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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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케다야 사건은 1864년 6월 5일, 교토의 이케다야 여관에서 신선조가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습격한 사건이다. 당시 교토는 존왕양이 사상을 가진 낭인들의 활동 거점이었고, 신선조는 이들의 회합 정보를 입수하여 습격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지사들이 사망하거나 체포되었고, 신선조는 그들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이후, 신선조는 포상과 함께 세력을 확장했으며, 이케다야는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 폐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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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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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이케다야 사건 |
로마자 표기 | Ikedaya jiken |
발생일 | 1864년 7월 8일 (분세이 원년 6월 5일) |
발생 장소 | 교토 산조 기야마치 이케다야 여관 |
좌표 | 35° 0′ 32.2″ N 135° 46′ 11.6″ E |
![]() | |
원인 | |
원인 | 후루타카 슌타로의 자백에 의한 교토 방화 계획 등의 발각 (이설 있음) |
교전 세력 | |
교전 1 | 신센구미 |
교전 2 | 조슈 번, 도사 번, 히고 번 등의 존왕양이파 지사 |
지휘관 | |
신센구미 |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
존왕양이파 지사 | 가쓰라 고고로, 미야베 데이조, 요시다 도시마루 |
규모 | |
신센구미 | 34명 (곤도 그룹 10명 (이케다야 내부), 히지카타 그룹 24명 (별도)) |
존왕양이파 지사 | 40명 |
피해 규모 | |
신센구미 | 사망 1명, 부상 4명 (부상자 중 2명은 후에 사망) |
존왕양이파 지사 | 사망 8명, 체포 23명 |
결과 | |
결과 | 신센구미의 승리 |
전투 시간 | 2시간 |
2. 경위
에도 시대 말기, 교토는 다양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로닌들의 집결지였다. 특히 조슈, 도사, 히고 출신 로닌들은 존황양이 사상을 தீவிர하게 지지하며, 서양 세력의 배척을 주장했다. 고메이 천황과 아이즈 번, 사쓰마 번은 막부와 황실의 통합을 추구한 반면, 막부는 중앙 집권적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로닌들은 서로를 암살하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다. 이에 막부는 신선조를 포함한 로닌 집단을 조직하여 존황양이 지사들을 체포하거나 처단하는 임무를 맡겼다.
지사들은 이케다야 여관을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신선조는 반 막부 단체의 일원인 후루타카 슌타로를 체포했는데, 그는 조슈 번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권력 장악을 위해 조정의 일원인 모리와 신뢰를 쌓고자 했다.[1] 후루타카 체포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른 이론도 있는데, 테시로 토시스케가 마스야의 상속 문제로 후루타카에게 앙심을 품고 신선조에 그의 위치를 알렸다는 설도 있다.
신선조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가 주도한 심문은 매우 가혹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히지카타는 후루타카를 발목으로 매달아 손목을 묶고, 발뒤꿈치에 5인치 길이의 못을 박은 후 촛불을 꽂아 뜨거운 왁스가 종아리에 흘러내리게 했다고 한다. 결국 후루타카는 교토에 방화하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포획할 계획이었다고 자백했다.
후루타카의 자백에는 구니 아사히코 친왕 방화 계획과 기온 지구에 많은 조슈 번 가신들이 숨어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2][1] 이러한 긴급 상황에 곤도 이사미는 신선조 병력 일부를 이끌고 지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여관으로 향했고, 히지카타가 이끄는 두 번째 그룹이 뒤따랐다.
역사학자들은 지사들이 실제로 교토 방화를 준비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이는 고문받은 후루타카의 자백에만 근거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체포 소식에 조슈 번 가신들은 이케다야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려 했다. 요시다 토시마로와 미야베 테이조는 즉각적인 행동을 원하는 이들을 설득하여 회의를 열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마음을 바꾸게 했다.[3] 가쓰라 고고로 (후의 기도 다카요시)는 후루타카 구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고 주장했다.
