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야쿠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 1850–1904)는 아일랜드계와 그리스계 혼혈로 태어난 작가로, 본명은 패트릭 래프카디오 헌(Patrick Lafcadio Hearn)이다. 그는 미국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1890년 일본에 정착하여 고이즈미 가문의 여성과 결혼 후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고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낯선 일본의 모습(Glimpses of Unfamiliar Japan)』, 『마음』, 『괴담』 등이 있으며, 일본의 전설, 민담, 문화를 영어로 소개하여 일본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일랜드계 그리스인 - 요르요스 1세
요르요스 1세는 1863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를 통치한 덴마크 왕자 출신의 국왕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영토 확장을 추진하다가 1913년 암살당했다.
고이즈미 야쿠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로마자 표기 | Koizumi Yakumo |
히라가나 표기 | こいずみ やくも |
가타카나 표기 | コイズミ ヤクモ |
본명 | 파트리키오스 레프카디오스 헤른 (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έρν) |
출생일 | 1850년 6월 27일 |
출생지 | 레프카다, 이오니아 제도 연합주 (현재 그리스) |
사망일 | 1904년 9월 26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묻힌 곳 | 조시가야 묘지 |
국적 | 영국 일본 |
언어 | 영어 그리스어 일본어 프랑스어 |
![]() | |
직업 |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영문학자 기타 |
결혼 및 가족 | |
배우자 | 앨리스 포리(1874년-1877년, 이혼) 고이즈미 세츠코(1890년 결혼) |
자녀 | 4명 |
친척 | 고이즈미 본(증손)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894년 - 1904년 |
교육 | 더럼 대학교 중퇴 |
주요 작품 | 골동품 괴담 |
종교 | |
종교 | 동방 정교회 불교 |
2. 생애
1850년 영국 보호령 이오니아 제도 연합주의 레프카다 섬에서 아일랜드계 아버지와 그리스계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 태어났다. 본명은 Patrick Lafcadio Hearneng이다. 2살 때인 1852년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하여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외모 콤플렉스에 영향을 주어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오른쪽 옆모습만 보이려 했다.
1869년, 19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뉴올리언스 등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문화와 사회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 특히 뉴올리언스에서는 크리올 문화와 부두교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90년, 잡지 특파원으로 일본에 처음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일본 문화에 매료되어 정착을 결심했다. 시마네현 마쓰에시의 중학교와 사범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고이즈미 세쓰코를 만나 결혼했다. 1896년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아내의 성을 따라 '小泉 八雲|고이즈미 야쿠모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4] '야쿠모'라는 이름은 그가 잠시 거주했던 마쓰에가 속한 이즈모국의 옛 시적 별칭인 "팔운이 일어선다(八雲立つ)"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65]
이후 구마모토의 제5고등중학교, 고베의 신문사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과 와세다 대학 등에서 영문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의 문화, 민속, 괴담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주제로 한 다수의 글을 영어로 발표했으며, 대표작으로는 『괴담』(怪談일본어) 등이 있다. 스스로 "반은 동양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하며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공감을 나타냈고,[66] 서구에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어가 서툴렀던 야쿠모는 "헬른 씨 말투"라고 불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소통했으며, 주로 아내 세쓰가 통역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글쓰기에 매우 엄격하여 "원고는 아홉 번 고쳐 써야 제대로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 쓰는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79][80]
1904년 9월 26일, 도쿄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54세였다. 그의 묘소는 도쿄 도시마구의 조시가야 공원묘지에 있다. 사후 1915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정4위에 추서되었다.[76]
한편, 2016년에는 아이치가쿠인대학 교수에 의해 1896년 당시 영국 영사의 서한을 근거로 야쿠모가 영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97]
2. 1. 초기 생애 (1850년 ~ 1869년)
1850년 6월 27일,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오니아 제도 연합주의 레프카다 섬에서 태어났다.[2] 본명은 패트릭 래프카디오 헌(Patrick Lafcadio Hearneng)이다. 아버지는 영국군 의무관으로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혈통인 찰스 부시 헌(Charles Bush Hearn)이었고, 어머니는 그리스 키티라섬 출신의 그리스인 로사 카시마티(Rosa Cassimati)였다.[3][4] 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트리키오스 레프카디오스 헌(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ερνell)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중간 이름 '래프카디오'는 그가 태어난 섬의 이름에서 따왔다.[7] 헌은 평생 자신의 그리스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했다.[5][6]그는 2살 때인 1852년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하여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869년, 19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2. 1. 1. 아일랜드 이주와 유기
허언의 아버지 찰스 헌은 2급 군의관으로 승진한 후, 1850년 레프카다에서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발령받았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아내 로사와의 결혼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 관계가 자신의 경력에 해를 끼칠 것을 우려하여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 래프카디오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가족을 떠났다.[8] 1852년, 찰스는 아내와 아들을 더블린에 있는 자신의 가족에게 보냈으나, 그들은 차가운 환대를 받았다. 찰스의 어머니이자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엘리자베스 홈즈 허언은 며느리 로사의 그리스 정교회 신앙과 교육 부족(그녀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고 영어도 하지 못했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로사는 낯선 문화와 시댁의 프로테스탄트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찰스의 고모이자 가톨릭으로 개종한 과부 사라 홈즈 브레인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사라 브레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사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1853년 남편 찰스가 휴가차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부부 사이는 이미 틀어져 있었다. 찰스는 다시 크림 반도로 파견되었고, 임신한 아내와 아들을 아일랜드에 남겨두었다. 1854년, 정신 질환을 앓던 어머니 로사는 그리스로 귀국했고, 1856년 찰스가 부상을 입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채 돌아왔을 때, 로사는 세리고 섬에서 셋째 아들 다니엘 제임스 허언을 낳았다. 이 무렵 부모의 이혼이 성립되었고, 래프카디오는 사라 브레인에게 맡겨졌다.
찰스는 결혼 계약서에 서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로사와의 결혼이 영국법상 무효라고 주장하며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결혼이 무효화된 후, 로사는 이탈리아계 그리스인 조반니 카발리니와 재혼했다. 카발리니는 결혼 조건으로 로사에게 래프카디오와 제임스의 양육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제임스는 더블린의 아버지에게 보내졌고, 래프카디오는 사라 브레인의 보살핌 아래 남게 되었다. 래프카디오와 제임스는 어머니를 다시는 보지 못했으며, 로사는 결국 코르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882년에 사망했다.[9]
사라 브레인이 래프카디오를 돌본 지 4년이 지난 1857년, 아버지 찰스는 사라를 래프카디오의 영구 후견인으로 공식 임명했다. 같은 해 7월, 찰스는 어린 시절 연인이었던 알리시아 고슬린과 재혼하고 세컨더라바드로 파견되어 세 딸을 두었다.[10] 래프카디오는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했으며, 찰스는 1866년 수에즈 만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11]
1857년부터 래프카디오는 사실상 고아가 되어 고모할머니 사라 브레인의 손에 자랐다. 사라는 겨울에는 더블린, 여름에는 남편의 영지가 있던 아일랜드 남부 해안의 트래모어(워터퍼드주)와 북웨일스의 뱅거를 오가며 살았다.[67] 사라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래프카디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래프카디오는 고모할머니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그리스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12] 이러한 성장 환경은 그가 기독교, 특히 엄격한 가톨릭 문화에 반감을 갖게 만들었고, 켈트족의 원시 종교인 드루이드교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되었다.[67]
1861년, 래프카디오가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우려한 사라는 친척 헨리 허언 몰리뉴의 조언에 따라 그를 프랑스 이브토에 있는 가톨릭 기숙학교(Institution Ecclésiastiquefra)에 보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가톨릭 교육에 대한 평생의 혐오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가톨릭 교육을 "관습적인 지루함과 추함, 더러운 금욕주의, 긴 얼굴, 예수회식 교육, 그리고 어린이들의 뇌를 끔찍하게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3]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어에 능통해졌고, 훗날 기 드 모파상과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863년, 다시 몰리뉴의 제안으로 영국 더럼 대학교의 세인트 커스버트 칼리지, 어쇼(St. Cuthbert's College, Ushaw)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패디"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3년 동안 영어 작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14] 그러나 1865년, 16세 때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기구를 타다가 사고로 왼쪽 눈을 심하게 다쳤다. 눈의 감염으로 더블린과 런던의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고 1년간 휴학했지만 결국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원래 심한 근시였던 그는 이 사고로 시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어, 가까운 것을 볼 때는 돋보기를, 먼 거리를 볼 때는 망원경을 사용해야 했다. 그는 안경이 시력을 더 약화시킬 것이라 믿어 착용을 꺼렸다. 또한 다친 눈의 홍채 색깔이 변하면서 평생 자신의 외모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고, 대화할 때는 왼쪽을 가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는 항상 오른쪽 옆모습만 보이도록 했다.[15]
1867년, 고모할머니 사라 브레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헨리 몰리뉴가 파산하면서 사라도 함께 파산했다. 학비를 낼 수 없게 된 래프카디오는 학업을 중단하고[68] 런던 이스트엔드로 보내져 사라의 전 하녀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녀 부부는 그를 돌볼 여유가 없었고, 그는 거리를 배회하거나 구빈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의 유일한 지적 활동은 도서관과 대영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16]
2. 1. 2. 가톨릭 교육과 추가적인 유기
1857년, 일곱 살의 허언은 고모 사라 브레인(Sarah Brenane)의 영구적인 후견 아래 놓이게 되었다. 브레인은 허언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함께 가톨릭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했다.1861년, 허언이 가톨릭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고모는 친척 헨리 허언 몰리뉴(Henry Hearn Molyneux)의 권유로 프랑스 이브토에 있는 가톨릭 교회 학교인 ''Institution Ecclésiastique''에 그를 입학시켰다. 허언은 이 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가톨릭 교육에 대해 "관습적인 지루함과 추함, 더러운 금욕주의, 긴 얼굴, 예수회식 교육, 그리고 어린이들의 뇌를 끔찍하게 왜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평생의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13] 이 시기에 허언은 프랑스어에 능통해졌다.
