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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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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춘선은 일제강점기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관군으로 시작하여 북간도로 이주한 후, 기독교에 입교하여 용정시교회와 하마탕교회 설립에 기여했다. 1913년 김약연, 백옥보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구에 참여했으며, 3·1 운동 당시 용정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독립기성총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대한국민회 회장, 군정사후원회 조직, 임시정부 군무부 교통부 책임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0년에는 대한독립군단에 참여, 자유시 사변을 겪은 후 동만으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갔으며, 1944년 사망 후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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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춘선
기본 정보
구춘선
구춘선
출생1924년 3월 2일
사망2017년 10월 25일 (93세)
국적대한민국
학력
모교고려대학교 법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경력
주요 경력제11대 국회의원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2. 생애

구춘선은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886년 온성군 영달진(永達鎭)에서 하급 군졸로 근무했다. 이후 괴력을 인정받아 서울 궁궐 수비 군인이 되었고, 남대문 수문장 등으로 근무했다. 청일 전쟁을미사변 이후 1895년 낙향했다가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해 한인을 보호하자, 구춘선은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간민(墾民)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했다. 1905년 이범윤노령으로 망명하면서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고,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후 용정시교회(龍井市敎會)와 하마탕교회(蛤蟆塘敎會) 설립에 기여했다.

1913년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 백옥보 등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용정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독립의사회가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했다.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군정사후원회를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왕청현 교통부 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노령 지역과의 연계 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간도에 국민회 지회를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며 독립군 무력을 강화했다. 1920년 10월 29일, 대한국민회가 간북남부총판부(間北南部總辦府)를 결성하자 총판으로 활동했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 조직에 참여, 자유시 사변을 겪은 후 동만(東滿)으로 돌아와 1921년 12월 돈화현(敦化縣)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판부(總辦府)를 조직했다. 이후 무장운동, 신앙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 1927년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하고 대한국민당 조직을 지시했다.

1934년 한국교회 희년(禧年)을 맞아 문재린 등과 함께 동만주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 1944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2. 1. 관군 생활과 북간도 이주 (1886년 ~ 1907년)

1886년 온성군 영달진(永達鎭)에서 하급 군졸로 근무하다가 괴력으로 행영(行營)의 도시(都試)에 선발되어 서울 궁궐 수비 군인이 되었다. 남대문 수문장 등 중앙군으로 복무하였다. 청일 전쟁, 을미사변 이후, 1895년 낙향하였다가 1897년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인의 보호에 나서자,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간민(墾民)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였다. 1905년 이범윤노령으로 망명하여 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07년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같은 해 용정시교회(龍井市敎會), 1913년 하마탕교회(蛤蟆塘敎會)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2. 2. 북간도의 독립운동 지도자 (1913년 ~ 1919년)

1913년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김약연, 백옥보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자 같은 해 3월 13일 길림성(吉林省) 용정에서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이와 함께 연길현 국자가에 본부를 둔 조선독립의사회가 주관한 용정 만세운동에 3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참가하였고, 조선독립의사회는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었는데, 구춘선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익찬, 윤희준, 방달성 등과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2. 3. 대한국민회 활동 (1919년 ~ 1920년)

1919년 3·1 운동 이후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는 공화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자치기구를 운영하고 무장활동을 추구하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구춘선은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1919년 8월 23일 유예균(劉禮均)과 함께 군정사후원회를 조직하여 노령 지역과의 연계 투쟁을 도모하였고,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왕청현(汪淸縣) 교통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20일, 구춘선은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하마탕에서 동지 약 20명과 비밀 집회를 열고 간도에 국민회 지회 72개소를 설치, 각 지회에 30명 이상의 간부를 두어 군자금을 대대적으로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2월에는 노령 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하여 독립군의 무력을 강화하였다.

1920년 10월 29일, 대한국민회는 간도의 간북대한의민회,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등과 통합하여 임시정부 지휘 하의 간북남부총판부(間北南部總辦府)를 결성하였다. 구춘선은 총판으로서 부총판 방우룡 등과 함께 연길(延吉), 화룡(和龍), 돈화(敦化), 액목(額穆) 지역을 관할하며 활동하였다.

2. 4. 노령과의 연대 투쟁 (1920년 ~ 1928년)

1920년 12월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참여하여 노령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사변을 겪은 후 다시 동만(東滿)으로 돌아왔다. 1921년 12월 돈화현(敦化縣) 양수천자(凉水泉子)에서 총판부(總辦府)를 조직하여 사관학교 설립과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해 일경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 등 활동하였다.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자유시 사변의 책임과 관련하여 대한국민의회 문창범(文昌範)과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1926년 하마탕을 거쳐 왕청현 백초구(百草溝)로 돌아왔다. 그 후 무장운동에서 신앙운동, 교육운동으로 전환하였다가 1927년 국민회 동지들과 북간도 대한국민회 재건운동에 착수하였고, 1928년 11월 돈화현에 있는 마진에게 대한국민당 조직을 지시하였다.

2. 5. 최후 (1934년 ~ 1944년)

1934년 한국교회 희년(禧年)을 맞아 문재린 등과 함께 동만주 기독교 세력의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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