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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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숙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좌우익 정치 세력 모두 비판하며 독립노동당을 창당했으나, 여러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말년에는 통일사회당, 신민당 등 혁신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1969년 사망했으며,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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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 (189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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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성숙 |
원어 이름 | Kim Sungsuk 성숙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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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설명 | 운암 김성숙 |
출생일 | 1898년 3월 10일 |
출생지 |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구의동 |
사망일 | 1969년 4월 12일 (만 71세) |
국적 | 대한민국 |
필명 | 법명은 태허(太虛) 초기 이름은 성암(星巖) 필명은 성숙(星淑), 아호는 운암(雲岩), 가명은 규광(奎光), 충창(忠昌), 창숙(昌淑) |
직업 | 불교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 시인 사상가 |
종교 | 불교 |
장르 | 시문학 |
가족 정보 | |
배우자 | 부인 하동정씨 두군혜(杜群惠) 중국 여성 김명선(金明善) |
자녀 | 아들 김정봉(金정鳳) 딸 김숙녀(金淑女) 아들 김두감(金杜甘) 아들 김두건(金杜建) 아들 김두련(金杜漣) 아들 김청운(金靑雲) 딸 김천연(金天然) 아들 김삼양(金三陽) 등 슬하 6남 2녀 |
부모 | 아버지 김문환(金文煥)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 趙氏) |
친척 | 남동생 김성호(金星虎) 누이 김보구(金寶具) |
학력 | |
학력 | 대한독립학교 졸업 중국 중산대학교 졸업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17년 ~ 1969년 |
웹사이트 | 운암김성숙 기념사업회 |
2. 생애
김성숙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나 1969년 천식으로 사망할 때까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봉선사 승려로서 남양주군 진접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문서를 제작, 배포하다 양주 광천시장의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4] 1920년 출옥 후에는 전국을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강연 활동을 펼쳤고, 1922년에는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소작쟁의 진상 보고 등의 활동을 했다.
1923년 불교 유학생 신분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혁명동맹 주필을 맡았으며, 1926년 유학한국혁명청년회(留學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을 발간하였다.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광저우 봉기)에 참여하고,[5] 대한독립당촉성회(大韓獨立黨促成會) 광동지구 분회 조직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6] 1931년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여 기관지 《봉화(烽火)》와 《반일민중(反日民衆)》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중국군 19로군(十九路軍)에도 종군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선전부장,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 주임[7] 등을 역임하며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한 후[3], 내무차장, 외교연구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소련과의 외교 창구 역할을 담당하며 이승만의 반소 활동을 비판하기도 했다.[9]
1945년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2진으로 귀국하여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4] 1946년 2월 15일 장건상, 김원봉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입하여 부의장을 역임했다.[10] 미군정에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했으며,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 위원장,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문제 해결과 단독정부 수립 등에 반대하여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정적으로 부상되었다.[4]
1948년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가망이 없다고 본 김성숙은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8년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 되었으나 국민의회가 몰락하자,[4] 좌익계열을 제외한 인원으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대표간사에 취임하였다.[4] 이후 단주 유림 등과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지도하였다.
1950년 6.25 동란이 발생하자 은신하여 납북되는 것을 면하였다. 1952년 부산광역시에서 야당과 연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다.[4]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12]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통사당 사건으로 장건상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2]
1965년 통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위원을 맡았으나, 신한당에 흡수되었다. 이후 신한당과 신민당에서 활동하며 야당 정치인으로서 박정희 정권에 맞섰다.
2. 1. 초기 생애 (1898년 ~ 1923년)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아버지 김문환과 어머니 임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상산 김씨이다.[1] 형제로는 누이 김보구가 있었다. 고향의 대한독립학교에서 위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애국심을 키웠으나, 경술국치 이후 학교가 문을 닫자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이는 훗날 그의 학문적 밑거름이 되었다.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삼촌의 영향을 받아, 1916년 봄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원산시에서 용문사의 풍곡 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 봉선사에서 성숙(星淑)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3] 불교 경전과 더불어 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근대 사회 과학 지식도 쌓았다.[3]

1919년 3.1 운동 당시 봉선사 승려로서 남양주군 진접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 독립문서를 제작, 배포하다 양주 광천시장의 시위 주모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4]
1920년 출옥 후 전국을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강연 활동을 펼쳤다. 1922년에는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소작쟁의 진상 보고 등의 활동을 했다.
2. 2.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23년 ~ 1945년)
1923년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했다.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중국에 망명하여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면서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였으며 한인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하며 단결을 촉구하였다.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장지락)의 스승으로서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유학회(高麗留學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뽑혀 활동하였고, 승려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후 김성숙은 일본제국의 침략 수뇌부를 암살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곧 의열단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활약했으며 '혁명동맹'의 주필을 맡았다. 1926년 유학한국혁명청년회(留學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을 발간하였으며,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의 광주봉기(광저우 봉기)에 참여하였다.[5] 그 해 대한독립당촉성회(大韓獨立黨促成會) 광동지구 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이후 재중국조선청년동맹 등을 직접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6]
1931년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였으며, 반제동맹의 기관지 《봉화(烽火)》와 《반일민중(反日民衆)》이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중국군 19로군(十九路軍)에도 종군하였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에 취임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연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정당통합에 참여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 3개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였다.[4] 1938년 민족혁명당의 부당수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자, 김성숙은 조선의용대 정치부 주임에 선임되었다.[7] 이후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등을 지냈다.


