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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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옥(1890년 ~ 1923년)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890년 1월 5일에 출생하여, 3·1 운동 이후 혁신단을 결성하고 지하 신문을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후 일제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자결했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장본인인지에 대한 의문과 논란이 존재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1992년에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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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189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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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상옥 |
로마자 표기 | Gim Sang-ok |
한자 표기 | 金相玉 |
출생일 | 1890년 1월 5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
사망일 | 1923년 1월 22일 |
사망 장소 |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부 효제동 |
사망 원인 | 자살 |
본관 | 김해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 |
배우자 | 정진주 |
자녀 | 김태룡(장남), 김태운(양차남) |
부모 | 김귀현(부), 김점순(모) |
형제 | 형 1명, 남동생 1명, 여동생 2명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의열단 |
주요 경력 |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의열단 사무위원 |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책 | 군무부 예하 행정관 |
임기 시작 | 1922년 9월 6일 |
임기 종료 | 1923년 1월 22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이승만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노백린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 노백린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차장 | 윤기섭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훈장 | |
서훈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관련 링크 |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유공자 공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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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다.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항거,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를 일으켰고, 이후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했다.[2][3]
2. 1. 초기 생애
1890년 1월 5일 한성부 어의동에서 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과 김점순(金占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金海金氏 安敬公派)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개신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물산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자영하고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으나,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그는 말발굽을 만들어 히트를 쳤으며, 일제강점기 시절에 머리카락이 잘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총모자를 선보였다. 20세가 되던 해, 동흥야학교를 설립하고 김상옥 주도하에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이종소, 임용호 등과 함께 국권 회복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했다.2. 2. 독립운동 투신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하고 지하 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 한 일본 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1920년 봄, 만주에서 온 김동순을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 파괴 등 직접 행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그해, 한훈,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웠으나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 그는 일제에 폭력투쟁으로써 저항하며,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거나 억압을 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1921년 귀국하여 군자금 모금과 첩보 활동을 펼쳤다.[1]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년 5월 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살림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겨울, 안홍한, 오복영 등 동지들과 함께 폭탄, 권총, 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서울에 진입했다.[1] 같은 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그곳에서 김구,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안내하고 소개하며 중국 관리들과 교류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대한 임정 군무부 행정관 직책으로 발탁된 그는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폭탄,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했다.
2. 3.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와 최후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1920년 봄, 만주에서 온 북로군정서의 김동순을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는 등 직접 행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그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2년 10월, 대한 임정 군무부 행정관 직책으로 발탁된 그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권총 두 자루로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군경 15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였다.[2][3]
3. 의문과 논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격렬하게 저항한 것으로 보아 전투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군경은 김상옥을 생포하려 했으나, 김상옥이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폭탄 투척 여부에 대한 심문은 불가능했다.[6] 효제동 총격전 직후인 3월 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이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의열단원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 윤익중은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고,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 식의 폭탄 투척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했다."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보도하며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당시 김상옥은 사이토 마코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의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는 분석이 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에 돌입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되었고,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6]
종로경찰서 사건은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7]
4. 사후
- 1924년 임시정부 외교부장이자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조소앙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 김상옥이 수많은 일본 경찰의 포위 속에서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 사건을 당시 중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하여, 해방 후 1930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 최후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8]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1992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 사업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였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 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김상옥이 최초로 선정되었다.
- 1988년 서울특별시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9]
- 19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친 | 김귀현(金貴鉉, 1860 ~ 1890) |
모친 | 김점순(金点順, 1861 ~ 1941) |
누나 | 김기숙(金基淑), 김아기(金兒基) |
매형 | 고봉근(高奉根) |
형 | 김춘옥(金春玉, 요절) |
형수 | 박도순 |
동생 | 김춘원(金春元) |
제수 | 이애기 |
부인 | 정진주(鄭眞珠) |
아들 | 김태용(金泰龍, 1914~1939) (25세로 후사 없이 요절) |
아들 | 김태운(金泰雲, 1927~2014.5.3) (조카를 입양하여 대를 이음) |
며느리 | 한정수(1929) |
손자 | 김주동(金柱東), 김민홍(金敏洪) |
손녀 | 김영심(金英心), 김영실(金英實), 김영욱(金英旭) |
증손 | 김종찬, 김종근, 김용민, 김주아, 이선호, 이진호, 최예진, 최예은, 김종한, 김지원 |
장녀 | 김의정(金義政, 1917 ~1958) |
사위 | 김진익 |
외손 | 김효기(요절), 김세원 |
외손부 | 지영희 |
외증손 | 김남석, 김남연 |
6. 대중문화 속 김상옥
이성아가 쓰고 북멘토에서 출판한 '''경성을 쏘다'''는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상옥이 의열단에 들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세계일보 김동진 기자가 쓰고 서해문집에서 2010년 출판한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은 영화 밀정의 원작으로, 김상옥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의 항일 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다.
6. 1. 경성을 쏘다
'''경성을 쏘다'''는 이성아가 글을 썼으며, 북멘토에서 출판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상옥은 몰래 발간하던 신문이 발각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들을 지켰다. 이후 의열단에 들어가 식민 치하 경성부 한복판에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신출귀몰하게 경찰들을 따돌리다가, 열흘 뒤 일제 군경 천여 명과 세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하였다. 이 시가전으로 일본 형사 16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내용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6. 2.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은 세계일보 김동진 기자가 글을 썼고, 서해문집에서 2010년 출판되었다. 영화 밀정의 원작으로 김상옥, 황옥, 김시현, 김원봉 등 의열단의 항일 투쟁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서술했다.참조
[1]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
2019-04-26
[2]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
2019-05-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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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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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6
[4]
일반텍스트
[5]
웹인용
김상옥
https://terms.naver.[...]
2019-05-27
[6]
서적
시민을 위한 서울역사 2000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7]
뉴스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5]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 거사 앞둔 김상옥이 정말 폭탄을 던졌을까?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8-05-01
[8]
서적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돌베개
2005-05-23
[9]
웹인용
김상옥 의거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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