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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가쓰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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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가 가쓰난은 메이지 시대의 언론인이자 사상가로, 일본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융합한 '일본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도쿄 전보'를 시작으로 '일본 신문'을 창간하여 정치적 보수주의자와 정부 관료를 비판하며,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그는 서구 문명 수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주체성과 전통 가치 보존을 강조했으며, 그의 사상은 미노베 다쓰키치에게 영향을 미쳤다. 구가는 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신문 발행을 계속했으며, 그의 사상은 '국민론파' 또는 '국민주의'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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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가쓰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가 가쓰난
본명나카타 미노루
출생일1857년 11월 30일
출생지히로사키, 아오모리현
사망일1907년 9월 2일
사망지가마쿠라, 가나가와현
직업언론인
학력
출신 학교사법성 법학교
활동
정치 운동동아동문회
국민동맹회
가족
나카타 겐사이
나호

2. 생애

구가 가쓰난은 1857년 히로사키번에서 번의 차 담당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번교와 사숙에서 공부한 후, 도오기주쿠와 미야기 사범학교를 거쳤으나, 교장과의 갈등으로 퇴학당했다. 이후 사법성 법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 법률을 공부했지만, 학생 시위로 인해 하라 다카시 등과 함께 자퇴했다.

1890년 동방협회를 설립했고 국가경제회 설립에도 참여했다. 『근시헌법고』, 『자유주의여하』, 『대신론』, 『근시정론고』, 『국민론파』 등을 발표하며, "정치는 여론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글로써 관철했다. 1892년 마사오카 시키가 이웃으로 이사 오자 생계를 지원하고 자신의 신문에 글을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키는 그를 "생애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1895년 삼국 간섭 수용에 대해 도쿄니치니치 신문과 논쟁을 벌였다. 1896년에는 신문 동맹을 결성하고 신문지조례 철폐 운동을 주도하여 조례를 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타루이 도키치・나카무라 다하치로 등이 만든 사회문제연구회에 참여했고, 1898년에는 동아동문회의 간사장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히로사키번의 차 담당관(御茶坊主頭)이었던 나카다 겐사이(中田謙斎)의 아들로 무쓰국 히로사키시에서 태어났다. 장남인지 차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버지의 봉록은 그리 높지 않았다.

1871년경부터 번교 교관이었던 구도 다잔(工藤他山)의 사숙인 사재당(思斉堂)에서 공부했고 1873년부터 도오기주쿠(東奥義塾)에 진학했다. 1874년 미야기 사범학교에 전학 갔으나 구 오무라번사였던 교장[15]의 심기를 거슬러 퇴학당했다. 도쿄 사법성 법학교에 합격하여 프랑스 법률을 배우며 청춘을 보냈다. 1879년 식사 담당 토벌(調理場荒らし) 사건이 있었고 구가는 범인이 아니었지만 항의 차원에서 하라 다카시를 비롯한 후쿠모토 니치난(福本日南)・가토 쓰네타다(加藤恒忠)・고쿠분 세이가이(国分青崖) 등과 함께 자퇴했다.[16]

2. 2. 언론 활동

고향으로 돌아가 신문사에 입사했으나 참방율 위반으로 두 번 벌금을 물었다.[16] 또 홋카이도의 설탕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1881년 상경하여 신설된 농상무성 등의 프랑스어 번역 요청 등으로 연명하다가 1883년 태정관 문서국에서 일했다. 1885년 문서국이 내각 관보국으로 바뀌어 편집과장으로 승진했으나[18] 1888년 퇴직했다.

이 시기 제1차 이토 내각은 유럽화를 지향했고 민간에선 조약개정 반대운동이 국민적 규모로 고조되었다.[19] 다니 다테키, 고무라 주타로, 스기우라 주고 등의 지원으로 ''도쿄 전보''『東京電報』를 창간했으나 다음해 ''일본신문''일본 신문으로 재창간하고 33세의 나이로 주필 겸 사장이 되었다.

창간사는 다음과 같았다.[20]

> 본지는 정당 신문이나 영리 신문이 아닌 독립 신문이다. 지금 일본은 나라를 들어 서구화로 급하게 나아가 마치 식민지가 될 것 같다. 본지도 서구 문명의 훌륭함을 알고 존경한다. 그러나 서구 문명은 독립 일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

잡지 ''일본인''日本人과 함께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개정안은 속임수라 비난하여 명성을 얻었다.

2. 3. '일본 신문'과 일본주의

1888년 4월, 구가 가쓰난은 東京電報|도쿄 전보일본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슷한 이름의 상업 신문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1889년에 日本|일본일본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2] 이 신문은 구가의 사상인 '일본주의(日本主義, Nihon-shugi)'를 위한 발판이었다.[2]

일본주의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본의 주체성과 전통적 가치는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3] 구가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일본 신문'을 탄압했다. 1889년부터 1896년까지 16년간 31회, 총 233일간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4] 특히 제2차 이토 내각 시기에 탄압이 심했다.