1863년, 다시 몰리뉴의 제안으로 허언은 더럼 대학교의 전신인 가톨릭 신학교 세인트 커스버트 칼리지, 어쇼(St. Cuthbert's College, Ushaw)에 입학했다. 16세 때인 1865년, 어쇼 재학 중 학교 운동장에서의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쳤다. 이 부상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심한 근시까지 겹쳐 시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15] 이로 인해 평생 외모에 대해 의식하게 되어 사진을 찍을 때는 항상 옆모습으로 왼쪽 눈을 가렸다.[15]
1867년, 고모 브레인의 재정 관리인이었던 헨리 몰리뉴가 파산하면서 고모 역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6] 학비를 댈 수 없게 된 허언은 어쇼 칼리지를 중퇴해야 했다.[68] 이후 허언은 런던 이스트엔드로 보내져 고모의 전 하녀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16] 하녀 부부는 허언을 제대로 돌볼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고, 그는 거리를 배회하거나 구빈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뿌리 없는 방황 생활을 이어갔다.[16] 이 시기 그의 주요 지적 활동은 도서관과 대영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16]
2. 2. 미국 이민과 기자 활동 (1869년 ~ 1890년)
19세가 되던 해인 1869년, 허언은 후견인이었던 헨리 몰리뉴의 결정으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뉴욕을 거쳐 신시내티로 갔으나, 그곳의 친척들은 그를 냉대했고 결국 그는 빈곤 속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한동안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던 중, 영국의 인쇄공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헨리 워킨의 도움으로 여러 임시직을 얻고 그의 서재를 통해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뛰어난 글쓰기 재능 덕분에 허언은 1872년부터 신시내티 데일리 인콰이어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현지 살인 사건에 대한 선정적인 묘사와 신시내티 소외 계층에 대한 감동적인 글로 명성을 얻었다.[20][21] 1874년에는 젊은 화가 헨리 파니(Henry Farny)와 함께 예술, 문학, 풍자를 다루는 주간지 ''예 기글램프즈(Ye Giglampz)''를 창간하기도 했다.[22][23]
같은 해, 허언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자 전 노예였던 알레시아("매티") 폴리와 결혼했으나, 이는 당시 오하이오주의 인종혼합 금지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그의 결혼과 반종교적 견해, 풍자적인 글쓰기 등으로 인해 1875년 ''인콰이어러''에서 해고되었고, 이후 경쟁지인 ''신시내티 커머셜''로 잠시 이직했다.[24][25]
1877년 가을, 신시내티 생활에 환멸을 느낀 허언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여 약 10년간 활동했다. 그는 '''데일리 시티 아이템'''과 '''타임스 데모크랫''' 등에서 기자 및 편집자로 일하며 뉴올리언스의 독특한 크리올 문화, 요리, 루이지애나 부두 등에 대한 글을 활발히 발표했다. 또한 테오필 고티에, 제라르 드 네르발, 아나톨 프랑스, 피에르 로티 등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도 힘썼다.[31]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Gombo zhèbes: 크리올 속담 소사전』(1885), 『라 퀴진 크리올』(1885), 『치타: 라스트 아일랜드의 추억』(1889) 등이 있으며, 하퍼스 위클리 등 전국적인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뉴올리언스의 독특한 문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허언의 뉴올리언스 시기 활동은 그가 이후 일본 문화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2] 그는 1890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2. 2. 1. 신시내티 이민
1869년, 허언을 후원하던 헨리 몰리뉴는 재정적 안정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병약해진 75세의 고모 사라 브레인을 대신해 19세 허언에 대한 재정적 의무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뉴욕으로 가는 편도 티켓을 사주고, 허언에게 몰리뉴의 여동생 부부가 있는 신시내티로 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시내티에 도착한 허언은 친척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몰리뉴의 매부인 토마스 컬리넌은 5USD만 쥐여주고 그를 거리로 내쫓았다. 허언은 훗날 "나는 미국 도시의 포장도로에 돈 한 푼 없이 버려져서 인생을 시작했다"고 회상했다.한동안 허언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마구간이나 창고에서 잠을 자며 잡다한 노동으로 연명했다. 그러던 중 영국의 인쇄공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헨리 워킨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워킨은 허언을 자신의 인쇄소에 고용하고, 여러 임시직을 찾아주었으며, 자신의 서재에서 푸리에, 딕슨, 노이스 등의 유토피아 사상가들의 책을 빌려주었다. 워킨은 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허언에게 '까마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이 별명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허언은 당시 약 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신시내티 공공도서관도 자주 이용했다. 1871년 봄, 헨리 몰리뉴로부터 편지를 통해 사라 브레인의 사망 소식과 몰리뉴가 단독 유언집행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레인이 허언을 연금 수혜자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산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으며 몰리뉴로부터 다시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뛰어난 글쓰기 재능 덕분에 허언은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신시내티 데일리 인콰이어러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신시내티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한 신문사 중 하나에서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그는 현지 살인 사건에 대한 선정적인 묘사로 유명해졌다. 동시에 신시내티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감동적인 글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살인 사건 기사 중 하나인 "Gibbeted"는 2008년 미국 문학 도서관(The Library of America)에서 발행한 미국 실화 범죄 회고록에 선정되기도 했다.[20] 1874년, 그의 "탠야드 살인 사건" 기사가 몇 달 동안 연재된 후, 허언은 신시내티에서 가장 대담한 기자로 인정받았고, ''인콰이어러''는 그의 주급을 10USD에서 25USD로 인상했다.[21]
1874년, 허언은 젊은 화가 헨리 파니(Henry Farny)(훗날 미국 서부의 유명 화가)와 함께 예술, 문학, 풍자를 다루는 8페이지 분량의 주간지 ''예 기글램프즈(Ye Giglampz)''를 창간하여 직접 글을 쓰고 삽화를 그렸다. 신시내티 공공 도서관은 1983년에 총 9호의 복사본을 재인쇄했다.[22] 한 20세기 비평가는 이 잡지를 "그가 편집자로서 수행한 가장 매력적인 지속적인 프로젝트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23]
1874년 6월 14일, 23세의 허언은 20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자 전 노예였던 알레시아("매티") 폴리와 결혼했다. 이는 당시 오하이오주의 인종혼합 금지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1875년 8월, 그의 반종교적 견해에 대한 지역 성직자들의 항의와 ''Ye Giglampz''의 풍자적인 내용에 불만을 품은 지역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엔콰이어러''는 그의 불법 결혼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는 경쟁지인 ''신시내티 커머셜''로 이직했다. ''커머셜''에 그의 기사가 실리면서 판매량이 증가하자 ''엔콰이어러''는 재고용을 제안했지만, 허언은 신문사의 이전 처사에 분노하여 이를 거절했다. 허언과 폴리는 별거했지만, 1877년 이혼하기 전까지 몇 차례 재결합을 시도했다. 폴리는 1880년에 재혼했다.[24][25] ''커머셜''에서 일하는 동안 허언은 전 노예였던 헨리에타 우드가 제기한 중요한 배상 소송을 지지하며 그녀의 편에 섰다.[26]
''커머셜'' 재직 시절, 허언은 유명한 첨탑공 조셉 로드리게즈 웨스턴의 등에 업혀 신시내티에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 경험에 대해 공포와 유머가 뒤섞인 글을 쓰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신시내티의 빈민가(백타운)와 강변 지역(레비)에 대한 글을 연재했는데, 이는 "...남북 전쟁 이후 국경 도시에서 흑인들의 삶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7] 그는 당시 지역 흑인들의 노래 가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림버 짐"이라는 백타운 거주자에게 헌정된 "실로(Shiloh)"라는 노래 등을 기록했다.[28] 또한 도시의 부두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의 노래를 듣고 그중 한 구절을 ''커머셜''에 싣기도 했는데, 비슷한 구절은 훗날 줄리어스 대니얼스(1926)와 토미 맥클레넌(1939)의 "보틀 업 앤 고(Bottle Up and Go)" 녹음에서도 발견된다.[29]
2. 2. 2. 신문 및 문학 작품
뛰어난 작가적 재능 덕분에, 허언은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신시내티 데일리 인콰이어러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신시내티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한 신문사 중 하나에서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그는 현지 살인 사건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로 유명해졌으며, 동시에 신시내티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감동적인 묘사를 통해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 문학 도서관(The Library of America)은 2008년에 발행된 2세기 동안의 미국 실화 범죄 회고전에 그의 살인 사건 기사 중 하나인 "Gibbeted"를 선정했다.[20] 1874년에 그의 살인 사건 기사 중 하나인 "탠야드 살인 사건"이 몇 달 동안 연재된 후, 허언은 신시내티에서 가장 대담한 기자로 명성을 얻었고, ''인콰이어러''는 그의 주급을 10USD에서 25USD로 인상했다.[21]
1874년, 허언과 나중에 미국 서부의 유명한 화가가 된 젊은 헨리 파니(Henry Farny)는 예술, 문학, 풍자를 담은 8페이지 분량의 주간 잡지 ''예 기글램프즈(Ye Giglampz)''를 공동으로 집필, 삽화, 발행했다. 신시내티 공공 도서관은 1983년에 모든 9개 호의 복사본을 재인쇄했다.[22] 이 작품은 20세기 비평가에 의해 "그가 편집자로서 수행한 가장 매력적인 지속적인 프로젝트일 것이다"라고 평가받았다.[23]
1874년 6월 14일, 23세의 허언은 20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자 전 노예였던 알레시아("매티") 폴리와 결혼했는데, 이는 당시 오하이오주의 미국 내 인종혼합 금지법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1875년 8월, 그의 반종교적 견해에 대한 지역 성직자의 항의와 그의 풍자적인 글 ''Ye Giglampz'' 때문에 당황한 지역 정치인들의 압력에 따라, ''엔콰이어러'' 신문은 그의 결혼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는 경쟁 신문인 ''신시내티 커머셜''로 이직했다. ''커머셜''에 그의 기사가 실리고 판매량이 증가하자 ''엔콰이어러''는 그를 다시 고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허언은 신문의 행동에 분노하여 거절했다. 허언과 폴리는 별거했지만 1877년 이혼하기 전 몇 차례 화해를 시도했다. 폴리는 1880년 재혼했다.[24][25] ''커머셜''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전 노예였던 헨리에타 우드의 사건을 지지했는데, 그녀는 주요 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26]
''커머셜''에서 일하는 동안 허언은 유명한 첨탑공 조셉 로드리게즈 웨스턴의 등에 업혀 신시내티에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에 동의했고, 그 경험에 대한 반은 공포에 질리고 반은 유쾌한 글을 썼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허언은 신시내티의 백타운과 레비 지역에 대한 일련의 글을 썼는데, "...남북 전쟁 후 국경 도시에서 흑인들의 삶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자료 중 하나"이다.[27] 그는 또한 당시의 지역 흑인 노래 가사에 대해 썼는데, 여기에는 "림버 짐"이라는 백타운 거주자에게 헌정된 "실로"라는 제목의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28] 게다가 허언은 도시의 부두 앞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의 노래를 듣다가 우연히 들은 한 연을 ''커머셜''에 게재했다. 비슷한 연은 1926년 줄리어스 대니얼스와 1939년 그의 "보틀 업 앤 고" 버전에서 토미 맥클레넌이 노래로 기록했다.[29]

1877년 가을, 매티 폴리와 이혼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던 허언은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의 작품 번역에 몰두하며 신문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시내티에 대해 점점 환멸을 느껴 헨리 워킨에게 편지를 쓰며 "신시내티를 미국 파리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 사람은 그곳을 떠나야 할 때입니다."라고 적었다. 왓킨과 ''신시내티 커머셜''의 발행인 뮤랫 홀스테드의 지원을 받아 허언은 신시내티를 떠나 뉴올리언스로 갔고, 처음에는 ''커머셜''에 "열대 지방의 관문"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다.
