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구사카 류노스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사카 류노스케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해군 중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1893년 도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후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방면 함대, 제1항공함대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에 관여했으며, 종전 후에는 카노야 연락 위원장으로 미군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그는 검술에도 능했으며, 종전 후에는 공직 추방을 거쳐 화학 비료 회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일본 전쟁 관련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독일-일본 전쟁 관련자 -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 철도 건설, 헌법 제정, 와세다 대학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 진주만 공격 관련자 - 후치다 미쓰오
    후치다 미쓰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이자 항공모함 아카기의 비행대장으로서, 진주만 공격의 제1차 공격대 총지휘관으로 참여하여 기습 성공 암호를 발신하고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으며, 종전 후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며 회고록과 미드웨이 해전 기록을 출판하는 등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논쟁이 있다.
  • 진주만 공격 관련자 - 야나기모토 류사쿠
    일본 해군 군인 야나기모토 류사쿠는 해군병학교 졸업 후 해군 요직과 항공모함 소류 함장을 지냈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 미드웨이 해전에서 소류와 운명을 함께하여 사후 소장으로 추서되고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 일본의 검도 선수 - 하세가와 요시미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 대장, 조선 주둔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제2대 조선 총독으로 3·1 운동 시 무단 통치를 시행했으며, 백작 작위를 받고 사망 후 아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
  • 일본의 검도 선수 - 기무라 도쿠타로
    기무라 도쿠타로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변호사, 검찰총장, 법무대신, 요시다 내각의 법무총재 및 방위청장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며, 반공주의 활동과 전일본검도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검도 부흥에 기여했다.
구사카 류노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구사카 류노스케
본명구사카 류노스케 (草鹿 龍之介)
로마자 표기Kusaka Ryūnosuke
출생1893년 9월 25일
출생지도쿄
사망1971년 11월 23일 (78세)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13년 – 1945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지휘 경력
함선호쇼
아카기
부대제4 연합 항공대
제24 항공전대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
제5 항공함대
주요 참전
전투/전쟁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인도양 해전
미드웨이 해전 (부상)
포모사 해전
이미지
구사카 류노스케 해군 소장, 제1 항공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 해군 소장, 제1 항공함대 참모장

2. 생애

구사카 류노스케는 1893년 9월 25일 스미토모 본사 이사였던 구사카 쵸지로우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이시카와현이었다.[3] 이시카와현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를 거쳐 오사카 덴노지 중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해군병학교 41기로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1914년 독일-일본 전쟁에 참전하여 칭다오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1937년 제3함대 참모로서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다.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제 전문 분야는 수뢰였다.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진주만 공격, 미드웨이 해전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에 참전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큰 실패를 겪은 후에도, 남태평양 해전 등에서 참모장으로 계속 참전했지만, 적극적인 공격만을 주장하여 비난을 받았다.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관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4월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제2함대에 해상 특공 명령이 내려졌을 때, 구사카는 이토 세이이치 제2함대 사령관에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설득에 나섰다.[78]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 우가키 마토메 중장의 뒤를 이어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이 되었다. 종전에 납득하지 못하는 젊은 장교들에게 "대명을 따르는 것이 나의 생각이며, 그것에 납득할 수 없는 자는 나를 베어라"고 설득했다. 이후, 쇼와 천황을 배알하고 천황의 말에 통곡했다.

10월 15일[81]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공직 추방을 거쳐[82] 화학 비료 회사 고문을 맡았다.

2. 1. 초기 생애

구사카 류노스케는 1893년 도쿄에서 스미토모 ''재벌'' 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이시카와현 출신이었고,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녔다.[3] 이시카와현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와 오사카 덴노지 중학교를 졸업했다.

구사카 류노스케의 사진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니시다 기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스즈키 마사야를 만나 상담했다. 니시다는 구사카가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했고, 제1고등학교에도 합격했지만, 해군병학교에 진학했다. 1910년 해군병학교41기에 차석으로 입학했다.[4] 1913년 해군병학교 41기를 14등/118명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군 소위 후보생이 되었다.

1914년 방호순양함 "오토와"에 승선하여 독일-일본 전쟁에 종군했고,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7]

2. 2. 해군 복무 초기

구사카 류노스케는 1913년에 해군병학교 41기로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14년 오토와에 승선하여 독일-일본 전쟁에 참전, 칭다오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3]

1920년에는 특무함 간토 분대장(대위)으로 캄차카 지방에 파견되었다.[7]

1925년에는 해군 참모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항공을 전공했다.[2] 이후 가스미가우라 해군 전투기 부대 지휘관을 맡았으며, 여러 참모직을 역임했다.

