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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누키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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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사누키 히로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버팔로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2003년 신인왕을 수상했다. 201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트로 복귀하여 2군 투수 코치를 거쳐 현재는 다시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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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누키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이름기사누키 히로시
영어 표기Hiroshi Kisanuki
출생일1980년 5월 17일
출생지가고시마현 센다이 시 (현: 사쓰마센다이시)
신장188cm
체중84kg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프로 경력
데뷔 리그NPB
데뷔 연도2003년
데뷔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최종 시즌2015년
최종 리그NPB
선수 경력요미우리 자이언츠 (2003년 ~ 2009년)
오릭스 버펄로스 (2010년 ~ 2012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13년 ~ 2015년)
코치 경력요미우리 자이언츠 (2019년 ~ 2020년)
드래프트2002년 자유 획득 범위
첫 출장2003년 3월 30일
마지막 출장2015년 9월 30일 (은퇴 경기)
해외 파견(2008년)
통계 (2015년 기준)
승-패 기록63승 73패
평균 자책점3.75
탈삼진980
수상
수상 내역NPB 올스타 (2003년, 2010년, 2013년)
2003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
대표팀 경력
국가대표일본
올림픽2003년 (아시아 예선)
이미지
기사누키 히로시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12년 3월 16일 메이지진구 야구장)

2. 프로 입단 전

가고시마현 센다이 시(현재의 사쓰마센다이시) 출신으로 가고시마 현립 센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대학에 진학했다. 도토 대학 리그 통산 31경기에 등판해 12승 8패, 평균자책점 1.80, 225탈삼진을 기록했고 4학년 때는 2시즌 연속으로 최고 수훈 선수,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

제1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고[34] 200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자유 획득 범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34]

2. 1. 유소년 시절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 출신으로, 가고시마 현립 센다이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8년 가고시마 현 춘계 고교 야구 대회에서 스기우치 도시야가 소속된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를 꺾고 우승했다. 그 해 여름에 열린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결승에서는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에게 1대 3으로 패하며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35] 사쓰마센다이 시립 센다이 미나미 중학교에서 연식 야구부에 소속되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아시아 대학에 진학했다.[2]

2학년 때는 리그전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대학 선수권 준결승에서 야마무라 미치나오(규슈 공립 대학 경식 야구부)와 연장 10회를 던지며 완봉승을 거두었다. 결승에서도 선발로 등판하여 3회 1실점으로 교체되었지만 우승에 기여했다.[3] 도토 대학 리그 통산 31경기 등판, 12승 8패, 평균자책점 1.80, 225탈삼진을 기록했다. 4학년 때는 대학 선수권에서 전 경기에 등판, 준결승에서는 아라가키 나기사(규슈 공립 대학 경식 야구부)와 맞대결하여 완봉승을 거두었고, 결승에서는 와다 쓰요시(와세다 대학 야구부)와의 투수전을 제압하고 우승했다.[4] 메이지 신궁 대회에서는 오른팔의 통증으로 인해 결승전에서만 구원 등판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5] 2시즌 연속 최고 수훈 선수,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 3관왕을 수상했다.

제1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도 발탁되었고,[34] 200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자유 획득 범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1]

2. 2. 고등학교 시절

가고시마현 센다이 시(현재의 사쓰마센다이시) 출신으로 센다이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8년, 스기우치 도시야가 소속된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를 누르고 가고시마 현 춘계 고교 야구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그해 여름에 열린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결승에서는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에게 1대 3으로 패하며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35]

2. 3. 대학교 시절

아시아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 대학 리그 통산 31경기에 등판해 12승 8패, 평균 자책점 1.80, 탈삼진 225개를 기록했다. 2학년 때는 리그전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대학 선수권 준결승에서 드래프트 유력 후보였던 야마무라 미치나오(규슈 공립대)와 연장 10회를 던지며 완봉승을 거두었다. 결승에서도 선발로 등판하여 3회 1실점으로 교체되었지만 우승에 기여했다.[3] 4학년 때는 대학 선수권에서 전 경기에 등판, 준결승에서는 규슈 공립대의 아라가키 나기사와 맞대결하여 완봉승을 거두었고, 결승에서는 와다 쓰요시(와세다)와의 투수전을 제압하고 우승했다.[4] 메이지 신궁 대회에서는 오른팔의 통증으로 인해 결승전에서만 구원 등판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5] 4학년 때는 2시즌 연속으로 최고 수훈 선수, 최우수 투수, 베스트 나인 등을 수상했다.[35]

제1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도 발탁되었고[34],[1] 2002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자유 획득枠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34],[1]

3. 프로 선수 시절

2003년, 기사누키 히로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가카와 가쓰히로신인왕 경쟁을 벌여,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모두 주니치 드래곤스전)을 포함해 시즌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6]

2004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도중 마무리로 전향했고,[6] 2005년에는 14경기 등판, 0승 1패 5세이브를 기록한 후 7월에 오른쪽 어깨뼈 아래 수술을 받았다.[6]

2006년 1월, 니오카 도모히로와 함께 아마미오 섬에서 고쿠보 히로키, 사이토 가즈미의 자주 트레이닝에 동행했다.[6] 6월 19일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약 1년 만에 1군 등록 후 선발 등판했지만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고, 총 3번의 선발 기회에서 모두 초반 강판되며 0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6]

2007년에는 우에하라 코지, 제러미 파월의 부상으로 개막 1군에 합류, 12승(9패),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하며 자신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6] 우쓰미 테쓰야, 다카하시 히사노리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도 패퇴했다.

2008년에는 4월에 3승(1패)을 거두며 호투했지만, 5월부터 컨디션 난조를 겪었다. 5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머리 사구를 던져 위험구 퇴장을 당했고, 이후 부진으로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는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연말에는 도미니카 윈터 리그에 자원하여 참가했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밀려 2군에서 시작했다. 8월에 잠시 1군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3실점 후 강판되었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팀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기사누키는 1군 등판 기회 없이 시즌을 마쳤다. 2군에서는 리그 최다승(9승), 최다 탈삼진(94개)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은 4.05로 부진했다. 12월 4일, 다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오릭스에서 뛰면서, 이적 후 첫 승과 월간 MVP를 수상하고,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그 최다 패전, 낮은 득점 지원율, 잦은 부상 등 어려움도 겪었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된 개막전에 개막 투수로 등판했지만, 시즌 내내 부진했다. 2012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딛고 재기에 성공하여, 방어율 2.60, QS율 66.7%를 기록하며 팀의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타선의 지원 부족으로 5승 9패에 그쳤다.

