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 다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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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니 다테키는 1837년 고치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군인, 정치인이다. 유학 후 존왕양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보신 전쟁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육군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874년 대만 원정에 참여했다.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으로 세이난 전쟁에서 구마모토 성을 사수하며 정부군 승리에 기여했다. 1885년 초대 농상무 대신을 역임하며 정계에 입문, 보수 중도주의 정치 노선을 걸었다. 이후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191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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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다테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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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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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谷 干城 (타니 칸조) |
출생일 | 1837년 3월 18일 |
사망일 | 1911년 5월 13일 |
출생지 | 고치현고치시 |
신분 | |
작위 | 자작 |
출신 | 무사(도사번 번사)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
경력 | |
복무 기간 | 1871년–1905년 |
최종 계급 | 육군 중장 |
주요 참전 |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타이완 출병 (1874년) |
수상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타니 쿠마코 |
자녀 | 타니 타케쿠마 아사노 요시코 |
친족 | 타니 반시치(아버지) 타니 오토이지(양자) 타니 기이치(양손) 아사노 타다아쓰(사위) |
정치 경력 | |
직책 | 농상무대신 귀족원 의원 |
임기 시작 | 1885년 12월 22일 (농상무대신) 1890년 7월 10일 (귀족원 의원) |
임기 종료 | 1887년 7월 26일 (농상무대신) 1911년 5월 13일 (귀족원 의원) |
소속 내각 | 제1차 이토 내각 |
선거구 | 귀족원 자작 의원 |
당선 횟수 | 3회 |
2. 생애
에도 시대 말기 토사 번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막부 말기의 격동기를 겪었다. 초기에는 존왕양이 사상을 따랐으나, 해외 시찰 후 개국 및 토막론으로 전환하여 삿초 동맹 추진에 기여했다. 보신 전쟁에서는 이타가키 다이스케 휘하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소장으로 임관,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을 지냈다. 세이난 전쟁 당시 구마모토성을 52일간 방어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고 육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정부 및 군 주류와는 다른 노선을 걸으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군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 투신하여 가쿠슈인 원장, 초대 농상무대신 등을 지냈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귀족원 의원으로서 번벌 정치와 자유민권운동 모두에 비판적인 '보수 반대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강한 국수주의와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 반대, 군비 확장 반대, 영일 동맹 및 러일 전쟁 반대 등 일관된 입장을 보였다. 말년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줄었으나, 1911년 사망 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덴포 8년 2월 12일(1837년 3월 18일), 토사 번에 봉사하는 유학자 타니 카게이(만시치. 녹봉은 24석[7])의 넷째 아들로 토사국 타카오카군 쿠보카와(현재의 고치현 타카오카군 시만토정)에서 태어났다. 통칭은 '''신타로''' 또는 '''모리베'''였고, 호는 '''구마야마'''이다.
세 명의 형이 잇따라 요절하여 사실상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후에 아버지가 토사 번의 조사(小姓組格·무예 지도 사범)로 발탁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백부에게 양육되었으며, 처음에는 차분하지 못한 아이였으나 성장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여 번의 주목을 받았다. 안세이 6년(1859년)에는 에도로 유학하여 야스이 소켄(유학), 아세키 간사이, 시오야 토인(주자학), 와카야마 못도(야마가류 군학)[8][9][10] 등에게서 배웠다.
분큐 원년(1861년)에 토사로 돌아왔고, 이듬해 분큐 2년(1862년)에는 번교인 지도관의 사학 조교(史学助教)로 임명되었다. 귀국 도중 다케치 즈이잔을 만나 존왕양이 사상에 기울게 되었고, 당시 번정을 주도하던 요시다 토요와 대외 정책을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타니는 토요의 개국 방침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인물됨에는 감탄했지만, 토요가 암살당했을 때는 그와의 대립 관계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암살 연루 의혹을 받기도 했다.[11]
토요 암살 이후에는 다케치와 함께 번주 야마우치 토요노리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교토로 가서 여러 번들과 교류하며 양이(攘夷)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에도와 나가사키를 오가며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와도 접촉하여 여러 차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다케치가 실각하고 후에 처형되자, 그의 동지였던 타니 역시 겐지 원년(1864년)에 좌천되어 이듬해 게이오 원년(1865년)에 지도관 조교로 복직될 때까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복직 후에도 초기에는 고토 쇼지로가 추진하는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등 양이 사상을 유지했지만, 점차 서양의 장점을 인정하고 외국인에 대한 시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게이오 2년(1866년) 12월, 번의 명령으로 나가사키시를 시찰하게 되었고, 이듬해 게이오 3년(1867년) 1월 나가사키에서 고토 쇼지로와 사카모토 료마를 만나 그들로부터 양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직후 배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가 서양 열강의 군사력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를 실감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토 쇼지로의 노선을 지지하며 개국 및 도막론자로 전환했다. 귀국 후 에도에서 만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토사 번과 사쓰마 번 간의 동맹(삿토 동맹)을 추진하는 데 동의했다.
2. 2. 막부 말기의 활동
안세이 6년(1859년) 에도로 유학하여 야스이 소켄, 아세키 간사이, 시오야 토인, 와카야마 못도 등에게 배웠다.[8][9][10] 분큐 원년(1861년) 토사로 돌아온 후, 이듬해 분큐 2년(1862년)에는 번교 지도관의 사학 조교가 되었다. 귀국 도중 타케치 즈이잔을 만나 존왕양이 사상에 기울게 되었고, 번정을 주도하던 요시다 토요와 대외 방침을 두고 토론하기도 했다. 타니는 토요의 개국 방침에 반발하면서도 그의 도량에 감복했지만, 토요가 암살된 후에는 그와의 대립 관계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범인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11]
토요 암살 후에는 타케치와 함께 번주 야마우치 토요노리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교토로 상경, 여러 번과 교류하며 양이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에도와 나가사키를 오가며 전 번주 야마우치 요도에게도 의견을 제시했지만, 타케치가 실각하고 후에 처형되자 타니 역시 겐지 원년(1864년)에 좌천되었다. 이듬해 게이오 원년(1865년)에 지도관 조교로 복직할 때까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복직 후에도 고토 쇼지로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등 양이 사상을 유지했으나, 점차 서양 문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게이오 2년(1866년) 12월 나가사키 시찰 명령을 받아 이듬해 3년(1867년) 1월 나가사키에 도착한 타니는 고토나 사카모토 료마와 교류하며 양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직후 배를 타고 건너간 상하이에서 서양 열강의 군사력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를 실감하게 되었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토의 노선에 동조하여 개국 및 토막론자로 변모했다.
