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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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미국 워싱턴 D.C.에 설립된 외교 기관이다. 구미 지역의 외교 및 재정 지원을 담당했으며, 독립공채 발행, 외교 활동, 재미 한인 사회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워싱턴 군축 회의, UN 창립 총회 등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알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주미한국대사관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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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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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약칭 | 구미위원부 |
유형 |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기관 |
설립 | 1919년 |
해체 | 1945년 |
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위치 | 미국 |
주요 인물 | |
책임자 | 이승만 |
주요 인물 | 정한경 민찬호 현순 임병직 |
목표 및 역할 | |
목표 |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 파견 미국 내 외교 활동 전개 |
주요 활동 | 외교 활동 선전 활동 자금 모금 |
역사 | |
설립 배경 |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구미 지역 외교 필요성 증대 |
주요 경과 | 1919년: 설립 파리 강화 회의 대표 파견 시도 미국 내 외교 및 선전 활동 전개 워싱턴 회의 관련 활동 태평양 전쟁 이후 활동 위축 1945년: 해체 |
관련 단체 | |
관련 단체 | 주미 외교 위원부 |
2. 역사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외교적, 재정적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9년 8월 25일, 이승만 임시 집정관총재는 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4] 1919년 9월 11일, 전 세계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공식화되었다.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30]
1919년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5] 이후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으며, 서재필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 김규식이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파리위원부도 구미위원부의 관할 아래 포함시켰다.[24]
1919년 9월 12일, 구미위원부는 독립공채표를 발행하였다.[9][10]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1984년 6월 28일,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F%85%EB%A6%BD%EA%B3%B5%EC%B1%84%EC%83%81%ED%99%98%EC%97%90%EA%B4%80%ED%95%9C%ED%8A%B9%EB%B3%84%EC%A1%B0%EC%B9%98%EB%B2%95%EC%8B%9C%ED%96%89%EB%A0%B9/(11444,19840628) 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총 수입 중 인구세는 2940USD (4.3%), 애국금은 44583USD (64.6%), 구미위원부 송금액은 12354USD (17.9%)였다. 이승만은 미주 지역 재정 관할 및 공채 발행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로부터 미주 재정 업무를 위임받아 애국금 등을 관장하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의 주장에 따라 공채 발행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1920년 6월부터 임시정부에 송금을 시작했는데, 1919년 8월 이후 2년 동안 구미위원부 총 지출액 91640USD의 18%인 16452USD였다.[24]
1921년 4월 25일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20] 4월 26일 현순은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21] 같은 날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22]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24]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회의(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26][27]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기 직전에 그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을 내렸다.[31]
1925년 4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포문에서 이승만은 "한성계통의 대표적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여 외교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33]
1925년 5월 11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였고,[34]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를 임명하였다.[35]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며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1933년에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등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고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업무를 보좌하였다. 1930년 초에는 김현구에 이어 윤치영이 워싱턴에서 구미위원회 업무를 맡으면서 미국 정부와 교섭하거나 중남미 특히 멕시코와 쿠바의 교민들 그리고 동남아의 동포들에게 《태평양주보》 배포에 주력하였다.[38] 윤치영이 귀국할 때까지는 구미위원부 활동이 확인되는데,[37] 적어도 1937년까지는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37]
1941년 6월 4일,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 대미교섭 전권을 위임했다.[39]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습격 후, 이승만은 임시정부 승인, 군사·경제 원조를 요청했으나, 동북아 문제 제기는 시기상조라며 거절당했다.[40]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 거주 한국인 신분 문제가 대두되었다. 1943년 여름, 한국인 2명이 통금위반 혐의로 체포되자,[41] 구미위원부는 1943년 4월 30일 스팀슨의 답신을 받았다.[41]
1945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 UN 창립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려 했으나,[43] 한인 단체 대표들 간 의견 충돌, 미 국무성 앨저 히스의 연립 정부안 수락 종용이 있었다.[43]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미외교위원부는 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3] 장면이 미국 대사로 임명되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정식 대사와 영사가 부임할 때까지, 구미외교위원부는 워싱턴에 체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 간 중계 연락 업무와 국내, 미국 및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 업무를 전담하였다.[3]