1926년 가스미가우라 항공대 부속으로, 사령관 안도 마사타카에게 "별다른 임무는 없으니 스스로 공부하라"는 말을 듣고, "항공기에 의한 적정 정찰"을 연구했다. 정찰원 훈련도 받았다.[12] 구사카의 첫 비행은 10식 함상 정찰기 정찰원으로 13식 함상 공격기 수색 중 엔진 불량으로 기병 연대 연병장에 불시착한 것이었다.[13]

1928년 군령부 참모 겸 해군 기술 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어, 당시 군령부 내 유일한 항공 담당자였다.[16] 1929년 미국 출장 시 비행선체펠린 호의 태평양 횡단 비행에 동승했다. 이 일로 유명해져, 그가 주문한 구두가 "구사카 소좌 어용"으로 전시되기도 했다.[17] 귀국 후, 구사카는 군령부에 "(비행선은) 항공기 공격에 취약하며, 방어 전투기(기생 전투기) 5대 탑재 및 이착륙이 가능하고, 군수 물자 공중 수송에 유용하다"고 보고했다.[18]

2. 3. 중일 전쟁

1937년 제3함대 참모로서 중일전쟁에 참전했다.[3]

2. 4. 태평양 전쟁

구사카 류노스케는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전문 분야는 수뢰였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 진주만 공격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초반에는 항공전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큰 실패를 겪었다. 이후 남태평양 해전에서도 참모장으로 참가했으나, 시종일관 적극적인 공격만을 주장하여 비난을 받았다.[2]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관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하며,[72] 1944년 5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73] 그는 고류무술과 검술의 달인으로, 실전에서도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마음이 없이는 퇴각하지 않는다"라는 적극적인 주전론을 펼쳤다.[72]

아호 작전 준비 중, 미군이 비약에 상륙하자 연합함대 사령부는 독단적으로 결전 병력을 투입, 마리아나 해전에서 패배했다. 구사카는 "사이판에 오면 그곳을 확실히 확보하고 있는 동안 천천히 준비를 갖춰 작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회상했다.

1944년 8월 16일, 특공 병기 "신요" 작전 검토회에서 구사카는 생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5] 1945년 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오카 부대로 구성된 제11항공전대 종합 훈련 연구회가 열렸고, 2월 1일 구사카는 제11항공전대를 정규 작전에 투입할 것을 희망했다.[77]

1945년 4월,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해상 특공대가 실시되었다. 구사카는 이토 세이이치에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했고, 이토는 즉시 이를 수락했다.[78] 4월 6일, 오키나와로 향하는 야마토 이하 제2함대를 전송하며 구사카는 "이때만큼 괴로운 마음을 맛본 적은 없다"라고 회상했다.[80]

8월 15일 우가키 마토메 중장이 특공으로 사망하자, 8월 17일 구사카는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이 되었다. 그는 종전에 불만을 품은 젊은 장교들에게 "대명을 따르는 것이 나의 생각이며, 이에 따를 수 없는 자는 나를 베어라"라며 설득했다. 이후 쇼와 천황을 알현하고, 천황이 "만민을 위해 내 몸을 희생해도 좋다", "여러분, 부디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통곡했다.

8월 25일부터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총리의 명으로 가노야 연락위원장이 되어 미 진주군과의 교섭에 임했고, 약 1개월 후 임무를 완수, 10월 15일[81]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2. 4. 1. 제1항공함대 참모장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이끄는 제1항공함대의 참모장으로서, 구사카 류노스케는 진주만 공격 준비를 명령받았다. 그는 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가 안을 만들고, 비행대장 후치다 미쓰오가 실행하는 മികച്ച 조합을 이루어, 그들의 제안을 최대한 수용하며 조용히 지원했다.[32]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에서 제1항공함대는 미 해군 전함 4척을 격침하고 2척을 크게 파손시켜,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구사카는 진주만 공격의 주된 목적이 적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주어 진공 계획을 막는 데 있었다고 판단했다. 공격을 한 번으로 정하고, 철저한 계획 하에 숙련된 공격으로 기습에 성공하여 목표를 달성했다. 구사카는 언제까지나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즉시 다른 적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나구모 장관에게 철수를 건의했다.[35] 그는 "왜 추가 공격을 하지 않았는가?", "공창이나 유조선을 파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비판은 모두 전략적인 부분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35] 그는 또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자신에게 직접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37]