1867년 5월 21일,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모리 요시모리와 함께 교토의 고마쓰 기요카도 저택에서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이 도모자네를 만나 삿초 밀약을 맺고 무력 토막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대정봉환을 지향하며 고토 쇼지로가 추진하던 온건 노선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타니는 요도의 신임을 받는 고토가 번의 주도권을 쥐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타니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토사 번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본가에서 동족인 다니 오토이를 양자로 들이고, 그의 형 다니 시게키와 함께 전선에 나섰다. 보신 전쟁에서는 이타가키가 이끄는 진충대의 소군감(후에 대군감으로 승격)으로서 북관동 및 아이즈 전쟁에서 활약했다. 3월에는 신선조에서 이름을 바꾼 고요 친부대를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격파했으며, 에도 개성 후에는 북상하여 닛코 도쇼구에서 구 막부군과 대치, 이마이치의 전투를 치른 뒤 5월에 잠시 토사로 귀환했다.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아이즈로 향했고, 8월 아이즈 성 농성전에 참전한 뒤 11월에 토사로 개선했다. 이러한 전공으로 녹봉 400석이 추가되고 시치야쿠에 임명되었다.
한편, 게이오 3년(1867년) 사카모토 료마가 암살된 오미야 사건 당시, 타니는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빈사 상태의 나카오카 신타로로부터 사건 경위를 들었다. 타니에 따르면 나카오카는 범인이 신선조일 것이며, 범인이 '코나쿠소'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타니는 신선조와 대립했으며, 고료 에지 멤버들과 만나 현장에 남겨진 칼집이 신선조 대원 하라다 사노스케의 것임을 확인했다. 보신 전쟁 중 나가레야마에서 체포된 전 신선조 국장 곤도 이사미의 처우를 두고, 타니는 그가 료마 암살의 원흉이라 여겨 참수를 강력히 주장했다. 사쓰마 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곤도는 참수되었으나, 타니는 배후 관계 조사를 위한 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 불만을 표했다.
1869년에는 참정, 다음 해인 1870년에는 소참사에 임명되어 고치(토사)에서 번정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도쿄에 있던 고토 쇼지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재정 운영 방식에 반발하여 가타오카 겐키치와 함께 독자적으로 번사 정리와 비용 절감을 단행했다가 그들의 분노를 사 번정에서 잠시 배제되기도 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타니는 반대파로부터 신망을 얻었고, 1871년 4월 소참사로 복귀하여 번의 군제 개혁에 힘썼다.
2. 3. 보신 전쟁에서의 활약
막부 말기에 토사번의 존황파로서 이타가키 다이스케(당시 이누이 타이수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1867년 5월 21일,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를 통해 이타가키 다이스케, 모리 요시모리와 함께 교토의 고마쓰 기요카도 저택에서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이 도모자네와 만나 무력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삿초 밀약(삿초 동맹과는 다름)을 맺었다. 이는 대정봉환을 목표로 한 고토 쇼지로의 온건 노선과는 다른 길이었기에, 다니는 고토가 번의 주도권을 잡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번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본가에서 동족인 다니 오토이를 양자로 들이고, 오토이 및 그의 형 다니 시게키와 함께 전선에 나섰다.
보신 전쟁에서 다니는 이타가키가 이끄는 진충대의 소군감(나중에 대군감으로 승격)으로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지략을 발휘하며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3월에는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신선조에서 이름을 바꾼 고요 친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에도 개성까지 잠시 대기하다가 4월에 북상하여 닛코 도쇼구에서 구 막부군과 대치했으며, 이마이치의 전투를 치른 뒤 5월에 잠시 도사로 귀환했다. 다시 전선에 복귀한 후에는 아이즈로 진격하여 8월 아이즈 성 농성전에 참여했으며, 11월에 전쟁이 끝나자 도사로 개선했다. 이러한 전공으로 녹봉 400석이 더해지고 시치야쿠(執政)에 임명되었다.
2.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군 경력
막부 말기에는 토사번의 존황파로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측근이 되어 사쓰마번의 고마쓰 다테와키,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사쓰-토 토바쓰 밀약을 체결했다. 1868년부터 시작된 보신 전쟁에서는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고슈-카츠누마 전투, 아이즈 전투 등 최전선에서 싸우며 군사적 재능과 지략을 발휘했다.
1869년 소참의(少参事)로 임명되어 3년간 도사에 머물며 번 정부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도쿄에 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나 고토 쇼지로와 달리, 도쿄 주재 도사 대표단의 낭비적인 지출을 강하게 비판하고 비용 절감 조치를 시행했다. 이로 인해 고토 쇼지로의 분노를 사 해임되었으나, 1871년 4월 복직되었다. 그러나 번의 재정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 이후, 병부권대승으로 신정부에 출사했다. 이듬해인 1872년(메이지 5년) 일본 제국 육군이 창설되자 육군재판장으로 전임되어 육군 소장 계급을 받았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구마모토 진대 사령장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발포된 징병령을 둘러싸고 반대파인 기리노 도시아키가 사임하자, 찬성파이자 징병령 작성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다니를 임명한 배경이 있었다. 다니는 군의 근대화에 힘써 부대에 프랑스식 훈련을 도입했다. 그러나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하야하자 고치 출신 군인 다수가 함께 하야했고, 구마모토 진대 내에서 방화 소동이나 부대 폭동이 일어나는 등 동요가 발생하며 이타가키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1874년(메이지 7년) 2월 사가의 난이 발발하자 정부로부터 진압 명령을 받았다. 이와무라 다카토시 현령 호위를 위해 파견한 부하 야마카와 히로시가 이끄는 제11대대가 사가성에서 불평 사족에게 포위되어 약 300명 중 절반 가까이를 잃는 타격을 입었으나, 오사카 및 도쿄 진대의 증원으로 난 자체는 진압되었다.