2. 1. 설립 배경 (1919)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외교적, 재정적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9년 8월 25일, 이승만 임시 집정관총재는 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4] 1919년 9월 11일, 전 세계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공식화되었다.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30]1919년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이 임명되었다.[5] 이후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으며, 서재필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 김규식이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파리위원부도 구미위원부의 관할 아래 포함시켰다.[24] 숙소는 포틀랜드 호텔, 사무실은 백악관과 근접한 H가(街) 14번지에 있는 15층 남짓의 컨티넨탈 빌딩 두 방을 얻어서 활동하였다.[6][7] 공관에서는 한국 독립을 돕는 미국의 명사들을 초청해서 간소한 행사도 열었다.[8]
2. 2. 초기 활동 (1919~1921)
1919년 8월 25일, 임시 집정관총재 이승만이 워싱턴 D. 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4] 1919년 9월 11일 전세계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로 공식화하였다. 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30]1919년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이 임명되었다.[5] 이후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 '지방위원부'가 설치되었으며, 서재필이 이끌던 필라델피아의 한국통신부, 김규식이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파리위원부도 구미위원부의 관할 아래 포함시켰다.[24] 숙소는 포틀랜드 호텔, 사무실은 백악관과 근접한 H가(街) 14번지에 있는 15층 남짓의 컨티넨탈 빌딩 두 방을 얻어서 활동하였다.[6][7] 공관에서는 한국 독립을 돕는 미국의 명사들을 초청해서 간소한 행사도 열었다.[8]
1919년 9월 12일, 구미위원부는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였다.[9][10] 이 공채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미 대륙을 양분하여 동서부에 각각 1명, 하와이와 쿠바, 멕시코 등지에 각각 1명씩을 선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교포들을 일일이 찾아가 호응을 얻도록 하였다.[8]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4년 6월 28일,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F%85%EB%A6%BD%EA%B3%B5%EC%B1%84%EC%83%81%ED%99%98%EC%97%90%EA%B4%80%ED%95%9C%ED%8A%B9%EB%B3%84%EC%A1%B0%EC%B9%98%EB%B2%95%EC%8B%9C%ED%96%89%EB%A0%B9/(11444,19840628) 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11]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총 수입 중 인구세는 2940USD (4.3%), 애국금은 44583USD (64.6%), 구미위원부 송금액은 12354USD (17.9%)였다. 애국금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1920년까지 애국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공채 판매액은 많지 않았다. 이승만은 미주 지역 재정 관할 및 공채 발행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로부터 미주 재정 업무를 위임받아 애국금 등을 관장하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갈등을 빚었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애국금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이미 임시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수납해온 것이니 취소할 수 없고, 공채는 장차 주미재무관을 파견하여 발행하겠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다. 이승만은 크게 반발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의 주장에 따라 공채 발행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1920년 6월부터 임시정부에 송금을 시작했는데, 1919년 8월 이후 2년 동안 구미위원부 총 지출액 91640USD의 18%인 16452USD였다.[24]
1920년 8월 7일 김규식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장 이종관을 구미위원부 하와이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12] 김기창을 구미위원부 멕시코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13]
2. 3. 이승만 중심의 활동과 갈등 (1921~1925)
1920년 9월 28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지 취임을 위해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가기 전에 현순에게 위원장대리(서리)를, 정한경에게 서기를 맡겼다.[16][17] 이승만은 1920년 12월, 김규식은 1921년 1월 임정에 도착하였다.1921년 3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 현순은 이승만에게 보낸 업무보고에서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취임 이후 미일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면서 구미위원부를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개편하여 미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 후 현순은 독단적으로 '주미대사'라는 직함을 사용하였다.[18]
1921년 4월 14일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신규식, 신익희, 김규식이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사저를 방문하였다. 이승만은 "지금 구미위원부 일이 매우 절박합니다. 현순은 마땅히 파면해야 하며 서재필 박사가 임시위원장에 피선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비록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에 찬동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규식이 사면장을 내면서 "뜻을 결정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 지연되어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규식은 "내가 이와 같은 문제에 답을 하지 못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다.[19] 당시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이 위원장서리 현순이 일으킨 파동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된 것이다.
