 기법을 전수한 것이다.
  • 동생 나오키 마사나오는 난폭하여 히데히사에 의해 산속으로 옮겨졌고, 사이넨지 (사쿠시)로 옮겨졌으나 젊은 나이에 죽었다.


; 주요 가신

이름출신 및 주요 경력
시노미야 미츠토시타로자에몬. 시나노에서 사누키로 이주, 히키타 성주. 형 미츠타케는 미요시 씨에게 공격받아 함락. 도요토미 가문에 신종, 오토이 성주, 스와 신사 건립.
오가와 이세노카미히데히사를 섬김. 1583년 사누키 호쿤지 성 축성. 시코쿠 국분 후 사누키 350석 하사.
히로타 토고히데히사를 섬김. 1581년 아와지 스모토 성 공격 공적.
모리 곤페이히키타 전투에서 센고쿠 군 후위, 이자에서 이나요시 신조인에게 토벌됨(향년 18세). 다리의 신으로 모셔짐.
고토 모토츠구구로다 가문 추방 후 히데히사 섬김. 1583년 사누키 다카마쓰 성(요시오카 성) 공격 첫 출전.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용서받아 귀참.
쇼린 잇신가토 가문 삼걸 중 한 명. 아라키 가문 몰락 후 히데히사 섬김. 히데히사 개역 후 가토 기요마사 가신.
하유카 도요요시하유카 스케요시 차남. 야사부로. 1579년 하유카 성 개성 시 조소카베 가문 인질. 1582년 하유카 씨 당주. 시코쿠 공격 후 히데히사 섬김. 1586년 도쓰가와 전투 전사.
오히라 쿠니스케1538년 출생. 도사 아가와 군 홍오카 성 패배, 카가와 유키카게 의지. 1572년 산슈 와다 시시노하나 성주. 1578년 국유사 흥함. 1585년부터 히데히사 섬김, 사무라이 다이쇼. 1586년 도쓰가와 전투 패배 후 은거. 1603년 사망.
오히라 쿠니쓰네1569년 출생. 오히라 쿠니스케 장남(혹은 차남). 1586년 도쓰가와 전투 전사(향년 18세).
모리 무라요시통칭 이와미, 구로자에몬. 센고쿠 성 받음. 모리 모토무라 차남, 모리 무라하루 동생. 1582년 히데히사 가신. 1583년 히키타 전투 승리 공헌. 시나노 고모로 배령 후 7,000석. 셋째 아들 무라아키 계통 센고쿠 가문 섬김.


7. 센고쿠 히데히사를 소재로 한 작품


  • 미야시타 히데키의 만화 ''센고쿠''의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오다 노부나가가 사이토 타츠오키의 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 만화

  • 미야시타 히데키, 『센고쿠』 (영 매거진 코믹스, 전 15권, 2004년부터 간행)
  • 미야시타 히데키, 『센고쿠 덴쇼기』 (영 매거진 코믹스, 전 15권, 2008년부터 간행)
  • 미야시타 히데키, 『센고쿠 잇토키』 (영 매거진 코믹스, 전 15권, 2012년부터 간행)
  • 미야시타 히데키, 『센고쿠 곤베』 (영 매거진 코믹스, 전 27권, 2016년부터 간행)
  • 도고 류, 『센고쿠 형제』 (호소카와 타다타카에 의한 만화화가 진행, 월간 영 매거진 코믹스, 전 6권, 2009년부터 간행)

; 소설

  • 교코엔, 『도요토미 호걸 센고쿠 곤베』 (무사도 문고에서 간행, 전 1권, 1915년,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브러리에서 열람 가능)
  • 시키자와 이쿠, 『센고쿠 히데히사, 전국을 질주하다 -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무장』 (PHP 연구소에서 간행, 전 1권, 2016년)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13-04-11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웹사이트 戸次川の戦い 長宗我部元親・信親の無念 https://shuchi.php.c[...] Web歴史街道 2019-07-25
[4] 웹사이트 仙石秀久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9-07-25
[5] 웹사이트 Shinano Province http://www.japanese-[...] 2013-04-11
[6] 웹사이트 秀吉と秀久の間で交わされた書状 http://museum.umic.j[...] 上田市立博物館
[7] 문서 佐野半四郎
[8] 웹사이트 仙石秀久の略伝 http://museum.umic.j[...] 上田市立博物館
[9]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https://kotobank.jp/[...]
[10] 서적 改選仙石家譜
[11] 웹사이트 小諸城時代の治世 http://museum.umic.u[...] 上田市立博物館 2024-02-24
[12] 웹사이트 小田原の役 http://museum.umic.u[...] 上田市立博物館
[13] 서적 一色軍記
[14] 웹사이트 小諸城大手門解説 http://www.kanko.kom[...] 小諸市観光協会 2024-02-24
[15] 서적 シリーズ藩物語、小諸藩
[16] 서적 フロイス日本史 中央公論社
[17] 웹사이트 秀久の具足 http://museum.umic.j[...] 上田市立博物館
[18] 웹사이트 「安珍・清姫」の鐘由来 http://www.kyoto.zaq[...] 妙満寺
[19] 웹사이트 仙石秀久と小諸城 http://www.kanko.kom[...] 小諸市観光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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