같은 해 5월부터 12월까지 타이완 출병에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의 지휘 아래 해군 소장 아카마쓰 노리요시와 함께 참군(参軍)으로 참전했다.[12] 당시 구마모토 진대 사령장관에서 참군으로 직책이 변경되었으며, 원정에 참여한 미국인 외교 고문 중 한 명인 해군 중령 더글러스 캐슬은 사적인 편지에서 그를 "작은 바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 출병 후 정부 방침에 불만을 품고 고치현에 칩거했으며, 동향의 사사키 다카유키로부터 복귀를 재촉받았다.
1876년(메이지 9년) 10월 신푸렌의 난에서 불평 사족에게 살해된 다네다 마사아키의 후임으로, 11월 다시 구마모토 진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가바야마 스케노리가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와 가와카미 소로쿠가 참모로 그를 보좌했다. 이 인사는 그의 조상 중에 야마자키 안사이 문하의 대학자 타니 진잔이 있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다니라면 사쓰마군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의 공격으로부터 구마모토성을 52일간 사수하며 정부군의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사쓰마군 측에서는 반정부파로 여겨졌던 다니와 가바야마가 자신들에게 합류할 것을 기대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쓰마군과의 대결을 선택하고 농성을 감행했다. 2월 19일 구마모토성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천수각 등 주요 시설을 잃고 병량이 부족해졌으며, 22일부터 시작된 사쓰마군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참모장 가바야마 스케노리가 총격으로 부상하고 요쿠라 도모자네가 전사하는 등 고전을 겪었지만, 사쓰마군의 공격이 무계획적이고 분산된 반면, 진대 병력은 대포와 총기를 활용한 화력 집중으로 응전하여 성내 진입을 막아냈다. 사쓰마군은 다음 날인 23일에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강습을 포기하고 24일부터 포위로 전환했다.
포위 중에도 공방은 계속되었고, 3월 들어 북쪽에서 정부군 구원 부대가 접근하고 해로를 통해 별동대(충배군)가 남쪽 야쓰시로에 상륙하여 구마모토성으로 다가왔다. 이를 기회로 본 다니는 가바야마, 고다마 등과 상의 후 4월 8일 오쿠 야스카타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를 성 밖으로 보내 외부와의 연락 및 충배군과의 합류에 성공했다. 3일 후인 11일 다니는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지만, 14일 구면이었던 야마카와 히로시가 충배군 일부를 이끌고 구마모토성에 입성하면서 포위가 풀렸다. 농성 후에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휘 아래 규슈 각지를 전전하며 싸웠고, 9월 24일 시로야마 전투에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세이난 전쟁에서의 승리로 다니의 명성은 크게 높아져 정부와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얻고 군부 내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세이난 전쟁의 공적으로 1878년(메이지 11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육군사관학교장과 육군 도야마 학교장을 겸임했다. 그러나 1881년(메이지 14년) 3월, 앞서 타이완 출병에서 전사하거나 병사한 장병들의 유해를 일부 지방 관리가 함부로 다룬 사실을 정부와 육군 수뇌부가 방치했다는 것을 알고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메이지 천황은 다니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여 사임을 만류하고 사사키 다카유키를 통해 귀향을 늦추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설득했으나, 결국 6월 천황은 다니의 육군 중장 직위는 유지시키되 육군사관학교장과 육군 도야마 학교장 직위는 면직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같은 해, 고향 고치에서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자 급진적인 민권파 정치 단체 릿시샤에 대항하여 사사키 다카유키와 함께 온건한 정치 운동을 표방하는 '중립사(中立社)'를 창립했으나, 릿시샤의 기세에 밀려 1878년 가을 해산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1881년 7월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정부 내 동요가 확산되자 소가 유쥰, 토리오 코야타, 미우라 고로 등 3명의 군인과 함께 '사장군파(四将軍派)'를 결성하고 사사키 다카유키와 함께 불하 반대를 표명했다. 9월에는 연명으로 국회 개설 건백서를 제출했고, 10월에는 사사키 및 동지인 모토다 나가자네, 히지카타 히사모토 등과 결탁하여 '중정당(中正党)'도 결성하는 등 현역 군인이면서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모습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위험하게 비춰졌다.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부에서 추방되어 사태가 수습되고 사사키 다카유키가 정부에 포섭되면서 중정당의 활동도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1882년(메이지 15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군인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는 군인 칙유를 제정하면서 사장군파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비록 비직(非職) 상태였지만 정부는 여러 차례 그의 복귀를 원했고, 1884년(메이지 17년) 5월 가쿠슈인 원장으로 복귀했다. 이전부터 화족 교육을 구상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의뢰를 받아 황실의 번병(藩屏, 울타리)이 될 화족 자제 교육을 추진하며 군인 양성에 힘썼다. 또한 장래의 의회 정치를 염두에 두고 화족이 천황에게 충성하면서도 독립된 세력으로서 의회에서 공정하게 활동할 인재를 육성하고자 군인뿐 아니라 정치, 외교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했다. 화족 유지 청년회 설립도 이러한 구상의 일환이었다. 다니가 가쿠슈인을 떠난 후에도 이 단체는 '화족 청년회'로 개명하고 '화족 동방회'도 결성하며 의회 활동에 대비했다. 이러한 공적이 인정되어 7월 화족령 제정 시 자작에 서임되었고, 이듬해 1885년(메이지 18년) 내각제 창설과 함께 제1차 이토 내각의 초대 농상무대신에 취임하며 정치가로 변신했다. 다만, 1889년(메이지 22년) 예비역으로 편입될 때까지 현역 군인 신분은 유지했다.
