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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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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항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다가 귀국 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9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4년간 억류 생활을 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를 기록한 《간양록》을 저술했다. 귀국 후에는 대구향교와 순천향교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강감회요》등의 저서를 남겼다. 현재 내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여러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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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강항
강항
한글강항
한자姜沆
로마자 표기Gang Hang
태초
수은
출생1567년 7월 8일 (음력 5월 17일), 전라도 영광군
사망1618년 6월 27일 (음력 5월 6일)
본관진주
직업문인, 의병장
학력1593년 전주 별시문과 병과 급제
부모강극검

2. 생애

1602년 대구향교 교수, 1608년 순천향교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내산서원에 강항을 모시고 있다. 내산서원 입구의 문은 강항의 부인 함평 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다. 4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수록한 《간양록》은 그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일본의 내정이나 국토의 특징, 당시의 여러 다이묘(大名)의 정세 등을 세세하게 적은 것으로 왕조에 대한 의견 제출서로서의 측면이 강하다.[4]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 어떤 재능, 어떤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일(天下一)을 내세운다. 벽칠, 지붕 덮기 등에도 천하일이라는 칭호가 붙으면 많은 금은이 투입되는 것은 보통이다”라고 적고 있다.[5]

간양록』에서는 백제의 왕족 臨政太子가 왜국의 주방(周防)으로 가서 다이내씨(大内氏)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 주장에 대해 松田甲는 “기이한 평을 내놓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5]

대한민국의 백과사전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강항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왜군(倭軍)의 포로로 일본에 잡혔다. 일본 학자들에게 성리학(송명리학)을 가르치는 한편, 왜군의 군사 정보 등을 고국에 전달하였는데, 일본 성리학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6]

2. 1. 조선에서의 초기 생애

강항은 전라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27세 때인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8]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었고, 1596년 공조좌랑(工曹佐郞)과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2. 2. 정유재란과 포로 생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강항은 휴가 중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남원에서 명나라 장군 양원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원균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육로가 뚫리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려와 공격 개시 사흘 만에 남원이 함락되었다. 강항은 고향 영광에서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영광마저 함락되자 식구들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순신에게 가려다가 논잠(論岑) 포구(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포위되었다. 강항은 죽을 각오로 일가족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수심 때문에 왜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건져졌다. 그 와중에 아들 용과 서녀(庶女) 애생을 잃었다.[8] 포로로 잡힌 강항 일가는 순천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9]

10여 일 만에 지금의 일본 에히메현 오쓰시 나가하마(長濱) 항구에 도착, 지금의 히지 강을 지나 이요의 오쓰(大洲) 성에 이른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과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을 엮어 몰래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강항은 교토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를 만나 함께 탈출을 의논하고, 5월 25일 밤에 숲길을 따라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 지금의 야쿠시타니 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배편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노승과 함께 숲길을 걸어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들려 우와지마 성의 처형장으로 끌려갔으나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이후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 성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된다. 당시 세이카와의 만남에 대해 강항 자신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서 배를 마련하고자", 즉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비용을 벌기 위해 그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세이카와 강항이 필담으로 주고받았던 또는 강항이 세이카를 위해 암기하고 있던 주자학 이론들을 적은 글들은(총 21권) 현재 일본의 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그는 후시미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1600년에 두 제자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일본에 억류된 지 2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2. 3. 일본에서의 활동과 귀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강항은 남원에서 명나라 장군 양원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원균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왜군이 남원을 함락시키자, 강항은 고향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영광마저 함락당했다. 강항은 가족과 함께 이순신에게 가려다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8]

일본 에히메현 오쓰시에 도착한 강항은 승려 요시히토와 교류하며 일본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내 《적중견문록》을 본국으로 보냈다.[9] 이후 교토 후시미성으로 이송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종 조사가 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좀 벌어서 배를 마련하고자" 세이카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하여 성리학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강항은 1600년 두 제자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4] 일본에 억류된 지 2년 8개월 만이었다. 귀국 후 1602년 대구향교, 1608년 순천향교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2. 4. 귀국 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강항은 남원에서 명나라 장군 양원에게 보내는 군량미 수송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원균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육로가 뚫리고, 왜군이 빠르게 진격해 왔다. 공격 개시 사흘 만에 남원이 함락되었다. 강항은 고향 영광에서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지만, 영광마저 함락되자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순신에게 가려다가 논잠 포구(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 포위되었다. 강항은 가족과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얕은 물 때문에 왜군에게 붙잡혔고, 아들 용과 서녀 애생을 잃었다.[8] 강항 일가는 순천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9]

