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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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전백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894년 개신교에 입문하여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선천에 신성중학교 등을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에 힘썼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복역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양전백은 평안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아버지 양형식(梁亨植)과 어머니 수원 백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평안도 선천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1]
2. 1. 초기 생애와 목회 활동
1894년 개신교에 입문했다. 1897년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길선주와는 평양신학교 동기생이다.[1]
선교사들과 더불어 선천에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집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정주의 이승훈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교육 사업가로 꼽혔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신민회 인사들과 같이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됐다.
2. 2. 105인 사건과 투옥
1911년 105인 사건에 신민회 인사들과 같이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1] 출옥 후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2. 3. 3.1 운동과 민족대표 33인
1919년 3·1 운동 때 미리 경성부에서 천도교와의 연합을 의논하고 돌아온 이승훈을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등 이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만난 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열린 낭독 행사에 참여했다.[1] 선천에서는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 4. 사망
1933년 1월 17일 평안북도 선천군 천북동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1]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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