한편, 사장군파는 육군 내 주류인 사쓰마·조슈 번벌에 반발하며 군 인사나 조직 개편 등에 간섭하며 활동을 재개했고, 다니 역시 사장군파의 일원으로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 가쓰라 타로, 가와카미 소로쿠 등 주류파와 군사 방침 및 외교 노선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다니의 농상무대신 취임은 이토 히로부미가 사장군파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와 천황이 다니의 입각을 바랐던 사정이 맞물려 성사된 것이었다.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치가들은 군 주류파의 군비 확장과 청나라에 대한 강경 자세에 반대하며 미우라 고로의 군축안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군 분규'라 불리는 1886년(메이지 19년)의 대립 당시 다니는 유럽 외유 중이어서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주로 미우라 고로와 오야마 이와오의 주도권 다툼으로 전개되었다. 이 분규에서 승리한 오야마 이와오에 의해 사장군파는 군에서 밀려났고, 지지 기반이었던 군사 연구 단체 월요회도 1889년 해산되었다. 다니는 좌천되거나 파면된 미우라 고로나 소가 유쥰과 달리 보복성 인사는 당하지 않았지만, 육군의 정치 관여에 부정적이었던 고다마 겐타로가 육군대학교 교장이 되면서 교육을 통해 사장군파의 영향력은 군 내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이후 다니는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2. 5. 정치 활동
서남 전쟁 이후 육군 요직을 거친 다니 다테키는 1881년 고향 고치로 돌아와 이타가키의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하는 보수 정당 추세이토 창립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가쿠슈인 원장(1884년), 제1차 이토 내각의 초대 농상무대신(1885년) 등을 역임했으며, 1884년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다니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확고한 반제국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였다. 그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 운동 모두에 비판적인 '보수 반대파'의 주요 인물로서, 천황 중심의 국가관을 가졌으나 정당 정치의 폐해를 경계하는 동시에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지지했다. 농상무대신 시절에는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의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포함된 외국인 판사 임용 등에 반대하며 사임하는 등, 국익과 국가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의 외교 및 국방 정책관은 반제국주의와 일본 고유의 국가 본질(고쿠타이) 수호 신념에 기반했다. 젊은 시절 1874년 대만 탐험 당시의 팽창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2], 1880년대 이후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군비 확장 노선에 반대하며 방어 목적의 소규모 군대를 주장했다. 그는 미우라 고로, 토리오 코야타, 소가 스케노리 장군과 함께 1800년대의 프로이센 모델 군사 개혁에 저항한 "4명의 장군 그룹"의 공동 창립자였다.[3] 청일 전쟁 이후 동료들이 영토 확장에 열광할 때도 그는 대륙 진출에 확고히 반대했다. 동시에 불평등 조약 개정 투쟁에서 외국인에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전통, 국가 본질을 지키기 위해 강대국과의 동맹을 삼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독특한 반제국주의적 입장은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로부터 "풀밭 위의 외로운 꽃"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4] 또한 유럽 방문(1886-1887)을 통해 서구화의 폐해를 목격하고 국수주의 및 농본주의 성향을 강화했다.
1890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된 후에는 특정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곤와회 등에 속해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지조(토지세) 증세, 군비 확장, 영일 동맹, 러일 전쟁 등에 일관되게 반대 목소리를 냈으며, 아시오 광독 사건 조사나 미야코지마의 인두세 폐지 운동 지원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의 연구회 등에 밀려 귀족원 내에서 영향력을 잃어갔고, 특히 러일 전쟁 반대는 그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언론의 비판을 받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1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활동했다.
2. 5. 1. 정계 입문과 초기 활동
서남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1878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여 육군사관학교장과 육군 토야마 학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1881년 3월, 타이완 출병 당시 전사하거나 병사한 장병의 유해를 일부 지방 관리가 함부로 다룬 사실을 정부와 육군 수뇌부가 방치한 것에 항의하며 사임하고자 했다. 메이지 천황은 다니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여 사임을 만류하려 했고, 사사키 다카유키를 통해 귀향을 늦추고 충성을 다하도록 설득했다. 이 문제는 같은 해 6월, 천황이 다니의 육군 중장 직위는 유지시키되 육군사관학교장과 육군 토야마 학교장에서는 면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고향인 고치현에서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자 급진적인 민권파 정치 단체인 릿시샤에 대항하기 위해 사사키와 함께 온건 노선의 정치 운동을 표방하는 중립사를 창립했지만, 릿시샤의 기세에 밀려 1878년 가을 해체되었다.1881년 고치로 돌아온 다니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민권운동에 맞서기 위해 창설된 보수 정당 추세이토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같은 해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정부에 동요가 일자 소가 유쥰, 토리오 코야타, 미우라 고로와 함께 '사장군파'를 결성하고 사사키와 함께 불하 반대를 표명했다. 9월에는 연명으로 국회 개설 건백서를 제출했고, 10월에는 사사키, 모토다 나가자네, 히지카타 히사모토 등과 중정당을 결성하는 등 현역 군인이면서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위험하게 비춰졌고,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부에서 축출되고 사태가 수습되자 중정당의 활동은 불분명해졌다. 1882년 야마가타가 군인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는 군인 칙유를 제정하면서 사장군파의 활동은 더욱 억제되었다.
비록 한직에 있었으나 정부는 다니의 복귀를 원했고, 1884년 5월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화족 교육 개혁을 다니에게 의뢰했고, 다니는 황실의 번병(藩屛, 울타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화족 자제 교육을 추진하며 군인 양성에 힘썼다. 또한 장래의 의회 정치에도 대비하여, 화족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독립된 세력으로서 의회에서 공정하게 활동할 인재 육성을 목표로 삼았다. 화족 유지 청년회 설립도 이러한 구상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제정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1885년 내각 제도가 창설되자 제1차 이토 내각의 초대 농상무 대신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1889년 예비역에 편입될 때까지 현역 군인 신분은 유지했다.
