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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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제2공화국은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존재했던 그리스의 공화국이다. 1919-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의 패배와 군주제에 대한 불신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지지 세력이 주도했으나, 테오도로스 팡갈로스의 쿠데타와 경제 위기를 겪으며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었다. 베니젤로스 정부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고, 1935년 군주제 복귀 국민투표를 통해 제2공화국은 종식되었다. 이 시기, 그리스는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사회 보험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회 발전을 이루었으나, 언어 문제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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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제2공화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국호 | 그리스 공화국 (Elliniki Dimokratia) |
표어 | 없음 |
국가 | 자유의 찬가 |
수도 | 아테네 |
공용어 | 그리스어 |
![]() |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국가 의회 공화국 (1924–1925; 1926–1936) |
대통령 |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1924–1926) 테오도로스 판갈로스 (1926)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1926–1929) 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1929–1935) |
총리 |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우 (1924, 첫 번째) 파나기스 차르다리스 (1933–1935, 마지막) |
의회 | 그리스 의회 |
상원 | 그리스 상원 |
하원 | 대표자 회의 |
역사 | |
성립 | 1924년 3월 25일 |
해체 | 1935년 11월 3일 |
인구 | |
1924년 | 5,924,000명 |
1928년 (인구 조사) | 6,204,684명 |
1935년 | 6,839,000명 |
통화 | |
통화 | 그리스 드라크마 |
종교 | |
종교 | 동방 정교회 |
언어 | |
언어 | 그리스어 (카타레부사는 공식 지위를 가졌으며, 데모티키 그리스어는 대중적이었다.) |
기타 | |
면적 | 130,199 제곱킬로미터 |
이전 국가 | 그리스 왕국 |
다음 국가 | 8월 4일 체제 |
2. 역사
1922년 소아시아 재앙이라 불리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면서, 패전한 그리스 군은 왕당파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등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의 강요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폐위되었고, 1923년 망명 중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요르요스 2세도 의회에서 그리스를 떠날 것을 요구받아, 그리스는 공화제를 선택했다. 이는 1915년 콘스탄티노스 왕과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대립에서 정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25년 테오도로스 팡갈로스의 쿠데타로 사임했다. 팡갈로스는 페트리히 사건으로 군부에 제거되었다. 쿤투리오티스는 복권되어 1929년 재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사임했다. 알렉산드로스 제미스가 후임 대통령으로 1935년 왕정 복고까지 재직하였다.
1928년~1932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마지막 집권 시기 그리스는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나, 대공황으로 다시 정치적 불안이 찾아왔다.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은 1935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요르요스 콘딜리스 장군이 진압하였다. 1935년 10월, 콘딜리스는 파나이스 찰다리스 정부를 전복시키고 섭정으로 취임, 공화정을 폐지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복고시켰다. 요르요스 2세가 즉위하며 제2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2. 1. 공화국 수립 배경
1922년, 소아시아 재앙이라 불리는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에 그리스 군은 패배했다.[52] 이 패배로 그리스 왕국의 근동 진출 야망은 좌절되었고, 스미르나 대화재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등 베니젤로스파 군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했다.[53] 이들은 콘스탄티노스 1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장남 요르요스 2세를 왕위에 올렸다.패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그리스는 기존 지원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몇몇 군 관계자들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이들은 명백한 속죄양이었다.[53] ‘6인 재판’에서 6명이 사형당하면서 베니젤로스파와 반(反)베니젤로스파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54][55]
로잔 조약에서 세브르 조약으로 얻었던 영토 대부분을 잃게 되었고,[54] 터키 공화국과 그리스 왕국 간의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다. 약 11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 이주했지만, 이들은 ‘야우르트바프티즈메니(요구르트로 세례받은 자들)’ 등으로 조롱받고 경멸당했다.[57]


1923년 12월, 요르요스 2세는 그리스를 떠났고, 1924년 총선에서 난민들이 군주제 폐지에 강하게 찬성하여, 투표 총수의 70%가 공화제를 선택했다.[55] 1923년 선거에서 반(反)베니젤로스파는 보이콧을 선언하여 의회는 베니젤로스파가 독식하게 되었고, 1924년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제독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60]