김성숙은 김원봉 일파와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때 김성숙은 김원봉과 김구의 대립을 조절하려 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7]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그는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 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임시정부행을 선택하게 되었다.[7]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때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였으며, 이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3] 그 뒤 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 44년 국무위원을 지냈고[6]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 중국 소련 대사관(중경 소재)과 임정간의 외교를 담당하며 대소련 외교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당시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한 러시아인의 증언을 참조함) 그러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이 미국과 접촉하면서 반소 활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의 항의를 받자, 이승만을 면직시켜야 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1945년 2월부터 구미위원장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를 찾아가 OSS 합동군사훈련을 제의하며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소련이 적화 야욕을 드러내며 한반도를 강제로 삼킬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이승만의 발언이 중국으로 전해지자 그는 이승만의 소련 비난에 대한 비판, 항의 전보를 미국으로 보냈다.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8]
1945년 5월 이승만은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9]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9] 김성숙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그는 이승만의 탄핵, 해임을 주장하였지만 임정 내 우파들의 반대로 거부당하였다.
2. 3. 광복 이후 정치 활동 (1945년 ~ 1969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1946년 2월 4일 이승만·김구 등 우익 진영에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고, 2월 14일 좌익에서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자 김성숙은 모두를 비판한 뒤,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4] 1946년 2월 15일 장건상, 김원봉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입하여 부의장을 역임했다.[10]
이후〈노동신문〉을 창간했는데, 미군정 반대를 주장한 혐의로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1947년 전국혁명자총연맹 창립에 참여하여 위원장을 지냈으며, 5월에는 근로인민당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통한 한국 통일 임시정부 수립 문제 해결과 단독정부 수립 등에 반대하여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정적으로 부상되었다.[4]
1948년 2월 김구, 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가망이 없다고 본 김성숙은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8년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 되었으나 국민의회가 몰락하자,[4] 좌익계열을 제외한 인원으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대표간사에 취임하였다.[4] 이후 단주 유림 등과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지도하였다.
그해 4월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남북협상의 실패를 예견하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후 유림과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월 25일 6.25 동란이 발생하자 은신하여 납북되는 것을 면하였다. 1952년 부산광역시에서 야당과 연합해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결성하여 이승만 정권의 재집권에 반대하였다.[4]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관여하였으나, 조봉암 등과의 의견불일치로 진보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았다.[11]
1957년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2] 그러나 곧 석방되었다. 1958년에는 제1공화국 정부에서 조작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12] 그러나 진보당 사건 이후 조봉암 등은 사형당하고 그는 석방되었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등 혁신계 정치활동에 가담하였지만,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으나 장면 내각에서도 그는 혁신정당 창당 운동에 가담하여 야당 정치인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의해 특수반국가행위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할 때 6월 22일 공포된 특별소급법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때 김성숙은 이때 통사당사건으로 임시정부때부터 같은 동지이자 같은 혁신계 활동해왔던 장건상과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임이 감안돼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했다.[2]
출감 이후 1965년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통일사회당 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통일사회당은 곧 신한당에 흡수되었다. 1966년 윤보선 등과 함께 신한당에 발기인으로 참여, 창당후 신한당 정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이 창당되자, 신민당에 입당하였으며, 신민당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에 선출됐다.[6] 1969년 4월 12일 71세로 사망하였으며, 사망 원인은 천식이었다.[14]
3. 사후
198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유해가 안장되었다.[6]
2005년 8월 20일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가 외손자인 민성진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2006년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같은 해 1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김창수 고려학술재단 이사장, 김창 심산 아카데미 상임고문,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김성숙 선생의 손자인 김덕천 씨, 윤소암 스님,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등의 주도로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 발족되었다.[15]
2008년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심사하는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4. 평가
김성숙은 불교,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아우르는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실천적인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7]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붉은 중'이 바로 자신이라고 주변에 알리기도 했다.[17] 2013년에는 KBS에서 '한국의 유산- 운암 김성숙 편'을 통해 그의 삶과 업적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김성숙의 부인인 중국인 두쥔훼이(杜君慧) 역시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두쥔훼이는 1942년 충칭에서 한중 문화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한중 연합 항일 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5. 기타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출간 직후, 김성숙은 소설 속 '붉은 중'이 자신이라고 소개했다. 1940년 자신을 찾아온 김준엽, 장준하 등에게도 소설 아리랑을 언급하며 자신이 그 책에 나오는 승려라고 말했다.[17] 2013년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KBS는 '한국의 유산- 운암 김성숙 편'을 1주일 간 70회 방송했다.
김성숙의 중국인 처 두군혜는 천식으로 사망했다.[17]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
[2]
뉴스
경향닷컴 | Kyunghyang.com
http://news.khan.co.[...]
[3]
뉴스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 39주기 추모식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4]
웹사이트
'유림'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5]
문서
[[유자명]]의 회고록
[6]
뉴스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 김성숙선생 제39주기 추모제 및 학술강연회 개최 :: 네이버 뉴스
https://news.naver.c[...]
[7]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8]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9]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10]
서적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11]
문서
내부 파벌다툼으로 서상일, 장건상 등도 조봉암과 갈라섰다.
[12]
뉴스
[13]
뉴스
“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http://www.sisainliv[...]
시사IN
2008-08-12
[14]
뉴스
기다림 45년… 이제야 아버지 땅에/독립운동가 김성숙씨 아들 내한
중앙일보
1990-12-19
[15]
뉴스
김성숙 기념사업회 창립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6-01-24
[16]
웹사이트
운암김성숙 기념사업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http://www.kimsungsu[...]
2009-02-20
[17]
뉴스
기다림 45년… 이제야 아버지 땅에/독립운동가 김성숙씨 아들 내한
중앙일보
199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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