한편, 육군 내에서는 사쓰마와 조슈 번벌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 반발한 사장군파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다니 역시 사장군파의 일원으로서 야마가타, 오야마 이와오, 가쓰라 타로, 가와카미 소로쿠 등 주류파와 군 인사, 조직, 군사 방침 및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다니의 농상무상 기용은 사장군파의 관심을 얻으려는 이토의 의도와 천황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치가들은 주류파의 군비 확장과 청나라에 대한 강경 자세에 반대하며 미우라의 군축안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1886년 육군 내 주도권 다툼인 '육군 분규'가 벌어졌을 때 다니는 유럽 외유 중이어서 직접 관여하지 못했고, 이 분규에서 승리한 오야마에 의해 사장군파는 군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지지 기반이었던 군사 연구 단체 월요회도 1889년에 해산되었다. 다니는 좌천·파면된 미우라, 소가와 달리 보복 인사는 없었지만, 육군의 정치 관여에 부정적이었던 고다마가 육군대학교 교장이 되면서 사장군파의 영향력은 군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이후 다니는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다니의 정치적 견해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확고한 반제국주의가 혼합된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퇴역 장군, 정치인, 귀족들로 구성되어 메이지 정부와 민권 운동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보수 반대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국가를 천황과 국민 간의 신비로운 연합체로 보았으며, 정부가 과두 정치인이나 정당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다니는 헌법 개정 논의에서 천황을 행정, 사법, 입법 3부 간의 조정자로 격상시키고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정당의 "이기심"은 비판했지만, 언론과 집회의 자유는 지지했다.
1886년 3월부터 1887년 6월까지 1년 3개월간의 유럽 여행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론에서는 추방된 이집트의 군인 혁명가 아흐마드 오라비를 만나 외채를 계기로 영국에 잠식된 이집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일본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스위스와 그리스에서는 국민 정치가 잘 이루어져 자치가 확립되고 열강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는 모습에 이상을 발견했다. 여러 나라의 실정을 보면서 서양 문명의 과도한 도입으로 인한 부채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열강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고, 일본의 유화주의 외교 정책에 부정적인 국수주의자로 변모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강의를 듣고 자작농 보호를 중시하는 농본사상을 받아들여, 귀국 후에는 의회를 통해 국민의 자치를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변해갔다.
귀국 후, 그는 각료였음에도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추진하던 조약 개정안, 특히 외국인 사법관 임용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의견서'를 1887년 7월 3일 내각에 제출하여 조약 개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내각 내에서 큰 논란이 벌어졌고, 이노우에 및 이토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7월 26일 농상무대신직을 사임했다.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노우에도 9월 17일 사임했고, 조약 개정 시도는 저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다니는 민권파와 민중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를 부담스러워 9월에 고치로 귀향하여 정계 복귀를 거부했다. 1888년 리쿠 가쿠난이 주재하는 신문 '도쿄 전보'(후에 '일본'으로 개칭)를 지원하고 천황의 요청으로 잠시 학습원 어용 담당관을 맡기도 했으나 곧 사직하고 고치로 돌아갔다. 민권파의 참여 요청에도 계속 거부했다. 한편, 대동 단결 운동은 1889년 2월 다니와 악연이 있는 고토가 구로다 내각에 입각하면서 분열되었다. 다니는 미우라 고로, 아사노 나가야스 등과 함께 8월에 '일본 클럽'을 설립하여 구로다 내각의 외상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 개정안에도 반대하며 정치 결사화를 꾀했지만, 10월 개정 무기한 연기와 내부 대립으로 일본 클럽은 해산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양자 오토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겪었으며, 8월 26일에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1890년 7월, 귀족원 의원 선거에서 선출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1월 29일 제국 의회가 개원하자 그는 곤와회에 속해 활동하며, 학습원에서 내걸었던 천황의 울타리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정당과 정부로부터 자립하여 지조 증징에 반대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천황과 모리로부터 추밀원이나 궁중 진출을 기대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정계에서 황실을 지키기로 결단했다. 그의 정치 사상은 황실 숭경, 중의원(정당) 및 정부로부터의 독립 및 감시, 정당·정부와 관계없이 정책을 심사하여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면 찬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는 시시비비주의, 국민 이익을 중시하는 국가주의를 제창했다. 이러한 사상은 귀족원의 다수 유력자들이 공유하는 목표였으며, 다니는 삼요회의 영수 고노에 아쓰마로와 손잡고 정쟁에 맞서 나갔다.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시기인 1891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다니는 심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첫 의회에서 예산을 성립시키려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예산안은 통과되었다. 다음 제1차 마쓰카타 내각 시기에는 1891년 12월, 재정 절감을 통해 마련한 재원을 지조 경감이 아닌 국방 충실에 사용해야 한다는 '근검 상무의 건의안'을 제출하며 자신의 그룹(근검 상무 연)을 형성하고 곤와회의 결성 기반을 마련했다. 건의안은 친정부파인 연구회의 저항으로 부결되었지만, 고노에 등 삼요회와의 연계와 그룹 형성이 진행되어 곤와회가 결성되었고, 귀족원은 점차 친정부파의 연구회와 반정부파의 곤와회·삼요회로 양분되어 갔다. 곤와회는 1892년경 결성된 것으로 보이나(이설 있음), 조직적 통일성은 약했다.
내각과의 대립 자세는 계속되었다. 1892년 5월, 마쓰카타 내각이 제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행한 선거 간섭에 항의하는 건의안을 제출했고, 이는 중의원의 민당이 제출한 결의안과 함께 양원에서 불신임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각의 총사퇴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8월에 성립된 제2차 이토 내각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강경 자세를 늦추고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1893년 조약 개정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대외 강경 노선으로 돌아서 정부와 대립했다. 그는 중의원 해산을 비판하고 민당을 옹호하며 이토 내각에 항의하였다. 이듬해 1894년 6월의 재차 해산에도 항의했지만, 7월에 영일 통상 항해 조약이 성립되어 조약 개정이 성공했을 때는 명확한 반대는 하지 않았다.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니는 거국일치 입장에서 정부에 협력하여 예산 통과에 힘썼다. 그러나 1895년 종전 후에는 다시 반정부 입장으로 돌아서 삼국 간섭과 전후 재정 운영을 비판하였다. 조선 공사로 미우라 고로를 추천했으나, 그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경악했다. 그는 전후 군비 확장 예산에 반대했지만, 자유당과 연대한 내각 및 연구회의 찬성으로 예산안은 귀족원을 통과했다. 1896년에 성립된 제2차 마쓰카타 내각(마쓰카타-오쿠마 연립 정권)에서도 군비 확장 예산에 반대했지만, 고노에 아쓰마로가 마쓰카타의 추천으로 귀족원 의장에 취임했고, 다니도 마쓰카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대립을 피하고 예산을 통과시켰다. 대신 원래 주장했던 1897년의 신문지 조례 개정은 통과되었고, 금본위제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화폐법 공포에 힘써 곤와회와 다니의 위신은 높아졌다.