2013년 1월 25일, 이토이 요시오·야기 도모야와의 트레이드로 아카다 쇼고·오비키 게이지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9]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시즌 개막이 늦춰져, 4월 12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개막전에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여 와세다 대학 야구부 출신 와다 쓰요시와 투수전을 펼쳤으나 9이닝 1자책점을 기록하고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5월 4일 등록 말소 후, 5월 1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하코다테 시 지요가다이 공원 야구장)에 선발 등판했지만 2회에 홈런과 연타를 맞고 8실점으로 강판당했다. 5월 2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시즌 첫 승을 올렸지만, 이후 선발로서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7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4이닝 9피안타 6실점으로 2군에 내려갔다. 2군행 통보를 받고 오사카로 돌아가던 중, 신요코하마역에서 요미우리 시절 코치였던 가토리 요시타카를 만나 투심과 체인지업에 대한 조언을 받고 투심을 습득했다.[37] 이후 10월 15일 닛폰햄전에 등판해 6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2승째를 올렸다.

八木 智哉|야기 도모야일본어, 赤田 将吾|아카다 쇼고일본어, 大引 啓次|오비키 게이지일본어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9]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어,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 (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이 경기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맞붙었던 요미우리 선발 투수인 스기우치 도시야를 상대로 승리하여, 1998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결승에서 패배한 이후 약 15년 만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11][12] 시즌 종료까지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두 자릿수 승리에는 미치지 못했고, 브라이언 울프와 함께 팀 내 최고인 9승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스프링 캠프 중에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1군 공식전에는 젊은 투수들의 약진으로 5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고, 1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시즌 막바지까지 1군 등판 기회가 없었고, 이스턴 리그 공식전에서도 16경기 등판에서 0승 6패, 평균자책점 7.67의 성적으로 마쳤다.[13] 9월 18일에 다음 해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 것이 밝혀졌다. 타 구단에서의 현역 속행 가능성 등을 숙고한[14] 결과, 9월 29일에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을 표명했다.[15] 9월 30일에는, 그 해 처음으로 출장 선수 등록[16]을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전 (삿포로 돔) 5회 초에 1이닝 한정으로 등판했다. 2탈삼진을 포함한 삼자범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11월 27일부로 일본 야구 기구 (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17]되었다.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3년, 기사누키 히로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가카와 가쓰히로신인왕 경쟁을 벌여,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모두 주니치 드래곤스전)을 포함해 시즌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6]

2004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도중 마무리로 전향했고,[6] 2005년에는 14경기 등판, 0승 1패 5세이브를 기록한 후 7월에 오른쪽 어깨뼈 아래 수술을 받았다.[6]

2006년 1월, 니오카 도모히로와 함께 아마미오 섬에서 고쿠보 히로키, 사이토 가즈미의 자주 트레이닝에 동행했다.[6] 6월 19일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약 1년 만에 1군 등록 후 선발 등판했지만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고, 총 3번의 선발 기회에서 모두 초반 강판되며 0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6]

2007년에는 우에하라 코지, 제러미 파월의 부상으로 개막 1군에 합류, 12승(9패),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하며 자신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6] 우쓰미 테쓰야, 다카하시 히사노리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도 패퇴했다.

2008년에는 4월에 3승(1패)을 거두며 호투했지만, 5월부터 컨디션 난조를 겪었다. 5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머리 사구를 던져 위험구 퇴장을 당했고, 이후 부진으로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는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연말에는 도미니카 윈터 리그에 자원하여 참가했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밀려 2군에서 시작했다. 8월에 잠시 1군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3실점 후 강판되었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팀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기사누키는 1군 등판 기회 없이 시즌을 마쳤다. 2군에서는 리그 최다승(9승), 최다 탈삼진(94개)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은 4.05로 부진했다. 12월 4일, 다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3. 1. 1. 2003년 ~ 2006년

2003년에는 리그 최다인 두 차례의 완봉을 포함하여 시즌 10승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6] 대학교 동기인 나가카와 가쓰히로(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시즌 마지막까지 신인왕 경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모두 주니치 드래곤스전)을 포함하여 시즌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으로 선정되었다.[6]

2004년에는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시즌 도중에 구원 투수로 일시 전향했다.[6] 2005년에는 14경기에 등판하여 단 한 번도 승리(0승 1패 5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하고 7월에 오른쪽 견갑골하 수술을 받았다.[6]

2006년 1월에는 니오카 도모히로와 함께 아마미오 섬에서 고쿠보 히로키, 사이토 가즈미의 자주 트레이닝에 동행했다.[6] 같은 해 6월 19일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약 1년 만에 1군 등록을 하여 선발 등판하였지만 3실점을 기록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6] 총 3차례의 선발 등판 기회가 주어졌지만 모두 패전 투수가 되는 등 0승 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겨 2년 연속 승리를 올리지 못했다.[6]

3. 1. 2. 2007년 ~ 2009년

2007년에는 주력 투수였던 우에하라 코지, 제러미 파웰의 부상으로 개막 1군에 합류, 자기 최고 기록인 12승(9패),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했다. 우쓰미 테쓰야, 다카하시 히사노리와 함께 한 해 동안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는 두 번째 경기에 등판했지만 4회 도중 3실점으로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도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패퇴했다.