허언은 거의 10년 동안 뉴올리언스에 살면서 1878년 6월부터 ''데일리 시티 아이템'' 신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타임스-피카윤''에서도 활동했다. ''아이템''은 4페이지짜리 신문이었기에 허언의 편집 활동은 신문의 성격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아이템''에서 뉴스 편집자로 시작하여 브렛 하트와 에밀 졸라의 서평, ''하퍼스 위클리''와 같은 전국 잡지 기사 요약, 불교와 산스크리트어 작품을 소개하는 사설 등을 포함하도록 확장했다. 편집자로서 허언은 뉴올리언스의 일상생활과 사람들을 묘사한 약 200개의 목판화를 제작하여 발행했고, 이로써 ''아이템''은 남부 최초로 만화를 도입한 신문이 되었으며, 발행 부수가 즉각적으로 증가했다. 허언은 눈에 무리가 와서 6개월 후에 목판화 조각을 중단했다.[30]

1881년 말, 허언은 뉴올리언스 ''타임스-피카윤''에서 편집직을 맡아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신문의 기사를 번역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설과 문화 비평을 작성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제라르 드 네르발, 아나톨 프랑스, 그리고 특히 허언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 영향을 준 피에르 로티 등이 포함된다.[31] 헨리 워킨에게 보낸 허언의 편지를 편집한 밀턴 브로너는 "[뉴올리언스의 허언은 서인도 제도와 일본의 허언의 아버지였습니다."라고 썼고, 이 견해는 노먼 포스터가 지지했다.[32] ''타임스 데모크랫'' 재직 중 허언은 편집자 페이지 베이커와 친분을 쌓았는데, 베이커는 나중에 허언의 문학 경력을 지원했으며, 그들의 서신은 뉴올리언스 로욜라 대학교 특별 소장 및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33]
수집되지 않은 것도 많은 그의 뉴올리언스와 그 주변에 대한 방대한 저술에는 도시의 크리올 인구와 독특한 요리, 프랑스 오페라, 그리고 루이지애나 부두가 포함된다. 허언은 뉴올리언스에 대해 열정적으로 썼지만, 도시의 쇠퇴에 대해서도 "오렌지 꽃으로 장식된 죽은 신부"라고 묘사했다.[34]
''하퍼스 위클리''와 ''스크라이브너스 매거진''과 같은 전국적인 간행물에 대한 허언의 글은 뉴올리언스를 북미의 다른 지역보다 유럽과 카리브해의 문화와 더 유사한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곳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허언의 가장 유명한 루이지애나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Gombo zhèbes: 크리올 속담 소사전'' (1885)
- ''라 퀴진 크리올'' (1885), 뉴올리언스를 요리로 유명하게 만든 주요 요리사와 유명한 크리올 주부들의 요리법 모음집
- ''치타: 라스트 아일랜드의 추억'' (1889), 1856년 라스트 아일랜드 허리케인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1888년 ''하퍼스 매거진''에 처음 발표됨
허언은 ''하퍼스 위클리''에 미국 내 필리핀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된 기사(1883)를 발표했는데, 이 기사는 마닐라 사람들 또는 타갈로그족에 대한 것으로, 그는 루이지애나주 생 말로에 있는 마을 중 한 곳을 방문했었다. 보른 호 남동쪽의 세인트 버나드 패리시에 있는 곳이다.
그가 살았던 당시 허언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도 지역 문화 애호가들을 제외하고는 뉴올리언스에 관한 그의 글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해 쓰인 책은 뉴올리언스의 전 주민 중 루이 암스트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도 많다.[35]
허언의 뉴올리언스 신문 기사에는 장소와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와 정치 부패, 거리 범죄, 폭력, 불관용, 그리고 공중 보건 및 위생 관리의 실패를 비난하는 많은 사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뉴올리언스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곳으로 "발명"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루이지애나 부두 지도자 마리 라보와 존 몽테네트 박사의 부고 기사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허언의 뉴올리언스 글 중 일부는 1924년 ''크리올 스케치즈''[36]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뉴올리언스 발명하기: 라프카디오 허언의 글''[37]에서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원래부터 심한 근시였지만, 말년에는 오른쪽 눈의 시력도 나빠져 높이가 98cm나 되는 책상을 사용하여 종이를 눈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램프 불빛을 밝게 하여 집필했다. 16세 때 부상으로 왼쪽 눈이 실명하여 한쪽 눈만 쓰게 된 후, 뿌옇게 흐려진 왼쪽 눈을 혐오하여 말년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찍을 때는 반드시 얼굴 오른쪽만 카메라를 향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등, 절대로 실명한 왼쪽 눈이 사진에 찍히지 않도록 포즈를 취했다. 매우 글쓰기를 즐겨 했으며, 피서로 집을 비운 동안 남겨둔 아내 세츠에게 매일 편지를 보냈는데, 많은 편지가 남아 있다. 헐른은 일본어를 몰랐고 아내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 편지들은 부부 사이에서만 통하는 특수한 가타카나로 쓰여 있다.
"원고는 아홉 번 고쳐 써야 제대로 된다"고 말할 정도로 글에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설녀」의 마지막 문장 "Never again was she seen"의 세 개의 연속되는 's'는 그의 세심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79] 미국에서 신문 기자로 일할 때 "올드 세미콜론(구식 구두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80] 이는 구두점 하나에도 손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자신의 글에 대한 집착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체류 중 근면이 습관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학교 교육과 함께 14년 동안 13권의 책을 썼다.[81]
tsunami라는 영어 단어를 널리 알린 것은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 이후이지만, 영어로 처음 소개한 것은 허언의 1897년 작품 「살아있는 신」의 영어판 "A Living God"이다.
저작의 원고료에는 집착했지만 저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외국인 교사의 일은 보수가 높았지만, 코이즈미 집에는 아내의 친척들이 많이 함께 살았고, 저술업과 영어 교사로 번 돈은 그들의 생활비에 쓰였다. 돈에는 무심했고, 생활비나 여비로 펑펑 썼다. 아내 세츠의 『회상록』에 따르면, 하쿠운은 "좋다"고 생각한 물건에는 제시된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려 했으며, 유카타 두세 벌이 필요해서 포목점에 가면 점원이 추천하는 유카타를 서른 벌이나 사는 식이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자주 과제를 내주고 작문을 시켜 우수한 학생에게는 자비로 준비한 영어 문학 전집을 선물했다. 그렇게 재산을 써 버렸기 때문에, 하쿠운이 죽었을 당시 코이즈미 집에는 상속 재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언장에 전 재산을 세츠에게 양도한다고 적어두었기 때문에, 니시오쿠보의 집과 서재는 생전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세츠와 가족은 하쿠운의 저작물의 판권과 인세 덕분에 풍족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2. 2. 3. 결혼과 ''인콰이어러'' 해고
1874년 6월 14일, 23세의 허언은 20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자 전 노예였던 Alethea ("Mattie") Foley|알레시아 ("매티") 폴리eng와 결혼했는데, 이는 당시 오하이오주의 인종혼합 금지법 위반이었다. 1875년 8월, 그의 반종교적 견해에 대한 지역 성직자의 항의와 그의 풍자적인 글 ''Ye Giglampz'' 때문에 당황한 지역 정치인들의 압력에 따라, ''신시내티 인콰이어러'' 신문은 그의 불법 결혼을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는 경쟁 신문인 ''신시내티 커머셜''에서 일하게 되었다. ''커머셜''에 그의 기사가 실리고 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인콰이어러''는 그를 다시 고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허언은 신문의 행동에 분노하여 거절했다. 허언과 폴리는 별거했지만 1877년 이혼하기 전 몇 차례 화해를 시도했다. 폴리는 1880년 재혼했다.[24][25]2. 2. 4. 뉴올리언스로 이주
1877년 가을, 허언은 신시내티에 환멸을 느끼고 헨리 왓킨과 '''신시내티 커머셜'''의 발행인 뮤랫 홀스테드의 지원을 받아 뉴올리언스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커머셜'''지에 "열대 지방의 관문"에 대한 기사를 기고했다.
허언은 약 10년간 뉴올리언스에 거주하며, 1878년 6월부터 '''데일리 시티 아이템'''(Daily City Item) 신문에서 활동했다. 처음에는 뉴스 편집자로 시작했으나, 점차 브렛 하트와 에밀 졸라의 서평, 하퍼스와 같은 전국 잡지 기사 요약, 불교 및 산스크리트어 작품 소개 사설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또한, 편집자로서 뉴올리언스의 일상과 인물을 묘사한 약 200점의 목판화를 직접 제작하여 게재했는데, 이는 미국 남부 신문 최초로 만화를 도입한 사례였으며 신문 발행 부수 증가에 기여했다. 그러나 눈의 피로 때문에 6개월 후 목판화 작업은 중단해야 했다.[30]
1881년 말부터는 '''타임스 데모크랫'''(Times-Democrat)에서 편집자로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신문 기사를 번역하고, 자유롭게 사설과 문화 비평을 썼다. 이 시기에도 제라르 드 네르발, 아나톨 프랑스, 그리고 특히 그의 문체에 영향을 준 피에르 로티 등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했다.[31] 당시 편집자였던 페이지 베이커(Page Baker)와 친분을 쌓았으며, 베이커는 이후 허언의 문학 활동을 지원했다.[33] 밀턴 브로너는 헨리 왓킨에게 보낸 허언의 편지를 편집하며 "[뉴올리언스의 허언은 서인도 제도와 일본의 허언의 아버지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32]
허언의 뉴올리언스 관련 글은 도시의 크리올 문화, 독특한 요리, 프랑스 오페라, 루이지애나 부두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뉴올리언스의 이국적인 면모를 열정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도시의 쇠퇴하는 모습을 "오렌지 꽃으로 장식된 죽은 신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34] 그의 신문 기사에는 장소와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뿐 아니라, 정치 부패, 거리 범죄, 폭력, 불관용, 공중 보건 및 위생 문제 등을 비판하는 사설도 다수 포함되었다. 부두교 지도자 마리 라보나 존 몽테네트 박사의 부고 기사처럼 사실에 기반한 글도 남겼다.
하퍼스 위클리나 스크라이브너스 매거진과 같은 전국 단위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 허언은 뉴올리언스가 북미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유럽 및 카리브해 문화와 유사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도시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1883년에는 '''하퍼스 위클리'''에 생 말로의 필리핀계 어민 공동체를 방문하고 미국 내 필리핀인(마닐라맨 또는 타갈로그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루이지애나 관련 저작은 다음과 같다.
- '''Gombo zhèbes: 크리올 속담 소사전''' (1885)
- '''라 퀴진 크리올''' (La Cuisine Creole, 1885): 뉴올리언스 요리를 유명하게 만든 요리사들과 크리올 주부들의 요리법 모음집
- '''치타: 라스트 아일랜드의 추억''' (Chita: A Memory of Last Island, 1889): 1856년 라스트 아일랜드 허리케인을 소재로 한 소설 (1888년 '''하퍼스 먼슬리'''에 처음 발표됨)
생전에 허언은 뉴올리언스 관련 저술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후에는 루이 암스트롱 다음으로 뉴올리언스 출신 인물 중 가장 많은 연구 서적이 출판될 정도로 재조명받았다.[35] 그의 뉴올리언스 시절 글 중 일부는 사후 『크리올 스케치』(Creole Sketches, 1924)[36]나 『뉴올리언스 발명하기: 라프카디오 허언의 글』(Inventing New Orleans: Writings of Lafcadio Hearn)[37] 등의 선집으로 출판되었다.