다니의 외교 정책관은 반제국주의와 일본 고유의 고쿠타이(국체) 수호 신념이 결합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1874년 대만 탐험 당시에는 중국 남부 점령을 주장하기도 했으나[2], 188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비 확장 노선에 반대하며 일본 제국 육군을 소규모 방어 병력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우라 고로, 토리오 코야타, 소가 스케노리 장군과 함께 1800년대의 프로이센 모델 군사 개혁에 저항한 "4명의 장군 그룹"의 공동 창립자였다.[3] 청일 전쟁 이후 동료들이 영토 확장에 열광할 때도 그는 대륙 진출에 확고히 반대했다. 동시에 불평등 조약 개정 투쟁에서 외국인에게 어떤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전통, 국가 본질을 지키기 위해 강대국과의 동맹을 삼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독특한 반제국주의적 입장은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로부터 "풀밭 위의 외로운 꽃"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4] 그는 토지세 부과를 강력히 반대하고 인두세 폐지를 옹호했으며, 환경 재앙과 관련된 소송과 스캔들로 인해 조사단을 아시오 구리 광산에 파견했으며, 야마가타와 일본군 확장을 위한 그의 노력에 계속해서 방해가 되었다. 그는 영일 동맹에 강력히 반대했고, 정치적 관점과 재정적 이유로 러일 전쟁에도 반대했다.
2. 5. 2. 보수 중도주의 정치 노선
1881년 고향 고치로 돌아온 다니 다테키는 이타가키의 자유민권운동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보수 정당 추세이토 창립에 참여했다. 이후 1884년에는 가쿠슈인 원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7일,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다니의 정치적 견해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보수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확고한 반제국주의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퇴역 장성, 정치인, 귀족들로 구성되어 메이지 정부와 민권 운동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보수 반대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천황과 국민 간의 신비로운 결합체이며, 정부는 과두 정부나 정당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다니는 헌법 개정안을 통해 천황을 행정, 사법, 입법 3부 간의 조정자로 격상시키고 견제와 균형 원리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정당의 '이기심'을 비판하면서도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지지했다.
1885년, 다니는 초대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초대 농상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의 불평등 조약 개정에 대한 소극적인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곧 사임했다. 그의 외교 정책관은 반제국주의와 일본 고유의 국가 본질(고쿠타이)에 대한 신념이 결합된 것이었다. 젊은 시절 1874년 대만 탐험 당시에는 중국 남부 점령을 주장하기도 했으나[2], 1880년대에는 입장을 바꾸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비 확장 정책에 반대하며 일본 제국 육군을 방어 목적의 소규모 병력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우라 고로, 토리오 코야타, 소가 스케노리 등과 함께 프로이센식 군제 개혁에 반대한 '4장군파'(사장군파)를 결성하기도 했다.[3] 청일 전쟁(1894-1895) 이후에도 영토 확장에 열광하던 보수 반대파 동료들과 달리 대륙 진출에 확고히 반대했다. 반면,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서는 외국에 대한 양보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전통, 국가 본질을 지키기 위해 강대국과의 동맹을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반제국주의적 입장은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로부터 "풀밭 위의 외로운 꽃"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4]
다니의 정치관에는 1887년 6월부터 1888년 3월까지의 유럽 방문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에서는 아흐메드 오라비를 만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외채 부담이 국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일본의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며 서구화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강의를 통해 농본주의 사상을 접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1890년, 다니는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특정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곤와회(懇話会)에 속해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지조(地租, 토지세) 증세에 반대하고 인두세 폐지를 주장하는 등 국수주의 및 농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천황 중심의 황실 숭배, 중의원(정당)과 정부로부터의 독립 및 감시, 정책 사안별 시시비비(是是非非)주의, 국민 이익 우선주의 등을 정치 신조로 삼았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귀족원의 유력 의원 다수와 공유되었으며, 소가 스케노리나 삼요회(三曜会)의 영수 고노에 아쓰마로 등과 연대하기도 했다.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시기에는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정부 및 자유당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결국 예산안은 통과되었다. 제1차 마쓰카타 내각 때는 '근검 상무 건의안'을 제출하며 재정 건전화를 주장했고, 이를 계기로 그의 그룹은 '근검상무파'로 불리며 곤와회의 모태가 되었다. 제2차 이토 내각 시기에는 조약 개정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정부와 대립하며 대외 강경 노선을 취했다. 청일 전쟁 중에는 거국일치적 입장에서 정부에 협력했으나, 종전 후에는 삼국 간섭과 전후 재정 운영을 비판하며 다시 반정부 노선으로 돌아섰다. 을미사변에 자신이 추천한 미우라 고로가 연루된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다니와 그의 세력인 곤와회(이후 경자회(庚子会), 토요회(土曜会)로 개칭)는 조직력과 수적 열세로 인해 점차 영향력을 잃어갔다.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 계열의 연구회 등이 조직력을 바탕으로 귀족원 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다니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오 광독 사건의 진상 조사와 피해자 구제 활동에 나섰고, 미야코지마의 인두세 폐지 운동을 지지했으며, 지조 증세에 대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니는 영일 동맹 체결과 러일 전쟁 개전에도 재정 건전성과 방어 중심의 국방론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팽창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고립을 자초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주전론자였던 사위 다테베 톤고와도 대립하여 딸이 이혼하는 일까지 겪었다. 러일 전쟁 이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소야 해협과 마미야 해협의 비무장화 조항에 대해서도 국익에 반한다며 반대했다. 그는 군축과 긴축 재정을 꾸준히 주장했으나, 제국주의와 군비 확장이 대세가 된 정계에서 그의 목소리는 점차 외면당했다.