1921년 4월 25일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20] 4월 26일 현순은 구미위원부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21] 같은 날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22] 4월 29일 김규식은 임정 학무총장직을 사퇴하였다.[23]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태평양회의(對太平洋會議)' 외교 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이승만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24] 당시 이승만은 밀항하여 상해에 와 있었는데 1921년 5월 20일, 많은 임시정부 요인과 교포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쳐 워싱턴으로 향하였다.[24] 임시정부는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뒤에서 후원하였으며,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대표단의 외교 경비를 뒷받침해 주었다.[24] 특히 뉴욕서 유학하던 조병옥, 허정 등의 청년 유학생들이 함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24]
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회의(Washington Naval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26][27] 오전 8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이승만을 인터뷰 하였다.[26][27] 이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며, 회의가 미국 영토에서 열리기 때문에 파리 평화회의에서처럼 한국 대표들이 일본 외교관들에게 질식을 당하지는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26][27]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국 대표가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 위원회를 꾸리기 시작하였다.[24] 임시정부 대표단이 공식적이라는 인상을 가능한 띄기 위하여 이승만의 평생의 독립운동 동지인 국제 통신사인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젊은 기자 J. 제롬 윌리암스 주선으로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기자 회견을 열고 억압에 눌린 한국인들의 투쟁사를 설파하며 기자들을 통해 먼저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도록 노력하였다.[24] 그러나 이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임시정부가 과연 한국민의 전체를 대표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자들도 상당하였다.[24] 이에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공식 신임장을 전보로 요청하였고 1921년 9월 29일 신임장을 받았다.[24]

이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허그스 미 국무장관과 군축 회의 사무국에 직접 제출하고 한국 대표단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렇다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하였다.[24] 그래서 한국 대표부는 옵저버로서라도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24] 그러나 끝내 목표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법률 고문이었던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논설이 1921년 12월 1일자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결과만을 달성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간의 과도한 군비경쟁 해소 및 이권 조정이 회의의 목적이였던만큼 그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등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30] 이 회의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 소련 주도로 공산주의 운동이 커지면서 좌익과 우익 분화를 촉진하는 영향을 끼쳤다.
2. 4. 구미위원부 철폐와 독자 활동 (1925~1937)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기 직전에 그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을 내렸다.[31]1925년 4월 15일 '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에는 구미위원부를 폐지하고 대한인국민회에 사무를 인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미주 동포들이 분개하였으며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대한인교민단 등이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실렸다.[32]
1925년 4월 29일 이승만은 '대통령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포문에서 이승만은 "민국 원년에 한성에서 조직하여 세계에 공포한 아 임시정부는 해내외에 일반국민의 성복애대(誠服愛戴)하는 바이어늘 단 상해에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하여 정부 소재지로 일장난국을 성함은 세인이 공지하는 바라. 도금(到今)하여는 전부 전복의 계획을 실현하기에 지하였스니 아 충애동포가 엇지 차를 용인하리오"라고 한 다음, "한성계통의 대표적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를 유지하여 외교선전사업을 계속 진행함으로 부원(府院:행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말함)의 문제가 정경(政經)으로 해결되기를 시사(是俟)하라"고 했다. 요컨대 한성정부의 '법통'을 고수하여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당부였다.[33]
1925년 5월 11일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설치하였고,[34]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崔鎭河)를 임명하였다.[35]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며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1933년에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등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고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업무를 보좌하였다. 1930년 초에는 김현구에 이어 윤치영이 워싱턴에서 구미위원회 업무를 맡으면서 미국 정부와 교섭하거나 중남미 특히 멕시코와 쿠바의 교민들 그리고 동남아의 동포들에게 《태평양주보》 배포에 주력하였다.[38] 윤치영이 귀국할 때까지는 구미위원부 활동이 확인되는데,[37] 적어도 1937년까지는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37] 그가 국내로 돌아오기 직전 아내 이은혜와 위원부를 운영할 때에 미국인 여자 비서 2명, 흑인 남자 사환이 1명, 그리고 흑인 여자 1명 해서 총 4명이 있었는데, 후에 이 직원들은 정부 수립이 되고 서울로 2번씩이나 찾아와 윤치영 내외를 방문하였다고 한다.[37] 이승만이 단독으로 운영하면서 구미위원부가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학자마다 주장이 다르다.[36]
2. 5. 주미외교위원부 복설과 전시 외교 활동 (1941~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對太平洋會議중국어 외교 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 회의 선언서'를 발표, 이 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하였다.[24] 1921년 5월 20일, 이승만은 미국 기선 컬럼비아 호를 타고 워싱턴으로 향하였다.[24] 임시정부는 파견 대표단 활동을 후원, 뉴욕에서도 후원회가 조직되어 외교 경비를 지원했다.[24]1921년 8월 16일, 워싱턴 군축 회담(Washington Naval Conference) 참석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고 밝혔다.[26][27]
워싱턴 도착 후, 이승만은 한국 대표의 공식 참석을 위한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24] 1921년 9월 29일,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전권대사로 하는 신임장을 발송했다.[24]
이승만은 신임장을 미국 대표단에 제출, 한국 대표단의 정식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회답을 얻지 못했다.[24] 결국, 옵저버 참석을 시도했으나, 법률 고문 프레드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는 데 그쳤다.[30]
이 회의 후,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 주도 공산주의 운동 확산으로 좌우익 분화가 촉진되었다.