10여 일 후, 일본 에히메현 오쓰시 나가하마 항구에 도착한 강항은 히지 강을 지나 이요의 오쓰 성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승려 요시히토와 교류하며 일본의 역사, 지리, 제도 등을 알아내 《적중견문록》을 엮어 몰래 본국으로 보냈다. 교토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와 함께 탈출을 의논한 강항은 5월 25일 밤, 숲길을 따라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야쿠시타니 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배편을 약속받았으나, 노승과 함께 숲길을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잡혀 우와지마 성 처형장으로 끌려갔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교토 후시미 성으로 이송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 아카마쓰 히로미치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글씨를 팔아 은전을 벌어 배를 마련하고자" 세이카에게 글씨를 써주었는데, 주자학에 대한 그의 열의에 감탄하여 성리학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적었다. 세이카와 강항이 필담으로 주고받았거나 강항이 세이카를 위해 암기한 주자학 이론들은(총 21권) 현재 일본 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강항은 막부의 귀화 요청을 거부하고 4년간 억류되었다. 그는 후시미 성주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편지를 여러 번 썼고, 1600년 두 제자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일본에 억류된 지 2년 8개월 만이었다. 1602년 대구향교 교수, 1608년 순천향교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강향수(姜享壽)
증조모부안 한씨(扶安韓氏)
조부강오복(姜五福)
조모제주 양씨(濟州梁氏)
아버지강극검(姜克儉)
어머니영동김씨(永同金氏)
부인진주 김씨(晉州金氏)
장남강시만(姜時萬)
자부임득지(林得智)의 딸
손자강익주(姜翊周), 강숙주(姜䎘周), 강휘주(姜彙周)
손녀정이주(鄭以周)에게 출가
장녀나종경(羅宗敬)에게 출가
차녀김기(金夔)에게 출가
외손자김일태(金一台), 김일명(金一明), 김일규(金一奎)
외손녀남전(南琠), 권도전(權道全)에게 출가
삼녀이소(李昭)에게 출가
사녀고두남(高斗南)에게 출가
외손녀박경종(朴慶宗)에게 출가


4. 저서


:: 원래 제목은 '건거록'(巾車錄, 건차록)으로, 윤순거가 편찬한 강항의 포로 문학 작품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강항이 1597년부터 1600년까지 4년간 겪은 일본 포로 체험을 담고 있으며, 제자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4]

:: 현재 간양록은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단행본과 필사본(강항이 직접 쓴 것으로 추정)만 보존되어 있다.

:: 간양록은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적지에서 임금에게 보낸 상소 <적중봉소>

::: 일본의 지도, 관직, 장수의 특징 등을 적은 글 <적중문견록>

::: 일본에 남은 포로들에게 국가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잃지 말 것을 권한 글 <고부인격>

::: 귀국 후 일본 사정을 문답 형식으로 적은 글 <승정원계사>

::: 포로 상황부터 개인사까지 일기 형식으로 적은 글 <섭란사적>

:: 1658년 목판본에는 <섭란사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2020년 학술대회에서는 <섭란사적 시말>이라는 표기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 《운제록(雲堤錄)》
  • 《강감회요(綱鑑會要)》

: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을 보완, 정리한 책이다. 인쇄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1권뿐이다. 강감회요 목판은 숙종 28년(1702)에 새긴 총 642매로, 1999년 7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 《좌씨정화(左氏精華)》
  • 《문선찬주(文選纂註)》
  • 《수은집(睡隱集)》
  • 성재기(惺齋記)》
  • 《시상와기(是尙窩記)》

5. 평가 및 영향

강항은 정유재란조선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후지와라 세이카 등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가르쳤고, 일본의 제도와 정세에 대한 정보를 조선에 알렸다. 그의 저서 《간양록》은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과 일본의 내정, 국토의 특징, 여러 다이묘들의 정세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조선 조정에 일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4]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은 어떤 재능, 어떤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일(天下一)을 내세운다."라고 평가하며, 일본의 장인정신과 경쟁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을 남겼다.[4]

한편, 《간양록》에서 강항은 백제 왕족 임성태자가 왜국 주방으로 가서 다이내씨의 조상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에 대해 마쓰다 갑은 "기이한 평"이라고 평가했다.[5]

대한민국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강항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왜군의 포로로 일본에 잡혔다. 일본 학자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는 한편, 왜군의 군사 정보 등을 고국에 전달하였는데, 일본 성리학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6] 이는 강항이 일본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평가이다.

6. 관련 작품


  • 小説 土佐堀川 (小説)|소설 도사보리가와일본어(일본 NHK, 1989년) : 일본 소설가 후루카와 카오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6. 1. 드라마

참조

[1] 서적 A Korean War Captive in Japan, 1597-1600: The Writings of Kang Hang Columbia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The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Japan by Kang Hang, a Prisoner of War 1961-04-00
[3] 웹사이트 강항(姜沆) http://encykorea.aks[...] 2022-07-18
[4] 서적 看羊録 朝鮮儒者の日本抑留記 平凡社
[5] 서적 日鮮史話 朝鮮総督府 1926-00-00
[6] 뉴스 강 姜 https://www.doopedia[...] 斗山世界大百科事典
[7] 문서 동토집 권6, 수은 강 공 행장; 성담집 권20, 수은 강 공 묘갈명
[8] 문서 간양록, 섭란사적, 1597년 9월 23일
[9] 문서 간양록, 섭란사적, 1598년도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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