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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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건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후, 1916년 상하이 동제사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이후 임정을 탈퇴하고 고려공산당, 군사통일회의 등에 참여했으며, 남북 협상에 참여했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5.16 군사 정변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2002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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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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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건상 |
한자 표기 | 張建相 |
출생일 | 1882년 12월 19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칠곡 |
사망일 | 1974년 5월 1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병사)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인동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부모 | 장운원 (부) |
형제 | 장기상 (형) |
학력 | |
대학교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중퇴 |
대학교 | 미국 인디애나 주립 밸프레이조 대학교 법학과 학사 |
대학원 | 대한민국 국방대 행정학사 1기 (1956년) |
경력 | |
강사 | 前 연희대 초빙교수 겸 고려대 전임강사 |
임시정부 |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위원 |
정당 | 前 조선인민공화국 근로인민당 당수 |
정당 | 前 대한민국 혁신당 총재 겸 중앙위원장 |
정당 | 前 혁신당 총재 겸 중앙위원장 |
의정 활동 | |
의원 선수 | 1 |
소속 정당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장건상은 1882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했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2] 그러나 이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가서 국민대표자대회, 고려공산당 등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12월 고려공산당 성립을 위한 꼬르뷰로 임원에 선출되었다. 1923년 베이징에서 김성숙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잡지 《혁명》의 발간과 편집원으로 활동했다. 1926년 10월에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으나, 일제의 김원봉 유인 목적 파견을 역이용하여 탈출, 민족혁명당에 가담했다. 1940년 임시정부에 다시 참여하여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해방 후 1946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민족주의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했다. 1947년 여운형 사망 후에는 근로인민당을 이끌었고,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남북협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일방적인 협상 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되었다가 홍명희, 김두봉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남북협상 실패 후 단독정부 수립에는 불참했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의 입각 제의를 거절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했고, 한국민주당 계열로부터 사상 논쟁에 휘말렸다. 한때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기도 했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2]
2. 1. 생애 초기
1882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 장씨 참봉 장운원(張雲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장명상(張明相)이고 호는 소해이다. 1883년 집안이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부산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고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얼마 후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던 육영재(育英齋)에서 공부하면서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903년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한성에서 연동교회 담임목사 게일(James Gale, 한국명 奇一)에게 영어를 배웠다. 1888년 한국에 온 선교사 게일과의 인연은 후일 미국 유학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3]
러일전쟁 직후 1905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3]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하다가[2] 일본 당국의 민족차별정책에 반발, 1년 만에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자퇴하였다. 일본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찾아갔고, 그의 주선으로 주일본미국 공사관 무관 이스트레이크의 집에서 숙식하며 류동렬 등 유학생 50명과 함께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학생 수가 약 100명으로 늘어나자 일본 당국은 압력을 가해 이 학교를 폐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적국에서의 유학의 한계를 느껴 1907년 귀국하였다. 1908년 선교사 게일의 도움으로 200원의 여비와 게일 선교사의 미국대학 추천장을 가지고 출국했다. [3] 당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이므로 통감부의 주선을 통한 정상적인 출국은 불가능했고, 연해주와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서 미국에 도착하였다.
1908년 3월 청진(淸津)에서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인 거류민단장 정순만(鄭純萬),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이었던 유인석 등을 만나고 페테스부르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이범진, 이위종 부자를 만났다. 그 후 독일, 프랑스, 영국을 거쳐 6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미국 도착 후, 여권 미소지로 미국 이민관리국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 후 귀국 도중 미국 뉴욕에 온 이상설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미국 중부 인디애나주로 가서 게일 목사의 추천장으로 기독교계 학교인 인디애나 주 발프레이조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1912년 졸업하였다.