히지카타의 가혹한 심문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나가쿠라 신파치 등 참석자들의 증언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히지카타가 후루타카를 심하게 고문했다면 그가 의식을 잃어 진술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
2. 1. 발각
에도 막부 말기 교토는 정국의 중심지로써 존왕양이(尊王攘夷) ・ 근왕(勤王) 등 각종 정치사상을 가진 여러 번의 로시(浪士)들이 잠복해 활동하고 있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長州藩)이 실각하고 조정에서는 공무합체파가 주류가 되어 있었다.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움직이는 와중에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인 신센구미가 동원되어 교토 시내의 경비나 수색이 행해졌다.[11]5월 하순 무렵, 신센구미 제사조역(諸士調役) 겸 감찰을 맡고 있던 야마자키 스스무(山崎丞) ・ 시마다 가이(島田魁) 등이 시조(四条) 고바시우에루신 정(小橋上ル真町)에서 땔감 장사를 하는 마스야 기에몬(枡屋喜右衛門, 후루타카 슌타로)의 존재를 밝혀내 아이즈번에 보고하였다. 수색 결과 무기나 조슈 번과 주고 받은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이른 아침, 후루타카를 체포한 신센구미는 히지카타 도시조의 고문으로 후루타카를 자백하게 했다. 자백 내용은 "기온 마쓰리 전의 바람이 강한 날을 노려 고쇼에 불을 지르고, 그 혼란을 틈타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을 유폐,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을 암살하고, 고메이 천황을 조슈로 이동시킨다(데려간다)"라는 것이었다.[1] 그러나, 자백한 것은 자신의 본명이 후루타카 슌타로라는 것뿐이라는 설도 있으며, 후루타카에 대해 언급된 일지에는 자백 내용의 기술이 없기 때문에 자백은 본명뿐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나아가 조슈 번 ・ 도사번(土佐藩) ・ 히고 번(肥後藩) 등의 존왕파가 체포된 후루타카를 구출해 내기 위한 습격계획에 대해서도 실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협의하는 회합이 교토의 이케다야(池田屋)나 시코쿠야(四国屋)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도 밝혀 냈다.
이로 인해, 존양파의 낭사들이 시간을 두고 회합할 것이라고 본 신선조는 아이즈번에 보고한 후, 철저한 시중 탐색을 제안했다. 5일 저녁, 아이즈번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산조~시조 방면의 수색을 시작했다.

2. 2. 야습
亥の刻일본어(오후 10시경)이 지나자,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신센구미 부대는 이케다야에서 밀회를 하던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발견했다. 곤도 부대는 소수의 인원과 함께 이케다야로 돌입하여 한밤중에 전투가 벌어졌다. 20여 명의 존왕양이파에 맞서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4명이 먼저 쳐들어갔고, 나머지는 밖을 지켰다.[4] 실내로 돌입한 오키타는 요시다 토시마로를 베었으나, 전투 중 무더위에 지병이 도져 전선에서 이탈했다. 1층에 있던 도도는 방심하여 하치가네를 풀었다가 이마를 베여 피가 눈에 들어가 싸우기 힘들어져 전선에서 이탈했다.[1]습격을 받은 미야베 데이조 등 지사들은 응전하면서 현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안도 하야타로, 오쿠사와 에이스케, 닛타 가쿠자에몬 등에게 도사 번을 탈번한 모치즈키 가메야타 등 낭사들이 필사적으로 덤벼들어 도망쳤다. 이로 인해 오쿠사와는 사망하고, 안도와 닛타도 1개월 후에 사망했다. 모치즈키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조슈 번 저택 부근까지 도망쳤지만, 추격대에 쫓겨 할복했다.[3] 같은 전투 끝에 탈출에 성공한 도사 번 출신 노로야마 고키치로의 조서가 2009년 고치현이 구입한 토사 교토 번저 자료(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소장)에서 발견되어, 사건 전후의 상황이 밝혀졌다. 검이나 하카마를 잃고, 동료 이시카와 준지로가 현장에서 싸우다 죽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점에서 전투의 격렬함을 짐작할 수 있다.[3]
신센구미 측은 한때 곤도, 나가쿠라 2명이 되었지만, 히지카타 도시조 부대의 도착으로 전세는 신센구미에게 유리하게 기울었고, 방침을 "참살"에서 "체포"로 변경했다. 9명 사살, 4명 체포라는 전과를 올렸다. 아이즈 번・구와나 번의 지원군은 전투 후에 도착했다. 히지카타는 신센구미의 공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걸음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3. 전투
(2005년 당시에는 파칭코 가게였다)]]
(2009년 9월 현재, 이자카야로 운영되고 있다)
해의 시각 (오후 10시경)이 지나자, 곤도 부대는 이케다야에서 모의 중인 존황양이파 지사를 발견했다. 곤도 부대는 몇 명과 함께 돌입하여 한밤중에 전투가 벌어졌다. 20여 명의 존왕양이파에 맞서 처음 쳐들어간 것은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4명이었고, 나머지는 밖을 지켰다. 실내로 돌입한 오키타는 분전했지만, 전투 중에 병으로 쓰러져 전선에서 이탈했다. 또한 1층의 도도는 방심하여 하치킨을 잡으려다 이마를 베여, 피가 눈에 들어가 전선에서 이탈했다.