다니는 1911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활동했다.
2. 5. 3. 귀족원 내 세력 약화와 말년
1890년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정치 활동을 계속하면서 토지세 부과를 강력히 반대하고, 인두세 폐지를 옹호했으며, 환경 재앙과 관련된 소송과 스캔들로 인해 조사단을 아시오 구리 광산에 파견했다. 또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일본군 확장을 위한 그의 노력에 계속해서 반대했다. 그는 영일 동맹에 강력히 반대했고, 정치적 관점과 재정적 이유로 러일 전쟁에도 반대했다.메이지 30년(1897년) 7월의 귀족원 자작 의원 상호 선거에서 다니가 속한 곤화회(懇話会)는 선거 단체 상우회(尚友会)를 설립하여 조직적으로 선거를 준비한 연구회에 크게 밀려 참패했다. 연구회가 46명의 자작 의원을 당선시킨 반면, 곤화회와 삼요회(三曜会)를 합쳐 18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쳐 귀족원 내 세력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인 히라타 토스케와 기요우라 게이고가 각각 차화회와 연구회를 장악하고 양 파벌 간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곤화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정부가 칙선 의원을 차화회 등에 집중적으로 임명하면서 곤화회의 의원 영입은 더욱 어려워졌다. 메이지 32년(1899년) 12월,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제출한 종교 법안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곤화회 내에서 분열이 발생하여 탈퇴자가 속출했다. 다니를 포함한 주류파 40명은 이듬해인 1900년 '경자회(庚子会)'로 명칭을 변경하며 존속을 모색했지만, 이미 연구회와의 격차는 크게 벌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니는 정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빈민 구제 관점에서 아시오 광독 사건의 실지 조사를 벌이고 피해자 구제에 힘썼으며, 타구치 우키치와 지조 증징(地租増徴, 토지세 인상)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또한 미야코지마의 인두세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지조 증징 반대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이지 33년(1900년) 9월 입헌정우회가 창당되고 10월 제4차 이토 내각이 들어서자, 다니는 정당의 이익 유도가 포함된 증세 예산안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연구회와 행복 클럽파(幸倶楽部派) 역시 증세에 반대하면서 귀족원은 내각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메이지 34년(1901년) 3월, 메이지 천황이 정부 지지를 촉구하는 칙어를 내리자 귀족원은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고, 다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귀족원은 정부에 대한 강경 노선을 자제하게 되었고, 연구회와 행복 클럽파의 우위는 확고해졌다. 경자회는 아사히 클럽(朝日倶楽部)과 합병하여 '토요회(土曜会)'로 개칭했지만, 40명 전후의 소수 파벌로 전락하여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귀족원의 정치 행태도 중의원과 연계하여 내각과 타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귀족원의 자립을 주장했던 다니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다니의 완고한 태도는 고노에 아츠마로나 리쿠와 같은 동지들의 이반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는 영일 동맹에 대해 "영국에게는 이익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익이 없다"며 반대했고, 정치적·재정적 이유로 러일 전쟁 개전에도 반대했다. 그의 비전론(非戦論)은 주전론자였던 사위 타테베 톤고와의 관계 악화 및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후에도 군축과 긴축 재정을 꾸준히 호소했으나, 군비 확장과 제국주의가 대세였던 당시 정계에서 그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묵살되기 일쑤였다. 일본의 승리로 그는 정치적으로 점점 더 소외되고 언론에서 비난받았지만, 그의 상호 비무장화와 소야 해협과 마미야 해협 간의 자유 통행 주장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포츠머스 조약에 일부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니 자신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해당 해협들의 비무장화가 결정된 것에 대해 자국의 요충지를 비무장하는 것은 "실로 굴욕"이라며 반대했다.
메이지 44년(1911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사상과 평가
다니 다테키는 귀족원 내에서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 했으나, 점차 고립되었다. 그가 속했던 懇話会(곤화회)는 1897년 귀족원 유작 상호 선거 의원 총개선에서 조직적인 선거 운동을 펼친 연구회(研究会)에 참패했다. 懇話会(곤화회)는 조직적 통일성이 부족했고 선거 대비도 미흡하여, 연구회가 46석을 확보한 반면 懇話会(곤화회)와 三曜会(삼요회)를 합쳐 1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후 懇話会(곤화회)는 1899년 일시적으로 68명까지 의석수가 늘어나기도 했으나, 장기적인 쇠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인 히라타 토스케와 기요우라 게이고가 각각 차화회(茶話会)와 연구회를 장악하고 양 파벌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懇話会(곤화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정부가 칙선 의원을 차화회 등에 집중적으로 보내면서 懇話会(곤화회)는 의원 영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1899년 12월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이 제출한 종교 법안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 탈퇴자가 속출했다. 다니를 포함한 주류파 40명은 1900년 '경자회(庚子会)'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미 연구회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니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활동을 계속했다. 빈민 구제에 관심을 기울여 아시오 광독 사건의 현지 조사를 벌이고 피해자 구제에 힘썼으며, 미야코지마의 인두세 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자작농 보호의 관점에서 지조 증징(地租増徴, 토지세 인상)에 반대하며 경제 자유주의를 내세워 증징에 찬성한 타구치 우키치와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잡지 『일본』에 게재되었으나, 현실에서는 지조 증징이 이루어져 다니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 9월 창당된 입헌정우회에 대해 경계심을 보였고, 10월 출범한 제4차 이토 내각의 증세 예산안에 대해서도 정당의 이익 유도가 포함되어 민중의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당시 증세에 반대했던 연구회·행복 클럽파(幸倶楽部派)와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도 했으나, 1901년 3월 천황이 정부 지지를 촉구하는 칙어를 내리면서 귀족원은 결국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이 사건 이후 귀족원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고, 경자회와 아사히 클럽(朝日倶楽部)은 합병하여 토요회(土曜会)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소수파로 전락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다니가 주장했던 귀족원의 자립 노선은 힘을 잃고, 중의원과 연계하여 내각과 타협하는 것이 귀족원의 주된 정치 행태가 되었다.
