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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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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조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그는 서당 훈장을 하다가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근대식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 의원과 선전위원회 이사 등을 지냈다. 만주에서 광복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귀국 후 반공주의 활동을 하다 1946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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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1877년)
기본 정보
이름김병조(金秉祚)
출생1877년
사망몰년 미상
본관안동 김씨
성재(性齋)
직업대한제국 관료
일제강점기 관료
관력
주요 관직조선총독부 군수
조선총독부 도 참여관
작위남작
가족 관계
배우자정부인(貞夫人) 청주 이씨(淸州 李氏)
김석진(金奭鎭)
자녀4남 3녀
아들김영식(金永植)
김윤식(金允植)
김한식(金漢植)
김춘식(金春植)
사위이유선(李裕善)
이병직(李秉直)
김정호(金鼎鎬)
기타 정보
친일 행위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

2. 생애

김병조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03년 근대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를 설립하며 계몽 운동을 시작했다. 1909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1]

1919년 2월, 유여대 등과 함께 선천양전백 목사 사택에서 이승훈을 만나 3·1 운동 계획을 듣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평북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고, 이후 상하이시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 임시의정원 평안도 지역구 대표, 선전위원회 이사(1920년) 등으로 활동했다. 1924년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 편찬하여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발간했다.[1]

1923년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동, 무장 단체 광복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만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1933년 귀국했다. 신사참배 강요정주 묘두산 기슭에서 은둔 생활 중 광복을 맞았다.[1]

광복 직후 조만식조선민주당에 참여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4] 반공주의 청년들을 모아 남한의 이승만, 김구와 연락,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하다 1946년 12월 24일 체포되었다.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1952년 봄에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2. 1. 생애 초기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을 하던 중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3년 근대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개신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2. 2. 3.1 운동과 임시정부

1919년 2월 유여대 등 장로교 인사들과 함께 선천양전백 목사 사택을 방문하여 이승훈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3·1 운동 거사 계획을 들었다. 이미 경성부에서 천도교 지도자들과 연대에 합의하고 돌아온 이승훈의 권유로,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양전백은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북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1]

이후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시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지역구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1920년)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으로도 근무한 그는 독립운동 자료의 수집과 편찬에 관심을 두고 1924년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발간했다.[1]

2. 3. 만주 활동과 귀국

1923년 상하이를 떠나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무장 단체 광복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만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정주 묘두산 기슭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게 된다.[1]

2. 4. 광복 이후

광복 직후 조만식조선민주당에 참가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4] 이후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거부하고 반공주의 청년들을 모아 남한의 이승만, 김구와 연락하는 한편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1946년 12월 24일 겨울 체포되었다.[4]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1952년 봄에 그곳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3. 사후

1990년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훈했다.[2] 차남 김행식 목사가 《일재 김병조 평전》[3]을 발행했고, 《일재 김병조의 민족 운동》[2]이라는 저술도 있다.

4. 저서


  • 《일재 김병조의 민족 운동》[2]
  • 《일재 김병조 평전》[3]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들김행식
손자김철


참조

[1] 웹사이트 사육신 김문기,김재규,김영삼,금난새 http://www.dtnews24.[...] 2022-08-06
[2] 서적 일제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 1993
[3] 서적 일재 김병조 평전 한민족독립정신 2002
[4] 뉴스 「3·1독립선언 33인」 김병조목사/“52년봄 시베리아서 옥사”중앙일보 1993년 8월 14일자 https://news.joins.c[...]
[5] 서적인용 일제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 1993
[6] 서적인용 일재 김병조 평전 한민족독립정신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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