1941년 6월 4일,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 대미교섭 전권을 위임했다. 사무실은 워싱턴 동부 5번가 컬럼비아 빌딩에 위치했다.[39]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습격 후,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 비서 알저 히스 등에게 임시정부 승인, 군사·경제 원조를 요청했으나, 동북아 문제 제기는 시기상조라며 거절당했다.[40]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 거주 한국인 신분 문제가 대두되었다. 1943년 여름, 한국인 2명이 통금위반 혐의로 체포되자,[41] 구미위원부는 스팀슨 미 국방장관에게 한국 망명 정부의 항일전을 알리고, 비들 법무장관 승인 한국인 지위를 유념할 것을 요청, 1943년 4월 30일 스팀슨의 답신을 받았다.[41]

1945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 UN 창립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려 했으나,[43] 한인 단체 대표들 간 의견 충돌, 미 국무성 앨저 히스의 연립 정부안 수락 종용이 있었다.[43]
이승만은 우선 독립이 급선무이므로 '독립 국가'를 원한다는 데 합의, 대외 표방을 제안했다.[43] 한국 대표들은 이승만에게 유엔 창립 총회 건의서 제출을 일임, 이승만은 건의서를 알저 히스에게 전달했으나, 정식 발언권 없이 옵저버로 참관했다.[43]
2. 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미외교위원부는 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3] 장면이 미국 대사로 임명되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정식 대사와 영사가 부임할 때까지, 구미외교위원부는 워싱턴에 체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 간 중계 연락 업무와 국내, 미국 및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 업무를 전담하였다.[3]3. 주요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워싱턴 군축 회담(1921년), 국제연맹 회의(1933년), UN 창립 총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한국 문제를 알렸다.[24][34] 유럽 각국을 상대로도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워싱턴 군축 회담에 이승만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려 하였다.[24] 이승만은 1921년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통해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26][27] 임시정부는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프레드 A. 돌프를 대표단으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미 국무장관에게 제출하고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으나, 옵서버 자격으로도 참석하지 못했다.[24] 다만, 프레드 A.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었다.[24] 이 회의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의 공산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좌우익 분화가 촉진되었다.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에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 한국인 유학생들이 업무를 보좌하였다.[36] 1930년 초부터 윤치영이 워싱턴에서 구미위원회 업무를 맡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고, 중남미와 동남아 동포들에게 《태평양주보》를 배포하였다.[38]
3. 1. 독립공채 발행
1919년 9월 12일, 구미외교위원부는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였다.[9][10] 이 공채를 소화시키기 위해 미 대륙을 양분하여 동서부에 각각 1명, 하와이와 쿠바, 멕시코 등지에 각각 1명씩을 선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교포들을 일일이 찾아가 호응을 얻도록 하였다.[8] 독립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이 건국될 때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4년 6월 28일, [https://www.law.go.kr/%EB%B2%95%EB%A0%B9/%EB%8F%85%EB%A6%BD%EA%B3%B5%EC%B1%84%EC%83%81%ED%99%98%EC%97%90%EA%B4%80%ED%95%9C%ED%8A%B9%EB%B3%84%EC%A1%B0%EC%B9%98%EB%B2%95%EC%8B%9C%ED%96%89%EB%A0%B9/(11444,19840628) 독립공채상환에관한특별조치법][11]이 제정되어 채권에 명시된 액면가 금액에 소정의 이자를 합산하여 지불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총 수입은 69000USD였는데, 이 가운데 인구세는 2940USD로 4.3%, 애국금은 44583USD로 64.6%를 차지했다. 또 구미위원부에서 송금해온 돈도 12354USD로 17.9%를 점했다. 애국금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1920년까지 애국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공채 판매액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직접 미주 지역의 모든 재정을 관할하고 공채도 자신의 책임하에 발행하겠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임시정부로부터 미주의 재정업무를 위임받아 애국금 등을 관장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애국금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이미 임시정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수납해온 것이니 취소할 수 없고, 공채는 장차 주미재무관을 파견하여 발행하겠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했다. 이승만은 크게 반발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의 주장에 따라 공채 발행을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1920년 6월부터 임시정부에 송금을 시작했는데, 그 액수는 1919년 8월 이후 2년 동안 구미위원부 총 지출액 91640USD의 18%인 16452USD였다.[24]
1920년 8월 7일 김규식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회장 이종관을 구미위원부 하와이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12] 김기창을 구미위원부 멕시코구역 시찰원에 임명하였다.[13]
3. 2. 외교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워싱턴 군축 회담(1921년), 국제연맹 회의(1933년), UN 창립 총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한국 문제를 알렸다.[24][34] 유럽 각국을 상대로도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1921년 워싱턴 군축 회담에 이승만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려 하였다.[24] 이승만은 1921년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통해 워싱턴 군축 회의에서 한국민의 독립을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26][27] 임시정부는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프레드 A. 돌프를 대표단으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미 국무장관에게 제출하고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으나, 옵저버 자격으로도 참석하지 못했다.[24] 다만, 프레드 A. 돌프의 임시정부 승인 논설이 1921년 12월 1일 미 의회 회의록에 수록되었다.[24] 이 회의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서구 열강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의 공산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좌우익 분화가 촉진되었다.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이승만 탄핵 직전 구미위원부 철폐령을 내렸으나,[31] 미주 동포들의 반발로 1925년 5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최진하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34][35]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구미위원부에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 한국인 유학생들이 업무를 보좌하였다.[36] 1930년 초부터 윤치영이 워싱턴에서 구미위원회 업무를 맡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고, 중남미와 동남아 동포들에게 《태평양주보》를 배포하였다.[38]
4.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는 위원장, 부위원장, 장재(참사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조직 규모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직책이 추가되었다.
4. 1. 역대 위원장
대수 | 이름 | 임기 |
---|---|---|
1 | 김규식 | 1919년 8월 ~ 1921년 4월 25일[20] |
2 | 서재필 | 1921년 4월 26일[22] ~ 1921년 9월 2일 |
3, 4 | 이승만 | 1921년 9월 3일 ~ 1948년 5월 10일 |