1924년 그리스 공화국 국민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8]
찬성 | 반대 |
---|---|
69.95% | 30.05% |
"국민의회가 그리스를 의회 모델에 따른 공화국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한 것을 승인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투표였다.[9]
2. 2. 초기 공화정 (1924년~1925년)
1922년 혁명의 여파로 소아시아에서 그리스 군이 패배하면서, 왕당파 정부에 대한 군사 반란이 일어났다.[6]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등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의 압력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다시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1923년 망명 중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요르요스 2세 역시 의회의 요구로 그리스를 떠나야 했으며, 그리스는 어떤 정부 체제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1924년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제 수립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1915년 콘스탄티노스 국왕과 그의 정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924년 3월 25일, 의회는 공화국을 선포했다.[3] 이 날은 그리스 독립 전쟁이 전통적으로 기념되는 날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4년 4월 13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리스 국민들은 공화제 수립에 찬성표를 던졌다.[9]
{| class="wikitable"
|-
! 1924년 그리스 공화국 국민투표[8]
''국민의회가 그리스를 의회 모델에 따른 공화국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한 것을 승인하십니까?''[9]
|-
|
|}
그러나 국민투표에도 불구하고, 정부 형태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10]
공화국 초기, 베니젤로스 지지자인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제독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5년, 테오도로스 팡갈로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16] 팡갈로스는 국방장관이 정부 전복을 계획하고 있는지 묻자 "물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답했다.[16] 그의 쿠데타는 1925년 6월 24일에 시작되었고, 정부군의 거의 저항 없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6]
팡갈로스는 페트리히 사건을 일으켜 불가리아를 공격하는 등 외교적 실책을 범했다.[16] 이 사건으로 국제 연맹은 그리스의 침공을 비난하고 그리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18] 그리스는 판결을 준수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50명이 사망했다.[19]
2. 3. 베니젤로스 집권과 경제 위기 (1928년~1932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192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정권을 잡았다. 베니젤로스 정부(1928년 7월 4일~1933년 3월 6일) 하에서 그리스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였다. 베니젤로스는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 경제 안정, 난민 문제 해결에 힘썼다. 특히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이스메트 이뇌뉘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1930년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 일련의 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그리스-튀르키예 관계가 회복되고 두 국가 간의 사실상 동맹이 수립되었다.[24] 이 조약의 일환으로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로잔 조약이 양국의 국경에 대한 최종 합의임을 인정하고, 상대 진영의 군사 또는 경제 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며 해군 군비 경쟁을 즉각 중단하기로 약속했다.[24] 1934년에는 파나기스 찰다리스 정부가 아테네에서 그리스, 루마니아, 튀르키예, 유고슬라비아 간 군사 동맹인 발칸 조약에 서명하여 발칸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욱 개선했다.[25]그러나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그리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수출 감소, 해외 송금 감소, 해외 차관 이자 지불 불능 등 경제 위기가 심화되었다. 제2공화국 시대에도 그리스 드라크마(기호: ₯, Δρ 또는 Δρχ)는 국가 통화로 계속 사용되었다. 1928년에 그리스은행이 설립되면서, 그리스 최대 상업은행인 그리스 국립은행은 더 이상 통화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는 1928년 5월 14일 금본위제에 가입하였고, 드라크마는 1파운드(£)당 375드라크마 ±2.5드라크마의 환율로 사실상 안정되었다.[37]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 그리스는 이를 따르지 않고 드라크마는 금본위제를 유지했지만, 파운드에서 미국 달러로 고정 환율제를 전환했다.[37] 그러나, 1932년 4월 드라크마가 평가절하되고 그리스가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환전이 중단되었다.[37]
1924년 | 1925년 | 1926년 | 1927년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1년 | 1932년 | 1933년 | 1934년 | 1935년 | |
---|---|---|---|---|---|---|---|---|---|---|---|---|
1드라크마당 카라트의 금 | 1.79 | 1.56 | 1.26 | 1.31 | 1.30 | 1.30 | 1.30 | 1.30 | 0.83 | 0.56 | 0.56 | 0.56 |
가치 변화 | 12.9% | 19.2% | 3.8% | 0.7% | 0.0% | 0.0% | 0.0% | 36.2% | 32.5% | 0.0% | 0.0% |
이러한 경제 위기로 인해 베니젤로스의 인기는 급락했고, 정치적 불안이 다시 돌아왔다.