2. 4. 말년

1900년 고노에 아쓰마로, 도미타 데쓰노스케 등과 러일전쟁 개전 불가피를 주장했고 국민동맹회의 고문이 되었다.[21] 1901년에는 고노에와 함께 청나라대한제국을 시찰했으며, 다음 해 고노에로부터 신문 자금 지원을 받았다.

1902년 잡지 일본인의 미야케 세쓰레이가 외국에 나가 있어 사설을 대신 작성했다. 일본신문과 잡지 일본인은 그만큼 친밀한 관계였다. 1903년부터 미국과 유럽을 시찰했으며, 귀국 후 요양 중 결핵에 걸렸다. 1905년에는 구가 대신 미야케 세쓰레이가 일본신문의 사설을 썼다. 1906년 건강 악화로 일본신문을 이토 킨료에게 양도하고, 사내 분위기 유지를 위해 구가는 계속 논설을 맡았다. 1907년 9월 2일 51세로 사망했다. 무덤은 소메이 영원에 있다.

3. 사상

구가는 서구 문명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전통과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일본주의'(Nihon-shugi)를 주장했다.[2] 그는 정부의 유럽화 정책을 비판하고, 조약 개정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1885년 구가는 프랑스보수주의 정치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이 기간 동안 구가의 정치 철학은 로쿠메이칸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유럽화 정책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일본사 및 일본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거부를 거부했다.[1]

그가 창간한 『』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가쓰라 다로 등 역대 내각에 대해 메이지 22년(1889년)부터 38년(1905년)까지 총 31회, 233일에 걸쳐 발행 정지를 당했다. 그중에는 메이지 22년(1889년) 8월 7일부터 15일간(구로다 내각), 메이지 24년(1891년) 5월 24일부터 23일간(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발행 정지 처분도 있었다. 가장 집중적으로 탄압받은 것은 메이지 26년(1893년) 말부터 이듬해 정월에 걸쳐 제2차 이토 내각에 압박을 가했을 때였다. 12월 4일(3일간), 12월 27일(7일간), 이듬해 1월 5일(10일간), 2월 10일(5일간)의 불과 2개월 사이에 25일간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 가쓰난은 자신의 일본주의를 국민론파 또는 국민 숭의로 규정하고 근본적 입장으로 삼았다.[14]

3. 1. 일본주의(日本主義)

구가는 자신의 신문 《》을 통해 정치적 보수주의자들과 정부 내 기득권 관료들을 모두 비판했다. 그 결과, 신문은 정부 검열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1889년부터 1896년까지 정부 검열로 인해 신문은 30번 폐쇄되었고, 총 260일 동안 발행이 중단되었다.[4] 구가의 정치, 도덕에 대한 사설은 도쿄 제국대학 법학 교수 미노베 다쓰키치에게 영향을 주어, 일본 천황이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며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부의 "기관"이라는 이론을 개발하게 했다.[5]

구가는 서구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일본 고유의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정부의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 특히 로쿠메이칸으로 대표되는 정책에 비판적이었으며,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일본사 및 일본의 도덕적 가치를 거부했다.[1] 이러한 구가의 사상은 '국민론파', '국민주의'로 불렸다.[2]



만약 한 국가가 강대국들 사이에 서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항상 민족주의("고쿠민슈기")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만약 한 국가의 문화가 다른 국가에 의해 너무 영향을 받아 고유한 특성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독립적인 입지를 잃을 것이다.[3]


3. 2. 정치 사상

구가는 "정치는 여론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3] 동시대 언론인 토리야베 슈테이는 구가를 "고처사(옛날,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살던 선비)의 풍모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의 정치 사상은 중국 유교를 기초로 하고 독일의 국가주의를 더한 것으로, 대신(大臣) 책임론은 중국 간의대부(諫議大夫)의 탄핵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또한, 귀족과 평민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평가했다.[13]

구가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주의 여하(如何)'를 저술하기도 했다.[2]

4. 평가

구가 가쓰난은 미야케 세쓰레이, 도쿠토미 소호 등과 함께 메이지 시대 언론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2] 그는 자신이 창간한 신문 '일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2]

동시대의 언론인 토리야베 슈테이는 구가를 "높은 곳에 머무는 바람같다"고 평하며, 그의 사상을 중국 유학 위에 독일 국가주의적인 사고를 더한 것이라 평가했다. 또한 "그의 대신(장관) 책임론은 중국 대간의 탄핵을 방불케 했으며... 그는 귀족과 평민을 조화시키는 행정적 지식의 소유자였다"라는 평가를 받았다.[23]

구가가 창간한 신문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가쓰라 다로 내각을 거치며 16년간 31회, 총 233일간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특히 제2차 이토 내각 시절에는 강한 탄압을 받았다.[24] 구가는 자신의 일본주의를 '국민론파' 혹은 '국민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는데, 잦은 발행정지는 그 결과 중 하나였다.[14]

5. 저서

제목날짜총서출판사비고
예산론1890년 12월일본총서일본신문사
근시정론고1891년 6월일본총서일본신문사1972년 11월 이와나미 문고에서 재출간[1]
행정시언1891년 9월일본총서일본신문사
예산변망1891년 12월육실(陸実)
원정 및 국제론1893년 8월일본총서일본신문사
국제론1894년 2월일본총서일본신문사증보재판[2]


6. 연구 문헌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1], 『육갈남 - 사람과 사상』[2], 박양신의 『육갈남 정치 인식과 대외론』[3], 마쓰다 고이치로의 『육갈남 자유로이 공론을 대표함』[4] 등이 있다.