2008년에는 개막부터 부진한 팀 안에서 호투하여 4월에 3승(1패)을 거두었고, 패전으로 인한 '8이닝 완투'였지만 2004년 이후 처음으로 완투를 기록했다. 그러나 5월부터 컨디션이 나빠져 5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3회 도중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머리 사구를 던져 위험구 퇴장을 당했다. 이후 짧은 이닝으로 강판되는 경기가 이어져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전년과 같은 주니치 드래곤스와 대결하여 설욕했고,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기사누키 본인은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에서의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전반기 기여를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연봉 삭감으로 갱신했다. 연말 아이다 유지 등의 성장주가 도미니카 윈터 리그에 파견되는 것을 받아 본인의 희망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건너갔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패배하여 2군에서 시작했다. 8월 로테이션의 공백으로 시즌 첫 등판·첫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3회 도중 3실점으로 강판되어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팀은 3연패 및 7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 본인은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군에서는 선발의 축으로 활약하여 리그 최다승(9승), 최다 탈삼진(94개)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은 4.05로 부진했다. 12월 4일, 다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3. 2.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뛰면서, 기사누키 히로시는 이적 후 첫 승과 월간 MVP를 수상하고,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그 최다 패전, 낮은 득점 지원율, 잦은 부상 등 어려움도 겪었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된 개막전에 개막 투수로 등판했지만, 시즌 내내 부진했다. 2012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딛고 재기에 성공하여, 방어율 2.60, QS율 66.7%를 기록하며 팀의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타선의 지원 부족으로 5승 9패에 그쳤다.

3. 2. 1. 2010년 ~ 2012년

2010년, 기사누키 히로시는 시범 경기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주어 개막 로테이션에 들어갔다. 3월 2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8회 도중 1실점으로 호투하며 2008년 7월 27일 이후 609일 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고, 이적 후 첫 승을 기록했다. 5월 22일 한신전부터 5연승을 달성했다. 6월에는 2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신인 시절인 2003년 이후 7년 만에 완봉승을 거두는 등 4승 무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6월 월간 MVP를 수상했다. 7월 31일 승리로 9승을 달성했지만, 8월 6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3실점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 5경기 동안 팀 타선의 지원이 총 2점에 불과하여 승수를 쌓기 어려웠다. 9월 8일 롯데전에서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방어율 3점대를 기록했지만, 컨디션 기복이 심했고, 개인 통산 최악이자 리그 최다 패전인 12패를 기록했다. 사사구 수는 리그 2위, 폭투와 몸에 맞는 볼 수는 리그 최다를 기록하며 제구력이 흔들리는 경기가 많았고, 득점 지원율은 퍼시픽 리그 최악 2위인 3.71로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반면, 피홈런은 9개로 적었다. 롯데전에서는 4승 4패, 교류전에서는 3승 1패로 좋은 성적을 거둔 반면, 세이부전에서는 5전 4패, 방어율 7.01로 부진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되어 4월 12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본인 첫 개막 투수를 맡아, 2002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 2003년 올스타전 제1전과 마찬가지로 와세다 대학교 야구부 출신 호크스의 주축 와다 쓰요시와 맞대결을 펼쳐 9이닝 1/3을 자책점 1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12개 구단 개막 투수 중 유일하게 승리가 없어 5월 4일에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5월 14일 1군에 등록되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하코다테 시 지요다이 공원 야구장)에 선발 출전했지만, 2회 1사부터 홈런과 연타로 8실점하고 강판되었다. 세·퍼 교류전 한큐 브레이브스 유니폼 복각 경기인 5월 2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상대 7번 지명 타자 이마무라 타케시의 희생 번트도 처리하며 시즌 첫 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선발 등판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7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4이닝 9안타 6실점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2군 강등 통보를 받고 귀가하던 중 신요코하마역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코치인 카토리 요시타카와 우연히 만나 "투심이나 체인지업을 배우는 게 어때?"라는 조언을 받고 투심을 습득했다[7]。이후 승격하여 폐막 직전인 10월 15일 닛폰햄전에서 6이닝 무실점의 호투로 2승을 기록했다. 시즌 통틀어 2승 7패, 방어율 4.60으로 부진했다.

2012년, 시즌 첫 등판인 4월 8일 라쿠텐전에서 4안타 완봉승을 거두었고, 4월 15일에는 작년까지 약했던 세이부를 상대로 7회 도중 1실점 호투하며 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4월 22일 닛폰햄전에서 9이닝 1실점 완투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승리에서 멀어졌다. 6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을 때 왼쪽 허벅지 뒤 근육 파열을 일으켜 다음 날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재활에 힘쓰던 어느 날, 딸이 "아빠는 왜 낮부터 집에 있어?"라고 물어 당황했고, 그 때 동료 테라하라 하야토가 "우리는 좋아하는 야구를 하면 그걸로 괜찮을지 모르지만, 딸들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라고 발언한 것을 떠올리고 분발하여[8], 7월 13일에 재등록되었다. 3경기 구원 등판을 거쳐, 올스타전 이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선발 투수로서 시즌 종료까지 로테이션을 지켜, 방어율 2.60, QS율 66.7%로 선발 투수로서의 책임을 다했지만, 아군 타선의 지원이 부족한 경기가 많아 5승 9패로 마쳤다. 계약 갱신에서는 규정 투구 이닝을 클리어한 선수 중에서는 최고인 2.60의 방어율이 평가되어 1200만 엔 증액된 6200만으로 갱신했다.

3. 3.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2013년 1월 25일, 이토이 요시오·야기 도모야와의 트레이드로 아카다 쇼고·오비키 게이지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하기 전까지[9] 기사누키는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시즌 개막이 늦춰져, 4월 12일 오사카 돔에서 열린 개막전에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여 와세다 대학 야구부 출신 와다 쓰요시와 투수전을 펼쳤으나 9이닝 1자책점을 기록하고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5월 4일 등록 말소 후, 5월 1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하코다테 시 지요가다이 공원 야구장)에 선발 등판했지만 2회에 홈런과 연타를 맞고 8실점으로 강판당했다. 5월 2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시즌 첫 승을 올렸지만, 이후 선발로서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7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4이닝 9피안타 6실점으로 2군에 내려갔다. 2군행 통보를 받고 오사카로 돌아가던 중, 신요코하마역에서 요미우리 시절 코치였던 가토리 요시타카를 만나 투심과 체인지업에 대한 조언을 받고 투심을 습득했다.[37] 이후 10월 15일 닛폰햄전에 등판해 6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2승째를 올렸다.