겐다 중좌와 후치다 중좌는 며칠 동안 근처에 머물며 항공모함을 격파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구사카는 작전 목적이 일본 남방 작전 부대의 측면과 후방 방어에 있으며,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38]

귀환 중인 제1항공함대에 대해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는 미드웨이 섬 포격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미드웨이 공습을 명령했다. 구사카는 이에 대해 "참모장으로서 화가 났다", "스모에서 이긴 선수에게 돌아가는 길에 무를 사오라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했다.[39] 결국 제1항함은 악천후로 보급이 어려워 실행하지 못했다.[40]

구사카 참모장이 탑승한 기함 '아카기'(1942년 4월)


이후 제1항함은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인도양을 오가며 연합군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다. 라바울, 카비엔 공략 지원, 포트 다윈 공격, 자바해 소탕전 등에서 활약하며 태평양의 해상 지배권을 확보했다. 1942년 4월, 인도양 작전의 실론 해전에서는 영국 항공모함 허미스를 격침하고, 트리코말리 항을 폭격하는 성과를 올렸다.

제1항공함대는 인도양 작전까지 큰 성과를 올렸지만, 항공기 손실은 적었고, 함정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41] 역사상 유례없는 연속적인 승리로 제1항공함대는 세계 최강의 기동 부대가 되었지만, 계속된 승리로 피로와 자만심이 나타났다.[42]

연합함대 사령부 참모들은 나구모와 구사카에게 비판적이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장관에게 나구모 교체를 건의했지만, "그러면 나구모가 나쁜 사람이 된다"라며 거절당했다.[43] 야마구치 다몬은 제1항함에 대해 "참모장, 선임 참모 중 누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겁쟁이들만 모였다"라고 말했다.[44]

인도양에서 귀환한 제1항공함대에 연합함대 사령부가 계획한 미드웨이 작전이 명령되었다. 둘리틀 공습 직후였기 때문에, 구사카와 제2함대 참모장 시라이시 만류는 주 목적을 미드웨이 기지 공격, 부 목적을 적 기동 부대 격파로 해석했다.[45] 장기간 작전 후 함선의 정비, 보충, 수리, 훈련 등 준비를 해야 했기에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구사카는 준비 기간이 부족하여 불만이 있었지만 강하게 반대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와이 공격 전사자의 2계급 특진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진주만에서 성과를 올린 항공 부대 전사자가 일반적인 대우를 받아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불만이 제1항함에서 높아지고 있었다.[46]

구사카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진주만 이후 성공이 계속되었지만 소모도 있었고 반대했다. 미드웨이 공략 자체에 상당한 의문이 있었고 연합함대에서 작전이 결정되어 강요되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7] 1942년 5월 4일 연구회에서 구사카는 시라이시와 연기를 신청했지만 거부되었고, 5일에 다시 방문했을 때 제2차 작전을 전달받았으며, 그날 연기 신청을 하지 않고 돌아갔다.[48] 또한, 미드웨이 작전은 시기상조라고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항공 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가 연합함대에 반대했으나, 연합함대 사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구사카는 여기서 포기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전후에 말했다.

전훈 분과 연구회에서 우가키 마토메는 구사카에게 "적에게 선제 공격을 받았을 경우, 혹은 육상 공격 시 적 해상 부대에게 측면을 공격당했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구사카는 "그런 일 없도록 처리하겠다"라고 대답했고, 우가키가 구사카를 추궁하자, 항공 참모 겐다가 "함공에 증조를 부착한 정찰기를 450해리 정도까지 연장할 수 있는 것을 곧 두세 기 배치하고, 이것과 순양함의 0식 수정으로 측면 초계에 임하게 한다. 적에게 선제당했을 경우에는, 현재 상공에 있는 전투기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 때문에 우가키는 주의를 환기했고, 작전 회의 전에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 공격을 2단계 공격으로 하고 2차는 적에 대비한다"라고 했다.[49] 우가키는 "앞으로 천변만화의 해양 작전에 과연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걱정했다.[50]