허언과의 인연으로 뉴올리언스는 그가 후에 정착한 일본의 마쓰에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84]
2. 3.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서의 체류 (1887년 ~ 1889년)
1887년, 하퍼스는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후의 고이즈미 야쿠모)을 특파원으로 서인도 제도에 파견했다.[38][39] 그는 마르티니크 섬에서 2년간 머물며[38][39]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한편,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38][39] 해당 저서는 『Youma, The Story of a West-Indian Slave|유마, 더 스토리 오브 어 웨스트인디언 슬레이브eng』(1889년 출판)와 『Two Years in the French West Indies|투 이어스 인 더 프렌치 웨스트 인디스eng』(1890년 출판)이다.[38][39]2. 4. 일본에서의 삶과 죽음 (1890년 ~ 1904년)
1890년, 신문 특파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허언(Hearn)은 특파원 임무가 끝난 후에도 일본에 남아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베이즐 홀 체임벌린의 도움을 받아 시마네현 마쓰에에 있는 현립 중학교 및 사범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마쓰에에서의 15개월 동안 그는 지역의 유서 깊은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고이즈미 세쓰코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40]이후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 대학)와 고베의 신문사(《고베 크로니클》)를 거쳐 1896년에는 도쿄 제국대학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같은 해, 그는 일본으로 귀화하며 처가의 성인 '고이즈미(小泉|고이즈미일본어)'와 이즈모국의 옛 마쿠라코토바에서 따온 '야쿠모(八雲|야쿠모일본어)'를 합쳐 '고이즈미 야쿠모'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4][65] 야쿠모라는 이름은 그가 한때 거주했던 마쓰에가 속한 이즈모 지방의 시적인 별칭 "팔운이 일어선다(八雲立つ)"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구름이 솟아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41] 그는 종교적으로 그리스 정교, 로마 가톨릭, 스펜서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불교에 귀의했다.[42] 2016년에는 그가 영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 국적 상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97]
야쿠모는 일본의 문화와 전통, 특히 민담과 전설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그는 일본 각지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재구성하여 『미지의 일본을 엿보다』(1894), 『괴담』(1904)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스스로 "반은 동양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하며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표현했으며,[66] 유술과 같은 일본 고유의 정신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43] 그는 일본어가 서툴러 "헬른 씨 말투"라 불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소통했으며, 주로 아내 세쓰의 통역에 의존했다고 전해진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1903년까지 가르쳤고, 1904년에는 와세다 대학에서 잠시 강의하다가 같은 해 도쿄부 도요다마 군에서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4. 1. 일본에서의 말년
1890년, 허언은 신문 특파원으로 일본에 처음 발을 디뎠으나, 특파원 임무는 곧 종료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정서적 안식처와 창작 활동의 가장 큰 영감을 얻게 된다. 베이즐 홀 체임벌린의 도움으로 허언은 1890년 여름, 일본 서해안의 시마네현 마쓰에에 위치한 시마네 현립 중학교 및 사범학교에서 교사직을 얻었다. 마쓰에에서 15개월간 머무는 동안, 그는 지역 사무라이 가문의 딸인 고이즈미 세쓰코와 결혼하여 가즈오(一雄), 이와오(巌), 기요시(清), 스즈코(寿々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40] 1896년 도쿄에서 교직을 수락한 후,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처가의 성을 따라 小泉八雲|고이즈미 야쿠모일본어라는 법적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쿠모'라는 이름은 시적 수식어(마쿠라코토바)인 "약모타쓰(八雲立つ)"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허언 자신이[41] "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으로 번역한 이즈모국을 가리킨다. 그는 종교적으로 그리스 정교, 로마 가톨릭, 이후 스펜서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불교도가 되었다.[42]1891년 말, 허언은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에서 교직을 맡아 3년간 근무하며 『미지의 일본을 엿보다』(1894)를 집필했다. 1894년 10월에는 영어 신문인 《고베 크로니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1896년에는 다시 체임벌린의 도움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임용되어 1903년까지 재직했다. 1904년에는 와세다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술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유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유도를 접한 허언은 마치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듯 경외감에 찬 어조로 그 개념을 사색했다. '서양의 어떤 두뇌가 이 기이한 가르침, 즉 힘으로 힘에 맞서지 않고 공격의 힘을 이용하고, 오로지 적의 힘만으로 적을 쓰러뜨리고, 오로지 적의 노력만으로 적을 정복하는 것을 고안할 수 있었을까? 분명 없다! 서양의 사고는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동양의 사고는 놀라운 곡선과 원으로 이루어진다.'"[43] 그가 제5고등학교에서 가르칠 당시 교장은 유도의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였다.
19세기 후반, 서구인들에게 일본은 여전히 낯선 이국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등을 통해 일본 미학이 소개되면서 서구 사회에서 일본풍(자포니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허언은 일본에 관한 저술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45] 후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일본을 지나치게 이국적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46] 그의 작품은 서구 사회에 산업화 이전의 일본과 메이지 시대 일본의 모습을 처음으로 소개한 중요한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47][48][49]
허언의 작품은 벤 헥트,[50] 존 어스킨, 말콤 카우리,[5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52] 등 여러 작가와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기여했다.[53] 시인 요네 노구치는 허언에 대해 "그의 그리스적 기질과 프랑스 문화는 북쪽의 꽃처럼 서리에 맞았다"고 평가했다.[54]
허언은 일본 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그의 책들은 번역되어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일본 독자들이 허언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서구식 산업화와 국가 건설이라는 격변 속에서 사라져가던, 신비로운 옛 일본의 단편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은 일본인들조차 기록하지 않았던 전설과 민담을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55]
허언은 1904년 도쿄부 도요다마 군에서 사망했다.
=== 주요 저작 ===
- ''미지의 일본을 엿보다'' (1894)
- ''동방에서: 새로운 일본에 대한 몽상과 연구'' (1895) – "여름날의 꿈" 포함
- ''고코로: 일본 내면 세계의 암시와 메아리'' (1896)
- ''붓다의 들판에서 모은 것들: 극동의 손과 영혼에 대한 연구'' (1897)
- ''고양이를 그린 소년'' (1897)
- ''이국적이고 회고적인 것들'' (1898)
- ''일본 요정 이야기'' (1898, 및 속편)
- ''유령의 일본에서'' (1899)
- ''그림자'' (1900)
- ''일본 서정시'' (1900)
- ''일본 잡기'' (1901)
- ''콧토: 일본의 진기한 것들과 여러 가지 거미줄'' (1902)
- ''괴이담: 기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와 연구'' (1904)
- ''일본: 해석의 시도'' (1904)
- ''은하수의 로맨스와 기타 연구 및 이야기'' (1905)
=== 가족 관계 ===
2. 4. 2. 사망

1904년 9월 26일, 허언(Hearn)은 54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 도시마 지역의 조시가야 공원묘지에 있다.[44]
3. 이름
고이즈미 야쿠모의 출생 이름은 '''패트릭 라프카디오 헌'''(Patrick Lafcadio Hearn|패트릭 라프카디오 헌영어)이며, 현대 그리스어로는 '''파트리키오스 레프카지오스 헤른'''(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ερν|파트리키오스 레프카지오스 헤른el)이다. '라프카디오'는 흔히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중간 이름이다. '패트릭'과 '헌'은 아일랜드계 이름이고, '라프카디오'(레프카지오스)는 그의 출생지인 이오니아 제도 연합주의 레프카다 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에서 따온 이름 '패트릭'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 교리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씨 '헌(Hearn)'은 일본에 처음 왔을 때 '헬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시마네현 보통중학교 부임 발령 문서에 'Hearn'을 '헬른'으로 잘못 표기한 것이 퍼졌고, 본인도 이 발음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굳어진 것이다(일반적으로 본인이 "왜가리"(heron)와 발음이 비슷해서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아내인 세쓰코에게는 '헌'이라고 읽도록 가르쳤다. 'Hearn' 또는 'O'Hearn'은 아일랜드 남부에서 비교적 흔한 성씨이다.
1896년(메이지 29년)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서 '''고이즈미 야쿠모'''(小泉 八雲|고이즈미 야쿠모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4] '고이즈미'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아내의 성을 따른 것이다. '야쿠모(八雲)'라는 이름은 그가 한때 거주했던 시마네현 마쓰에시의 옛 지명인 이즈모국과 관련된 와카의 관어(枕詞) "팔운이 일어선다(八雲立つ, 야쿠모 타츠)"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65]
2016년 11월, 아이치가쿠인대학 교수의 연구를 통해 고이즈미 야쿠모가 영국과 일본의 이중 국적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97]
야쿠모는 일본어가 서툴러 스스로 "헬른 씨 말투"라고 부르는 독특하고 단편적인 일본어를 사용했다. 이 말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내 세쓰뿐이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어려워 세쓰가 통역을 해주었다고 그의 차남 이와오가 『父八雲を語る(아버지 야쿠모를 말하다)』에서 회상하고 있다.