습격을 받은 미야베 테이조 등 지사들은 응전하면서 현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안도 사타로, 오쿠사와 에이스케, 닛타 카쿠자에몬 등에게 도사 번을 탈번한 모치즈키 카메야타 등 낭사들이 필사적으로 덤벼들어 도망쳤다. 이로 인해 오쿠사와는 사망하고, 안도와 닛타도 1개월 후에 사망했다. 모치즈키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조슈 번 번저 부근까지 도망쳤지만, 추격대에 쫓겨 할복했다. 같은 전투 끝에 탈출에 성공한 도사 번의 노로야마 고키치로의 조서가 2009년에 고치현이 구입한 토사 교토 번저 자료(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소장)에서 발견되어, 사건 전후의 상황이 밝혀졌다. 검이나 바지를 잃고, 동료 이시카와 준지로가 현장에서 싸우다 죽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던 점에서 전투의 격렬함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선조 측은 한때 곤도, 나가쿠라 2명이 되었지만, 히지카타 토시조 부대의 도착으로 전세는 신센구미에게 유리하게 기울었고, 방침을 "참살"에서 "체포"로 변경했다. 9명 사살, 4명 체포라는 전과를 올렸다. 아이즈 번・구와나 번의 지원군은 전투 후에 도착했다.
이 전투에서 몇 명의 존왕양이파는 도주했지만, 이어진 다음 날 아침의 시중 소탕에서 아이즈・쿠와나 번 등과 연계하여 20명 정도를 체포했다. 이 시중 소탕도 격전이 되어, 아이즈 번은 5명, 히코네 번은 4명, 쿠와나 번은 2명의 즉사자를 냈다.
그 후, 신선조는 밤중에 돌아가면 암살의 위험이 있으므로 날이 밝을 때까지 대기했고, 다음 날 정오, 미부 촌의 둔소로 귀환했다. 길가에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가쓰라 고고로(후의 기도 다카요시)는 회합에 너무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일단 이케다야를 나와 쓰시마번저에서 오시마 도모노신과 담화하고 있다가 화를 면했다. 담화 중에 밖의 소란으로 이상을 눈치챈 가쓰라는 현장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오시마에게 제지당해 멈췄다고, 가쓰라의 회상록 『가쓰라 고고로 교토 변동의 시동』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돗토리 번사・아다치 세이후의 일기에 따르면, 오시마는 사건 전인 5월 28일 (7월 1일)에 교토를 떠나, 6월 5일 (7월 8일) 당일에는 에도에 있었으며, 6월 13일 (7월 16일)이 되어서 사건을 알았다고 되어 있어, 오시마가 가쓰라를 막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9]。그 외에도, 교토 유수역이었던 노미 오리에는, 수기에 "가쓰라 고고로 의는 이케다야에서 지붕을 통해 도망쳐, 쓰시마 저택으로 돌아갔다"라고 적어 두었지만, 그에 앞서 "가쓰라 고고로가 살해당했다"는 오보를 번에 전달하여 번 내를 더욱 혼란시켰으며, 또한 이케다야에서 쓰시마 번저까지 도망갈 수 있는 지붕이 이케다야에 없다는 점 등에서, 노미의 기술은 신뢰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4. 이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쇼 방화 계획",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암살", "천황 납치" 등 지사 측의 음모는 아이즈번, 구와나 번, 신센구미 등 막부 측의 주장이며, 실력 행사 정당화 및 존왕양이파의 신용 실추를 노린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로 이러한 계획은 막부 측의 기록에는 있지만, 지사 측의 기록에는 전혀 없고, 가쓰라 고고로가 기록한 『기토 다카요시 일기』에도 이케다야에서의 회합은 "신센구미에 체포 감금된 동료(후루타카 슌타로)를 구하기 위한 회합"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3]
다만 이케다야 사건 전년인 분큐 3년(1863) 8월 18일의 정변 이후, 조슈로 도망가 있던 존왕양이파 공경 산조 사네토미, 구루메 번의 마키 이즈미, 조슈 번의 기지마 또베 등에 의해 "무력으로 교토로 진발하여 조슈의 무실을 호소한다"는 진발론이 활발하게 제창되었다. 이 진발론에 대한 영(令)은 이케다야 사건 전날인 6월 4일에 조슈 번에서 발해졌다.