출격 전, 구사카는 공격일이 정해져 있어 기습의 여지가 없고, 항공모함은 안테나 수신 능력이 부족하여 적정을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연합함대가 적정을 파악하여 작전 전환을 지시하도록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중장에게 부탁했다.[51] 그러나 연합함대는 근처에 적 항공모함이 있을 가능성을 느껴, 상황이 긴박해졌다고 판단하면서도, 안이한 상황 판단 방송을 도쿄에서 전부대에 내보낸 채, 자기 판단을 휘하에 알리지 않았다.[52] 이로 인해 제1항함은 미 해군 기동 부대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 우가키는 해전 후 일기에 제1항공함대에 대해 "당 사령부도 미흡한 점이 있어 죄송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남겼다.[53]

1942년 6월 5일,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 섬 기지 공격대를 출격시키고,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었다. 공격을 마친 비행대장 도모나가 조이치 대위는 사령부에 "제2차 공격 필요"라고 보고했다. 나구모 장관은 미드웨이 공략 부대를 위해 제압을 서둘러야 했고, 미 함대는 하와이에 있다는 연합함대의 적정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으며,[54] 귀환 중인 정찰기로부터도 보고가 없어,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으로부터 미 함대 요격을 위해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은 나머지 절반의 공격대를 무장 전환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구사카에 따르면 "야마모토의 바람은 나구모도 막료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기지의 적 항공 전력이 우리에게 공격을 개시하고 적 항공모함도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적에게 절반을 무기한으로 대기시키는 것은 전선 지휘관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된다고 해도 당시 상황에서는 나구모의 결정은 정당했다"라고 말했다.[55]

그러나 정찰기가 예상치 못한 미군 기동 부대 발견 보고를 했고, 제2항공전대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으로부터 육상용 폭탄으로 즉시 공격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요격 전투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제1항공함대 상공에 미드웨이 섬 공격을 마친 제1차 공격대 100기가 귀환하여 착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구모는 귀환 부대의 수용을 우선했다. 구사카에 따르면, 적의 공격 상황을 보니 적은 전투기를 붙이지 않고 와서 쉽게 격추되었고, 전혀 공격 효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이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기에, 함전대를 붙이지 않고 함폭대(함상 폭격기)를 내릴 결심이 서지 않았다고 한다.[56]

제1항공함대는 미드웨이 섬 기지 항공대의 공습을 격퇴했고, 미군 기동 부대에서 발진한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의 공격도 연속으로 모두 격퇴했다. 그러나 그 직후 미군 기동 부대 함재기에 의한 급강하 폭격을 받아 주력 항공모함 3척(아카기, 가가, 소류)이 불탔고, 남은 "히류"도 나중에 불타 자군에 의해 처분되어, 항공모함 4척을 잃고 패배했다.

구사카는 피탄 직전, 공격대에 준비가 된 것부터 발함하도록 명령했고, 공격대의 전투기가 날아오르려는 순간 폭격을 받아, 5분만 더 있었으면 공격대는 발함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57] 이것은 "운명의 5분"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공격대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5분 만에 발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58] 이 해전에서는 적 기동 부대 발견이 늦어졌지만, 정찰을 결정한 구사카는 "공격 병력을 늘리려고 정찰을 경시했다"라고 말했다.[59]

함대 사령부 막료는 나구모 이하 전원이 자결해야 한다고 선임 참모 오이시 타모츠가 대표로 건의했지만, 구사카는 그것을 기각하고, 나구모에 대해서도 설득하여 달랬다.[60] 작부 토시로(항해 참모)는 미드웨이 해전 후 사령부 일동의 자결을 기각한 구사카를 "진정한 의미로 담력이 있고, 그런 때에 침착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61]

연합함대 사령부의 기함 "야마토"에 패전 보고를 하기 위해, 나구모 대신 구사카가 막료를 데리고 갔다. 첫 마디는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였다. 구사카는 연합함대 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이렇게 살아 돌아올 몸이 아니지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떻게 복수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했고, 야마모토는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는 패전 보고를 위해 "야마토"를 방문한 구사카에게 "참모장에 대해서는 당 사령부도 미흡한 점이 있었으며,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사과했다.[62] 구사카에 따르면 사과할 때 우가키는 적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한다.[63] 공격대를 절반 대기시킨 것에 관해 구사카는 "저는 부임 이래 충분한 정찰을 했고, 이 일격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을 주의로 삼아 훈련했고 또 성공했습니다. 도중에 이것을 변경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64]

