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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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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면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인물이다.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우척현 전투에서 승리하고 지례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왜군 공격을 준비하던 중 급사했다. 사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1607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저서로는 《송암실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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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
기본 정보
김면의 초상
김면의 초상
본관김해(金海)
백순(百順)
시호충의(忠毅)
생애
출생1541년
사망1593년 (52세)
관직
최종 관직형조참판

2. 생애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천거로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한 사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 곽준, 문위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2] 우척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지례 전투에서 적병 10만 명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합천 군수가 되었고, 무계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의 의병들을 모아 금산개령으로 진주해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던 중,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9월에는 첨지(僉知)로 임명되었고, 11월에는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당시 호남 관찰사에게 무기와 식량을 요청했으나 회신이 없자, 스스로 무기를 수리하고 병사를 고무하여 전투에 임했으며, 호남과 영남의 의병장들과 함께 4차례에 걸쳐 진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군사를 이끌고 고령·김산·선령 등을 수복했다. 왕이 공적을 치하하며 근왕(勤王)을 명했으나, 민중들이 꺼리고 관찰사 김성일이 보고했으므로, 본도를 지키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저서로 《송암실기(松庵實記)》가 있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경상북도 고령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원부사 김세문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판관 김중손의 딸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2]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선조 초년에 조목, 성혼, 정구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다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한 사퇴하였다.[2]

2. 2. 관직 사퇴와 학문 연구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2] 다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2] 선조 초년에 조목, 성혼, 정구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퇴했다.[2] 강직한 절개를 지녔으며, 문장보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특히 정호와 정이의 문장을 좋아하고 본받았다.

2. 3.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김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맞서 싸웠다. 1592년 조종도, 곽준, 문위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모았으며[2], 우척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지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합천 군수에 임명된 후 무계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1593년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충청도전라도의 의병들을 모아 금산개령(현 김천시)으로 진주하여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다.

2. 3. 1. 주요 전투와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 곽준, 문위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우척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2],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지례 전투에서 적병 10만 명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합천 군수가 되었고 무계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159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전라도의 의병들을 모아 금산개령으로 진주해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던 중,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2. 4. 죽음과 사후

1593년 선산에서 일본군 공격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급병으로 사망했다. 많은 장병들이 그의 유언을 받들어 신창까지 돌아온 뒤 그의 죽음을 알고 모두 매우 슬퍼했다.[2] 관찰사 김성일이 보고하자, 왕은 슬퍼하며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했고, 고령의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으며, 1607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3. 사상과 평가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배워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다시 추천받아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 곽준, 문위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우척현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고,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지례 전투에서 적병 10만 명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합천 군수가 되었고, 무계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1593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2]

강직한 절개를 지녔으며, 문장보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실천에 힘썼다. 특히 정호와 정이의 문장을 좋아하고 본받았다. 저서로 『송암실기』가 있다.

4. 저서

저서로 《송암실기(松庵實記)》가 있다.[2]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면 http://encykorea.aks[...]
[2] 서적 朝鮮史. 第四編第九巻 朝鮮総督府
[3]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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