신센구미가 고다카 슌타로 저택을 습격한 목적은 처음에는 고다카 저택을 교토의 정숙소로 삼고 있던 미야베 데이조의 체포였지만, 미야베는 신센구미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고다카에 의해 도망쳤다. 신센구미는 급히 체포 대상을 미야베에서 고다카 1명으로 바꾸어 고문을 통해 미야베의 도주처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고다카는 미야베의 도주처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증언대로, 여러 부대로 나누어 시조에서 산조의 여관 등을 샅샅이 탐색했고, 그 결과 콘도 부대의 약 7~10명이 여관 이케다야에서 미야베 데이조와 함께 있던 지사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가쓰라의 수기에 따르면, 이케다야에서의 회합은 고다카 체포 후에 급히 결정된 것이며, 사전에 신센구미가 장소를 파악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나가쿠라 신파치는 수기 『낭사 분큐 보고 기사』에서 "모조리" 탐색한 취지를 말하고 있으며, 사건 직전에 기온의 이즈쓰야에 신센구미가 탐색을 실시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회합 장소가 어디인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많은 장소를 탐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콘도의 서간과 나가쿠라의 수기에 따르면, 당일은 콘도 부대 10명, 히지카타 부대 12명, 이노우에 부대 12명의 세 부대로 나누어 탐색을 실시했고, 지원하러 온 것은 이노우에 부대였다. 콘도의 서간에 따르면, 이케다야에 들이닥친 것은 콘도,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도도 헤이스케, 콘도 슈헤이 5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나가쿠라의 수기 및 사건 후의 포상자 명부에서 추정하면, 콘도, 오키타, 나가쿠라, 도도, 오쿠자와, 안도, 니타, 타니 만타로, 다케다 간류사이, 아사노 가오루 10명이다.
콘도는 서간에서 당일은 병자가 많아 인력이 적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사건 직전에 탈주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용마가 간다』 등에서는, 야마자키 스스무가 약장수로 변장하여 사전에 이케다야에 잠입하여 탐색하고, 돌입 전에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야마자키를 확보했다면 처음부터 주력을 이케다야에 투입했을 것이고, 야마자키의 이름은 포상자 명부에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둔소 잔류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영향
신센구미는 교토에 불을 지르려던 계획을 막아내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12] 반면, 존왕양이파는 요시다 토시마로, 기타조에 키마, 미야베 테이조, 오타카 마타지로, 이시카와 준지로, 스기야마 마츠스케, 마츠다 쥬스케 등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나중에 신정부 수립 이후 '순난칠사'(殉難七士)로 불리게 된다. 사망한 지사들은 산조 대교 동쪽의 산엔지에서 장례를 치렀다.[12]
조슈 번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파가 더욱 격렬해져 군사를 일으켜 교토로 올라왔고, 7월 19일 (8월 20일)에 금문의 변을 일으켰다.[12]
이케다야 사건으로 조슈 번의 인재들이 희생되면서 메이지 유신이 1년 늦춰졌다는 평가도 있지만, 반대로 존왕양이파를 자극해 결과적으로 유신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있다.[12]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 사건이 없었다면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삿초토히)이 중심이 된 메이지 유신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각 번들이 서로 견제하고 있었고, 특히 조슈의 급진적인 행동을 다른 번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슈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다른 번들이 힘을 합쳐 막부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12]
신선조는 이 사건으로 인지도가 높아져, 히지카타 토시조와 사이토 하지메 등이 직접 에도로 가서 대원을 모집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10]
사건 후,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숨겨준 혐의로 이케다야 주인 이케다야 소베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케다야도 7개월간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친척에 의해 인근에서 영업을 재개했지만, 나중에 폐업하여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10]
원래의 이케다야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다른 경영자가 사사키 여관으로 영업했으나 폐업했다. 1960년경까지 당시 건물이 남아 있었지만, 그 후 철거되었고, 부지는 임대 빌딩 (1978년경에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점포)이나 파칭코 가게 등으로 바뀌었다가, 2009년에 이자카야 체인 치무니가 신선조를 테마로 한 이자카야 "해선찻집 이케다야 하나노마이"를 개업했다.[10]
그 자리에는 사사키 여관의 연고자가 건립한 "이케다야 소동의 터"라고 새겨진 석비가 있다.
6. 논공행상
이 사건에서 활약한 신센구미 대원들에게는 모두 금 10냥씩이 지급되었으며, 추가로 지급된 금액별 명단은 아래와 같다.