2. 4. 정치적 혼란과 군주제 복고 (1933년~1935년)
1933년 선거에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파는 패배했고, 파나이스 찰다리스가 이끄는 인민당이 집권했다.[70]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고,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요르요스 콘딜리스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71] 1935년 10월, 군 최고 지휘부는 찰다리스 정부를 전복시키고 콘딜리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콘딜리스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군주제를 복고시켰다.[72] 이 조작된 투표에서 왕정 복고가 승인되었고, 망명 중이던 요르요스 2세가 복위하면서 제2차 그리스 공화국은 막을 내렸다.[72]3. 정치
제2차 그리스 공화국의 정치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이끄는 자유당과 파나기스 찰다리스가 이끄는 인민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정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한 "인물 중심 정당"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21]
전통적인 그리스 카페는 일상적인 정치 토론의 장으로 활용되었고, 그리스인들은 높은 수준으로 정치 토론에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국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를 매우 비판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21]
1922년 터키-그리스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에 패배한 그리스는 '스미르나의 파멸'이라는 재앙을 겪었다.[52] 이 과정에서 베니젤로스파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퇴위하고 게오르기오스 2세가 즉위했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기존 지원국들로부터 버려졌다는 분위기가 그리스 내에 팽배했다.
로잔 조약으로 세브르 조약에서 얻었던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튀르크인과 그리스인의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다. 약 11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 이주했지만, 이들은 '야우르트바프티즈메니(요구르트로 세례받은 자들)' 등으로 조롱받고 경멸당했다.[57] 이주민들은 그리스 정치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고, 대부분 베니젤로스를 지지했다.[59]
1924년 파블로스 쿤두리오티스 제독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플라스티라스가 이끄는 혁명 정부는 권력을 의회로 이양했다. 베니젤로스는 귀국했지만, 베니젤로스파의 분열과 군주제 지지자들과의 갈등으로 다시 망명해야 했다. 1925년 테오도로스 팡가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체제가 되었지만, 1926년 콘딜리스 장군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이 전복되었다.[65]
팡가로스 실각 후 쿤두리오티스가 대통령으로 복귀하고, 비례 대표제를 기반으로 한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어 베니젤로스파와 반베니젤로스파 등이 초당파적으로 내각을 구성했다.[60][67] 1927년 베니젤로스는 귀국하여 총리에 취임했지만, '선거 조작'을 위해 소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여러 그룹의 이반을 초래했다. 베니젤로스는 '이디오님 법'을 제정하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시도를 불법화하고, 적대자를 제거하는 데 사용했다.[68]
베니젤로스는 주변국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1934년 '발칸 협상'을 체결하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터키와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알바니아, 불가리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1930년에는 터키와의 관계 개선에 성공하여 '앙카라 회담'을 열었고, 1933년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56]