미드웨이 해전 이후, 구사카는 1942년 11월까지 제1항공함대에 남아 여러 참모직을 맡았다.[2]

2. 4. 2. 제3함대 참모장

1937년 제3함대 참모로서 중일전쟁에 참전했다.[2]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전문 분야는 수뢰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큰 실패를 겪었고, 이후 남태평양 해전에서도 참모장으로 참가했지만, 시종일관 적극적인 공격만을 주장하여 비난을 받았다.[2]

1944년 11월, 도요다 소에무 제독 휘하의 연합 함대 참모장으로 전출되기 전까지, 구사카는 남동 방면 함대 참모장 겸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을 맡았다.[2]

2. 4. 3. 연합함대 참모장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 휘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72] 고류무술과 검술의 달인이었던 구사카는 실전에서도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마음이 없이는 퇴각하지 않는다"라고 할 만큼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다.[72] 5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73]

5월, 아호 작전 준비 중 비약에 미군이 상륙하자, 연합함대 사령부는 독단적으로 결전 병력을 비약에 투입했다. 마리아나 해전에서 해군은 항공모함 3척과 항공 전력 대부분을 잃고 패배했다. 구사카는 "사이판에 오면 그곳을 확실히 확보하고 있는 동안 천천히 준비를 갖춰 작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회상했다.

1944년 8월 16일, 특공 병기 "신요"에 의한 작전에 관한 검토회에서는 생환 가능성도 생각해 달라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최종적으로 그런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75] 1945년 1월 25일 - 30일에 오카 부대로 구성된 제11항공전대 종합 훈련 연구회가 있었고, 2월 1일에 구사카는 제11항공전대를 정규 작전에 사용할 것을 희망했다.[77]

1945년 4월,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해상 특공대가 실시되었다. 구사카는 이토 세이이치에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했고, 이토는 즉시 납득했다.[78] 4월 6일, 오키나와 방면으로 향하는 "야마토" 이하 제2함대를 기상에서 전송한 것을 "이때만큼 괴로운 마음을 맛본 적은 없다"고 회상했다.[80]

8월 15일에 특공한 우가키 마토메 중장의 후임으로 8월 17일,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이 되었다. 종전에 납득하지 못하는 젊은 장교들에게 "대명을 따르는 것이 나의 생각이며, 그것에 납득할 수 없는 자는 나를 베어라"고 설득했다. 그 후, 쇼와 천황을 배알하고, 천황이 "만민을 위해 내 몸을 희생해도 좋다", "여러분, 부디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통곡했다.

8월 25일부터, 총리대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명에 의해 카노야 연락 위원장이 되어, 미 진주군과의 교섭에 임했다. 약 1개월 후 임무를 마쳤다. 10월 15일[81], 예비역 편입되었다.

2. 5. 종전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구사카 류노스케는 8월 17일 제5항공함대 사령 장관에 취임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10월 10일 제5항공함대가 폐지되면서 해군성으로 돌아왔고, 10월 15일에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3]

종전 직후, 구사카는 카노야 연락 위원장으로서 미군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9월 3일 미군 대표와의 회담에서 미군 측은 일본군이 항복 의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구사카는 일본군 대표가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음을 지적하며, 추가적인 항복 의식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미군 측은 이에 수긍하고 회담을 종료했다.[3]

공직에서 추방된 후, 구사카는 1950년에 일본 특수 화학 비료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1963년까지 재직했다.[3] 그는 검도가 무토류(無刀流)의 야마오카 텟슈에게서 이어져 다카노 사사부로를 거쳐 자신에게 계승되었다고 주장했다.[3] 또한, 가가번 이래의 선(禪)을 아사히나 소겐에게 배웠다고 한다.[3]

3. 평가

구사카 류노스케는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실제로는 수뢰가 전문이었다. 제1항공함대 참모장으로서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함께 진주만 공격,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다. 초기에는 항공전에서 수완을 발휘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큰 실패를 겪었고, 남태평양 해전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해 비난을 받았다.[28]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 휘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72] 고류무술과 검술의 달인이었던 구사카는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마음이 없이는 퇴각하지 않는다"라고 할 만큼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다.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제2함대에 수상 특공 명령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제2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 중장에게 "1억 총 특공의 선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했다.[78]

그러나 종전 후, 구사카는 수많은 장병들을 자살 특공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살아남아 영달을 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힘과 입만 앞세운 어리석은 참모'로 낙인찍히기도 했다.[84]