추가 지급액 | 명단 |
---|---|
금 20냥 | 곤도 이사미 |
금 13냥 | 히지카타 도시조 |
금 10냥 |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다니 만타로, 아사노 도타로, 다케타 간류사이 |
금 7냥 | 이노우에 겐자부로, 하라다 사노스케, 사이토 하지메, 시노즈카 미네조, 하야시 신타로, 시마다 카이, 가와시마 가쓰지, 가쓰라야마 부하치로, 다니 산주로, 미시나 주지, 아리미치 간고 |
금 5냥 | 마쓰바라 주지, 이키 하치로, 나카무라 긴고, 오자키 야사부로, 슈쿠인 료조, 사사키 구라노스케, 가와이 기사부로, 사카이 효고, 기우치 미네타, 마쓰모토 기지로, 다케우치 겐타로, 곤도 슈헤이 |
사망한 오쿠자와 에이스케, 안도 하야타로, 닛타 가쿠자에몬에게는 각각 금 10냥에 10냥이 추가로 지급되었다.[3]
아이즈번은 신센구미를 칭찬했고, 약 500RYO를, 황실은 신센구미에게 약 100RYO를 주었다.[3]
7. 사건 이후의 이케다야
이케다야는 사건으로 인해 7개월 동안 영업이 정지되었다가, 소유자의 친척 중 한 명이 여관을 다시 열었지만 결국 폐업했다.[7] 이후 이케다야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다른 경영자가 사사키 여관으로 영업했으나 폐업했다. 1960년경까지 당시 건물이 남아 있었지만, 그 후 철거되었고, 부지는 임대 빌딩이나 파칭코 가게 등으로 전전했다.[7] 2009년에는 이자카야 체인 치무니가 신선조를 테마로 한 이자카야 "해선찻집 이케다야 하나노마이"를 개업했다.[7] 현재 그 자리에는 "이케다야 소동의 터"라고 새겨진 석비가 있다.
8. 출동한 신센구미 대원 명단
이케다야 사건에 출동한 신센구미 대원은 다음과 같다(여러 설이 있음).
곤도 이사미 부대 |
---|
히지카타 도시조 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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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곤도 부대
곤도 이사미 부대 |
---|
해시(밤 10시경) 무렵,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부대는 이케다야에서 모의 중이던 존왕파 지사들을 발견했다. 곤도 부대는 겨우 5명에서 7명의 적은 대원들만을 거느리고 이케다야로 돌입해 한밤중에 전투가 벌어졌다. 스무 명 남짓의 존왕양이파에 맞서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국장 곤도 이사미, 1번대 조장 오키타 소지, 2번대 조장 나가쿠라 신파치, 8번대 조장 토도 헤이스케 네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이케다야 건물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3] 곤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토도 헤이스케, 슈헤이와 함께 이케다야에 들어갔다.[4] 반면, 나가쿠라 신파치는 곤도 이사미가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토도 헤이스케와 함께 들어갔다고 언급한다.[1]
건물 안으로 들어간 오키타 소지는 요시다 토시마로를 베고 난 뒤에 분전 도중에 무더위에 지병이 도져 전선에서 이탈해야 했고, 1층의 토도 헤이스케는 방심하고 鉢金(하치가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장비로 천으로 된 머리띠 중앙에 철판을 붙인 형태)를 풀었다가 이마를 베여 피가 흘러 눈을 뜨지 못하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뒷문에서 지키고 있던 안도 하야타로, 오쿠자와 에이스케, 닛타 가쿠자에몬 등이 있는 곳에서 도사의 탈번 로닌인 모치즈키 키야타 등 무사들이 탈출을 기도하며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그들을 베고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오쿠자와 에이스케는 사망하고 안도 하야타로, 닛타 가쿠자에몬도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곤도 슈헤이는 창이 부러지고 실제 전력은 일시에 국장 곤도 이사미와 2번대 부장 나가쿠라 신파치만이 남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이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을 맞댄 채 1대 1로 적을 하나씩 죽여 나가던 상황에서 10번대 조장 하라다 사노스케, 아이즈 번의 원병을 요청하러 간 3번대 조장 사이토 하지메 등의 병력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8. 2. 히지카타 부대