4. 평가 및 논쟁
19세기 후반, 일본은 서구인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국적인 나라였다. 특히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 미학이 소개되면서 서구에서 일본풍 스타일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고이즈미 야쿠모(래프카디오 헌)는 일본에 관한 저술을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45]
야쿠모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일부 후대 비평가들은 그가 일본을 이국적으로만 묘사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46] 그러나 그의 작품은 서구 사회에 산업화 이전의 일본과 메이지 시대 일본의 모습을 처음으로 소개한 중요한 기록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47][48][49] 벤 헥트,[50] 존 어스킨, 말콤 카우리,[5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52]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요네 노구치는 야쿠모에 대해 "그의 그리스적 기질과 프랑스 문화는 북쪽의 꽃처럼 서리에 맞았다"고 평하기도 했다.[54]
야쿠모는 일본 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그의 책들은 번역되어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는 그가 서구식 산업화와 국가 건설이라는 격변 속에서 사라져가던 옛 일본의 신비로운 단면들을 포착하여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들이 기록하지 않았던 전설과 민담을 집대성한 그의 책들은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55] 그는 일본의 요괴 이야기를 영어로 정리한 ''괴담''을 출판했으며,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53]
야쿠모의 작품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는 1964년 영화 ''콰이단''에서 그의 이야기 네 편을 각색했다. 핑 충은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999년 "콰이단"과 2002년 "오봉: 달빛과 비의 이야기" 등의 인형극을 만들었다. 1984년에는 그의 후반 생애를 그린 4부작 일본 TV 시리즈 "일본의 잔영"(日本の面影일본어)이 방영되었으며, 그리스계 미국인 배우 조지 차키리스가 야쿠모 역을 맡았다. 이 이야기는 후에 연극으로도 각색되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작가 션 마이클 윌슨은 그의 일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화책 ''얼굴 없는 유령''(2015)과 ''만화 요괴 이야기''(2020)를 출간했다. 비디오 게임 시리즈 동방 프로젝트 역시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등장인물 '야쿠모 유카리'와 '마리벨 허언'은 래프카디오 헌을 직접적으로 참조한 것이다.[61][62]
그의 문학 세계와 사상은 개인적인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머니가 키티라섬 출신의 그리스인이었고 아랍인의 피도 섞여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야쿠모 스스로도 "나에게는 반은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문화, 예술, 전통, 풍속습관 등에 접해도 이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아일랜드, 프랑스, 미국, 서인도 제도, 일본 등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았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든 인간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믿었다. 신시내티에서는 당시 주법을 어기면서까지 혼혈 흑인 여성과 결혼하려 했으며, 훗날 일본인 아내 고이즈미 세쓰와 가정을 이룰 때에도 인종적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다.[66]
한편, 2016년 아이치가쿠인대학의 한 교수는 1896년 당시 영국 영사의 서한을 근거로 야쿠모가 영국과 일본의 이중 국적자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97]
야쿠모는 일본어가 서툴러 "헬른 씨 말투"라고 불리는 독특하고 단편적인 일본어를 사용했다. 그의 아들 이와오는 저서 ''아버지 야쿠모를 말하다''에서 아내 세쓰만이 이 말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역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5. 일화
고이즈미 야쿠모(래프카디오 헌)의 삶에는 그의 성격과 인생관에 영향을 미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특히 젊은 시절 겪었던 사고는 그의 신체적 특징과 외모에 대한 생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세 때 어쇼 칼리지 재학 중 불의의 사고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는데[15], 이는 평생 그에게 심각한 근시와 더불어 외모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15]
5. 1. 신체, 외모
16세 때, 어쇼 칼리지에 재학 중이던 허언은 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쳤다.[15] 이 부상으로 눈에 감염이 생겼고, 더블린과 런던의 전문의와 상담하며 1년 동안 학교를 쉬고 요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왼쪽 눈을 실명했다.[15] 허언은 원래 심한 근시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상으로 시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가까운 것을 볼 때는 확대경을, 멀리 있는 것을 볼 때는 휴대용 망원경을 사용해야 했다.[15] 그는 안경이 시력을 더욱 약화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안경 착용을 피했다.[15] 사고로 인해 왼쪽 눈의 홍채 색깔이 영구적으로 변했고, 이로 인해 허언은 평생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왼쪽 눈을 가리려 했으며, 사진을 찍을 때는 항상 왼쪽 눈이 보이지 않도록 옆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15] 이후 뉴올리언스에서 신문 삽화를 위한 목판화 조각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눈에 무리가 와서 6개월 만에 중단해야 했다.[30]6. 야쿠모를 둘러싼 사람들
- 과심거사(果心居士)
- 나스노 아야코(那須野絢子) - 연구자
7. 가족 및 친족
패트릭 래프카디오 헌(Patrick Lafcadio Hearn)은 1850년 6월 27일,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오니아 제도 연합주의 레프카다 섬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혈통의 영국군 의무장교 찰스 부시 헌(Charles Bush Hearn) 소령이었고,[3][4] 어머니는 그리스 키티라섬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인 로사 안토니아 카시마티(Rosa Antonia Cassimati)였다.[3] 헌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트리키오스 레프카디오스 헌(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ερνel)으로 세례받았으며, '래프카디오'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섬의 이름에서 따왔다.[7] 그는 평생 자신의 그리스 혈통을 자랑스러워했다.[5][6] 헌에게는 1849년에 태어났으나 1850년에 요절한 형 조지 로버트 헌(George Robert Hearn)과,[8] 1854년에 태어나 나중에 미국에서 농업에 종사한 동생 다니엘 제임스 헌(Daniel James Hearn)이 있었다.
헌의 부모는 1849년 11월 25일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결혼했지만,[8] 아버지 찰스는 1850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발령받으면서 가족을 떠났다. 1852년, 헌과 어머니 로사는 더블린에 있는 아버지의 친가로 보내졌으나, 프로테스탄트였던 할머니 엘리자베스 홈즈 헌은 그리스 정교회를 믿고 교육받지 못한 로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로사는 낯선 문화와 종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으며,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고모 사라 홈즈 브레인(Sarah Holmes Brenane)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1853년 아버지가 휴가차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부부 사이는 이미 틀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크림 전쟁에 참전했고, 1854년 어머니 로사는 그리스로 귀국했으며 얼마 후 이혼이 성립되었다. 로사는 그리스로 돌아가 동생 제임스를 낳았고, 이후 이탈리아계 그리스인 조반니 카발리니와 재혼하면서 헌과 제임스의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다. 로사는 헌과 제임스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으며, 1882년 코르푸의 국립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9]
아버지 찰스는 1857년, 어린 시절 연인이었던 알리시아 고슬린(Alicia Goslin)과 재혼하여 세 딸을 두었으나,[10] 헌은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찰스는 1866년 수에즈만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11]
부모와 떨어지게 된 헌은 아버지 쪽의 고모할머니인 사라 브레인의 영구적인 보살핌 아래 자랐다. 그녀는 헌에게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시켰지만, 헌은 오히려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되었고 켈트족의 원시 종교인 드루이드교에 심취하기도 했다.[67]
1890년 일본에 온 헌은 1891년 마쓰에 번의 유서 깊은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고이즈미 세쓰(小泉節子)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처가의 성을 따라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은 고이즈미 가즈오(小泉一雄)이며, 헌은 장남에게 미국식 교육을 시키고자 직접 영어를 가르쳤고, 레오니 길모어(시인 노구치 요네지로의 아내이자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의 어머니)에게 개인 교습을 받게 하기도 했다.
손자로는 에세이스트 고이즈미 도키(小泉時, 2009년 사망), 소이즈미 쥰(小泉閏), 이나가키 아키오(稲垣明男), 타네이치 야에코(種市八重子), 사사키 케이코(佐々木京子)가 있으며, 증손자로는 민속학자이자 시마네현립대학 단기대학부 준교수인 고이즈미 본(小泉凡)이 있다.[93]
=== 고이즈미 가문 ===
아내 세쓰의 가문인 고이즈미 가문(小泉家일본어)은 마쓰에 번의 사무라이 집안이다. 『열사록』(列士録)에 따르면 초대 소이즈미 야우에몬(小泉弥右衛門)은 본래 오미국(현 시가현) 출신으로, 처음에는 사누키국 마루가메 번주 야마자키 하리요리(山崎治頼)를 섬겨 가로(家老)를 지냈다. 그러나 1657년 야마자키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자 에도로 이주하여, 1658년 이즈모국 마쓰에 번의 번조(藩祖)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에게 등용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가문은 대대로 마쓰에 번에서 번두(番頭, 사무라이 50명을 지휘)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다른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지 않는 '구미하즈레'(組外) 격식을 부여받는 조슈(上士) 가문으로 대우받았다. 세쓰의 아버지인 8대 야우에몬까지 이러한 지위를 유지했다. 가록(家禄)은 여러 기록에서 일치하게 300석으로 나타난다.
=== 센케 가문과의 관계 ===
고이즈미 세쓰는 모계를 통해 이즈모 대사의 궁사(宮司)를 세습하는 명문가인 센케 가문(千家家)과도 연결된다. 세쓰의 외할머니 키요(清)는 77대 이즈모쿠니조(出雲国造)이자 이즈모 대사 대궁사(大宮司)였던 센케 타카유키(千家尊之)의 딸이다. 따라서 세쓰는 센케 가문의 혈통을 일부 이어받았다.
8. 계보
패트릭 래프카디오 헌(Patrick Lafcadio Hearn)은 1850년 6월 27일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의 레프카다 섬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영국군 의무장교로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혈통인 찰스 부시 헌(Charles Bush Hearn)이었고,[3][4] 어머니는 그리스 키티라 섬 출신의 로사 카시마티(Rosa Cassimati)였다.[3] 헌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Πατρίκιος Λευκάδιος Χερν|파트리키오스 레프카디오스 헤른el으로 세례를 받았으며,[7] 중간 이름 '래프카디오'는 그가 태어난 섬의 이름에서 따왔다.[7] 헌에게는 1849년 7월 24일에 태어났으나 1850년 8월 17일에 사망한 형 조지 로버트 헌(George Robert Hearn)이 있었다.[8] 또한 1856년 이후에 태어난 남동생 다니엘 제임스 헌(Daniel James Hearn)이 있었다.
헌의 아버지 찰스는 가족의 반대와 경력에 대한 우려로 1850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로 발령받아 떠나면서 사실상 가족을 버렸다. 1852년 헌과 어머니는 더블린의 아버지 가족에게 보내졌으나 냉대를 받았다. 특히 개신교도였던 할머니 엘리자베스 홈즈 헌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이고 문맹이었던 며느리 로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낯선 문화와 종교에 적응하지 못한 로사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시고모할머니 사라 홈즈 브레인(Sarah Holmes Brenane)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1853년 찰스가 잠시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부부 사이는 이미 틀어져 있었다. 찰스는 다시 크림 전쟁에 참전했고, 로사는 1856년경 그리스로 돌아가 셋째 아들 다니엘 제임스 헌을 낳았다. 이후 로사는 조반니 카발리니라는 남자와 재혼하면서 헌과 제임스의 양육권을 포기했고, 평생 자식들을 다시 보지 못한 채 1882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9] 아버지 찰스 역시 1857년 다른 여성과 재혼하여 인도에서 근무하다 1866년 수에즈 만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11] 부모와 헤어진 헌은 1857년부터 고모할머니 사라 브레인의 영구 후견 아래 더블린, 트래모어, 뱅거 등지에서 살며 교육을 받았다.[12]
헌의 배우자인 소이즈미 세쓰(小泉節子)는 마쓰에번(松江藩)의 사무라이 가문인 소이즈미 가(小泉家) 출신이다. 『열사록』(列士録)에 따르면, 소이즈미 가문의 시조인 소이즈미 야우에몬(小泉弥右衛門)은 본래 오미국(현 시가현) 출신으로, 처음에는 사누키국 마루가메번의 번주 야마자키 하리요리(山崎治頼)를 섬겨 가로(家老)를 지냈다. 1657년 야마자키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자 에도(현 도쿄)로 이주했고, 이듬해 이즈모국 마쓰에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에게 등용되었다. 이후 소이즈미 가문은 대대로 마쓰에번에서 봉직하며, 2대 야우에몬부터 세쓰의 아버지인 8대 야우에몬에 이르기까지 모노가시라(者頭, 아시가루 20명 지휘)나 방가시라(番頭, 사무라이 50명 지휘)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가문은 적자가 가독을 상속할 때 다른 사무라이의 지휘를 받지 않는 '구미하즈레(組外)'라는 격식을 부여받았으며, 이는 당시 번 내에서 귀족으로 간주되던 조슈(上士)에게만 주어지는 대우였다. 가문의 가록(家禄)은 여러 기록에 따르면 300석이었다.
또한 세쓰는 모계를 통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의 최고 신관인 이즈모노쿠니노미야쓰코(出雲国造)를 세습하는 센케(千家) 가문과도 연결된다. 세쓰의 할머니 미나토(湊)는 제79대 이즈모 국조인 센케 타카스미(千家尊澄)의 딸 치에(チエ)의 딸이다.