다니의 강경한 태도는 동지들과의 결별을 초래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의 중국 대륙 진출에 맞서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던 고노에 아츠마로와 대립했으며,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영국에게는 이익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익이 없다"고 비판했다. 러시아에 대한 강경론으로 돌아선 리쿠와도 결별했다. 러일 전쟁 발발 시에는 건전 재정론과 방어 중심의 군비론에 입각하여 개전에 반대했다. 그의 사위이자 사회학자인 다테베 톤고가 주전론자였기 때문에 그와도 대립하며 비전론(非戦論)을 굽히지 않았다(전쟁 후 딸 요시코는 다테베와 이혼했다). 전쟁 후에도 군비 축소와 긴축 재정을 계속 주장했으나, 군비 확장과 적극 재정, 제국주의가 대세가 된 정계에서 그의 의견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묵살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당시, 조약 내용 중 소야 해협과 마미야 해협의 상호 비무장 및 무해 통항 규정에 대해 자국 내 요충지를 비무장화하는 것은 "실로 굴욕적"이라며 반대했다.
1911년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생가 근처 안락사 산성에 있으며, 가독은 양손자이자 오토이노(音त्स)의 장남인 다니 기이치(谷儀一)가 이었다.
4.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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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날짜 | 내용 |
---|---|---|
메이지 4년 (1871년) | 7월 28일 | 육군 대좌 임관[13] |
8월 15일 | 병부 권대승 | |
메이지 5년 (1872년) | 4월 14일 | 육군 재판장 |
9월 2일 | 육군 소장 승진, 근위국 분과 | |
메이지 6년 (1873년) | 4월 5일 |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 |
메이지 7년 (1874년) | 4월 5일 | 대만 번지 사무 참군 |
메이지 9년 (1876년) | 11월 9일 |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 |
메이지 11년 (1878년) | 11월 20일 | 육군 중장 승진 |
12월 14일 | 동부 감군 부장 | |
메이지 13년 (1880년) | 4월 29일 | 육군 사관학교 교장 겸 육군 토야마 학교 교장 |
8월 9일 | 겸 중부 감군 부장 | |
메이지 14년 (1881년) | 2월 9일 | 면 중부 감군 부장 |
10월 27일 | 사직 | |
메이지 17년 (1884년) | 5월 24일 | 학습원장 |
7월 7일 | 자작 서작[14] | |
메이지 18년 (1885년) | 12월 22일 | 농상무 대신 |
메이지 19년 (1886년) | 3월 11일 | 훈1등 욱일 대수장 |
7월 8일 | 정사위 | |
10월 19일 | 종이위 | |
메이지 20년 (1887년) | 7월 26일 | 사직 |
메이지 21년 (1888년) | 7월 14일 | 학습원 담당 |
메이지 22년 (1889년) | 8월 26일 | 예비역 편입 |
메이지 23년 (1890년) | 7월 10일 | 귀족원 의원 |
메이지 38년 (1905년) | 10월 16일 | 퇴역 |
메이지 44년 (1911년) | 2월 9일 | 훈1등 욱일 동화 대수장 |
4월 15일 | 정2위 | |
5월 13일 | 사망 |
5. 가족 관계
다니 가문은 오호(大穂) 성씨를 사용했으며, 본래 초소카베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이후 도사번의 상사(上士) 가문이 되었다. 가문의 시조는 다니 타다즈미의 동생인 다니 진에몬(초대)이다. 다니 간조의 증조부인 다니 시게토(신잔)와, 다니 시게키의 5대조인 다니 시게마사는 형제 관계였다.
보신 전쟁 당시 진충대(迅衝隊)에 함께 참전했던 다니 시게키(신베)는 도사번 상사 가문인 다니 진에몬 본가의 제11대 당주였다. 다니 진에몬 가문의 제4대 당주 다니 시게모토(신베)의 적자인 다니 시게마사(야타로)의 5대손이 바로 다니 시게키이다. 한편, 다니 시게모토의 셋째 아들인 다니 시게토(신잔)는 분가하여 신잔 가문을 열었다. 신잔의 손자인 다니 고이(만로쿠)의 적자 다니 코엔(탄사쿠)이 신잔 가문의 제4대 당주를 이었다. 다니 코엔의 동생인 다니 카게이(만시치)는 다시 분가하여 새로운 가문을 이루었다. 간성은 카게이의 넷째 아들로, 3명의 형이 잇따라 요절했기에 그 뒤를 이었다. 간성의 뒤를 이은 양자 다니 잇시는 다니 시게키의 친동생에 해당한다.
다니 가문의 가몬(家紋)은 왼쪽을 향하는 세 개의 토모에(左三つ巴) 문양이다.[23]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다니 카게이(만시치) | |
본인 | 다니 간조 | 자작, 육군 중장 |
아내 | 쿠니사와 구마코 | 쿠니사와 시치로에몬 미치타츠의 차녀 |
양자 | 다니 잇시 | 다니 시게키의 동생, 진충대(迅衝隊) 최연소 종군자 |
며느리 (잇시의 처) | 무라타 아이코 | 무라타 쓰네요시 남작의 장녀 |
양손 (잇시의 자) | 다니 기이치 | 육군 소장 |
증손 (기이치의 자) | 다니 타케오 | |
친자 (아들) | 다니 타케쿠마 | |
장녀 | 다니 요시코 | 사회학자 다케베 톤고와 결혼 후 이혼, 아사노 타다즈미와 재혼[24][25][26]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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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An Army as Good and Efficient as Any in the World: James Wasson and Japan’s 1874 Expedition to Tai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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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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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07-08
[15]
웹사이트
旧幕新撰組の結城無二三 : お前達のおぢい様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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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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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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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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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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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巴紋 -水が渦巻いている姿を表現-
http://www.ippongi.c[...]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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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The Haworth Press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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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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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干城 島村干雄宛て長文書簡 日露戦争 七博士 建部遯吾 ◎
https://archive.is/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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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霞会館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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