히지카타 도시조가 이끄는 부대는 24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대원들은 다음과 같다.이름 |
---|
히지카타 도시조 |
이노우에 겐자부로 |
하라다 사노스케 |
사이토 하지메 |
시마다 카이 |
타니 산주로 |
가와시마 가쓰지 |
구즈야마 부하치로 |
아리토시 간고 |
시노즈카 미네조 |
하야시 신타로 |
미시나 주지 |
사사즈카 미네조(簗塚峰蔵) |
카츠라야마 타케하치로(桂山武八郎) |
아리도오시 칸고(有働喜郷) |
마츠바라 츄지(松原忠治) |
이키 하치로(伊岐八郎) |
나카무라 킨고(中村金吾) |
오제키 야시로(大関弥四郎) |
슈쿠인 료조(宿院良蔵) |
사사키 쿠라노스케(佐々木蔵之助) |
카와이 키사부로(河合耆三郎) |
사카이 효고(酒井兵庫) |
키우치 미네타(木内峰太) |
마츠모토 키지로(松本喜次郎) |
타케우치 겐타로(竹内源太郎) |
콘도 슈헤이(近藤周平) |
히지카타 부대는 곤도 부대와 함께 이케다야 사건에 투입되었으며, 곤도 부대가 이케다야 내부를 수색하는 동안 히지카타 부대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유연하게 임무를 수행했다.[3]
8. 3. 마쓰바라 부대
마쓰바라 주지, 슈쿠인 료조, 이키 하치로, 나카무라 긴고, 오제키 야시로, 사사키 구라노스케, 가와이 기사부로, 사카이 효고, 기우치 미네타, 마쓰모토 기지로, 다케우치 겐타로, 곤도 슈헤이 (마쓰바라 부대는 히지카타 부대 소속이었다는 설도 있다.)8. 4. 둔소 수비
야마나미 케이스케, 오제키 마사지로, 야나기타 산지로, 야마자키 스스무, 오가타 슌타로, 야마노 야소하치9. 사상자 및 체포자 명단
신센구미는 이케다야에서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급습하여 9명을 사살하고 4명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음은 이케다야 사건의 사상자 및 체포자 명단이다.
=== 존왕양이파 측 ===
이름 | 소속 | 결과 | 비고 |
---|---|---|---|
요시오카 쇼스케 | 불명 | 즉사 | |
사토 이치로 | 조슈 번 | 즉사 | 교토 저택 관리인[1] |
이시카와 준지로 | 도사 | 즉사 | |
후지사키 하치로 | 도사 | 즉사 | 산조오하시에서 부상 후 자결, 혹은 오사카 도사 번 저택으로 보내진 후 사망[1] |
기타조에 기마 | 도사 | 즉사 | 고모자와 칸의 창작 중 계단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유명[1] |
미야베 데이조 | 히고 | 자결 | 이케다야에서 자결[1] |
오타카 마타지로 | 하야시다 | 즉사 | |
요시다 도시마로 | 조슈 번 | 자살 | 탈출 후 자결[1] |
모치즈키 기야타 | 도사 | 자살 | 탈출 후 자결[1] |
스기야마 마쓰스케 | 조슈 번 | 부상 후 사망 | 사건을 알고 조슈 번 저택에서 달려갔으나 아이즈 번 병사에게 베여 나중에 사망[1] |
야마다 도라노스케 | 조슈 번 | 부상 후 사망 | 일단 탈출, 나중에 체포[1] |
도코로야마 아키치로 | 불명 | 부상 후 사망 | |
마쓰다 주스케 | 히고 | 즉사 | |
사에키 이즈오 | 조슈 번 | 체포 | 게이오 원년 6월 4일 (1865년7월 26일)에 형사[1] |
야마우치 다로자에몬 | 불명 | 체포 | |
오타카 주베 | 하야시다 | 체포 | 오타카 마타지로의 동생, 일단 탈출 후 나중에 체포, 7월 4일 (8월 5일)에 옥사[1] |
후루타카 슌타로 | 불명 | 체포 | |
니시카와 고조 | 교토 | 체포 | 일단 탈출, 10일 후 체포, 겐지 2년 2월 11일 (1865년 3월 8일)에 옥사[1] |
오나카 슈젠 | 불명 | 체포 | |
사와이 다테와키 | 불명 | 체포 | |
세오 고주로 | 불명 | 체포 | |
모리 가즈에 | 교토 | 체포 | |