3. 3. 1. 2013년 ~ 2015년

八木 智哉|야기 도모야일본어, 赤田 将吾|아카다 쇼고일본어, 大引 啓次|오비키 게이지일본어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9]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어,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 (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이 경기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맞붙었던 요미우리 선발 투수인 스기우치 도시야를 상대로 승리하여, 1998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결승에서 패배한 이후 약 15년 만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11][12] 시즌 종료까지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두 자릿수 승리에는 미치지 못했고, 브라이언 울프와 함께 팀 내 최고인 9승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스프링 캠프 중에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1군 공식전에는 젊은 투수들의 약진으로 5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고, 1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시즌 막바지까지 1군 등판 기회가 없었고, 이스턴 리그 공식전에서도 16경기 등판에서 0승 6패, 평균자책점 7.67의 성적으로 마쳤다.[13] 9월 18일에 다음 해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 것이 밝혀졌다. 타 구단에서의 현역 속행 가능성 등을 숙고한[14] 결과, 9월 29일에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을 표명했다.[15] 9월 30일에는, 그 해 처음으로 출장 선수 등록[16]을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전 (삿포로 돔) 5회 초에 1이닝 한정으로 등판했다. 2탈삼진을 포함한 삼자범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11월 27일부로 일본 야구 기구 (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17]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직구는 2003년에 자기 최고 속도 152km를 기록했다.[21] 포크볼을 결정구로 구사한다.

5. 개인적인 면모

기사누키는 꼼꼼한 성격으로, 일기를 쓸 때 글자 간격을 일정하게 띄어 쓰는 것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재활 중이던 시절, 고쿠보 히로키가 힘들 때 기록을 남겨두라고 권유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항상 겸손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여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코치의 조언을 들을 때나 취재를 할 때도 부동자세로 임하는 성실한 선수이며, 연습에도 매우 열심이다. 원래는 대충하는 성격이었지만, 아시아 대학에 들어가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잘하는 타자로는 아카호시 노리히로이바타 히로카즈와 같이 끈질긴 타자를 꼽았는데, 질문에 답한 후 "우리 대학(아시아 대학)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2008년 5월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가네모토 도모노리에게 머리에 공을 맞히는 사구를 던진 다음 날, 경기 전 연습 중에 가네모토에게 달려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가네모토는 "다시 마음껏 던져. 신경 쓰지 마. 괜찮아."라고 말하며 그를 배려했고, 기사누키는 이에 감사를 표했다.

역사학에 뛰어나며, 줌인!! 새터데이의 '프로야구 열혈 정보' 코너에서 출제된 테마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취미는 지도를 보면서 거리를 걷는 것이다. 외출 장소의 오픈 테라스에서 라디오에 전화 출연한 적도 있으며,[22] 시즌 중 원정을 갈 때는 취미와 실용을 겸하여 반드시 원정지의 지도를 직접 챙긴다고 한다.[23]

다카기 야스나리와의 트레이드는 평소 친분이 깊었던 오카다 아키노부하라 다쓰노리의 관계에서 성사된 우정 트레이드였으며, 오카다를 신뢰한 상에서의 트레이드였다고 한다. 기요타케 히데토시는 간부 후보생으로서 수련을 보내는 기분이라고 말하며, 장래에 거인으로 복귀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24]

같은 시즌 오프에 오릭스로 이적한 아카다 쇼고와는 같은 고향(가고시마현 출신) 동갑내기로, 중학교 시절에 대결한 적이 있다(결과는 당시 투수였던 아카다의 1안타 완봉 승리).

거인 시절부터 이동 중 등 사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팬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자신의 베이스볼 카드에 직접 사인을 넣은 것을 가지고 다닌다. 사인은 원정 시 등의 빈 시간을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한 장 한 장에 일련 번호를 넣은 위에 100엔 샵에서 구입한 소봉투에 넣는 꼼꼼함을 보였다. 구단 지급분으로는 부족하여 자비로 카드를 추가 구입하여 배포를 계속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연간 약 4000장을 배포했다고 한다.[25]

오릭스와 일본 햄 시절에는, 『가메야마 츠토무의 카메토모 Sports Man Day』(오릭스의 지역 방송국인 마이니치 방송이 당시 라디오로 방송했던 스포츠 정보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수시 출연했다. 프로그램 굿즈로 청취자 등에게 제공했던 카기쇼(효고현 아카시시) 제 해조류 제품 시리즈에는 기사누키의 캐리커처를 오릭스 시절부터 역대 프로그램 오리지널 라벨에 곁들였다. 제2대 굿즈의 아카시 김까지는 오릭스 시절의 라벨을 붙였지만, 일본 햄 이적 후 2013년 5월에 NPB 12개 구단으로부터 1군 공식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다음 해 6월의 제공분부터 라벨을 일본 햄 버전으로 신규 제작했다. 2014년 5월 굿즈 리뉴얼에서는, 오릭스 시절에 사적으로 맛본 적이 있는 동사제의 "아카시 김 후리가케"를 신규 굿즈 후보로 추천했고, 실제로 굿즈로 채용되었다.

5. 1. 기사누키 로드

기사누키 히로시의 고향인 사쓰마센다이시에는 "기사누키 로드"(거리 약 1.7km)라는 길이 있다. 이곳은 기사누키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훈련했던 장소이며, 지역 시민 단체가 그의 활약과 더 많은 인재 배출을 기원하며 이름을 붙였다.[22]

5. 2. 철도 팬

기사누키 히로시는 프로 야구계 최고의 철도 팬으로 알려져 있다.[26] 본인에 따르면, 열차 타기를 좋아하며 경기장으로 이동할 때 전철을 이용하기도 하고,[27] 철도 노선도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고 한다.[27] 한큐 전철 차량 좌석의 고급스러움과 촉감을 마음에 들어한다고도 한다.[28]

2011년 3월 큐슈 신칸센 전선 개통 시에는 선전 활동에 의욕을 불태웠으며,[29][30] 2004년 부분 개통 시에는 출신지인 센다이역에서 일일 역장을 맡기도 했다.