고이즈미 야쿠모와 세쓰 부부 사이의 후손으로는 손자 소이즈미 토키(小泉時, 에세이스트), 소이즈미 쥰(小泉閏), 이나가키 아키오(稲垣明男), 타네이치 야에코(種市八重子), 사사키 케이코(佐々木京子) 등이 있다. 증손자로는 민속학자이자 시마네현립대학 준교수인 소이즈미 폰(小泉凡)이 있다.[93]
9. 기념관 및 자료관 등
마쓰에시에 있는 라프카디오 허언 기념 박물관과 그의 옛 저택은 여전히 도시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또한 시즈오카현 야이즈시에는 2007년 허언을 기리는 작은 박물관(야이즈 고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이 개관했다.
유럽 최초의 라프카디오 허언 박물관은 그의 출생지인 그리스 레프카다에 2014년 7월 4일 라프카디오 허언 역사 센터(Lefcadio Hearn Historical Center영어)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초기 판본, 희귀 서적 및 일본 수집품이 소장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사진, 텍스트, 전시물을 통해 허언의 삶의 중요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의 강연, 저술, 이야기를 통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유럽, 미국, 일본의 문명을 접할 수 있다. 구마모토시, 마쓰에시, 신주쿠, 야이즈시, 도야마 대학, 고이즈미 가족 및 일본과 그리스의 여러 사람들이 센터 설립에 기여했다.[56]
2012년 마쓰에 방문 중 허언의 증손자인 고이즈미 본 교수 부부는 후지타 모토코를 만났다. 후지타의 주선으로 고이즈미 부부는 2013년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2015년 10월 15일부터 2016년 1월 3일까지 더블린 소규모 박물관(The Little Museum of Dublin영어)에서 "고향으로: 패트릭 라프카디오 허언의 열린 마음"(Coming Home: The Open Mind of Patrick Lafcadio Hearn영어) 전시회가 열렸다.[57] 이는 더블린에서 허언을 기념한 첫 행사였으며, 허언 작품 초판본과 라프카디오 허언 기념 박물관 소장품이 전시되었다. 본 고이즈미 교수가 개막식에 참석했다.[58] 또한 후지타의 노력으로 2015년 아일랜드 공화국 워터퍼드주 트라모어에 https://www.lafcadiohearngardens.com/ 라프카디오 허언 일본 정원이 개장했다.
영국 더럼 대학교에는 허언의 이름을 딴 문화 센터가 있으며, 2022년에는 "라프카디오 허언과 벨 에포크 시대의 세계적 상상력"(Lafcadio Hearn and the Global Imagination at the Fin de Siècle영어)이라는 학술 회의가 개최되었다.[59]
허언의 삶과 관련된 도시들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기도 했다. 레프카다와 신주쿠는 1989년에, 뉴올리언스와 마쓰에시는 1994년에 자매 도시가 되었다.[60]
명칭 | 소재지 | 비고 |
---|---|---|
고이즈미 야쿠모 구거 | 시마네현 마쓰에시 | 국가 사적 |
고이즈미 야쿠모 기념관 | 시마네현 마쓰에시 | |
야이즈 고이즈미 야쿠모 기념관 | 시즈오카현 야이즈시 | |
고이즈미 야쿠모 구마모토 구거 |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 |
이케다 기념 미술관 |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시 | 고이즈미 야쿠모 문학 자료실 상설 전시 |
도야마 대학 부속 도서관 중앙 도서관 헬른 문고 | 도야마현 도야마시 | |
효고 노동 도서관 | 효고현 고베시 | 구거 터에 위치. 기념비 및 "고이즈미 야쿠모 코너" 설치. |
고이즈미 야쿠모 구거 터 | 도쿄도 신주쿠구 후쿠쵸 | 세이죠가쿠엔 앞에 비석 위치.[105] |
고이즈미 야쿠모 종언의 땅 | 도쿄도 신주쿠구 오오쿠보 | 오오쿠보 소학교 옆에 비석 위치.[106] |
고이즈미 야쿠모 기념 공원 | 도쿄도 신주쿠구 오오쿠보 | 흉상, 기념 플레이트 등 설치.[107] |
고이즈미 야쿠모 피서의 집 | 아이치현 이누야마시 | 박물관 메이지무라 내 이축 전시. 1층은 "다가시야 야쿠모"로 활용.[102] |
10. 작품
고이즈미 야쿠모(래프카디오 헌)는 다양한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폭넓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신시내티와 뉴올리언스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의 모습과 문화를 글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특히 뉴올리언스에서는 약 10년간 머물며 지역 신문인 '''데일리 시티 아이템'''과 '''타임스 데모크랫'''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크리올 문화, 독특한 요리, 프랑스 오페라, 루이지애나 부두 등 뉴올리언스만의 독특한 색채를 포착하여 글로 남겼으며, 이는 당시 북미 독자들에게 뉴올리언스를 유럽이나 카리브해 문화와 유사한 이국적인 공간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34] 그의 뉴올리언스 관련 저술 중 일부는 사후 『크리올 스케치』(1924) 등으로 출판되었다.[36][37]
이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서의 경험을 담은 저작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테오필 고티에, 아나톨 프랑스, 기 드 모파상 등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했다.[31][53]
1890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에는 일본 문화와 사람들에 깊이 매료되어,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마쓰에, 구마모토, 도쿄 등지에서 교사 및 강사로 활동하며 일본의 민담, 전설, 불교 문화, 일상생활 등을 서양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힘썼다. 그의 일본 관련 저술은 서구 사회에 메이지 시대 일본의 모습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45] 그의 작품은 일본의 신비로운 면모를 강조하여 이국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46] 산업화 이전 일본의 모습과 메이지 시대의 변화를 기록한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47][48][49]
그의 작품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후대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52] 일본 내에서도 그의 저작들은 번역되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는 그가 서구화 과정에서 잊혀가던 일본의 옛 모습과 전설, 민담 등을 기록하여 일본인들에게도 귀중한 문화적 자산을 남겼기 때문이다.[55]
10. 1. 일본 방문 이전의 저작
- 테오필 고티에의 One of Cleopatra's Nights and Other Fantastic Romances|클레오파트라의 밤과 다른 환상적인 로맨스eng 번역 (1882)
- Stray Leaves from Strange Literature: Stories Reconstructed from the Anvari-Soheili, Baitál Pachísí, Mahabharata, Pantchatantra, Gulistan, Talmud, Kalewala, etc.|이상한 문학의 길 잃은 낙엽: 안바리-소헤일리, 바이탈 파치시, 마하바라타, 판찬트라, 굴리스탄, 탈무드, 칼레발라 등에서 재구성된 이야기들eng (1884)
- La Cuisine Creole: A Collection of Culinary Recipes|크레올 요리: 요리법 모음eng (1885)
- "Gombo Zhèbes": Little Dictionary of Creole Proverbs, Selected from Six Creole Dialects|"곰보 제베": 여섯 가지 크레올 방언에서 선택한 크레올 속담 소사전eng (1885)
- Some Chinese Ghosts|몇몇 중국 유령들eng (1887)
- 테오필 고티에의 Tales from Théophile Gautier|테오필 고티에의 이야기eng 번역 (1888)
- Chita: A Memory of Last Island|치타: 라스트 아일랜드의 추억eng (1889)
- 아나톨 프랑스의 The Crime of Sylvestre Bonnard|실베스트르 보나르의 범죄eng 번역 (1890)
- Youma, the Story of a West-Indian Slave|유마, 서인도 제도 노예 이야기eng (1890)
- Two Years in the French West Indies|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에서의 2년eng (1890)
10. 2. 일본 방문 이후의 저작

고이즈미 야쿠모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설화 등을 소재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서양에 일본을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일본의 신비로운 측면을 포착한 글쓰기로 유명하다.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모습'' (Glimpses of Unfamiliar Japan, 1894년) - 돗토리의 이불 이야기, 일본인의 미소 등 수록.
- ''동쪽 나라에서'' (Out of the East, 1895년) - "여름날의 꿈" 포함.
- ''마음'' (Kokoro: Hints and Echoes of Japanese Inner Life, 1896년) - 소설과 에세이 등 15편의 단편집.[108] 기미코, 아미다지의 비구니, 하루(ハル) 등 수록. 이 시기인 1896년(메이지 29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4] 이름 '야쿠모(八雲)'는 그가 한때 거주했던 마쓰에시의 옛 지명인 이즈모국과 관련된 시가 구절 "팔운이 일어선다(八雲立つ)"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5]
- ''살아있는 신'' (A Living God, 1896년) - 이네무라의 불 관련.[109]
- ''부처의 나라의 낙수'' (Gleanings in Buddha-Fields: Studies of Hand and Soul in the Far East, 1897년) - 살아있는 신,[110] 인형의 무덤, 쇼고로(勝五郎)의 전생 등 수록.
- ''고양이를 그린 소년'' (The Boy Who Drew Cats, 1897년) - 일본 옛날이야기를 영어로 소개한 시리즈 중 하나.
- ''이국 풍물과 회상'' (Exotics and Retrospectives, 1898년)
- ''일본 요정 이야기'' (Japanese Fairy Tales, 1898년 및 속편)
- ''혼령의 일본에서'' (In Ghostly Japan, 1899년)
- ''그림자'' (Shadowings, 1900년) - 화해, 시체 위에 걸터앉은 사나이 등 수록.
- ''일본 서정시'' (Japanese Lyrics, 1900년)
- ''일본 잡록'' (A Japanese Miscellany, 1901년) - 지켜진 약속, 깨어진 약속, 과심거사의 이야기, 우메쓰 추베이, 표류 등 수록.
- ''골동품'' (Kottō: Being Japanese Curios, with Sundry Cobwebs, 1902년) - 유령 폭포의 전설, 찻잔 속, 상식 등 수록.
- ''괴담'' (Kwaidan: Stories and Studies of Strange Things, 1904년) - 일본의 요괴 이야기를 영어로 엮은 대표작으로, 귀 없는 호이치의 이야기, 무지나, 목 없는 여자, 눈 여자, 묻힌 비밀, 식인귀 등이 실려 있다.
- ''일본: 하나의 해명'' (Japan: An Attempt at Interpretation, 1904년) -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일본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했다.
- ''은하수의 로맨스 외'' (The Romance of the Milky Way and other studies and stories, 1905년) - 사후 출판.