후치가미 이쿠타로 | 구루메 | 탈출 | |
이토 히로나가 | 도사 | 즉사 | |
후쿠오카 유지로 | 이요마쓰야마 | 즉사 | |
오치 마사유키 | 도사 | 즉사 | |
히로오카 나미히데 | 조슈 번 | 즉사 | 신관[1] |
노로야마 고키치로 | 도사 | 탈출 | 유학자 이타쿠라 카이도를 의지, 나중에 조슈 번 저택에서 자결[1] |
우치야마 타로에몬 | 조슈 번 | 체포 | 무급 통사, 7월 20일 (8월 21일) 형사[1] |
기타무라 젠키치 | 불명 | 탈출 | 마타지로의 문인, 창 상처를 입었지만, 이케다야 뒤쪽에서 강가로 도망쳐 배 안으로 숨어들어 구조[1] |
안도 테츠마 | 불명 | 체포 | 체포되었으나 도망[1] |
기무라 킨고로 | 교토 | 체포 | 구사카 겐즈이로 오인되어 체포[1] |
이마이 사부로에몬 | 도요오카 | 체포 | 46세, 체포되어 형사[1] |
무라카미 슌페이 | 조슈 사이고 | 체포 | 체포되어 형사[1] |
가와다 사쿠마 | 인슈 | 탈출 | |
다카기 겐에몬 | 히고 | 탈출 | 조슈 번 저택으로 도망[1] |
미야베 슌조 | 히고 | 탈출 | 테이조의 동생, 조슈 번 저택으로 도망[1] |
이와사 모 | 단바 | 탈출 | 이케다야 욕조 안에 숨어 구조[1] |
오사와 잇페이 | 조슈 번 | 탈출 | 이케다야 욕조 안에 숨어 구조, 조슈 번 저택으로 탈출[1] |
마쓰야마 료조 | 에치고 | 탈출 | 마쓰야마 다카요시의 사촌, 전 신선조라고도 함[1] |
다나카 조큐로 | 교토 | 체포 | |
요시다 고로 | 에치젠 | 체포 | |
나구모 헤이마 | 가미노토네 누마다 촌 | 체포 | |
구니시게 마사후미 | 조슈 번 | 탈출 | |
니시키오리 우무노스케 | 오와리 | 체포 | 2층 남쪽에서 도망, 미토 저택으로 도망쳤지만 쫓겨나 체포, 형사[1] |
9. 1. 신센구미 측
신센구미 측에서는 곤도 이사미 부대가 이케다야에서 존왕양이파 지사들이 모의 중인 것을 발견하고,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도도 헤이스케 4명이 먼저 돌입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키타는 전투 중 병으로 쓰러져 전선에서 이탈했고, 도도는 이마를 베여 피가 눈에 들어가 싸우기 어려워 전선에서 이탈했다.[1]습격을 받은 지사들은 응전하면서 탈출을 시도했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안도 사타로, 오쿠자와 에이스케, 닛타 가쿠자에몬 등에게 낭사들이 덤벼들어 도망쳤다. 이로 인해 오쿠자와는 즉사했고, 안도와 닛타는 1개월 후 사망했다.[9]
신센구미 측은 한때 곤도 이사미, 나가쿠라 신파치 2명만 남았지만, 히지카타 토시조 부대의 도착으로 전세가 유리해져 "참살"에서 "체포"로 방침을 변경했다. 9명 사살, 4명 체포라는 전과를 올렸고, 아이즈 번・구와나 번의 지원군은 전투 후에 도착했다.[9]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 측은 오쿠자와 에이스케가 즉사, 안도 하야타로와 닛타 가쿠자에몬은 중상 후 사망하였다. 도도 헤이스케와 나가쿠라 신파치는 경상을 입었다.[1]
9. 2. 존왕양이파 측
이름 | 소속 | 결과 | 비고 |
---|---|---|---|
요시오카 쇼스케 | 불명 | 즉사 | |
사토 이치로 | 조슈 번 | 즉사 | 교토 저택 관리인[1] |
이시카와 준지로 | 도사 | 즉사 | |
후지사키 하치로 | 도사 | 즉사 | 산조오하시에서 부상 후 자결, 혹은 오사카 도사 번 저택으로 보내진 후 사망[1] |
기타조에 기마 | 도사 | 즉사 | 고모자와 칸의 창작 중 계단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유명[1] |
미야베 데이조 | 히고 | 자결 | 이케다야에서 자결[1] |
오타카 마타지로 | 하야시다 | 즉사 | |
요시다 도시마로 | 조슈 번 | 자살 | 탈출 후 자결[1] |
모치즈키 기야타 | 도사 | 자살 | 탈출 후 자결[1] |
스기야마 마쓰스케 | 조슈 번 | 부상 후 사망 | 사건을 알고 조슈 번 저택에서 달려갔으나 아이즈 번 병사에게 베여 나중에 사망[1] |
야마다 도라노스케 | 조슈 번 | 부상 후 사망 | 일단 탈출, 나중에 체포[1] |
도코로야마 아키치로 | 불명 | 부상 후 사망 | |
마쓰다 주스케 | 히고 | 즉사 | |
사에키 이즈오 | 조슈 번 | 체포 | 게이오 원년 6월 4일 (1865년7월 26일)에 형사[1] |