5 | 임병직 | 1948년 5월 10일 ~ 1948년 9월 2일[45]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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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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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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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리더십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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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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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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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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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韓民國 特派 歐美駐紮委員部 設置 條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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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8-2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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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歐美委員部 組織文, 公債票 發賣文 配布 要請. 附:公布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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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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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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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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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채표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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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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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歐美委員部 組織文, 公債票 發賣文 配布 要請. 附:公布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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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9-12
[11]
문서
약칭 독립공채상환법
[12]
웹인용
3) 하와이구역 시찰원 위촉. 부:위임장
http://db.history.go[...]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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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멕시코구역 시찰원 위촉. 부: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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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서
초대적십자회장을 역임한 이희경 의학 박사
[15]
문서
구미위원부에서 살림을 맡던 여성.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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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통령 · 구미위원장 부재중 업무처리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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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인용
8) 委員長 不在時 委員 玄楯이 代理하는 件
http://db.history.go[...]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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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7 17권 구미위원부 Ⅰ >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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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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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備忘錄:歐美委員部 金奎植 辭任 狀況
http://db.history.go[...]
[20]
웹인용
11) 歐美駐箚委員部 委員長 依願免職
http://db.history.go[...]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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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歐美委員部 委員 玄楯 解任
http://db.history.go[...]
[22]
웹인용
14) 歐美駐箚委員部 委員長 兼任
http://db.history.go[...]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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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료 · 국무원 · 국무위원 명단
http://db.history.go[...]
[24]
서적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25]
뉴스
파테 뉴스(Pathe News)와 주간 국제뉴스(International News Weekly)가 [[금문교]] 공원에서 촬영하였다.
[26]
서적
Log Book : 이승만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7]
뉴스
『Oakland Tribune』, 1921년 8월 17일자 기사
[28]
문서
Mayborne, Etta Irene (1857~)
[29]
문서
Fred A. Dolph (1875~)
[30]
서적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31]
웹인용
3) 歐美委員部 事務引繼에 關한 件
http://db.history.go[...]
1925-03-10
[32]
웹인용
구미위원부 통신 제9-5호(192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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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인용
11) 歐美委員部 維持
http://db.history.go[...]
19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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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6) 駐美外交委員部 設置 公布
http://db.history.go[...]
192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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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歐美外交委員部 設置의 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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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사라진 ‘歐美위원부’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37]
서적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三星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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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三星出版社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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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新太陽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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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新太陽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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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43]
서적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44]
뉴스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5-01-15
[4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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