3. 1. 군사적 평가

구사카 류노스케는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실제로는 수뢰 부문이 전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제1항공함대 참모장으로서 나구모 주이치 중장과 함께 진주만 공격을 비롯한 태평양 전쟁 초반의 주요 해전에 참가했다.[28] 초기에는 항공전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일본 해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대실패를 겪었고, 이후 남태평양 해전에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비판을 받았다.[57] 특히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적 항공모함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공격 준비를 소홀히 한 점, 적의 공격에 즉각 대응하지 못한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 휘하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구사카는 특공 작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72]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전함 야마토를 특공에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고, 오카를 이용한 특공 작전도 주도했다. 이러한 과도한 특공 작전 추진은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종전 후, 구사카는 수많은 장병들을 자살 특공으로 몰아넣은 어리석은 참모로 낙인찍혀 비난을 받았다.[84]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지만, 전쟁 후반부의 과도한 특공 작전 추진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3. 2. 정치적 평가

구사카 류노스케는 해군 내에서 항공전에 밝은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실제로는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다. 1944년 4월부터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관 휘하 참모장으로 활동하며,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마음이 없이는 퇴각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질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3]

태평양 전쟁 당시, 구사카는 연합함대 참모로서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제2함대에 수상 특공 명령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제2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 중장에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하여 작전을 실행시켰다.[78]

그러나 종전 후, 구사카는 수많은 장병들을 특공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살아남아 영달을 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힘과 입만 앞세운 어리석은 참모'로 낙인찍히기도 했다.[3]

3.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구사카 류노스케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진주만 공격,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 주요 작전에 참여했다.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구사카 류노스케는 침략 전쟁의 주범 중 한 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의 작전으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겪었다.[72]

특히, 1944년 4월 연합함대 참모장으로 취임한 이후[72], 구사카 류노스케는 가미카제 특공 작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44년 8월 16일 특공 병기 "신요"에 의한 작전에 관한 검토회에서는 생환 가능성도 생각해 달라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최종적으로 그런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75] 1944년 12월 23일, 구사카는 제1연합기지 항공대와의 협의 회의에서 특공 병기 "오카"의 전문 부대인 신뢰 부대와 필리핀의 전투기에 의한 합동 레이테 공격을 논의한다.[76] 1945년 4월,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해상 특공대가 실시되었다. 해상 특공대는 이전부터 연합함대 사령부에서 수석 참모 진시게토쿠 대좌가 주장하던 것이었다. 구사카는 그것을 달랬지만, 진은 "야마토를 특공적으로 사용한 정도"라고 설득하여 군항에 계류될 예정이었던 야마토를 제2함대에 편입시켰다.[78] 이러한 특공 작전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전쟁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구사카 류노스케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비판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과거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일본의 역사왜곡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4. 가족 관계

구사카 류노스케는 1893년 도쿄에서 스미토모 재벌 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상 이시카와현 출신이며,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녔다.[3] 가가다이쇼지 번을 섬긴 일족 출신이다.[3]

이시카와현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 덴노지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시카와현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군 중장 아오키 시게노부(육사 25기 수석)와 동급생이었고, 성적은 구사카가 1등, 아오키가 2등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해군 소장 모리 토모이치(해병 42기)나 해군 대위 혼다 유즈루(해병 42기)도 동급생이었다. 이 시기에 종형인 닌이치(해병 37기)는 류노스케 저택에서 가나자와 제1중학교로 통학하고 있었다.

오사카 덴노지 중학교에서는 도요다 사다지로(해병 33기 수석), 곤도 노부타케(해병 35기 수석)와 동창이었고, 히가시 류타로와 동급생이었다.

구사카는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니시다 기타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스즈키 마사야를 만나 상담했다. 니시다는 구사카가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했고, 구사카는 제1고등학교에도 합격했지만, 해군병학교에 진학했다.