일본 햄 시대인 2013년에는 홋카이도 TV 방송 "FFFFF"에서 삿포로 시영 전차를 전세 내어 인터뷰를 진행했고,[31][32] 같은 해 연말 스페셜에서는 다음 해 폐선 예정이었던 JR 홋카이도 에사시 선 로케 기획을 진행했다. 은퇴 기자 회견에서도 에사시 선 로케를 현역 시절의 추억 중 하나로 꼽았다.[33]

6. 상세 정보

기사누키 히로시는 아시아 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자유 획득枠으로 지명되어 입단했다.[1] 프로 첫 해인 200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나가카와 카츠히로와 신인왕 경쟁을 벌이며,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을 포함해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4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다. 2005년에는 14경기 등판에 그쳤고, 7월에 오른쪽 어깨뼈 아래 수술을 받았다. 2006년에는 3번의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모두 초반 강판되며 0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07년에는 우에하라 코지 등의 부상으로 개막 1군에 합류, 자신의 최고 기록인 12승 9패,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부진했다. 2008년에는 4월에 3승을 거두었으나, 5월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기사누키는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밀려 2군에서 시작했다. 8월에 시즌 첫 등판 기회를 얻었지만, 3회 도중 강판되어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팀은 7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는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12월 4일, 타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2010년에는 3월 2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8회 도중 1실점으로 이적 후 첫 승을 거두었다. 6월에는 4승 무패의 활약으로 월간 MVP를 획득했고, 9월 8일에는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리그 최다 패전인 12패를 기록했고, 제구력 난조와 타선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11년에는 4월 12일 개막전에서 본인 첫 개막 투수를 맡아 와다 쓰요시와 맞대결을 펼쳤으나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5월 1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 8실점으로 강판된 후, 세·퍼 교류전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부진으로 7월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2군 강등 후 카토리 요시타카 코치의 조언으로 투심을 습득했고,[7] 10월 15일 닛폰햄전에서 6이닝 무실점 호투로 2승을 거두었다.

2012년에는 4월 8일 라쿠텐전에서 4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등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6월 6일 왼쪽 허벅지 뒤 근육 파열로 1군에서 말소되었다. 7월 13일 복귀 후 3경기 구원 등판을 거쳐, 올스타전 이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까지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5승 9패로 마쳤다. 계약 갱신에서는 방어율이 평가되어 연봉이 인상되었다.

2013년 1월 25일, 이토이 요시오 등과의 트레이드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9]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며,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시즌 9승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되었다.

2014년에는 스프링 캠프 중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고, 1군 공식전에는 5경기 등판에 그치며 1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이스턴 리그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9월 18일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9월 29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15]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1이닝 한정 등판하여 2탈삼진 삼자범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11월 27일 일본 야구 기구 (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17]
통산 성적:

연도소속팀등판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4사구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2003년요미우리25257231070--.588736175.01681844371806174653.341.21
2004년3121200785--.467643139.216820503111541092785.031.56
2005년1400000150.0005613.21313001700663.951.17
2006년330000300.0005410.124320070011119.582.52
2007년262500012900.571613148.21441735301311060513.091.20
2008년14141006500.54531874.087151901533036344.141.43
2009년110000000----122.2420002003310.131.50
2010년오릭스2828410101200.455767174.117497101314011185773.981.41
2011년19120002700.22232272.18652212604042374.601.49
2012년24215115900.357628152.113884213965047442.601.18
2013년닛폰햄24242119800.529620145.0141105015958064593.661.32
2014년550001300.25011526.029170021101293.121.38
2015년100000000.00031.000000200000.000.00
통산: 13년21517921556272100.46348871135.0117610934512429584025324743.761.3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수상·타이틀 경력:
주요 기록:

기록 종류내용
첫 등판·첫 선발2003년 3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스 3차전(도쿄 돔), 2이닝 5실점에서 패전 투수
첫 탈삼진상동, 1회초에 후쿠도메 고스케로부터 헛스윙 삼진
첫 승리·첫 선발 승리2003년 4월 2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이닝 3실점
첫 완투 승리2003년 5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스 8차전(도쿄 돔), 9이닝 2실점
첫 완봉 승리2003년 7월 29일, 주니치 드래곤스 18차전(도쿄 돔)
첫 세이브2004년 7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8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3이닝 2실점
1000 투구 이닝2013년 5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7차전(삿포로 돔), 5회초 2사에서 케이시 맥기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 달성 (역대 332번째)
전 구단 상대 승리2013년 5월 2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삿포로 돔), 7이닝 1실점 (역대 12번째, 긴테쓰 제외)[10]
매덕스2회 (2012년, 2013년)
올스타전 출장3회 (2003년, 2010년, 2013년)


지도자 경력:


등번호:

연도등번호
2003년 ~ 2006년21
2007년 ~ 2009년41
2010년 ~ 2012년12
2013년 ~ 2015년29
2019년 ~ 2020년78


6. 1. 출신 학교


  • 센다이 시립 센다이 미나미 중학교
  • 센다이 고등학교
  • 아시아 대학

6. 2. 선수 경력

기사누키 히로시는 아시아 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자유 획득枠으로 지명되어 입단했다.[1] 프로 첫 해인 200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나가카와 카츠히로와 신인왕 경쟁을 벌이며,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을 포함해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2004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다. 2005년에는 14경기 등판에 그쳤고, 7월에 오른쪽 어깨뼈 아래 수술을 받았다. 2006년에는 3번의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모두 초반 강판되며 0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07년에는 우에하라 코지 등의 부상으로 개막 1군에 합류, 자신의 최고 기록인 12승 9패,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부진했다. 2008년에는 4월에 3승을 거두었으나, 5월부터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기사누키는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밀려 2군에서 시작했다. 8월에 시즌 첫 등판 기회를 얻었지만, 3회 도중 강판되어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팀은 7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는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12월 4일, 타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2010년에는 3월 2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8회 도중 1실점으로 이적 후 첫 승을 거두었다. 6월에는 4승 무패의 활약으로 월간 MVP를 획득했고, 9월 8일에는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리그 최다 패전인 12패를 기록했고, 제구력 난조와 타선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11년에는 4월 12일 개막전에서 본인 첫 개막 투수를 맡아 와다 쓰요시와 맞대결을 펼쳤으나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5월 1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 8실점으로 강판된 후, 세·퍼 교류전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부진으로 7월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2군 강등 후 카토리 요시타카 코치의 조언으로 투심을 습득했고,[7] 10월 15일 닛폰햄전에서 6이닝 무실점 호투로 2승을 거두었다.