2. 1. 1. 출생과 소년기
1882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인동 장씨 참봉 장운원(張雲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장명상(張明相)이고 호는 소해이다. 1883년 집안이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부산 좌천동(佐川洞)으로 이사하고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얼마 후에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던 서당 육영재(育英齋)에서 공부하면서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2. 1. 2. 학창 시절
1903년 황성신문 사장으로 있던 장지연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한성에서 그는 연동교회 담임목사인 게일 (James Gale, 한국명 奇一)을 만났고 그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1888년 한국에 건너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선교사 게일과의 이같은 인연은 후일 그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3]러일전쟁 직후 일본에 건너가 1905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3]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하다가[2] 일본 당국의 민족차별정책에 반발하여 1년만에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를 자퇴하였다. 그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찾아갔고, 그의 주선으로 주일본미국 공사관 무관 이스트레이크의 집에서 숙식하며 류동렬 등 유학생 50명과 함께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 수가 약 100명으로 늘어나고 체제가 정비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일본 당국은 압력을 가해 이 학교를 폐교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적국에서의 유학의 한계를 통감하고 1907년 귀국하였다. 1908년 선교사 게일의 도움으로 200원의 여비와 게일 선교사의 미국대학 추천장만 지니고 출국했다. [3] 당시는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이므로 통감부의 주선을 통한 정상적인 출국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는 연해주와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서 미국에 도착하였다.
1908년 3월 청진(淸津)에서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그곳에서 한인 거류민단장 정순만(鄭純萬),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이었던 유인석 등을 만나고 페테스부르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이범진, 이위종 부자를 만났다. 그 후 독일, 프랑스, 영국을 거쳐 마침내 6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후, 여권을 소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 이민관리국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도중 잠시 미국 뉴욕에 도착한 이상설의 신원보증으로 특별히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미국의 중부지역인 인디애나주로 가서 게일 목사의 추천장에 힘입어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인디애나 주 발프레이조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2. 2. 독립운동
조선 경상도 칠곡 출신 장건상은 일본과 미국 유학 후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2월 고려공산당 성립을 위한 꼬르뷰로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김성숙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1930년 일시적으로 베이징 화북대학(華北大學) 영어교수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원으로 가담하였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민족혁명당에 가담했고, 1940년 임시정부에 재입각, 임정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임정을 탈퇴했다.
2. 2.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2] 그러나 뒤에 임정을 탈퇴,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민대표자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임정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2. 2. 2. 언론, 교육 활동과 의열단 입단
1926년 중국 독립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 기념 행사에 베이징대학 초청으로 강연을 했으나, "중국 인민을 선동하여 국권을 혼란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반일 성향이었던 중국 언론의 변호로 일본 경찰에 넘겨지지 않고 중국 정부 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27년 가을 출옥하였다.[3]1927년 10월 28일, 민족유일당 운동에 따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창립될 때 좌파 대표로 참여하였다. 유일당촉성회는 각지에 집행위원들을 파견하였는데, 그는 7인 집행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어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요청으로 중국 남부 지방에 파견되어 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유일당 운동은 중국의 국공합작 붕괴와 좌우파 세력 간 견해 차이로 좌절되었다.
이후 김성숙 등과 항일 잡지 ≪혁명≫을 발간하고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3] 3년간 활동 중, 일제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북경신문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상해에서 의열단(義烈團) 고문으로 활동하며 김창숙(金昌淑)과 독립운동 자금을 의논한 뒤, 김원봉(金元鳳)과 폭탄 제조 및 국내 반입을 지휘했다. 일본인 살상용 폭탄 제조를 지휘하고 국내로 폭탄을 보급하는 과정에서[4] 일본 밀정의 추적을 받았다.
2. 2. 3. 일제 강점기 후반
1927년 10월 28일 민족유일당 운동에 따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창립될 때 참여하였다. 유일독립당촉성회는 임정 대표와 좌파 대표를 선발했고, 그는 좌파 대표로 참석하였다. 유일당촉성회는 각지에 집행위원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그는 촉성회의 7인 집행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요청으로 중국 남부지방에 파견되어 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유일당운동은 중국의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또 좌우파 세력들 간의 견해 차이가 노정되면서 좌절되었다.이후 김성숙 등과 항일 잡지인 ≪혁명≫지 발행에 참여하였다.[3] 3년간 ≪혁명≫지 발행에 활동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붙잡혔다가 북경신문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담하여 의열단 고문으로 활동, 김창숙과 독립운동 자금 관계를 의논한 뒤 상해로 돌아와 김원봉과 만나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일본인 살상 폭탄 제조를 지휘하였으며, 국내로 폭탄을 보급, 들여보내는[4] 과정에서 일본 밀정의 추적을 받았다.
1930년 일시적으로 베이징 화북대학(華北大學) 영어교수로 근무했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원으로 가담하였다.