대공황으로 그리스 경제는 침체되었고, 1933년 그리스는 해외 차관의 이자 지불이 불가능해졌다. 베니젤로스파가 이끄는 자유당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파나요티스 차르다리스가 이끄는 인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플라스티라스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추방되었다.[67] 1935년 베니젤로스파 군 장교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베니젤로스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반베니젤로스파는 상원을 폐지하고 계엄령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압승했다. 군주제를 원하는 파벌은 헌법을 무시하고 군주제 복고를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왕정 복고가 승인되었다.[72] 게오르기오스 2세가 복위하고 콘스탄티노스 데메르지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비례 대표제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왕당파와 공화파가 과반을 얻지 못했고, 공산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72][73]
이오아니스 메탁사스가 육군 장관에 임명되었고, 데메르지스가 사망하자 국왕은 메탁사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메탁사스는 정치인들의 대립과 노동 문제로 인한 파업 상황을 이용하여 강력한 정부를 만들자는 제안을 국왕에게 했고, 국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1936년 8월 4일, 공산당의 총파업을 구실로 헌법이 정지되었고, 메탁사스는 이를 이용하여 '8·4 체제'라는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74][73]
3. 1. 선거 제도
제2공화국 시대에는 총 6번의 선거가 치러졌다. 초기에는 비례대표제가 시행되었으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소선거구제로 변경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베니젤로스파의 분열과 반(反)베니젤로스파의 결집을 초래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21] 1930년에는 여성에게 지방 선거에 한해 참정권이 부여되었다.[22]1927년 헌법은 양원제를 확립했다. 두 의회는 그리스 하원(Βουλή)과 그리스 상원(Γερουσία)이었다. 하원은 4년 임기로 선거구에서 선출된 200명에서 2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상원은 120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92명은 국민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선출되고, 10명은 하원과 상원의 합동 회의에서 선출되고, 18명은 다양한 직업을 대표하는 8개의 노동조합에서 선출되었다.[22] 국민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선출된 92명의 상원의원 중 90명은 크기가 다른 선거구에 배정되어 직접 선출되었고, 2명은 소수 민족에게 선거인단을 통해 선출되었다. 서트라키아 튀르크인 1명과 테살로니키 유대인 1명이었다.[22] 각 상원의원은 9년 임기를 수행했으며, 상원의 구성은 3년마다 1/3씩 갱신되었다.
1930년, 5년간의 심의 끝에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분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여성은 이제 선거에 출마할 수는 없었지만 지방 선거에서 투표할 권리를 얻었다. 최초로 그 기회가 주어진 곳은 같은 해 테살로니키였으며, 240명의 여성이 권리를 행사했다. 전국적으로 여성의 투표율은 낮았고, 1934년 지방 선거에는 약 1만 5000명만 참여했다.
4. 경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 하에서 안정과 번영의 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의 영향은 그리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흐로닝언 대학교의 매디슨 프로젝트에 따르면, 1924년 그리스의 GDP는 237.2억달러(2011년 가치 기준)였다.[28] 1924년부터 1935년까지의 경제 성장률은 평균 2.96%였다.[28]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3.52%, 대공황 기간에는 -3.23%, 그리고 1932년부터 1935년까지는 평균 5.24%였다.[28] 1935년까지 GDP는 324.09999999999997억달러(2011년 가치 기준)로 증가했다.[28] 1인당 GDP는 1924년 3,957달러였고, 1935년 공화국 말기에는 4,771달러로,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이며 이웃 국가들보다 훨씬 높았다.[28]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공황 기간 중 국민총소득은 1929년 410억 드라크마, 1930년 370억 드라크마(10% 감소), 1931년 300억 드라크마(30% 감소)였다.