2012년에는 4월 8일 라쿠텐전에서 4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등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6월 6일 왼쪽 허벅지 뒤 근육 파열로 1군에서 말소되었다. 7월 13일 복귀 후 3경기 구원 등판을 거쳐, 올스타전 이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까지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5승 9패로 마쳤다. 계약 갱신에서는 방어율이 평가되어 연봉이 인상되었다.

2013년 1월 25일, 이토이 요시오 등과의 트레이드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9]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며,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시즌 9승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되었다.

2014년에는 스프링 캠프 중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고, 1군 공식전에는 5경기 등판에 그치며 1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이스턴 리그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9월 18일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9월 29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15]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1이닝 한정 등판하여 2탈삼진 삼자범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11월 27일 일본 야구 기구 (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17]
통산 성적:

연도소속팀등판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4사구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2003년요미우리25257231070--.588736175.01681844371806174653.341.21
2004년3121200785--.467643139.216820503111541092785.031.56
2005년1400000150.0005613.21313001700663.951.17
2006년330000300.0005410.124320070011119.582.52
2007년262500012900.571613148.21441735301311060513.091.20
2008년14141006500.54531874.087151901533036344.141.43
2009년110000000----122.2420002003310.131.50
2010년오릭스2828410101200.455767174.117497101314011185773.981.41
2011년19120002700.22232272.18652212604042374.601.49
2012년24215115900.357628152.113884213965047442.601.18
2013년닛폰햄24242119800.529620145.0141105015958064593.661.32
2014년550001300.25011526.029170021101293.121.38
2015년100000000.00031.000000200000.000.00
통산: 13년21517921556272100.46348871135.0117610934512429584025324743.761.3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6. 3. 지도자 및 기타 경력

6. 4. 수상·타이틀 경력



木佐貫 洋|기사누키 히로시일본어의 투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 종류내용
첫 등판·첫 선발2003년 3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스 3차전 (도쿄 돔), 2회 5실점으로 패전 투수
첫 탈삼진상동, 1회 초에 후쿠도메 코스케로부터 헛스윙 삼진
첫 승리·첫 선발 승리2003년 4월 25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 3실점
첫 완투 승리2003년 5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스 8차전 (도쿄 돔), 9회 2실점
첫 완봉 승리2003년 7월 29일, 주니치 드래곤스 18차전 (도쿄 돔)
첫 세이브2004년 7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 말에 4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3회 2실점
1000 투구 이닝2013년 5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7차전 (삿포로 돔), 5회 초 2사 시에 케이시 맥기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 달성 ※역대 332번째



타격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 종류내용
첫 안타2003년 4월 25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3회 초에 크리스 홀트로부터 우전 안타
첫 타점2004년 7월 8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6차전 (도쿄 돔), 3회 말에 요시카와 테루아키로부터 우월 적시 2루타



기타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기록 종류내용
올스타전 출장3회 (2003년, 2010년, 2013년)
전 구단 승리2013년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 (삿포로 돔), 7회 1실점 ※역대 12번째
매덕스2회 (2012년, 2013년)


6. 5. 개인 기록

기사누키 히로시는 프로 야구 선수로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투수 기록으로는 2003년 3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 및 첫 선발을 기록했으나, 2회 5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같은 경기에서 후쿠도메 고스케에게서 헛스윙 삼진을 잡아 첫 탈삼진을 기록했다. 2003년 4월 2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7회 3실점으로 첫 승리와 첫 선발 승리를 달성했다. 2003년 5월 1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9회 2실점으로 첫 완투 승리, 2003년 7월 2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첫 완봉 승리를 기록했다. 2004년 7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는 7회 말에 구원 등판하여 3회 2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달성했다. 2013년 5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1000 투구 이닝을 달성했다(역대 332번째).[6]

타격 기록으로는 2003년 4월 2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3회 초 크리스 홀트에게서 우전 안타를 기록하며 첫 안타를 달성했다. 2004년 7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3회 말 요시카와 데루아키에게서 우월 적시 2루타를 기록하며 첫 타점을 달성했다.[6]

기타 기록으로는 올스타전에 3회(2003년, 2010년, 2013년) 출전했다. 2013년 5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 (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매덕스는 2회(2012년, 2013년) 달성했다.

6. 5. 1. 투수 기록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전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4사구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2003年|2003년일본어요미우리 자이언츠25257231070--.588736175.01681844371806174653.341.21
2004年|2004년일본어3121200785--.467643139.216820503111541092785.031.56
2005年|2005년일본어1400000150.0005613.21313001700663.951.17
2006年|2006년일본어330000300.0005410.124320070011119.582.52
2007年|2007년일본어262500012900.571613148.21441735301311060513.091.20
2008年|2008년일본어14141006500.54531874.087151901533036344.141.43
2009年|2009년일본어110000000----122.2420002003310.131.50
2010年|2010년일본어오릭스 버펄로스2828410101200.455767174.117497101314011185773.981.41
2011年|2011년일본어19120002700.22232272.18652212604042374.601.49
2012年|2012년일본어24215115900.357628152.113884213965047442.601.18
2013年|2013년일본어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24242119800.529620145.0141105015958064593.661.32
2014年|2014년일본어550001300.25011526.029170021101293.121.38
2015年|2015년일본어100000000.00031.000000200000.000.00
통산: 13년21517921556272100.46348871135.0117610934512429584025324743.761.34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첫 등판·첫 선발: 2003年|2003년일본어 3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 3차전(도쿄 돔), 2이닝 5실점에서 패전 투수
  • 첫 탈삼진: 상동, 1회초에 후쿠도메 고스케로부터 헛스윙 삼진
  • 첫 승리·첫 선발 승리: 2003年|2003년일본어 4월 25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이닝 3실점
  • 첫 완투 승리: 2003年|2003년일본어 5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스 8차전(도쿄 돔), 9이닝 2실점
  • 첫 완봉 승리: 2003年|2003년일본어 7월 29일, 주니치 드래곤스 18차전(도쿄 돔)
  • 첫 세이브: 2004年|2004년일본어 7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8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3이닝 2실점
  • 1000 투구 이닝: 2013年|2013년일본어 5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7차전(삿포로 돔), 5회초 2사에서 케이시 맥기를 좌익수 플라이로 잡아 달성 ※역대 332번째


2003년에는 대학교 동기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가카와 가쓰히로와 시즌 마지막까지 신인왕 경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리그 최다 타이인 2완봉(모두 주니치전)을 포함하여 시즌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으로 선정되었다.[6]

2004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도중 마무리로 전향했다.