2. 2. 4. 광복 직전
1945년 4월 장건상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밀명을 받고 화북 지역에 주둔 중인 조선독립동맹과의 합동 전선 구축을 위해 연안(延安)에 파견되었다.[1]
장건상은 중경을 출발하여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서안(西安)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을 만나 연안까지 가는 길을 의논하였다.[1] 이후 서안에서 도보로 3일 만에 연안에 도착했다.[1]
그는 경남 동래군 출신으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 및 동맹 지도자 무정, 최창익 등과 면담했다.[1] 이 자리에서 장건상은 김두봉 등에게 모든 해외 독립운동 세력이 대표자를 선정하여 중경에 모여 연합 전선 구축에 관해 협의할 것을 제의했고, 김두봉도 이에 찬성하며 중경 방문을 약속하는 등 좌우합작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였다.[1] 그러나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1]
이후 조선독립동맹은 임시정부의 종주권을 일부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행사 시에 스탈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외에 김구의 초상화를 함께 게시하였다.[1]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 투척 이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화북의 연안에서 접하게 되었다.[1] 조선독립동맹은 장건상에게 만주를 거쳐 귀국할 것을 제의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중경 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1]
2. 3. 광복과 귀국
1945년 4월 임시정부 김구의 밀명을 받고 화북 지역에 주둔 중인 조선독립동맹과의 합동 전선 구축을 위한 대표자로 선출되어 연안에 파견되었다.[2] 중경을 출발,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던 서안(西安)까지 기차로 이동, 그곳의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을 만나 연안까지 갈 길을 의논하였다. 서안을 출발하여 도보로 3일 만에 연안에 도착했다.경남 동래군 출신으로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 동맹 지도자 무정, 최창익 등과 면담했다. 김두봉 등에게 모든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대표자를 선정, 중경에 모여 연합 전선 구축에 관해 협의할 것을 제의했다. 김두봉도 이에 찬성, 중경으로 떠날 것을 약속하는 등 조선독립동맹 측 요인들과 좌우합작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담 과정에서 같은 결론에 도출한 것만 확인하고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건상의 방문 이후 조선독립동맹은 임시정부의 종주권을 일부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각 행사 시에 스탈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외에 김구의 초상화를 걸고 행사를 진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일제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화북의 연안에서 뉴스로 접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그에게 바로 만주를 거쳐 환국하자고 제의하였으나, 그는 독립동맹 측의 제의를 뿌리치고 다시 중경 임정으로 돌아왔다.
2. 3. 1. 미군정기의 정치활동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2진으로 귀국하여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인민당 부당수를 역임하였다. 미군정의 입각 제의는 거절하였다.1946년 2월 김구, 이승만 등이 주도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에 참여하였으나 우경화되자 2월 14일 김성숙, 김원봉, 성주식 등과 함께 임정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2월 15일 민족주의민주전선에 가담하였다.[5] 민족주의민주전선 전국 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일원을 순회하며 강연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 3당 통합으로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가담했다가 탈당, 여운형 중심의 사회로동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남로동당의 와해공작으로 해체되었다.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에 입당하였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이후 근로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2. 3. 2. 남북 협상 참여
1948년 2월 북한 측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제의하자 좌우합작파와 좌파를 중심으로 합작 참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는 남북협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삼청장을 찾아가 김규식에게는 북행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온건파와 중도파의 리더인 김규식마저 북한에 올라갔다가 협상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만류했던 것이다.송남헌에 의하면 장건상과 원세훈 등은 우사 김규식이 남북협상에 참가할 때, 김규식의 직접 참여가 장차 정치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김규식의 북행을 만류했다고 한다.[6] 그러나 김규식은 그들과 함께 북행하게 되었다. 1948년 4월 도보로 3.8선을 넘어 입북, 평양의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김규식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고 한다.
남북 협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회의 의사를 진행하자 그는 반발하였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따르자는 박헌영에게 그 민주적인 의사가 뭐냐며 항의하였다.