야마우치 다로자에몬 | 불명 | 체포 | |
오타카 주베 | 하야시다 | 체포 | 오타카 마타지로의 동생, 일단 탈출 후 나중에 체포, 7월 4일 (8월 5일)에 옥사[1] |
후루타카 슌타로 | 불명 | 체포 | |
니시카와 고조 | 교토 | 체포 | 일단 탈출, 10일 후 체포, 겐지 2년 2월 11일 (1865년 3월 8일)에 옥사[1] |
오나카 슈젠 | 불명 | 체포 | |
사와이 다테와키 | 불명 | 체포 | |
세오 고주로 | 불명 | 체포 | |
모리 가즈에 | 교토 | 체포 | |
후치가미 이쿠타로 | 구루메 | 탈출 | |
이토 히로나가 | 도사 | 즉사 | |
후쿠오카 유지로 | 이요마쓰야마 | 즉사 | |
오치 마사유키 | 도사 | 즉사 | |
히로오카 나미히데 | 조슈 번 | 즉사 | 신관[1] |
노로야마 고키치로 | 도사 | 탈출 | 유학자 이타쿠라 카이도를 의지, 나중에 조슈 번 저택에서 자결[1] |
우치야마 타로에몬 | 조슈 번 | 체포 | 무급 통사, 7월 20일 (8월 21일) 형사[1] |
기타무라 젠키치 | 불명 | 탈출 | 마타지로의 문인, 창 상처를 입었지만, 이케다야 뒤쪽에서 강가로 도망쳐 배 안으로 숨어들어 구조[1] |
안도 테츠마 | 불명 | 체포 | 체포되었으나 도망[1] |
기무라 킨고로 | 교토 | 체포 | 구사카 겐즈이로 오인되어 체포[1] |
이마이 사부로에몬 | 도요오카 | 체포 | 46세, 체포되어 형사[1] |
무라카미 슌페이 | 조슈 사이고 | 체포 | 체포되어 형사[1] |
가와다 사쿠마 | 인슈 | 탈출 | |
다카기 겐에몬 | 히고 | 탈출 | 조슈 번 저택으로 도망[1] |
미야베 슌조 | 히고 | 탈출 | 테이조의 동생, 조슈 번 저택으로 도망[1] |
이와사 모 | 단바 | 탈출 | 이케다야 욕조 안에 숨어 구조[1] |
오사와 잇페이 | 조슈 번 | 탈출 | 이케다야 욕조 안에 숨어 구조, 조슈 번 저택으로 탈출[1] |
마쓰야마 료조 | 에치고 | 탈출 | 마쓰야마 다카요시의 사촌, 전 신선조라고도 함[1] |
다나카 조큐로 | 교토 | 체포 | |
요시다 고로 | 에치젠 | 체포 | |
나구모 헤이마 | 가미노토네 누마다 촌 | 체포 | |
구니시게 마사후미 | 조슈 번 | 탈출 | |
니시키오리 우무노스케 | 오와리 | 체포 | 2층 남쪽에서 도망, 미토 저택으로 도망쳤지만 쫓겨나 체포, 형사[1] |
참조
[1]
서적
Shinsengumi tenmatsuki[新選組顛末記]
Shinjinbutsu Ōraisha
[2]
서적
Ikedaya jiken no kenkyū[池田屋事件の研究]
Kōdansha
[3]
서적
Hijikata Toshizō nikki [土方歳三日記]
Chikuma Bungei Bunko
[4]
서적
Shinsengumi, Ikedaya jiken tenmatsuki[新選組・池田屋事件顛末記]
Shinjinbutsu ōraisha
[5]
서적
Ishin sensō monogatari[維新戦争物語]
Shinnihonsha
[6]
서적
Rekishi no naka no shinsengumi[歴史のなかの新選組]
Iwanami shoten
[7]
웹사이트
Ikedaya Hana no Mai: the Restaurant that Re-creates the Time of the Shinsengumi
https://www.collecti[...]
CollectiKult
2018-11-01
[8]
웹사이트
年表 「萩・明治維新の動き」
https://www.city.hag[...]
萩市
[9]
서적
池田屋事件の研究
[10]
뉴스
新選組の忘れ物 キセル入れ見つかる 草津宿本陣 滋賀
https://www.nhk.or.j[...]
NHK
[11]
문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나 사쓰마 번과 함께 8월 18일의 정변을 주도해 조슈 번을 지지하는 구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선 인물로써 조슈 번사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2]
웹인용
歴史探偵 2021年5月12日放送 22:30 - 23:15 NHK総合 「真相!池田屋事件」
https://datazoo.jp/t[...]
202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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