2005년에는 14경기 등판에 그쳐 승리 없이 (0승 1패 5세이브) 7월에 오른쪽 어깨뼈 아래 수술을 받았다.

2006년 1월에는 니오카 도모히로와 함께 아마미오섬에서 고쿠보 히로키·사이토 가즈미의 자율 훈련에 동행했다. 6월 19일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약 1년 만에 1군 등록, 즉시 선발 투수로 나섰지만 3실점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총 3번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모두 초반에 강판되어 0승 3패로 시즌을 마쳤고, 2년 연속 승리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07년에는 주력 투수였던 우에하라 고지·제러미 파월이 부상으로 부진했기 때문에 개막 1군에 합류했고, 자기 최고 기록인 12승 (9패) ·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했다. 우쓰미 데쓰야·다카하시 히사노리와 함께 한 해 동안 로테이션을 지키며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2 스테이지에서는 두 번째 경기에 등판했지만 4회 도중 3실점으로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고, 팀도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패퇴했다.

2008년에는 개막부터 부진한 팀 안에서 호투하여 4월에 3승 (1패)을 거두었고, 패전으로 인한 '8이닝 완투'였지만 2004년 이후 처음으로 완투를 기록했다. 그러나 5월부터 컨디션이 나빠져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3회 도중 가네모토 도모아키에게 머리 사구를 던져 위험구 퇴장을 당했다. 이후 짧은 이닝으로 강판되는 경기가 이어져 8월에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팀은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전년과 같은 주니치 드래건스와 대결하여 설욕했고,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기사누키 본인은 포스트 시즌 및 일본 시리즈에서의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전반기 기여를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연봉 삭감으로 갱신했다. 연말 아이다 유지 등의 성장주가 도미니카 윈터 리그에 파견되는 것을 받아 본인의 희망으로 도미니카로 건너갔다.

2009년에는 개막 선발 로테이션 경쟁에서 패배하여 2군에서 시작했다. 8월 로테이션의 공백으로 드디어 시즌 첫 등판·첫 선발 기회를 얻었지만, 3회 도중 3실점으로 강판되어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팀은 3연패 및 7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지만, 기사누키 본인은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군에서는 선발의 축으로 활약하여 리그 최다승 (9승), 최다 탈삼진 (94개)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은 4.05로 부진했다. 12월 4일, 다카기 야스나리와의 교환 트레이드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했다.[6]

2010년은 시범 경기에서 호투하여 개막 로테이션에 진입했다. 3월 28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8회 도중 1실점으로, 2008년 7월 27일 이후 609일 만에 승리 투수가 되어 이적 후 첫 승리를 거두었다. 5월 22일 한신전부터 5연승을 기록했다. 6월에는 29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신인 시절인 2003년 이후 7년 만에 완봉승을 기록하는 등 4승 0패의 활약으로 6월 월간 MVP를 획득했다. 7월 31일 승리로 9승을 거두었지만, 8월 6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9회 2사까지 무실점했으나, 거기서 3실점을 하여 패전 투수가 되자, 이 경기부터 5경기는 자신이 등판하는 동안의 아군 타선 지원이 5경기에서 겨우 총 2점에 불과하여 좀처럼 승수를 쌓지 못했다. 9월 8일 롯데전에서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최종적으로 방어율 3점대를 기록했지만, 컨디션 기복이 심했고, 개인 통산 최악이자 이 해 리그 최다 패전인 12패를 기록했고, 사사구 수는 리그 2위, 폭투와 몸에 맞는 볼 수는 리그 최다로 제구력이 흔들리는 경기도 많았으며, 또 득점 지원율은 퍼시픽 리그에서 최악 2위인 3.71로 좀처럼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한편, 피홈런은 9개로 적었다. 또한, 롯데전에서는 4승 4패, 교류전에서는 3승 1패로 그럭저럭 좋은 성적을 거둔 반면, 세이부전에서는 5전 4패, 방어율 7.01로 매우 상성이 좋지 않았다.

2011년은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되어 실시된 4월 12일 오사카 돔에서의 개막전에서 본인 첫 개막 투수를 맡아, 2002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이나 2003년 올스타전 제1전과 마찬가지로 와세다 대학 야구부 출신의 호크스의 주축 와다 쓰요시와 맞대결을 펼쳐 9이닝 1/3을 자책점 1점으로 막았다. 하지만, 12개 구단 개막 투수 중 유일하게 승리가 없어 5월 4일에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5월 14일에 1군에 등록되어, 그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하코다테시 지요다이 공원 야구장)에 선발 출전했지만, 2회 1사부터 홈런과 연타로 8실점하고 강판되었다. 세·퍼 교류전의 한큐 브레이브스 유니폼 복각 경기인 5월 2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상대 7번 지명 타자 이마무라 다케루의 희생 번트도 무난히 처리하며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후 선발 등판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7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4이닝 9안타 6실점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2군 강등을 통보받고, 귀성하는 길의 신요코하마역에서 우연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코치인 가토리 요시타카와 마주쳐 "투심이나 체인지업을 배우는 게 어때?"라는 조언을 받고 투심을 습득한다.[7] 그 후 승격하여, 폐막 직전인 10월 15일 닛폰햄전에서 6이닝 무실점의 호투로 겨우 2승을 거두었다. 시즌 통틀어 2승 7패, 방어율 4.60으로 부진한 성적으로 마쳤다.