저자저서기타
마루야마 마사오『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세카이 (1946.5) 게재[1]
마루야마 마사오『육갈남 - 사람과 사상』주오코론 (1947.2) 게재, 『마루야마 마사오 집 3』, 이와나미 서점 (1965) 수록, 『리쿠 가쓰난과 국민주의』로 개제, 『메이지 사료 연구 총서 4』, 오차노미즈 서방 (1957) 수록[2]
박양신『육갈남 정치 인식과 대외론』이와나미 서점 (2008) 출판[3]
마쓰다 고이치로『육갈남 자유로이 공론을 대표함』미네르바 서방 일본 평전선 (2008) 출판[4]
아리야마 테루오『리쿠 가쓰난』깃카와 고분칸 인물총서 (2007) 출판
혼다 이쓰오『국민・자유・헌정 리쿠 가쓰난의 정치 사상』모쿠토쿠샤 (1994) 출판
고야마 후미오『리쿠 가쓰난 「국민」의 창출』미스즈 서방 (1990) 출판
우에테 미치아리『리쿠 가쓰난 내셔널리즘과 언론인』『일본의 사상가 상』, 아사히 선서 (1962) 소록
우에테 미치아리『리쿠 가쓰난』『일본의 사상가 상』, 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선서 44 (1975) 수록
오쿠보 토시키『리쿠 가쓰난・미야케 세쓰레이・도쿠토미 소호』주오코론 (1955.10) 게재, 『근대 일본의 양심』, 코쇼보 (1959) 수록
야나기다 이즈미『리쿠 가쓰난』지시 통신사 『3대 언론인 집 5』, (1963) 수록
기무라 다케시・야나기다 이즈미・니시다 조주『리쿠 가쓰난과 그 주변』미스즈 112 (1968.9) 게재
마루야마 마사오・니시다 조주・우에테 미치아리『근대 일본과 리쿠 가쓰난』미스즈 112 (1968.9) 게재, 『마루야마 마사오 좌담 7』, 이와나미 서점 (1998) 수록
히라타 고로쿠『리쿠 가쓰난 그 강인한 것』일본 및 일본인 (1969.1, 1969.3, 1969.5) 게재
오자키 다케시로『메이지의 신문인・리쿠 가쓰난』『역사 잔화 제3』, 지시 통신사 (1969) 수록
도야마 시게키『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주의와 리쿠 가쓰난의 역사주의』『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역사학의 발달 상』, 아오키 서점 (1976) 수록
사카이 유키치『리쿠 가쓰난』우치다 겐조 편:『언론은 일본을 움직인다 4』, 고단샤 (1986.6) 수록
마루야마 마사오『리쿠 가쓰난』『근대 일본 사상 대계 4 리쿠 가쓰난 집』, 지쿠마 서방 (1987.3) 수록
도야마 시게키『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주의와 리쿠 가쓰난의 역사주의』(동상) 게재
우에테 미치아리『청일 전쟁 후의 리쿠 가쓰난』(동상) 게재
나카노메 토오루「히로사키에 기증된 리쿠 가쓰난 관계 사료」일본 역사 762, 2011년 11월, 사료 산책
오노 코지『붓 한 자루로 권력과 싸움을 계속한 남자・리쿠 가쓰난』2020년 10월, K&K 프레스 출판
모리 센조『메이지 인물 야화』59페이지, 이와나미 문고 출판


참조

[1] 서적 Modern Japanese Thought
[2] 서적 Dawn to the West: Poetry, Drama, Criticism
[3] 서적 Rethinking Japan's Identity and International Role
[4] 서적 Modern Japanese Thought
[5] 서적 Japan's Orient
[6] 블로그 陸羯南 国民主義を唱えた近代ジャーナリズムの先駆者 https://blog.goo.ne.[...]
[7] 서적 陸羯南全集10
[8] 서적 陸羯南全集10
[9] 문서
[10]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1936 - 1957 みすず書房 1976
[11] 서적 言論とメディア 岩波書店 1990
[12] 문서
[13] 서적 明治人物評論・正 博文館
[14]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1936 - 1957 みすず書房 1976
[15] 블로그 陸羯南 国民主義を唱えた近代ジャーナリズムの先駆者 http://blog.goo.ne.j[...]
[16] 서적 陸羯南全集10
[17] 서적 陸羯南全集10
[18] 문서
[19]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1936 - 1957 みすず書房 1976
[20] 서적 言論とメディア 岩波書店 1990
[21] 문서
[22]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1936 - 1957 みすず書房 1976
[23] 서적 明治人物評論・正 博文館
[24] 서적 戦中と戦後の間 1936 - 1957 みすず書房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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