남북협상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북한으로부터 연금되기도 하였다.[7] 장건상은 김구, 김규식이 떠난 지 보름 뒤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도 그와 친분이 있던 북로당 위원장 홍명희·김두봉 덕택이었다고 한다.[7]
2. 3. 3. 단독 정부 승인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단독정부에 불참했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 이승만에게서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2]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한민당 계열로부터 번번이 사상 논쟁에 휘말렸다.[2]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불참했으나, 장건상은 한발 물러서서 정부 수립에는 불참하지만 반대하지 않는다는 노선으로 변경하였다.[7] 홍명희가 월남하지 않아 근로인민당을 맡게 되었고, 5.10 총선거에 참가하지는 않으나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하였다.[7] 그러나 근로인민당의 당세는 약화되었고 1949년 결국 정당등록 취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7]
2. 4. 정치 활동
조선 경상도 칠곡 출신으로 일본과 미국 유학 후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임정을 탈퇴,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민대표자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임정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1922년 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12월 고려공산당 성립을 위한 꼬르뷰로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김성숙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이후 잡지 《혁명》 지의 발간과 편집원으로 활동하다 1926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담했고 1940년 임시정부에 재 입각, 임정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해방 후 1946년 임정을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기간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일방적 협상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단독정부에는 불참하였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조각 이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민주당 계열로부터 번번히 사상논쟁 시비에 휘말렸다. 한국민주당원을 극도로 미워했던 그는 한때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고,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입건 되었다 풀려났으며,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2]
2. 4. 1.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2] 1950년 5월 1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부산 을구)에 출마, 공산당원으로 몰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전국 제2위 득표수(26,720표)로 당선되었다.[8]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90여 일간 은신하여 북한 인민군에 피납되는 것을 모면하였다. 1951년 원내 자유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52년 각파 연합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때 김동성, 오위영 등 다른 원내자유당원 48명, 민국당의 신익희, 소선규, 지청천 등 39명, 민우회의 윤길중, 권중돈, 김의준 등 21명, 무소속의 곽상훈, 박순천, 서민호 등 15명과 함께 내각제 개헌에 찬성표를 던졌다.[11]
2. 4. 2. 진보정당 건설
1954년 원내 자유당을 탈당하고 호헌동지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조봉암이 구 한민당 계열로부터 배척당하면서 민주당 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6년 조봉암 등과 진보당 결성 추진 위원회 조직책으로 활동하였으나,[3] 조봉암의 단독 정부 수립 참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진보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2. 5. 만년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2]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2]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김창숙, 조경한, 정화암, 김학규, 권오돈 등이 혁신동지총연맹을 창당할 때 참가하였다.[12]
1961년 1월 8일 혁신당 위원장에 취임하였다.[3] 5월 16일 5·16 군사 정변 당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혁신계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때부터 같은 동지였던 김성숙과 같이 구속되었으나, 박정희의 배려로 병보석, 석방되었다.[2] 그는 박정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그의 탄원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정동의 오두막집에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였다. 평소 한국민주당원을 미워하였던 그는 1963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주변인들에게 박정희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3.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중퇴
- 미국 인디애나 주립 발프레이조 대학교 법학과 학사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4. 평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로 정치 한복판에 섰다는 평가가 있다.
5. 가족 관계
6. 기타
같은 동향 출신이며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과는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인 장택상과는 호형호제하여 '형님, 아우'라 부르기도 했다.[1] 1950년 5월 그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을 때 장택상이 친필로 쓴 축하 편지를 받기도 했다.[1] 장택상이 외무부 장관과 총리에 취임했을 때는 그가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1]
근로인민당 계열이었으나 남북 협상의 실패 직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조봉암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기도 했다.[2] 1955년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할 때 진보정당 건설을 함께 의논하였으나 실패를 예상하고 불참을 선언했다.[2]
7.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명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50년 | 총선 | 국회의원 | 부산시 을 | 무소속 | 26,720표 | 58.87% | 1위 | 당선 | 초선 |
1960년 | 총선 | 국회의원 | 부산시 동구 갑 | 혁신동지총연맹 | 16,729표 | 42.46% | 2위 | 낙선 |
참조
[1]
문서
일설에는 [[1888년]]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1882년]]생이 명확하다.
[2]
웹인용
::::::: 인동장씨 홈페이지 :::::::
http://www.indongjan[...]
2008-07-09
[3]
뉴스
역사속의 오늘-독립운동가 장건상 출생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7-12-19
[4]
웹사이트
'장건상'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4-04-03
[6]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8]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9]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7
[10]
서적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7
[11]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12]
웹사이트
'유림'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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