192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노동력은 압도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남성이 주를 이루었다.[31] 남성의 실업률은 16.8%였으며, 여성의 68%는 일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31] 노동 조합은 법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정부는 적극적으로 억제했으며, 1929년부터 1936년 사이에 약 3,000명의 노동 운동가가 내륙으로 유배되었다.[20]
직업 | 비율 |
---|---|
농업 | 53.56% |
산업 | 17.80% |
무역 | 7.68% |
축산업 | 6.93% |
교통 | 4.42% |
자영업 | 3.56% |
개인 서비스 | 2.38% |
공무원 | 1.84% |
금융 | 0.95% |
어업 | 0.62% |
광업 | 0.26% |
성별 | 비율 |
남성 | 65.60% |
여성 | 34.40% |
4. 1. 경제 정책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1928년 7월 4일~1933년 3월 6일)는 그리스은행 설립, 금본위제 가입(1928년 5월 14일) 등 은행 시스템 개혁을 통해 경제 안정을 도모했다.[37]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로 그리스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1931년 9월 21일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 그리스는 드라크마를 미국 달러에 고정하는 환율제를 유지했다.[37] 그러나 드라크마는 계속 압박을 받았고, 1932년 4월 그리스는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고 금본위제를 포기하며 환전이 중단되었다.[37] 드라크마 가치는 루마니아 레우 다음으로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제2공화국 기간 동안 유통된 통화 가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35년에는 56억 드라크마에 달했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 인쇄된 그리스은행의 첫 지폐 시리즈(50, 100, 1,000드라크마)가 도입되었다.[39]
1924년 | 1925년 | 1926년 | 1927년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1년 | 1932년 | 1933년 | 1934년 | 1935년 | |
---|---|---|---|---|---|---|---|---|---|---|---|---|
1드라크마당 카라트의 금 | 1.79 | 1.56 | 1.26 | 1.31 | 1.30 | 1.30 | 1.30 | 1.30 | 0.83 | 0.56 | 0.56 | 0.56 |
가치 변화 | -12.9% | -19.2% | +3.8% | -0.7% | 0.0% | 0.0% | 0.0% | -36.2% | -32.5% | 0.0% | 0.0% |
5. 사회
인구 교환 이후 도시 생활이 증가했다. 1920년에는 인구의 26%가 도시 지역에, 74%가 농촌 지역에 거주했으나,[48] 1928년에는 난민 유입으로 인해 각각 33%와 67%로 변화했다.[48] 이민으로 인해 카발라(118%), 피레우스(85%), 아테네(54%) 등 일부 도시는 1920년과 1928년 인구 조사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48]
1928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 전체 인구는 6,204,684명이었다.[48] 이는 1920년 인구 조사(5,536,000명)보다 증가한 수치이며, 로잔 조약에 따라 약 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20000sqkm 면적의 영토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가한 것이다.[48] 또한 같은 해 인구 조사에 따르면 120만 명(전국 인구의 19%)이 난민으로 등록되었다.[48]
현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제2공화국 시대 그리스는 비교적 동질적인 국가였으며, 192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거의 94%가 그리스계였다.[48]
5. 1. 사회 복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는 사회보험연구소(IKA)를 설립하여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려 했다.[42] IKA는 당시 그리스에서 운영되던 50여 개의 사회보험 프로그램들을 통합하여 단일 국가 운영의 보편적 사회보험 시스템을 구축했다.[42]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기반으로 국제노동기구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43] IKA는 모든 가입자에게 병가 급여와 산재 보상을 제공했지만, 실업 수당은 제공하지 않았다. IKA의 설립 목적은 노동조합주의 증가 분위기 속에서 노동 조건 악화를 막고, 당시 열악했던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44] 또한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로도 여겨졌다.[44]IKA는 그리스 내 모든 고용인을 대상으로 했다.[42] 공공 및 민간 부문 고용인, 그리스 국적 선박 고용인, 해외에서 일하는 그리스 시민, 노동 조합 관리자, 그리고 모든 학생이 포함되었다.[42] 급여는 9단계 척도에 따라 하루 ₯grc0.05부터 ₯grc200까지 다양했다.[42] IKA는 예비금을 국채나 국가 보증 증권, 부동산, 공공 사업 대출에 투자할 수 있었다.[43]
하지만 IKA는 여러 이해관계 집단의 반발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44] 베니젤로스 정부가 1934년에 붕괴되고, 후임 정부도 IKA 설립을 시행하지 못했다. 제2공화국 붕괴 이후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정권이 노동 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IKA 설립을 활용했고,[45] IKA는 1937년 11월에 출범했다.[47] 메탁사스 정권은 IKA의 예비금을 국가 계획에 사용했지만,[43] IKA를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44]

5. 2. 민족과 언어