5. 어록

特攻は最後の手段である。まず、通常攻撃で全力を尽くすべきだった。|특공은 최후의 수단이다. 우선 통상 공격으로 전력을 다해야 했다.일본어 一度始めたら、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やめない。|한 번 시작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는다.일본어 戦争は負けることもある。しかし、負けたからといって、その責任を回避してはいけない。|전쟁은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졌다고 해서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일본어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도라! 도라! 도라!에서는 류자키 이치로가, 미드웨이에서는 팻 모리타가, 1981년 영화 연합 함대(영문명: The Imperial Navy)에서는 미하시 타츠야가, 토에이의 2005년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서는 하야시 류조가 구사카 류노스케를 연기했다.[1]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서적 Shattered Sword: The Untold Story of the Battle of Midway https://archive.org/[...] Potomac Books
[3] 문서 提督 草鹿任一 1頁
[4] 문서 草鹿半生記 76頁
[5] 문서 草鹿半生記 73頁
[6] 문서 高木 24頁
[7] 문서 草鹿半生記 124頁
[8] 문서 草鹿半生記 174頁
[9] 문서 草鹿半生記 185頁
[10] 문서 草鹿半生記 192-193頁
[11] 문서 草鹿半生記 194頁
[12] 문서 草鹿半生記 197頁、プランゲ『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千早正隆訳 原書房234-236頁
[13] 문서 草鹿半生記 198頁
[14] 문서 草鹿半生記 201頁
[15] 문서 草鹿半生記 202頁
[16] 문서 草鹿半生記 208頁
[17] 문서 草鹿半生記 213頁
[18] 문서 草鹿半生記 229頁
[19] 문서 草鹿半生記 297頁
[20] 문서 草鹿半生記 231頁
[21] 문서 草鹿半生記 233頁
[22] 문서 どん亀艦長青春記 47頁
[23] 문서 草鹿半生記 251頁
[24] 문서 草鹿半生記 274-275頁
[25] 문서 草鹿半生記 282頁-285頁
[26] 문서 池田海軍 120頁
[27] 문서 実松米内 134頁-135頁
[28]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公文庫
[29] 문서 戦史叢書10巻ハワイ作戦110頁
[30] 문서 亀井戦記 632頁
[31]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32]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33] 문서 戦藻録(九版) 17頁
[34] 문서 蝦名 特攻機 143頁
[35] 문서 戦史叢書10巻 ハワイ作戦 345頁
[36] 문서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37] 문서 亀井戦記
[38] 서적 トラトラトラ 太平洋戦争はこうして始まった 並木書房
[39] 문서 戦藻録(九版)
[40] 서적 ハワイ作戦
[41]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42] 서적 帝国陸海軍事典 同成社
[43]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44] 문서 戦藻録(九版)
[45]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46]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下 中公文庫
[47]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48]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49]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0] 문서 戦藻録(九版)
[51]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2]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3]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4]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5]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56]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57]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58] 서적 昭和の戦争 ジャーナリストの証言4 講談社
[59] 서적 ミッドウェーの奇跡上 原書房
[60]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61] 문서 亀井戦記
[62] 문서 戦藻録(九版)
[63] 서적 ミッドウェー海戦
[64] 문서 戦藻録(九版)
[65] 서적 連合艦隊参謀長の回想 光和堂
[66] 서적 南雲忠一 空母機動部隊を率いた悲劇の提督 PHP文庫
[67] 문서 戦藻録(九版)
[68] 문서 亀井戦記
[69] 문서 高木, 草鹿回想
[70] 서적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3)昭和十八年二月まで
[71] 서적 戦史叢書12巻マリアナ沖海戦
[72] 문서 吉田#海軍参謀
[73] 서적 戦史叢書12巻マリアナ沖海戦
[74] 문서 戦藻録(九版)
[75] 서적 戦史叢書45巻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6)第三段作戦後期
[76] 서적 海軍神雷部隊
[77] 서적 海軍神雷部隊
[78] 서적 戦史叢書93巻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79] 문서 草鹿半生記
[80] 문서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81] 간행물 昭和20年11月6日付 海軍辞令公報 甲 第1973号
[82]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83] 문서 良い参謀良くない参謀
[84] 문서 聯合艦隊作戦室
[85] 문서 二つの時代
[86] 문서 亀井戦記
[87] 문서 大衆人事録 東京篇「草鹿龍之介」
[88] 서적 「反米論」は百害あって一利なし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89] 간행물 昭和12年10月18日付 海軍辞令公報 号外 第76号
[90] 간행물 昭和18年11月20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1265号
[91] 간행물 昭和18年12月1日付 海軍辞令公報 (部内限) 第1270号
[92] 간행물 昭和20年5月19日付 秘海軍辞令公報 甲 第1804号
[93] 간행물 昭和20年11月2日付 海軍辞令公報 甲 第1971号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