10. 3. 지지미포(ちりめん本)
하세가와 타케지로가 간행한 일본 옛이야기 시리즈(Japanese Fairy Taleeng) 중 다음 5작품은 고이즈미 야쿠모(래프카디오 헌)가 쓴 것이다.작품명 (한국어) | 작품명 (원어) | 출판 연도 |
---|---|---|
고양이를 그린 소년 | The Boy Who Drew Catseng | 1898년 |
요괴 거미 | The goblin spidereng | 1899년 |
떡을 잃어버린 할머니 | The old woman who lost her dumplingeng | 1902년 |
진친코바카마 | ちんちん小袴jpn | 1903년 |
젊어지는 샘 | The Fountain of Youtheng | 1922년 |
10. 4. 저작집
- ''까마귀로부터의 편지: 헨리 왓킨과 라프카디오 헌의 서신'' (Letters from the Raven: Being the Correspondence of Lafcadio Hearn with Henry Watkin) (1907): ''까마귀로부터의 편지'' (Letters from the Raven), ''숙녀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s to a Lady), ''오지아스 미드윈터의 편지'' (Letters of Ozias Midwinter) 수록
- ''인상파의 일기에서'' (Leaves from the Diary of an Impressionist) (1911, 호턴 미플린)
- ''문학 해석'' (Interpretations of Literature) (1915, 도드, 미드): 도쿄대학교 강의 (1896-1902) 내용 발췌
- ''시에 대한 감상'' (Appreciations of Poetry) (런던: 윌리엄 하이네만, 1916): 도쿄대학교 강의 (1896-1902) 내용 추가 발췌
- ''업보'' (Karma) (1918)
- ''문학과 관련된 독서에 관하여'' (On Reading in Relation to Literature) (1921, 아틀란틱 먼슬리 프레스)
- ''크리올 스케치'' (Creole Sketches) (1924, 호턴 미플린)
- ''셰익스피어 강의'' (Lectures on Shakespeare) (1928, 호쿠세이도 프레스)
- ''곤충 음악가 및 기타 이야기와 스케치'' (Insect-Musicians and Other Stories and Sketches) (1929)
- ''일본의 종교: 신토와 불교'' (Japan's Religions: Shinto and Buddhism) (1966)
- ''책과 습관: 라프카디오 헌의 강의에서'' (Books and Habits; from the Lectures of Lafcadio Hearn) (1968, 도서관을 위한 프레스)
- ''일본에서의 글쓰기: 선집'' (Writings from Japan: An Anthology) (1984, 펭귄 북스)
- ''라프카디오 헌의 미국: 민족지 스케치와 사설'' (Lafcadio Hearn's America: Ethnographic Sketches and Editorials) (2002, 켄터키 대학교 출판부)
-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 국가와 국민에 관한 그의 글 선집'' (Lafcadio Hearn's Japan: An Anthology of His Writings on the Country and Its People) (2007, 튜틀)
- ''기묘하게 기괴한: 1872-1875년 신시내티 인콰이어러에 실린 라프카디오 헌의 선집'' (Whimsically Grotesque: Selected Writings of Lafcadio Hearn in the Cincinnati Enquirer, 1872-1875) (2009, 교비전 북스): 영어와 일본어 이중언어판.
- ''미국 작품'' (American Writings) (2009, 아메리카 도서관)
- ''악몽의 손길'' (Nightmare-Touch) (2010, 타르타루스 프레스)
- ''곤충 문학'' (Insect Literature) (2015, 스완 리버 프레스): 자세한 내용은 문학 속의 곤충 참조
- ''일본 유령 이야기'' (Japanese Ghost Stories). 머레이, 폴 편. (2019, 런던: 펭귄 북스).
- ''라프카디오 헌의 일본 이야기'' (Japanese Tales of Lafcadio Hearn). 안드레이 코드레스쿠 편. (2019, 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 『고이즈미 야쿠모 전집』 (小泉八雲全集일본어) 전 17권, 별권 1권. 제일서방 (라쿠아이 사다사부로, 오타니 마사노부, 타베 류지 역). 1926년-1928년.
- 『고이즈미 야쿠모 작품집』 (小泉八雲作品集일본어) 전 12권[111]. 히라이 테이이치 역. 고분샤. 1964년-1967년. 대부분 신장판(온디맨드판 포함)으로 재간행됨.
- 『라후카디오 하-ㄴ 저작집』 (ラフカディオ・ハーン著作集일본어) 전 15권. 고분샤. 니시와키 준사부로, 모리 료 감수. 1980년-1988년.
- 『첨탑 등반기: 고이즈미 야쿠모 초기 문집 외 4편』 (尖塔登攀記 小泉八雲初期文集 外四篇일본어). 고분샤. 사토 하루후 역. 신판 1996년 6월 ISBN 4-7704-0878-1
- 『고이즈미 야쿠모 작품집』 (小泉八雲作品集일본어) 전 3권. 모리 료 외 역. 가와데 쇼보 신샤. 1977년. 고단샤 학술문고(전 6권)에서 개정판 발행.
11. 래프카디오 헌을 다룬 작품
고이즈미 야쿠모의 삶과 그가 남긴 일본 문화에 대한 글들은 후대의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인형극, 만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고 재창작되었다. 특히 일본의 괴담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삶 자체를 다룬 전기적 작품들도 제작되었다.
11. 1. 드라마
- NHK 드라마 《일본의 면영》: 1984년 3월 3일부터 24일까지 NHK 종합에서 방영되었다. 야마다 타이치가 원작과 각본을 맡았고, 조지 차키리스가 고이즈미 야쿠모 역을 연기했다. (무대판에서는 가자마 모리오가 연기했다.) 이 드라마는 고이즈미 야쿠모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 NHK 연속 텔레비전 소설 《바케바케》: 2025년 후기 방영 예정인 드라마로, 고이즈미 야쿠모의 아내 세쓰를 모델로 한 오리지널 스토리이다.[112][113]
11. 2. 기타
일본의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는 1964년 영화 콰이단에서 허언의 이야기 네 편을 각색했다. 그의 몇몇 이야기는 핑 충이 인형극으로 각색했는데, 1999년 작품인 "콰이단"과 2002년 작품인 "오봉: 달빛과 비의 이야기"(OBON: Tales of Moonlight and Rain일본어)가 있다.구마모토에 거주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작가 션 마이클 윌슨은 허언의 일본 이야기를 바탕으로 두 권의 만화책을 만들었다. 일본 만화가 모리카와 미치루와 협력한 '얼굴 없는 유령'(The Faceless Ghost영어, 2015)과 일본 만화가 타키타 아이와 함께 만든 '만화 요괴 이야기'(Manga Yokai Stories영어, 2020)이다.
비디오 게임 시리즈 동방 프로젝트는 허언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동인 시리즈는 마법 장벽으로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늦은 에도 시대에 머물러 있는 환상의 세계 '겐소쿄'(幻想郷|겐소쿄일본어)를 배경으로 한다.[61] 주요 등장인물 중 야쿠모 유카리와 마리벨 허언은 라프카디오 허언을 직접적으로 참조한 캐릭터이다. 유카리는 겐소쿄와 외부 세계를 나누는 경계를 만드는 데 기여한 강력한 요괴이며, 마리벨 허언은 교토에 거주하며 꿈을 통해 겐소쿄를 볼 수 있는 대학원생(상대 심리학 석사 과정)이다. 동방 프로젝트의 제작자인 ZUN은 두 캐릭터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암시했지만,[62] 그들의 정확한 관계나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야쿠모 유카리는 여러 동방 게임, 서적, 만화에서 주요 역할을 하며 "정말 필요할 때만 행동하는 책략가"로 묘사된다. 마리벨은 'ZUN의 음악 컬렉션' 시리즈 2편부터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사미 렌코와 함께 등장한다.
제목 | 방영 정보 | 원작/각본 | 주연 (허언 역) | 비고 |
---|---|---|---|---|
일본의 잔영 (日本の面影|니혼노 오모카게일본어, :ja:日本の面影) | 1984년 3월 3일 ~ 24일, NHK 종합 | 원작·각본: 야마다 타이치 | 조지 차키리스 (무대판: 가자마 토오) | 라프카디오 허언(고이즈미 야쿠모)을 주인공으로 한 4부작 드라마. 1984년 방영. 나중에 연극으로도 각색됨. |
바케바케 (ばけばけ일본어) | 2025년 후기 예정, 연속 텔레비전 소설 | 오리지널 | - | 허언의 아내 세쓰를 모델로 함.[112][113] |
NHK 인간 강좌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おもかげの国 うつろいの国일본어, 2004년, 작: 마츠오카 마사토시)가 있었다. 이는 내용을 보강하고 재구성하여 2006년 NHK 북스에서 무크지로 발매되었고, 추가 수정 후 2020년에는 '일본이라는 방법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日本という方法 おもかげの国・うつろいの国일본어)라는 제목으로 각카와 소피아 문고에서 발매되었다.
와타나베 쿄우지의 저서 '지나간 세상의 면영'(逝きし世の面影일본어)이 아시 쇼보(1998년)에서 출간되었고, 이후 헤이본샤 라이브러리(2005년)에서 재간되었다.
11. 3. 친족에 의한 전기
(해당 섹션에 대한 정보가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11. 4. 자료
;드라마- NHK 드라마 『일본의 면영』(1984년 3월 3일 ~ 24일, NHK 종합, 원작·각본: 야마다 타이치, 연기: 조지 차키리스(무대판; 가자마 모리오)) - 라프카디오 허언(고이즈미 야쿠모)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 연속 텔레비전 소설 『바케바케』(2025년도 후기 예정) - 허언의 아내 세쓰를 모델로 한 오리지널 텔레비전 드라마[112][113]。
;기타
- NHK 인간 강좌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おもかげの国 うつろいの国일본어)』(2004년, 작: 마츠오카 세이고) - 가필·재구성하여 2006년 NHK 북스에서 무크를 발매, 더욱 가필 수정하여 2020년에는 「일본이라는 방법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日本という方法 おもかげの国・うつろいの国일본어)」(가도카와 소피아 문고)로 발매.
- 『지나간 세상의 면영(逝きし世の面影일본어)』( 아시 쇼보, 1998년, 작: 와타나베 쿄지(헤이본샤 라이브러리, 2005년))
11. 5. 전기
- 드라마
- 일본의 면영 日本の面影|니혼노 오모카게일본어: 1984년 3월 3일부터 24일까지 NHK 종합에서 방영된 드라마이다. 원작과 각본은 야마다 타이치가 맡았으며, 조지 차키리스가 라프카디오 헌(고이즈미 야쿠모) 역을 연기했다. (무대판에서는 가자마 모리오가 연기했다.) 이 작품은 고이즈미 야쿠모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 바케바케 ばけばけ일본어: 2025년 하반기 방영 예정인 연속 TV 소설이다. 고이즈미 야쿠모의 아내 고이즈미 세쓰를 모델로 한 오리지널 드라마이다.[112][113]
- 기타
- NHK 인간 강좌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 おもかげの国 うつろいの国|오모카게노 쿠니 우츠로이노 쿠니일본어: 2004년 마쓰오카 세이고가 집필한 강좌 내용이다. 2006년 내용을 보강하고 재구성하여 NHK 북스에서 무크지로 발매되었고, 2020년에는 추가적인 수정과 보완을 거쳐 『일본이라는 방법 그림자의 나라 덧없는 나라』 日本という方法 おもかげの国・うつろいの国|니혼토 이우 호호 오모카게노 쿠니・우츠로이노 쿠니일본어라는 제목으로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에서 출간되었다.
- 『지나간 세상의 면영』 逝きし世の面影|유키시 요노 오모카게일본어: 와타나베 쿄지가 쓴 책으로, 1998년 아시 쇼보에서 출판되었고, 2005년 헤이본샤 라이브러리에서 재출간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Lafcadio Hearn
https://www.britanni[...]