제2공화국 시대 그리스는 비교적 동질적인 국가로, 1928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거의 94%가 그리스인이었다.[48] 1920년 인구조사에서 그리스인의 비율은 80.53%였으나, 1928년에는 93.75%로 증가했다.[48] 반면, 인구 교환으로 인해 튀르크인과 불가리아인 공동체의 인구는 감소했다.[48] 마케도니아에서는 비그리스인의 수가 1920년 48%에서 1928년 12%로 감소했지만, 그리스 대백과사전은 마케도니아에 남은 소수 민족들이 "아직 그리스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48]공화국 시대 동안, 그리스에는 중요한 소수 민족이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소수 민족은 서트라키아 튀르크인으로, 약 10만 3천 명(인구의 1.66%)이었으며, 그리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유일한 소수 민족이었다.[48] 인구의 1% 이상을 차지하는 다른 민족 집단으로는 불가리아인(1.33%)과 솔로니키 유대인(1.13%)이 있었다.[48]
이러한 인종 구성의 균질성은 언어에도 반영되었다. 1928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92.8%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으며, 터키어(3.1%)와 마케도니아어(1.3%, 인구 조사에서는 '마케도노슬라브어'로 기재)가 그 뒤를 이었다.[48] 다만, 1928년 인구 조사가 실제 언어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49]
그리스어 문제에서는 카타레부사와 데모틱이라는 두 가지 공식적인 그리스어 변종이 경쟁했다. 국가의 공식 언어인 카타레부사는 아티카 방언을 기반으로 한 인공 언어였고, 데모틱은 구어였다. 학교에서는 두 언어가 번갈아 가며 교육용 언어로 사용되었다.[50] 1925년부터 정부는 슬라브어 사용 소수 민족을 위해 아베체다르라는 읽기책을 도입했으나, 이 책은 여러 논란 끝에 결국 철회되었다.[49]
6. 외교 관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주변국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1934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터키와 발칸 협상을 체결하여 국경선을 확정하고, 불가리아, 알바니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했다.[68] 터키와는 콘스탄티노스 아라보글루의 세계 총대주교 취임 문제로 일시적 긴장이 있었지만,[56] 1930년 앙카라 회담을 통해 관계 개선에 성공, 1933년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69][56] 베니젤로스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70]
6. 1. 터키와의 관계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의 협상을 통해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1930년 앙카라 회담에서 양국은 로잔 조약으로 확정된 국경선을 인정하고, 해군 군비 경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베니젤로스는 더 나아가 아타튀르크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6. 2. 발칸 국가들과의 관계
1934년, 그리스는 루마니아, 터키, 유고슬라비아와 발칸 조약을 체결하여 지역 안정을 도모했다.[19] 그러나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는 이 조약에서 제외되어 발칸 지역의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19]6. 3. 국제 연맹과의 관계
그리스는 국제 연맹의 적극적인 회원국이었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국제 연맹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2] 그리스는 국제 연맹 예산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국제 연맹에서 활동했다.[32] 1932년 초 베니젤로스는 그리스 경제를 돕기 위해 국제 연맹에 미화 5,000만 달러(5000만달러)의 대출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32]7. 결론
공화정 수립 국민투표에서 70%의 지지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Ἑλληνικὴ Δημοκρατία|헬레니키 디모크라티아el로 명명되었으며,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그리스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이념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4] 터키-그리스 전쟁 패배와 인구 교환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스티리아노스 고나타스 등 베니젤로스 지지파 군 장교들이 주도한 혁명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선포되었다.[53]
그러나 베니젤로스파와 반(反)베니젤로스파 간의 갈등,[54][55] 테오도로스 팡가로스의 쿠데타와 군사 독재,[62] 콘딜리스의 쿠데타[65] 등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이어졌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70] 그리스는 차르다리스 내각의 군주제 복고 움직임과 베니젤로스파의 쿠데타 시도[71]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1935년 국민투표를 통해 군주제가 복고되었고,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8·4 체제라는 군사 독재 정권이 수립되면서 제2공화국은 막을 내렸다.[74][73]
이처럼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제2공화국 시기 그리스는 금본위제 가입, 그리스 은행 설립 등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37] 발칸 협상 체결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적 안정을 모색했다.[68] 또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는 이후 그리스 정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제2공화국의 경험을 교훈 삼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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