2012년는 시즌 첫 등판인 4월 8일 라쿠텐전에서 4안타 완봉승을 거두었고, 4월 15일에는 작년까지 상당히 약했던 세이부를 상대로 7회 도중 1실점 호투로 연승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나, 4월 22일 닛폰햄전에서 9이닝 1실점 완투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승리에서 멀어졌다. 6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을 때, 왼쪽 허벅지 뒤 근육 파열을 일으켜 다음 날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재활에 힘쓰던 어느 날, 딸이 "아빠는 왜 낮부터 집에 있어?"라고 물어 당황했고, 그 때 동료 데라하라 하야토가 "우리는 좋아하는 야구를 하면 그걸로 괜찮을지 모르지만, 딸들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라고 발언한 것을 떠올리고 분발하여,[8] 7월 13일에 재등록되자, 3경기 구원 등판을 거쳐, 올스타전 이후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둔다. 그 후에도 선발 투수로서 시즌 종료까지 로테이션을 지켜내, 방어율 2.60, QS율 66.7%로 선발 투수로서의 책임을 다했지만, 역투에도 아군 타선의 지원이 부족한 경기가 많아, 5승 9패로 마쳤다. 계약 갱신에서는 규정 투구 이닝을 클리어한 선수 중에서는 자기 최고인 2.60이었던 평균자책점이 평가되어 1200만 증액된 6200만으로 갱신했다.

2013년 1월 25일, 이토이 요시오·야기 도모야와의 트레이드로 아카다 쇼고·오비키 게이지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9]했다. 같은 해 5월 20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7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어, 역대 12번째로 전 구단 (긴테쓰 제외 12개 구단) 상대 승리를 달성했다.[10] 또한, 이 경기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맞붙었던 요미우리 선발인 스기우치 도시야를 상대로 승리하여, 1998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결승에서 패배한 이후 약 15년 만의 맞대결에서 승리했다.[11][12] 같은 해 시즌 종료까지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두 자릿수 승리에는 미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브라이언 울프와 함께 팀 내 최고인 9승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스프링 캠프 중에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1군 공식전에는 젊은 투수들의 약진으로 5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고, 1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2015년에는 시즌 막바지까지 1군 등판 기회가 없었고, 이스턴 리그 공식전에서도 16경기 등판에서 0승 6패, 평균자책점 7.67의 성적으로 마쳤다.[13] 9월 18일에 다음 해 전력 구상에서 제외된 것이 밝혀졌다. 타 구단에서의 현역 속행 가능성 등을 숙고한[14] 결과, 9월 29일에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것을 표명했다.[15] 다음 30일에는, 그 해 처음으로 출장 선수 등록[16]을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전 (삿포로 돔) 5회 초에 1이닝 한정으로 등판했다. 2탈삼진을 포함한 삼자범퇴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11월 27일부로 일본 야구 기구 (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17]되었다.

6. 5. 2. 타격 기록

6. 5. 3. 기타

6. 6. 등번호

연도등번호
2003년 ~ 2006년21
2007년 ~ 2009년41
2010년 ~ 2012년12
2013년 ~ 2015년29
2019년 ~ 2020년78


참조

[1] 서적 プロ野球カラー名鑑 200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 문서 鹿児島県大会はこの年まで準々決勝と準決勝の間に休養日がなく、日程の関係上、杉内は準決勝と決勝の2連投だったが、木佐貫は準々決勝から3日連続登板。準決勝は雨により[[ナイター]]ゲームとなった為、翌日の決勝に疲労を残していた。鹿児島実業は1日の休養が有った。これを受けて県大会の日程に問題有りとされ、後に日程が見直される発端となった。
[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増刊 大学野球2000秋季リーグ戦展望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増刊 大学野球2002秋季リーグ戦展望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増刊 大学野球2003春季リーグ戦展望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6] 웹사이트 トレード成立のお知らせ http://www.buffaloes[...]
[7] 웹사이트 木佐貫 鹿取氏とばったり 新横浜駅での立ち話が復調のきっかけ https://www.sponichi[...]
[8] 뉴스 オリックス逆襲のキーマン、木佐貫洋を変えた“一言”。~寺原がくれた、復調のきっかけ~ http://number.bunshu[...] 2012-10-10
[9] 웹사이트 トレード(2012年度シーズン終了後 ~ ) http://www.npb.or.jp[...] 2013-01-30
[10] 웹사이트 【日本ハム】木佐貫、史上12人目の前12球団勝利 https://web.archive.[...]
[11] 웹사이트 同じ年、同じ鹿児島の高校出身…木佐貫 杉内に16年越しリベンジ https://www.sponichi[...]
[12] 웹사이트 杉内に勝った!木佐貫“青春のリベンジ” https://web.archive.[...]
[13] 웹사이트 日本ハム木佐貫引退発表「お立ち台の景色忘れない」 https://www.nikkansp[...]
[14] 웹사이트 日本ハム木佐貫来季構想外、1軍登板なし引退も視野 https://www.nikka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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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서 前述『MBSたびぐみ』に出演した際の発言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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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뉴스 木佐貫、公認「九州新幹線宣伝マン」に 데일리 스포츠
[29] 웹사이트 木佐貫、九州新幹線“投げる宣伝マン”だ http://www.daily.co.[...] 데일리 스포츠 20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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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웹사이트 選手出演情報2013年7月 https://www.fighters[...]
[32] 웹사이트 FFFFF これまでの放送 第305回7/13の放送 https://archive.is/w[...]
[33] 웹사이트 鉄道マニアの日ハム木佐貫 野球人生を列車に例え「一本道で走ってきた」 https://full-count.j[...]
[34] 서적 프로 야구 컬러 명감 2008 베이스볼 매거진사
[35] 문서 가고시마 현 대회에서는 1998년까지 준준결승전과 준결승전 사이에 휴양일이 없었고 일정상 스기우치는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모두 등판했지만 기사누키는 준준결승전으로부터 3일 연속 등판했다. 준결승전은 우천에 의해서 야간 경기로 치렀기 때문에 다음날 결승전에서는 쌓였던 피로를 남겼고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는 하루를 쉬었다. 이것에 의해 가고시마 현 대회 일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서 후에 일정이 재검토가 되는 발단이 되었다.
[36] 웹사이트 관련 내용 http://www.buffaloes[...] 2013-11-03
[37] 뉴스 木佐貫 鹿取氏とばったり 新横浜駅での立ち話が復調のきっかけ http://www.sponichi.[...]
[38] 웹사이트 トレード(2012年度シーズン終了後 ~ ) http://www.npb.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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