2021-11-18
[2]
서적
The life and letters of Lafcadio Hearn
Houghton, Mifflin
[3]
서적
Lafcadio Hearn in International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Global Oriental
2007-03-29
[4]
서적
Lafcadio Hearn
http://archive.org/d[...]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912
[5]
서적
A History of Modern Japanese Aesthetic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02-01
[6]
서적
Receptions of Greek and Roman Antiquity in East Asia
https://books.google[...]
BRILL
2019-01-04
[7]
서적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D. Appleton and Co.
[8]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9]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0]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books.google[...]
Knopf
1991
[11]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2]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3]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4]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5]
서적
The life and letters of Lafcadio Hearn
Houghton, Mifflin
[16]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17]
서적
Lafcadio Hearn: American Writings
Library of America
[18]
서적
Legendary Locals of Cincinnati
https://books.google[...]
Arcadia Publishing
2012-01-04
[19]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20]
서적
True Crime: An American Anthology
https://archive.org/[...]
Library of America
[21]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22]
웹사이트
Ye Giglampz
https://digital.cinc[...]
[23]
학술지
"Ye Giglampz" and the Apprenticeship of Lafcadio Hear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2-09-01
[24]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25]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26]
뉴스
She sued her enslaver for reparations and won. Her descendants never knew.
https://www.washingt[...]
2021-02-24
[27]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28]
서적
A Lafcadio Hearn Companion
Greenwood Press
[29]
서적
The Devil's Music
https://archive.org/[...]
Da Capo Press
1997
[30]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31]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32]
서적
American Poetry and Prose
Houghton Mifflin
[33]
웹사이트
Lafcadio Hearn Correspondence Finding Aid
http://library.loyno[...]
[34]
서적
Wandering Ghost: The Odyssey of Lafcadio Hearn
https://archive.org/[...]
Knopf
[35]
뉴스
A chronicle of Creole cuisine
http://www.chron.com[...]
2007-02-14
[36]
서적
Creole Sketche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Co.
[37]
서적
Inventing New Orleans: Writings of Lafcadio Hearn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38]
웹사이트
Two Years in the French West Indies
https://www.wdl.org/[...]
2017-08-22
[39]
서적
Youma: Story of a Western Indian Slave
https://books.google[...]
Harper & Brothers
1890
[40]
서적
Hearn, (Patricio) Lafcadio Carlos (1850–1904)
Oxford University Press
[41]
편지
Lafcadio Hearn's letter to Ellwood Hendrick
1895-09
[42]
서적
American Poetry and Prose
Houghton Mifflin
[43]
서적
The Pyjama Game: A Journey Into Judo
http://thepyjamagame[...]
Aurum Press Ltd
2007
[44]
뉴스
Grave company: Zoshigaya Reien
https://www.japantim[...]
Japan Times
[45]
웹사이트
Lafcadio the Greek: The Man Who Dreamed Japan
https://www.redcircl[...]
2019-09-26
[46]
웹사이트
By the early 1900s so many books had been published 'Explaining Japan' that one author felt compelled to write a book summarising them
https://www.redcircl[...]
2020-12-11
[47]
서적
The True Face of Japan
[48]
간행물
Interpreting Japan's interpreters: the problem of Lafcadio Hearn
https://web.archive.[...]
[49]
간행물
The Critical Reception of Lafcadio Hearn outside Japan
https://web.archive.[...]
[50]
서적
Ben Hecht
Barricade
[51]
서적
The Selected Writings of Lafcadio Hearn
Citadel
[52]
웹사이트
Fantasmas de la China (book review, Página12, 12 October 2008)
https://www.pagina12[...]
2021-02-03
[53]
웹사이트
Lafcadio Hearn
http://www.trussel.c[...]
[54]
서적
Lafcadio Hearn in Japan
Mitchell Kennerley
[55]
뉴스
Honoring a Westerner Who Preserved Japan's Folk Tale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7-02-20
[56]
웹사이트
Lafcadio Hearn Japanese Gardens
http://lafcadiohearn[...]
[57]
웹사이트
Coming Home - Lafcadio Hearn
https://www.littlemu[...]
2015-10-07
[58]
뉴스
Coming home – An Irishman's Diary on Lafcadio Hearn and Dublin
https://www.irishtim[...]
[59]
웹사이트
Lafcadio Hearn and the Global Imagination at the Fin de Siècle
https://www.durham.a[...]
[60]
웹사이트
CLAIR (Council of Local Authorities for International Relations)
http://www.clair.or.[...]
[61]
웹사이트
Gensokyo Timeline
https://en.touhouwik[...]
[62]
웹사이트
Doujin Barrier: The Work Called Touhou and the Fantasy of Game Creation
https://en.touhouwik[...]
[63]
웹사이트
Lafcadio Hearn Bibliography
http://www.trussel.c[...]
[64]
웹사이트
小泉八雲(こいずみ やくも)
https://www.city.bun[...]
[65]
서적
増補新版文学アルバム小泉八雲
恒文社
[66]
서적
小泉八雲集
新潮社
1997-11-20
[67]
웹사이트
The Victorian Garden
https://www.lafcadio[...]
[68]
웹사이트
小泉八雲の生涯
https://www.hearn-mu[...]
小泉八雲記念館
[69]
서적
夢の途上 ラフカディオ・ハーンの生涯【アメリカ編】
集英社
[70]
서적
[71]
서적
[72]
뉴스
出雲 縁結びの旅へ!~古事記編纂1300年 神話の里の物語~
https://www.nhk.or.j[...]
NHK歴史秘話ヒストリア
2012-11-07
[73]
서적
A Fantastic Journey: The Life and Literature of Lafcadio Hearn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74]
뉴스
Rabyah's Last Ride(再録)
https://cdnc.ucr.edu[...]
Los Angels Herald
1895-10-27
[75]
웹사이트
小泉八雲の生涯
https://www.hearn-mu[...]
小泉八雲記念館
2024-12-05
[76]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77]
간행물
チヤムブレン「ラフカデイオ・ハアン」
https://ohta-masakaz[...]
竹柏会
1911-01
[78]
서적
Embracing Defeat
岩波書店
[79]
뉴스
小泉八雲 知られぬ面影
日本経済新聞
2016-04-25
[80]
서적
増補新版文学アルバム小泉八雲
恒文社
[81]
서적
小泉八雲とカミガミの世界
文藝春秋
[82]
웹사이트
小峯墓地の石仏(八雲関連) - 【満遊!くまもと】
http://www.manyou-ku[...]
2016-10-02
[83]
뉴스
熊本日日新聞
1998-05-25
[84]
웹사이트
姉妹提携情報
http://www.clair.or.[...]
自治体国際化協会
2012-10-27
[85]
웹사이트
島根大学附属図書館所蔵 小泉八雲(ラフカディオ・ハーン)自筆書簡 画像とテキスト
https://da.lib.shima[...]
島根大学附属図書館
2024-12-11
[86]
웹사이트
焼津の海と八雲
https://www.city.yai[...]
焼津小泉八雲記念館
2024-10-29
[87]
웹사이트
小泉八雲と鳴く虫コーナー、展示追加しました!
https://www.hitohaku[...]
兵庫県立 人と自然の博物館
2009-08-10
[88]
서적
鳴く虫文化誌―虫聴き名所と虫売り
HSK
2011-09-01
[89]
웹사이트
昆虫シリーズ35 鳴く虫 コオロギ、キリギリスの仲間
http://www.forest-ak[...]
あきた森づくり活動サポートセンター
2022-05-17
[90]
웹사이트
企画展「小泉八雲」『骨董』のお話
https://library.meis[...]
明星大学
2020-12-24
[91]
웹사이트
10月の新刊『草雲雀』刊行に寄せて 小泉八雲が愛した日本人の姿 葉室 麟
https://j-nbooks.jp/[...]
実業之日本社 月刊ジェイ・ノベル2015年11月号
2024-01-19
[92]
웹사이트
虫の詩 かそけきものの声音を愛す
https://www.hearn-mu[...]
小泉八雲記念館
2024-01-19
[93]
웹사이트
島鳥ひとひと 八雲記念館コーディネーター 小泉祥子さん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
2022-10-10
[94]
웹사이트
知られぬ八雲の面影 ~山陰が誇る偉人~
https://saninmanabi.[...]
さんいんまなび
2024-10-29
[95]
웹사이트
【焼津と八雲(2)】小泉八雲と焼津の「食」
https://photo-news.c[...]
焼津小泉八雲記念館
2024-11-06
[96]
웹사이트
目に見える食文化より、見えない怪異に関心 「小泉八雲と日本料理」小泉凡さんに聞く
https://www.sanin-ch[...]
山陰中央新報デジタル
2024-05-09
[97]
뉴스
小泉八雲は「二重国籍」? 新潟・南魚沼市の美術館 未公開書簡で判明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6-11-26
[98]
웹사이트
ハーン雑話
https://www.kumamoto[...]
熊本アイルランド協会
2024-12-04
[99]
웹사이트
館長のひとりごと「関東大震災とミッチェル・マクドナルド~防災の日に寄せて」
https://www.instagra[...]
小泉八雲記念館
2024-12-18
[100]
웹사이트
『八雲と震災との切れぬ縁、また一つ』風呂鞏
https://web.archive.[...]
住吉神社
2024-12-18
[101]
서적
文学アルバム小泉八雲
恒文社
2000-04-30
[102]
웹사이트
小泉八雲避暑の家
https://www.meijimur[...]
博物館明治村
2024-12-04
[103]
웹사이트
【小泉八雲の絶筆(コピー)】
https://x.com/hearnm[...]
小泉八雲記念館
2024-12-18
[104]
웹사이트
本田増次郎自叙伝「ある日本人コスモポリタンの物語」の紹介
https://web.archive.[...]
本田増次郎Web記念館
[105]
웹사이트
小泉八雲旧居跡
https://www.kanko-sh[...]
新宿観光振興協会
2024-02-15
[106]
웹사이트
小泉八雲終焉の地
https://www.kanko-sh[...]
新宿観光振興協会
2024-02-20
[107]
웹사이트
小泉八雲記念公園
https://www.city.shi[...]
新宿区
2023-07-21
[108]
웹아카이브
Kokoro: Hints and Echoes of Japanese Inner Life
https://archive.org/[...]
[109]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
https://news.yahoo.c[...]
2020-08-24
[110]
웹사이트
稲むらの火
https://www.data.jma[...]
気象庁
2021-04-25
[111]
문서
最終巻は『全訳 小泉八雲作品集 第12巻 小泉節子「思い出の記」、小泉一雄「父「八雲」を憶う」』、本書も単行判『小泉八雲』で度々再刊。
[112]
웹사이트
25年度後期の朝ドラ「ばけばけ」制作決定 モデルは小泉八雲の妻・小泉セツ
https://www.cinemato[...]
シネマトゥデイ
2024-06-12
[113]
웹사이트
2025年度後期 連続テレビ小説「ばけばけ」制作決定!
https://www.nhk.jp/g[...]
NHK
2024-06-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